지노비 마르코비치 우샤코프

Зиновий Маркович Ушаков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투하쳅스키의 자백을 받아낸 심문관, 자기가 맞고 나서야 매를 말했다

자신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는 인정했다. “나는 레포르토보에서 당의 적들을 직접 때려야 했지만, 맞는 자가 겪는 고통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린 것도 같은 기관이었다.

1895년 키예프현의 유대인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헤데르만 마치고 열세 살부터 일했다. 1920년 키예프 체카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에서 십사 년을 보냈고, 1937년 1월 모스크바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해 봄 붉은군대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주임 심문관으로 투하쳅스키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의 자백을 만들어냈다. 5월 25일 투하쳅스키의 첫 심문을 맡았고 그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1938년에는 아직 붙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를 이용해 그를 고문했다.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어 1940년 1월 26일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투하쳅스키 심문과 '군사파시스트 음모' 조작

우샤코프는 1937년 봄 NKVD가 조작한 '붉은군대 내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핵심 심문관이었다. 사건의 첫 체포자는 콤코르 드미트리 시미트였는데, 우샤코프는 그를 심문해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이오나 야키르를 연루시키는 진술을 받아냈다. 1937년 5월 22일 투하쳅스키 원수가 체포되자 우샤코프가 주임 심문관을 맡았다.

5월 25일 첫 심문에서 우샤코프는 투하쳅스키를 구타해 자백을 강요했다. 투하쳅스키가 서명한 자백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조서는 특별재판에서 투하쳅스키가 자백을 철회했음에도 유죄의 핵심 증거로 사용되었다. 우샤코프는 같은 방식으로 콤안다름 1계급 야키르, 콤안다름 1계급 이예로님 우보레비치, 콤안다름 2계급 아우구스트 코르크 등 고위 장성들의 자백을 연이어 만들어냈다. 이들의 자백은 상호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NKVD는 이를 '군사파시스트 센터'의 실체를 입증하는 증거로 조립했다.

우샤코프의 심문 대상은 군부에 그치지 않았다. 1938년 봄에는 정치국 위원 블라스 추바르와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 정치국 후보위원 파벨 포스티셰프 등 최고위 당 간부들의 사건도 맡았다. 1938년 4월 로베르트 에이헤가 체포되자, 우샤코프는 아직 아물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 부위를 집중적으로 때려 자백을 받아냈다. 에이헤는 훗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고문을 상세히 증언했다.

우샤코프의 수사 방식은 단순한 폭력 이상이었다. 그는 체포된 지휘관들에게 '당의 적'이라는 정치적 낙인을 내면화시키고,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역이용해 자백을 '당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받아들이게 하는 심리적 압박을 병행했다. 이러한 기법은 예조프 시기 NKVD 수사 관행의 전형으로, 물리적 고문과 정치적 세뇌가 결합된 형태였다.

1938년 여름 우샤코프는 프리놉스키가 이끄는 GUGB 특별여단의 일원으로 극동으로 파견되었다가 9월 5일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후 우샤코프 자신도 키예프 NKVD의 비밀정치부에서 가혹한 구타를 당했고, 모스크바로 이송된 후 수하노프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자신의 심문 과정에서 그는 투하쳅스키, 야키르, 우보레비치, 코르크, 펠트만 등에 대한 사건 조작과 불법적 심문 방법을 인정했다. 특히 야키르 사건에서 가마르니크의 자살을 '군사 음모'의 증거로 둔갑시키기 위해 불법적 방법이 동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940년 1월 21일 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월 26일 총살되었다. 유해는 돈스코이 묘지 화장터 1호 '무연고 유골 묘지'에 매장되었다. 우샤코프는 소련 붕괴 후에도 '다수의 사건 조작에 적극 가담하고 수사 중 불법적 방법을 사용한 점'을 이유로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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