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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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파업 노동자 처벌에 반대했다가 1953년 해임·투옥된 동독 초대 법무장관
베를린의 공구공 출신으로 1910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8~1933년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나치 시기 저항 단체에 가담해 두 차례 투옥되었다. 전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강제 합당을 지지해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49년 10월 동독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다. 글라도프 일당 재판에서 사형이 가능하도록 성인 형법을 위법하게 적용하게 했다. 1953년 6월 30일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인터뷰에서 6월 17일 파업 참가자를 혐의만으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가 「국가와 당의 적」으로 몰려 해임·제명·체포되었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56년 석방·사면되고 1958년 복당했으며, 1973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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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사회민주당 입당
- 1928–1933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49–1953동독 법무장관
- 1953해임·제명·체포
- 1956석방과 사면
- 1958복당
동독 초대 국가보안부 장관으로 1953년 울브리히트 퇴진을 꾀하다 숙청된 공산주의자
겔젠키르헨에서 헌병 하사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920년 카프 폭동 때 루르 적군을 지휘했다. 소련 군사정보국(GRU) 요원과 코민테른 군사고문으로 중국 광저우 봉기 등에 관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고메스」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을 이끌었다. 1947년 귀국해 사회주의통일당에 들어갔고, 1950년 초대 국가보안부 장관과 정치국원이 되어 슈타지를 키웠다. 1953년 6월 봉기 뒤 헤른슈타트를 제1서기로 세우자고 제안했으나, 울브리히트가 흐루쇼프의 지지를 얻자 7월 장관직과 모든 직위를 잃고 당에서 제명되었다. 번역가로 지내다 1958년 동베를린에서 죽었고, 1990년 뒤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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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카프 폭동 때 루르 적군 지휘
- 1927–1930코민테른 군사고문(중국)
- 1936–1938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지휘(「고메스」)
- 1950–1953동독 국가보안부 장관, 정치국원
- 1953모든 직위에서 해임, 당에서 제명
당 중앙통제위원장으로 1953년 울브리히트 편에 선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부르크에서 사회민주당원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차 세계대전에 반대해 사회민주당을 떠났다.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에 들어갔고 마그데부르크·동프로이센 지구 지도자를 지냈다. 1933년 체포되었다가 탈옥해 망명했고, 소련에서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에 참여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1946년까지 작센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48년부터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통일당 중앙당통제위원회 위원장으로 당 규율을 맡았고 정치국원·인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봉기 뒤 정치국 다수가 울브리히트를 내치려 할 때 호네커와 함께 그의 편에 섰다. 1971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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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독립사회민주당 입당, 노동자·병사 평의회
- 1931–1933공산당 동프로이센 지구 지도자
- 1945–1946작센 공산당 제1서기
- 1948–1971사회주의통일당 중앙당통제위원장
- 1950–1971정치국원
동독을 건설하고 베를린 장벽을 세운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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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8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 1923–1933KPD 중앙위원, 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3–1945파리·프라하·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활동
- 1943자유 독일 국가위원회(NKFD) 결성 참여
- 1950–1971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 제1서기
- 1960–197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71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당직 사임
분단 국가의 통합을 이끈 사회민주주의자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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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20–1926브라운슈바이크 주의회 의원
- 1922–1924브라운슈바이크 법무·국민교육 장관
- 1925–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5–1946소련 점령지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46–1950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동 의장
- 1949–1964독일민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60–1964중병으로 사실상 정치 활동 중단
- 1964동베를린에서 사망
분단의 현장에서 국가 권력으로 이동한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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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1925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자
- 1927–1933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시의원
- 1928–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6–1949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의장
- 1946–1979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위원
- 1948–1967동베를린 초대 시장
- 1949–1979동독 인민회의·국가평의회 지도부
- 1971–1979SED 인민회의 원내단 의장
동독 사회민주당을 재건하고 통합에 서명했으나 1948년 사회주의통일당을 탈당해 서쪽으로 간 조직가
엘빙의 조선소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사무직 노조 간부로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그로테볼과 함께 일했다. 나치 시기 사회민주당 저항 모임에 가담해 1938년 그로테볼과 함께 투옥되었다. 1945년 5월 그로테볼과 함께 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을 재건해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공산당과의 합의와 통합 선언에 사회민주당 쪽 첫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다.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에 뽑혔으나 당의 스탈린화 속에 고립되었고, 1948년 9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10월 「새로운 형태의 당」이 전체주의 독재로 이어질 것이라는 탈당 편지를 쓰고 서쪽으로 도피했다. 196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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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사회민주당 입당
- 1938그로테볼과 함께 투옥
- 1945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6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
- 1948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고 탈당, 서쪽으로 도피
전간기 반파시즘 파괴공작을 조직했고 1953~1957년 슈타지를 이끈 공산주의자
하노버주 뮌덴에서 태어나 1918년 수병 반란에 가담했고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가 당 군사조직을 이끌었다. 1932~1933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망명 중 1936~1940년 「볼베버 동맹」을 조직해 파시스트 국가들의 선박에 21건의 파괴공작을 벌였고, 스페인 공화국군에 무기를 댔다. 1946년 귀국해 해운 행정을 맡았다. 1953년 7월 차이서가 물러나 국가보안부가 국가보안청으로 격하되자 그 수장이 되었고, 1955년 11월 다시 국가보안부 장관이 되었다. 울브리히트·호네커와 충돌하고 시르데반 편에 섰다가 1957년 물러났고, 1958년 「분파 활동」으로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났다. 1967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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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수병 반란 가담
- 1932–1933제국의회 의원(공산당)
- 1936–1940「볼베버 동맹」 파괴공작 조직
- 1953–1955국가보안청장(차관급)
- 1955–1957국가보안부 장관
- 1958중앙위원회에서 축출
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동독 정부의 전신을 이끌고 경제 정책을 맡은 공산주의자
슈투트가르트 근교 포이어바흐에서 태어나 보슈 공장의 금속 프레스공으로 일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1920년대 공산당 농업 정책을 이끌었다. 나치 집권 뒤 투옥되었다가 소련으로 망명했고, 스페인 내전에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프랑스에서 억류되어 1942년 게슈타포에 넘겨졌고,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3월 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화폐개혁과 경제계획을 이끌었다. 동독 정치국원과 부총리,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3년 7월 정치국에서 울브리히트 교체를 권했으나 자리를 지켰다. 기계공업장관과 대외무역장관을 지내다 1961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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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독일 공산당 입당
- 1923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37–1938제11국제여단 지휘
- 1943–1945마우트하우젠 수용소
- 1948–1949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
- 1950–1961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부총리
- 1955–1961대외무역·독일내무역 장관
1953년 6월 16일 정부 청사 앞에서 파업 노동자들 앞에 나섰던 동독 중공업 장관
헤센 라우터바흐의 구리 세공인 아들로 열일곱에 광부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 나가 1918년 병사평의회에 들었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1922년 공산당에 들어가 작센 지구당 정치 책임자와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감옥과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등 강제수용소에서 나치 시대를 버텼다. 전후 작센 경제·계획장관을 거쳐 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동독에서 공업장관과 중공업장관을 지냈다. 1953년 6월 16일 각료의 집 앞 군중 속에 들어가 책상 위에서 연설했으나 야유에 묻혔다. 1958년 울브리히트에게 「일탈적 태도」로 몰려 직책에서 밀려난 뒤 작가로 살았고, 197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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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독일 공산당 입당
- 1932–1933제국의회 의원
- 1933–1945투옥,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 1948–1949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9–1955공업장관, 중공업장관
- 1958「일탈적 태도」로 직책에서 밀려남
1953년 봉기 뒤 페히너를 이어 법무장관이 되어 가혹한 정치 재판을 이끈 동독 법률가
안할트 베른부르크의 자유주의적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 최초 세대의 여성 법학도로 공부했다. 사회민주당원이었다가 1926년 의사 게오르크 벤야민(발터 벤야민의 동생)과 결혼하고 1927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나치 시대에 변호사 활동을 금지당했고, 남편은 1942년 마우트하우젠에서 죽었다. 전후 소련 점령지구 사법행정에서 일했고, 동독 최고재판소 부소장으로 여호와의 증인과 「국가의 적」에 대한 공개 재판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15일 파업 노동자 처벌에 반대한 페히너를 이어 법무장관이 되었고, 봉기 가담자를 가혹하게 처벌해 「붉은 힐데」, 「붉은 프라이슬러」로 불렸다. 1967년 울브리히트에게 밀려 물러났고, 1989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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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독일 공산당 입당
- 1949–1953동독 최고재판소 부소장
- 1953–1967동독 법무장관
- 1954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
- 1967울브리히트에 의해 사임
1953년 신노선을 함께 쓰고 울브리히트 퇴진을 꾀하다 숙청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글라이비츠의 유대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베를리너 타게블라트》 특파원으로 일하며 소련 군사정보국(GRU) 요원이 되었다. 1939년 소련으로 망명해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의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귀국해 《베를리너 차이퉁》을 이끌고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창간에 참여했으며, 그 편집장으로서 늘 모스크바의 노선을 따랐다. 1953년 6월 차이서와 함께 울브리히트에 맞섰고,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신노선을 함께 썼다. 봉기 뒤 집단지도를 제안했으나 7월 「반당 분파」로 몰려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났고, 1954년 1월 당에서 제명되었다. 메르제부르크의 문서고에서 일하다 1966년 죽었고, 1989년에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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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GRU 요원으로 포섭
- 1943《자유 독일》 편집장
- 1945《베를리너 차이퉁》 편집장
- 1950–1953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후보위원
- 1953「반당 분파」로 중앙위원회에서 축출
- 1954당에서 제명
- 1989사후 복권
1958년까지 사회주의통일당의 수석 이데올로그였다가 쉬르데반 사건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난 경제학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919년 독립사회민주당, 1920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당 신문 편집자로 일했다. 1926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와 붉은 교수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33년 망명해 파리에서 울브리히트의 비서로 일했고, 1936년 모스크바에서 「이념적 일탈」로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전쟁 중에는 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당 선전·교육을 맡았고, 1950년 정치국원, 1950~1955년 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어 당의 수석 이데올로그로 통했다. 1953년 6월 할레에서 봉기 진압 지휘부를 꾸렸다. 1956년 뒤 농업 전면 집단화에 반대하다 1958년 정치국에서 쫓겨났고,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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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독일 공산당 입당
- 1926–1932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붉은 교수 연구소
- 1941–1944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
- 1950–1958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 1950–1955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8–196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
1945년 공산당 호소문을 쓰고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운 동독 공산주의자
작센 탈하임의 양말공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고, 모스크바 레닌 학교를 다녔다. 나치 집권 뒤 지하 활동과 망명을 거쳐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 정치학교를 이끌었고, 모스크바에서 자유독일 방송을 맡았다. 1945년 작센으로 파견된 공산당 선발 그룹을 이끌었고, 1945년 6월 11일 공산당 호소문 초안을 썼다. 1946년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도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세울 수 있다는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웠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뒤 이를 철회해야 했다. 외무차관과 대외정보기관 책임자를 지냈고, 1953년 차이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쫓겨났다. 1973년 암 투병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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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독일 공산당 입당
- 1935공산당 중앙위원, 정치국 후보위원
- 1945작센 파견 공산당 그룹 책임자, 6월 11일 호소문 초안
- 1946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
- 1949–1953외무차관
- 1953모든 직책에서 해임
동독 '공포의 대가': 32년간 슈타지를 장악한 국가보안 수장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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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KPD 입당
- 1931뷜로플라츠 경관 살해 후 소련 망명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참전 (대위)
- 1945베를린 귀환, 리히텐베르크 경찰서장
- 1950국가보안부 차관 겸 국무차관
- 1957–1989국가보안부 장관 (슈타지 수장)
- 1976SED 정치국 정위원
- 1993경관 살해 유죄 판결, 6년형
독일경제위원회의 계획 책임자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이 된 동독 경제 계획가
베를린 릭스도르프의 구두장이 아들로 사무원으로 일하며 야간에 경제학을 배웠고, 1931년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다. 나치 집권 뒤 지하 신문과 당 군사정보 조직에서 일하다 1936년 체포되어 6년형을 살았고, 작센하우젠과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전후 공산당 경제부를 세워 이끌었고, 1947년부터 독일경제위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하며 계획을 맡아 1948년 반년 계획과 1949~1950년 2개년 계획을 짰다. 1952~1961년 라우의 뒤를 이어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8년 정치국원, 1955~1965년 각료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1961년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상호경제원조회의 상임대표를 맡았고, 196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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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독일 공산당 입당
- 1936–1945투옥, 작센하우젠·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
- 1947–1949독일경제위원회 계획 책임자
- 1952–1961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58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 1962상호경제원조회의 상임대표
장벽의 공화국을 장기 통치한 동독 지도자
1989년 10월의 축출은 동독 체제의 붕괴가 지도부 내부에서도 더는 막을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거친 독일 공산주의자로, 전후 동독에서 청년조직과 당의 핵심을 지냈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이끌며 동독의 장기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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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1931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71–1989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제1서기·총서기
- 1976–1989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89대중 시위 속에서 실각
동독의 파산을 경고했으나 체제를 구하지는 못한 국가계획위원장
내가 정치국에서 호네커에게 이 정책을 경고했을 때 나는 '사보타주'로 일축됐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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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1939기계공 훈련
- 1939–1945루프트바페 복무, 비행 교관
- 1948SED 입당
- 1955–1958모스크바 공산당 고등학교 수학
- 1960–1962SED 중앙위 계획·재정·기술부장
- 1962–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1965년 위원장 승진
- 1965–1989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겸 각료회의 간부위원
- 1973–1989SED 정치국 후보위원, 1989년 11월 정위원
울브리히트 그룹의 막내로 귀국했다가 1949년 유고슬라비아로 탈출한 소련·동독 연구자
빈에서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공산주의자인 어머니와 함께 1935년 소련으로 망명했으나 어머니는 1936년 체포되어 보르쿠타 수용소에서 12년을 보냈다. 코민테른 학교를 마치고 자유독일 방송의 아나운서가 되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의 일원으로 베를린에 돌아왔다. 공산당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했고 1947년부터 당 대학에서 가르쳤다. 독일이 소련 체제를 그대로 따른다고 확신하게 되자 1949년 3월 프라하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탈출했고, 1950년 서독으로 갔다. 1955년 회고록으로 널리 알려졌고, 1966~1987년 예일 대학에서 소련사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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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어머니와 함께 소련으로 망명
- 1943자유독일 방송 아나운서
- 1945울브리히트 그룹의 일원으로 베를린 귀환
- 1947사회주의통일당 당 대학 강사
- 1949유고슬라비아로 탈출
- 1955회고록 출간
- 1966–1987예일 대학 교수
베를린 장벽을 실수로 무너뜨린 동독 정치국의 대변인
기자회견에서 '언제 발효됩니까?'라는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며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즉시, 지체 없이.'
동독의 대표적 선전 담당자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을 거쳐 SED 정치국 위원 겸 동베를린 제1서기에 올랐다.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변하여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했다. 훗날 자신의 실수가 체제의 '관 속의 마지막 못'이었다고 인정했고, 통일 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동독 체제에 대한 공개적 반성으로 감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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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FDGB 기관지 『트리뷔네』 편집자로 언론 경력 시작
- 1952SED 입당
- 1967–1968모스크바 CPSU 당학교 수학
- 1978–1985SED 중앙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 1981–1989SED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후보위원, 1984년 정위원
- 1985–1989SED 동베를린 지구당 제1서기
- 1989.11.09기자회견에서 여행규정 즉시 발효 발언으로 장벽 붕괴 촉발
- 1997–2000국경 사망 사건으로 3년형, 1년 복역 후 사면
호네커를 계승했으나 장벽을 열고 50일 만에 몰락한 동독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규정 초안을 낭독한 뒤 "자, 이걸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게"라며 샤보프스키에게 쪽지를 건넸고, 몇 시간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로, 1989년 10월 호네커 축출 후 SED 총서기가 되었다. 취임 3주 만에 여행 규정 초안을 승인하고 11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낭독한 뒤 이를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개혁을 약속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12월 초 전권을 내놓았다. 통일 후 국경 사망 사건에 대한 형사책임으로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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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입당
- 1971–1974에른스트 텔만 피오네르 조직 의장
- 1974–1983자유독일청년단(FDJ) 중앙평의회 제1서기
- 1983–1989SED 정치국 위원 겸 중앙위 안보·청년·체육 담당 서기
- 1984–1989국가평의회 부의장
- 1989.10–12SED 총서기
- 1989.10–12국가평의회 의장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97국경 사망 사건으로 금고 6년 6개월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