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 장교들이 『네프서버』 기자 둘을 살해했고 1921년 카를 왕의 복귀 시도에 가담한 헌병 장교
마로시바샤르헤이에서 태어난 장교로,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쇼프론의 헌병 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2월 17일 그의 장교 부대원들이 『네프서버』의 쇼모지 벨러와 버초 벨러를 살해해 호르티에 반대하는 세력에 경고를 보냈고, 3월 섭정 선거 때는 그의 부대가 국민의회의 「질서」를 지켰다. 1921년 8월 쇼프론 철수를 거부해 이 도시가 헝가리에 남을 길을 열었다. 같은 해 10월 왕정주의 장교들과 함께 카를 왕을 불러들여 장갑열차로 부다페스트로 진군했으나 부더외르시 전투에서 졌고, 사면을 받은 뒤 퇴역했다. 1932년 프로너이 팔과 함께 헝가리 전국 파시스트당을 세웠다.
국민군 조직을 주도하고 1932~1936년 총리로서 헝가리를 이탈리아·독일 쪽으로 이끈 우익 급진파 장교
톨너주 무르거에서 마을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 1919년 세게드에서 준군사 단체 MOVE를 만들고 호르티의 국민군 조직을 주도했으며,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무력으로 막는 데 앞장섰다. 1929년 베틀렌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1932년 총리가 되었다. 무솔리니와 손잡고 1934년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히틀러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36년 뮌헨에서 병으로 죽었다.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 가정에서 프란츠 차이드너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간기에 성을 헝가리식인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로 바꾸었다. 1941년 8월 세게드에 주둔한 제5군단장이 되었다. 1942년 1월 참모총장 솜버테이이가 그를 바치카의 파르티잔 진압에 보냈고, 그의 명령으로 바치카 마을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노비사드 학살도 그가 조직했다. 1944년 1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다른 유죄 장교들과 빈으로 달아났고, 자원해 친위대에 들어갔다. 화살십자당 정권에서 국방차관이 되어 자신을 비판해 온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전후 헝가리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11월 처형되었다.
부다페스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재무부에서 일한 경제 전문가로, 1932년 굄뵈시 내각의 재무장관, 1935년 국립은행 총재가 되었다. 1938년 5월 총리가 되어 그해 가을부터 외교를 독일·이탈리아 쪽으로 돌렸고, 그의 재임 중 제1차 빈 중재로 남부 슬로바키아가 헝가리에 돌아왔다. 독재적 개편과 제2차 유대인법을 추진했으나 1939년 2월 정적들이 그의 유대계 조상을 밝혀내 사임했다. 1940년 친파시스트 정당 헝가리 쇄신당을 세웠고, 1944년 독일 점령 뒤 스토여이 내각의 장관을 지냈다. 1946년 인민재판소의 사형 선고로 총살되었다.
1944년 내무부 차관으로 버키 라슬로와 함께 헝가리 유대인의 게토 수용과 아우슈비츠 이송을 맡은 극우 관료
어보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경기병 장교로 싸웠고,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MOVE 등 반혁명 단체에 가담해 잔혹함으로 이름났다. 1923년부터 15년 동안 괴될뢰 수석 군수, 1938년 페스트주 부지사를 지내며 반유대법이 미흡하다며 해수욕장 출입 금지 등을 독자적으로 가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여로시 언도르 밑에서 내무부 차관이 되어 유대인 게토 수용과 이송에 폭넓은 권한을 받았고, 버키 라슬로와 함께 아이히만을 도와 5~7월 40만 명이 넘는 헝가리 유대인을 이송했다. 9월 해임되었으나 화살십자당 집권 뒤 작전 지역 민정 담당 정부위원이 되었다. 1945년 달아났다가 미군에 붙잡혀 넘겨졌고, 1946년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을 당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헝가리계 정치인에서 1944년 스토여이 내각의 내무장관이 되어 유대인 이송을 조직한 인물
헝가리 왕국 코마롬주 코마롬체히(오늘날 슬로바키아 체히)에서 태어나, 1920년대 초 트리아농 조약으로 떨어져 나간 펠비데크의 헝가리계 정치에 뛰어들었다. 1933년 헝가리 국민당 대표, 1935년 프라하 하원 의원이 되었고 통일 헝가리당 서기장을 지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헝가리 정부의 펠비데크 담당 무임소 장관을 지냈고, 1940년 임레디 벨러와 극우 정당 헝가리 쇄신당을 세웠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스토여이 내각의 내무장관이 되어 차관 버키 라슬로·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조직했다. 8월 17일 호르티의 압력으로 물러났다. 전후 서쪽으로 달아났다가 미군에 붙잡혀 헝가리로 넘겨졌고,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총살되었다.
커셔(지금의 코시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복무했고, 1925년 참모본부에 들어갔다. 1930년대 초 트리아농 이전 국경 회복을 내건 「헝가리주의」를 주창하며 정치에 뛰어들어 1935년 군을 떠났고, 1937년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을 세웠다. 1938년 투옥된 사이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당은 1939년 선거에서 의석 30석을 얻었다. 1944년 10월 독일이 호르티를 끌어내리자 국가 지도자가 되어 중단된 유대인 이송을 재개했고, 그의 민병대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 붙잡혀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3월 처형되었다.
헌병대 출신의 국민사회주의자로, 1944년 내무부 차관으로서 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맡은 인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사관학교를 나와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고, 1919년 세게드에서 폭력적인 반혁명 활동으로 이름을 얻은 뒤 헌병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1938년 헌병 소장으로 물러나 헝가리 국민사회주의당에 들어갔고, 1939년 의원이 되었으며 독일 자금의 신문 『머저르샤그』 편집인이 되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내무부 정무 차관이 되어 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맡았고, 4월 4일 아이히만 특무대와의 회의를 주재해 유대인 재산을 빼앗고 도시 게토로 옮긴 뒤 독일로 이송하기로 정했다. 여름에 해임되고 반호르티 쿠데타 모의로 체포되었으나 화살십자당 집권 뒤 국가보안국장이 되었다. 1945년 오스트리아에서 붙잡혀 넘겨졌고,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