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제3장은 그를 푸리에·오언과 함께 계급 투쟁이 덜 발전한 시기에 나온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체계의 창시자로 꼽는다.
파리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요크타운 포위전에 참여했다. 혁명기에 국유재산 투기로 돈을 모았고 공포정치 시기에 투옥되었다. 『산업』, 『조직자』, 『산업가의 교리문답』 등에서 과학자·기업가·노동자를 아우르는 생산적 ‘산업가’가 무위도식하는 계급 대신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만년의 『새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가난한 계급의 처지 개선을 내세웠다. 『공산당 선언』이 그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정치 운동을 보지 못한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분류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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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1783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요크타운 포위전에 참여했다.
1793–1794공포정치 시기 생트펠라지와 뤽상부르에 갇혔다가 테르미도르 9일 뒤 풀려났다.
상업 문명을 비판하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정념에 맞게 일하는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를 구상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를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자로 꼽는다.
브장송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791년부터 1816년까지 여러 도시에서 외판원·서신 담당 사무원으로 일했다. 1808년 『네 운동의 이론』을 익명으로 낸 뒤, 상업이 사기와 비참을 낳는다고 비판하고,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에서 각자의 정념에 맞게 일하는 ‘매력 있는 노동’을 구상했다. 빅토르 콩시데랑 등 제자들이 그의 사상을 퍼뜨렸고 여러 나라에서 공동체 실험이 있었다. 『공산당 선언』 제3장은 그를 생시몽·오언과 함께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로 꼽고, 제자들이 팔랑스테르 같은 실험에 매달려 노동자의 정치 운동에 반대한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평가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한 티에르는 1873년 독일군의 프랑스 영토 철수를 앞당긴 뒤 왕당파 의회의 반대 속에 사임했다.
마르세유 출신 변호사·언론인으로 『프랑스 혁명사』를 써 이름을 알렸고, 1830년 7월 혁명에서 루이 필리프를 옹립한 뒤 7월 왕정의 내무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1834년 리옹 견직공 봉기와 파리 봉기를 진압했다. 제2제정기에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였다. 1871년 2월 국민의회가 그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 회수가 실패하자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겨 5월 피의 주간에 코뮌을 진압했다. 1871년 8월 대통령이 되었고 독일 배상금을 조기에 갚았으나 1873년 왕당파 의회에 밀려 사임했다.
파리 코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싸우고 망명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쓴 언론인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 언론인 프로스페르올리비에 리사가레는 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생존자 증언과 문서를 모아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썼다.
툴루즈의 바스크계 가정에서 태어나 제2제정기 공화파 강연가·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여러 차례 기소되었다. 1870년 전쟁 중 지방 국민방위정부의 군사 조직에 참여했고, 1871년 코뮌 기간 파리에서 신문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냈다. 피의 주간에는 벨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까지 싸운 뒤 런던으로 탈출해 마르크스 가족과 가까워졌고 엘리너 마르크스와 약혼했다. 1876년 브뤼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펴냈다. 1880년 사면 뒤 돌아와 신문 『라 바타유』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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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창간·편집했다.
1876코뮌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 문서를 바탕으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처음 출간했다.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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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1920.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생산자가 자신의 실존 조건을 통제하려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전되어야 한다' — 『경제계산과 소유형태』(1971)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CEMI를 설립해 소련 계획경제 연구를 개척했고, 나세르·네루·벤 벨라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1963년 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맞서 분권적 시장요소를 옹호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되어 알튀세르와 함께 '경제주의'를 비판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1974-1982)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고, 1972년 르몽드는 그를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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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공산청년동맹 가입 후 프랑스 공산당 입당
1936모스크바 5개월 체류, 대숙청 목격, PCF 제명
1944–1948노동부 관료, EPHE 연구주임
1950년대이집트·인도·알제리 정부 경제 고문, 유엔 전문가로 인도 제2차 5개년 계획 참여
“이데올로기는 길에서 경찰이 ‘이봐 거기!’ 하고 부르면, 몸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크스의 저작에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와 중층결정 개념을 통해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ENS 철학 교수로서 데리다·푸코·부르디외·바디우 등 프랑스 지성계 한 세대를 가르쳤다.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려 했으나, 공산당과의 긴장과 정신질환 속에서도 전후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의 중심으로 밀어올렸다. 1980년 정신적 발작 속에서 아내를 살해한 비극은 그의 사상적 유산을 오래도록 덮었다.
피에르 브루에는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역사가이자 교사운동 활동가로, 공산주의와 20세기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 에밀 테밈과 함께 쓴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은 1930년대 스페인에서 혁명 과정이 패배한 원인을 공화국 내부의 계급투쟁과 스탈린주의적 정책의 충돌 속에서 분석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발굴하고 편집하며, 혁명적 실천과 역사 서술을 결합하려 했다.
2017년 휴스턴 공항에서, 점령기 기억을 연구해 온 이 역사가는 강연 수당을 문제 삼은 미 국경 당국에 10시간 구금되며 강제송환 직전까지 갔다.
앙리 루소는 제2차 세계대전기 프랑스와 비시 체제, 그리고 그 기억의 변화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가정이 수에즈 위기 뒤 프랑스로 이주한 경험은 그의 역사적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대표작 《비시 증후군》은 해방 이후 프랑스 사회가 협력과 책임을 망각하거나 재구성해 온 과정을 분석했으며, 그는 레지스탕스의 규모와 국민적 단결을 과장하는 기억의 신화를 ‘레지스탕시알리슴’이라 불렀다. 그의 작업은 역사적 사실과 집단기억, 현재의 정치적 사용을 구별하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추적하는 현대사 연구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