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공 출신인 아이히호른은 사회민주당에서 일하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1918년 11월 혁명 뒤 베를린 경찰청장이 되어 좌파 정치 세력에 우호적인 경찰 운영을 폈다. 프로이센 내각은 1919년 1월 4일 그를 해임하고 사회민주당원 오이겐 에른스트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맞선 대중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어진 점거와 무장 충돌은 1월 봉기로 이어졌다.
스위스 샤프하우젠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옮겼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고, 오케스트리온 공장 관리자로 일하며 1923년 나치당에 들어가 「발트키르히의 히틀러」로 불렸다. 1932년 친위대에 들어갔다. 1941년 7월부터 1943년 9월까지 카우나스에서 특수작전집단 A 산하 특무부대 3을 지휘하며 리투아니아인의 도움을 받아 유대인 남녀와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총살했고, 1941년 11월 제9요새 학살을 저질렀다. 1941년 12월 1일 13만 7,346명의 처형을 날마다 집계한 보고서를 썼다. 1943년 말 신경 쇠약으로 독일에 돌아갔고, 전후 농장 일꾼으로 살다 1959년 보고서가 드러나 체포되자 재판 전에 목을 매 자살했다.
1907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장교로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군사사절단에서 일했다. 1919년 경찰로 옮겨 칠레 경찰대 책임자, 경찰학교 감찰총감을 지냈고, 친위대에 들어가 힘러의 참모부에서 일했다. 1939년 말 친위대 경찰사단을, 1943년 라트비아인 제6친위군단을 맡았다. 1944년 12월 부다페스트의 제9친위산악군단장이 되어 1944년 12월 24일부터 1945년 2월 11일까지 포위전에서 독일군을 지휘했고, 모든 항복 권유를 거부해 길고 참혹한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탈출 시도가 실패한 뒤 소련군 포로가 되어 1949년 징역 25년을 선고받았고, 1955년 풀려나 1971년 빌레펠트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슈바르츠발트의 호른베르크에서 직물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다. 1929년 나치당, 1930년 친위대에 들어갔고, 1933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의 경찰청장과 정치경찰 책임자를 지냈다. 1941년 6월 힘러에게 남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친위대·경찰 고위 지도자로 뽑혀 관할 지역의 아인자츠그루펜 학살을 모두 지휘했고, 카미야네츠포딜스키(2만 3600명)와 바비 야르(3만 3771명)의 대량 총살에 자신의 방식을 썼다. 11월 오스트란트로 옮겨 리가 유대인의 절멸을 명령받았고, 룸불라에서 이틀 동안 2만 5000명이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45년 4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리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
1941년 특수작전집단 A를 이끌며 카우나스 포그롬을 부추기고 발트 유대인 살해를 지휘한 친위대 장교
슈테르넨펠스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튀빙겐 대학에서 법학 박사가 되었다. 1932년 나치당과 친위대에 들어가 뷔르템베르크와 브레슬라우의 게슈타포를 이끌었고, 1938년 빈의 유대인 이주 중앙청 공식 수장이 되었다. 1941년 2월 특수작전집단 A 사령관이 되어 6월 북부집단군을 따라 발트 3국에 들어갔다. 카우나스에서는 클리마이티스에게 포그롬을 시키고 리가에서는 아라이스에게 부대를 꾸리게 하는 등, 학살을 현지인의 「자기 정화」처럼 꾸몄다. 1941년 겨울까지 유대인 24만 9,420명을 죽였다고 보고했고, 11월 말 오스트란트 보안경찰·정보부(SD)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 러시아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크 근처에서 소련 파르티잔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는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해 독일 국가기관들의 협력을 조율했다.
하이드리히는 1931년 친위대에 들어가 국가보안부(SD)를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36년에는 게슈타포와 형사경찰을 포괄한 보안경찰을 지휘했다. 1939년 제국보안본부(RSHA)가 설치되자 수장이 되어 보안경찰과 SD를 통합 지휘했고, 유대인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나치의 박해와 살해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 기관을 이끌었다. 1941년 총독 대리로 임명된 보헤미아·모라비아에서 저항 세력을 처형하고 유대인 게토화와 강제이송을 추진했다.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주재해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한 부처 간 협력을 조율했으며, 5월 체코 저항요원의 공격으로 부상한 뒤 6월 4일 사망했다.
유럽 각지 유대인의 절멸 수용소 이송을 맡고 1944년 헝가리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이송을 지휘한 친위대 장교
독일 졸링겐의 칼뱅파 가정에서 태어나 1914년 가족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옮겨 자랐고, 1932년 나치당과 친위대에 들어갔다. 1938년 빈에서 오스트리아 유대인의 이주를 조직했다. 1939년 12월 국가보안본부 IV B4과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 참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으며, 이후 그와 부하들이 유대인을 절멸 수용소로 보내는 이송을 맡았다.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점령 뒤 헝가리 유대인 이송을 지휘해, 7월 이송이 멈출 때까지 72만 5000명 가운데 43만 7000명이 이송되었다. 전후 미군에 붙잡혔다가 수용소에서 달아나 1950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갔으나,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납치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1962년 교수형을 당했다.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