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번스는 그를 '20세기 미국사에 관한 가장 유능한 소련 전문가 중 한 명'이라 평했다.
전후 세대 최초로 소련에서 미국사 연구의 학문적 기초를 세운 역사가. 레닌그라드대학에서 국제관계사를 전공하고 레닌그라드 역사연구소에서 평생 연구하며 석유정치, 미국 혁명, 미소 관계를 아우르는 300여 편의 저작을 남겼다. 티머시 나프탈리와 함께 소련 공산당·크렘린 문서고를 처음 열어 쿠바 미사일 위기의 내막을 밝힌 『One Hell of a Gamble』(1997)은 냉전사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어진 『Khrushchev's Cold War』(2006)로 영국 왕립연합군사연구소의 올해의 군사사 서적상을 받았다.
그가 편집한 체르노빌 연구서는 6,000여 개 자료를 검토해 장기 피해를 추산하며 공식 사망자 수 중심의 서술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렉세이 야블로코프는 동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생물학자이자 환경정책가였다. 그는 체르노빌의 장기적 건강·환경 피해를 강조하며 공공 논쟁에 참여했고, 공동 저술서의 높은 사망 추정치는 재난 피해 규모를 둘러싼 논쟁의 한 극단을 이루었다. 과학 연구와 환경운동, 의회·대통령 자문 활동을 오가며 생태 문제를 국가 의제로 끌어올렸다.
그동안 절대 접근할 수 없었던 사료가 마침내 열리자, 그는 역사가로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회고하며, 다만 그것이 오십 대 중반에야 왔음을 아쉬워했다.
소련 역사학자로 유고슬라비아 현대사와 냉전기 동유럽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1966년부터 인슬라브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1980년대 말 아카이브 개방 이후 스탈린과 유고·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회담 기록을 발굴해 스탈린-티토 결별의 기원에 대한 탈냉전기 재평가의 토대를 놓았다. 노먼 네이마크와 공동 편집한 『동유럽 공산정권의 수립』(1997)을 비롯한 수백 편의 저작과 코민포름 회의록 출판으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60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남·서슬라브사 전공)
1962–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슬라브학 연구소 아스피란투라
1966–2022슬라브학 연구소 연구원, 선임연구원, 국제관계사 부문장(1990–1993), 수석연구원
1989년 라진스키는 황제 가족 처형자인 야코프 유롭스키의 수기와 참여자들의 증언을 소련에서 처음으로 공개해, 사형 집행자들 스스로가 그 밤을 초 단위로 이야기하게 했다.
에드바르트 라진스키는 러시아의 역사와 비극적 인물을 대중에게 전달한 역사가이자 극작가, 방송인이다. 모스크바 역사기록보관소에서 훈련받은 그는 연극으로 경력을 시작한 뒤 니콜라이 2세, 라스푸틴, 스탈린 등의 전기를 썼다. 1997년 스탈린 전기에서 새로 공개된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베리야가 스탈린을 독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이 주장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사망 원인을 둘러싼 논쟁의 한 해석으로 남아 있다. 그의 서사적이고 심리적인 역사 서술은 널리 읽혔지만, 사료의 출처와 해석을 둘러싸고 전문 역사가들의 비판도 받았다.
유리 주코프는 소련과 러시아의 역사가로, 러시아 역사연구소에서 스탈린 시대와 소비에트 정치사를 연구했다. 그는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를 대숙청의 집행자이자 책임 있는 정치가로 재평가하는 논의를 제기했다. 동시에 스탈린의 대중 탄압 책임을 축소하는 ‘다른 스탈린’ 해석으로 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작업은 탈스탈린화 이후의 역사 기억이 지닌 정치성을 드러냈다.
발레리 티시코프는 민족성·민족주의·민족분쟁을 연구한 러시아 민족학자이자 사회인류학자다. 그는 민족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실체라기보다 정치적 행위자와 엘리트가 동원하고 재구성하는 범주로 분석했으며, 이 관점은 저서 『Ethnicity, Nationalism and Conflict in and after the Soviet Union: The Mind Aflame』에 집약됐다. 1992년 민족문제 담당 장관을 지내며 학술적 민족성 논의를 국가의 다민족 현실과 분쟁 예방의 문제에 연결했다. 그의 구성주의적 해석은 민족주의의 자율성과 대중적 경험을 과소평가한다는 비판과 함께 후기 소련 및 러시아 민족정치 논쟁의 한 축을 이룬다.
개혁은 좌초되었고, 국가는 정체기에 접어들었으며, 이 정체가 궁극적으로 소련 사회주의 경제의 종말을 예고했다.
유리 골란드는 소련 신경제정책(NEP)과 화폐개혁 연구로 출발한 러시아 경제학자다. 모스크바국립대 물리학부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 1990년대 경제학으로 전환, 네프와 관련한 논쟁사를 복원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2010년 알렉산드르 네키펠로프와 함께 발표한 논문 「코시긴 개혁: 놓친 기회인가 신기루인가」는 이 개혁을 둘러싼 탈소비에트 역사학 논쟁의 핵심 질문을 공식화했다.
수년에 걸쳐 나는 「레닌그라드 사건」이 1917년 이래 소비에트 러시아의 '러시아 문제' 전체 역사와 떼어놓고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굳혔다.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쳅스키는 소련과 러시아의 정치사를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역사학 박사이다. 그는 스탈린 시대의 권력과 국가 민족정책을 다룬 저술을 발표했으며, 특히 레닌그라드 사건을 러시아공화국의 지위와 러시아계 지도층을 둘러싼 갈등으로 해석했다. 그의 해석은 사건을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소련 체제의 ‘러시아 문제’와 연결해 보려는 논쟁적 역사서술로 자리 잡았다.
1987년 남성 기대수명이 3.2년 늘어 65세에 이르렀다는 계산은 정책 논쟁을 사망률의 언어로 바꾸었다.
예브게니 안드레예프는 수학적 엄밀성과 통계 실무를 결합해 러시아와 소련의 사망률을 연구한 인구학자다. 그의 기대수명 분해 방법은 연령과 사망 원인이 수명 변화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는 표준 도구가 되었고, 1980년대 후반 남성 기대수명 반등을 3.2년, 65세까지로 산출한 작업은 금주 정책의 건강 효과를 평가하는 핵심 근거가 되었다. 그는 알코올 관련 사망률을 장기 자료와 방법론의 문제로 다루며, 정책 효과를 단순한 서사로 환원하지 않았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작전집단의 최측근 보좌관으로서의 내부 시점에서, 비공개 문서고 자료와 참전자 증언에 기초해 아프간 전쟁을 다룬 『아프간의 비극과 용맹』(1995)을 썼다.
알렉산드르 랴홉스키는 러시아 군인이자 군사 저술가로, 1946년 2월 5일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2009년 2월 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68년 바쿠 고등제병지휘학교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참가했으며, 1977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총참모부 작전총국에서 8년간 아프리카 군사협력 업무를 맡았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 국방부 작전집단에서 바렌니코프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철군까지 복무했고, 1990년 지상군 총참모부 작전국 제1부국장을 지냈다. 2002년 예비역으로 전역했으며 장군 소령 계급을 받았다.
복무 중 '바실리 티모페예프'라는 필명으로 첩보소설을 쓰던 그는, 기밀 해제 전 예조프의 신문 조서 원문을 발굴해 평전에 그대로 실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KGB) 출신의 러시아 작가다. 기밀 해제 이전의 수사 기록에 접근해 예조프 평전 『예조프: 「철의」 스탈린 인민위원 이야기』(2001, 「특별 문서고」 총서)를 썼다. 이 책은 예조프 신문 조서와 재판 기록을 대량으로 수록한 초기 공간물이지만, 조서 인용 사이사이에 신문실 정경 같은 소설적 재구성을 끼워 넣어 사료와 창작의 경계가 흐리다는 한계가 있다.
상세 이력 보기
1969모스크바 폴리그라프 연구소 졸업
1971KGB 학교 졸업
1970년대–국가보안기관 정보장교로 복무(대령), 태국·인도에서 타스 통신 특파원으로 근무
1977년 그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심사받았을 때, 심사 기관인 CPSU 중앙위 산하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평가서를 제출했다.
모스크바 태생 타타르계 제도경제학자로, MSU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며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논쟁적 박사논문으로 주목받았다. 1993년 쿠즈미노프와 함께 고등경제대학(ВШЭ) 설립에 참여해 초대 경제학과장과 초대 부총장을 지냈고, 러시아 제도경제학파의 핵심 구축자로 자리잡았다. 2017년 출간된 집단 논문집 『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안전판인가?』의 책임편집자로서, 코시긴 개혁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양극화된 평가를 표제 하나로 응축했다.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은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은 것이 되었다: 많은 이가 봤다고 하나 단 하나의 확실한 증거도 제시된 적 없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스탈린 시대 연구자로, 소련 국가 반유대주의의 기록을 발굴해 학계의 표준을 세웠다. 그의 저서 『붉은 파라오의 포로』(1994)와 『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2001)는 의사들의 음모와 반세계주의 캠페인을 포함한 스탈린 말기 유대인 탄압의 전모를 기록으로 실증한 기념비적 작업이다. 2003년 '데포르타치야: 미스티피카치야' 논문에서 스탈린이 유대인 대량 추방을 계획했다는 통설에 대해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다'고 비판하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입장은 브렌트·나우모프의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와 대비되는 대표적 학설로 자리잡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88항공산업 인민위원회에 관한 후보자 학위논문 심사 통과
1994『붉은 파라오의 포로』 출간
2001『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 출간 (2003년 개정판)
2003러시아 유대인공동체연맹 '올해의 인물 5762' 선정
2008박사학위 논문 심사 통과: 소련 정치 지도부와 유대계 인텔리겐치야(1936–1953)
그는 소련 붕괴의 원인을 이렇게 압축했다: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 소련은 피할 수 없는 몰락이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실기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출신의 냉전사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학 역사학부와 소련 과학아카데미 미국·캐나다연구소에서 수학했으며, 1985년 동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 국가안보아카이브 연구원을 거쳐 템플대학 교수를 지냈고, 2013년부터 런던정경대학(LSE) 국제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출간한 《Collapse: The Fall of the Soviet Union》에서 소련 붕괴는 필연이 아니었으며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가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의 결과였다고 주장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 책으로 2022년 컨딜 역사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야로프의 연구는 봉쇄를 견딘 사람들을 영웅과 가해자의 이분법이 아니라 선택과 생존의 기록으로 읽게 했다.
세르게이 야로프는 러시아 20세기 사회사와 노동자 정치의식을 연구한 역사가로, 봉쇄 레닌그라드의 일상과 도덕적 선택을 핵심 주제로 삼았다. 그는 영웅적 저항이나 행정적 동원만으로 봉쇄사회를 설명하지 않고, 굶주림 속 연대와 순응, 생존 전략이 얽힌 경험을 사료로 복원했다. 『봉쇄 윤리』와 『봉쇄 레닌그라드의 일상생활』은 재난 속 인간 행위의 모순을 공적 기억의 중심으로 끌어냈다.
『스탈린: 한 지도자의 생애』 결론에서 흘레브뉴크는 "러시아 사회의 상당 부분이 스탈린식 과거에서 현재의 처방을 찾는다"고 진단했다.
올레크 흘레브뉴크는 소련 스탈린 시대의 정치사와 굴라크를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기록문서 편집자다. 국가기록원 자료와 당·정부 문서를 바탕으로 대숙청을 지역의 자발적 폭발이 아니라 중앙의 결정과 집행 체계가 작동한 사건으로 해명했다. 그의 연구는 스탈린의 지시와 통제가 테러의 방향과 규모를 결정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문서가 남기지 않는 동기와 과정을 신중하게 구분한다. 그는 학술서와 사료집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스탈린 신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다.
그는 스탈린의 최선의 행동은 '1941년 10월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은 것' 하나뿐이라 말한다.
모스크바에서 역사 교사와 학교 운영자로 일하며 대숙청기 국가보안기관을 연구해 온 역사가다. NKVD 지도부 내부 투쟁을 다룬 첫 연구(2006)에 이어 『「피의 난쟁이」 대 인민의 수령: 예조프의 음모』(2009)와 『스탈린과 NKVD』(2013)를 펴냈고, 대테러의 집행을 지역별 통계 편차와 예브도키모프의 '북캅카스파' 같은 체키스트 집단의 인맥 분석으로 재구성한다. 이 서가에 실린 두 연구서의 저자다.
반세기 동안 넓게 흔들리던 겨울전쟁 손실 기록을 그는 이름별 데이터베이스로 다시 세어, 전사자 13만 8천여 명과 핀란드군 대비 5배가 넘는 손실 비를 밝혀냈다.
유리 킬린은 카렐리야와 소련의 대외·군사정책을 연구해 온 페트로자보츠크의 역사학자다. 그는 겨울전쟁에서 국가가 남긴 손실 기록을 비판적으로 대조하는 연구를 이끌었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의 사업은 전사자 집계 문제를 다시 공론화했다. 2012년 그가 제시한 소련군 전사자 13만 8,533명은 이 전쟁의 인명 손실을 둘러싼 주요 수정안으로 자리 잡았다.
숙청 명단이 봉쇄기에 쿠즈네초프가 발탁한 간부들과 겹친다는 점을 들어, 그는 「이것은 '레닌그라드' 사건이 아니라 '쿠즈네초프' 사건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키릴 볼돕스키는 소련 후기와 현대 러시아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러시아 역사학자다. 그는 레닌그라드 사건 전후의 당 apparatus와 봉쇄의 역사를 함께 다루며, 공개된 기록이 밝혀 주는 것과 여전히 남은 공백을 구분한다. 그의 연구는 이 사건을 단순한 숙청의 서사가 아니라 당 권력, 지역 통치, 기억의 충돌로 읽게 한다.
그는 2021년 인터뷰에서 소련 해체가 ‘반노멘클라투라 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그 혁명의 불완전성과 일관성 결여의 결과라고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블라들레노비치 슈빈은 1965년 7월 18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역사가이자 좌파 사회운동에 참여한 공공 지식인이다. 1989년 모스크바 국립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84∼1985년에는 공군에서 복무했으며, 1992년부터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세계사연구소에서 일하면서 2000년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국립 인문대학, 2007년부터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 교수를 겸했다.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 아나키즘 운동, 소련사와 20세기 국제관계를 연구하며 약 25권의 단행본을 냈고, 1997∼1998년에는 보리스 네므초프 부총리 보좌관을 지냈다.
피지코프는 제22차 당대회 결의에서 반당 그룹에 대한 언급이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보다 거의 네 배 많았다고 지적했다.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피지코프는 1965년 11월 27일 모스크바주 라멘스코예에서 태어나 2019년 9월 16~17일 밤 모스크바에서 폐색전증으로 사망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국가 관료다. 1998년 후보 학위, 1999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2003~2004년 러시아 연방 교육부 차관을 지녔다. 말년에는 17세기 교회 분열과 구신도 연구로 널리 알려졌는데, 구신도가 혁명과 소비에트 체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구신도계 안에서도 평가가 갈렸다. 타타르-몽골 지배 부정 같은 음모론적 문명사 구상으로도 논란을 낳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89모스크바주 교육대학 역사학부 졸업
198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당사 부문 연구원
19981953~1964년 소련 사회의 사회정치 발전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19991950~1960년대 소련 사회의 정치개혁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2000러시아 연방 통신정보부 장관 보좌관
2000–2003러시아 연방 정부 의장 보좌관
2003.06.05–2004.06.18러시아 연방 교육부 차관으로 교육의 질 관리와 기관 국가인가를 담당
수시코프는 '레닌그라드 사건'의 진짜 동인이 파벌 항쟁이 아니라 레닌그라드 지도부가 비밀투표 제도를 무력화한 데 있다고 주장했다.
안드레이 수시코프는 소련 시기 당·국가 권력체계와 지역 노멘클라투라의 통치 실천을 연구해 온 러시아 역사가다. 우랄 연방관구 기록보존소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문서고에서 발굴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된 동인이 엘리트 간 권력투쟁만이 아니라 레닌그라드 지도부의 만연한 부패와 공적 자원의 사적 유용이었다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했다. 2018년 저서 『'레닌그라드 사건': '혁명의 요람'에 대한 총숙청』은 이 문제를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연구로 평가받으며, 전후 스탈린주의 정치사 연구의 주요 논쟁점을 재구성했다.
2021년 연구는 기근 사망률의 지역 격차가 식량 생산성보다 민족적 편향과 더 밀접하다고 제시했다.
안드레이 마르케비치는 러시아 경제사를 통계와 제도 분석으로 재구성해 온 역사경제학자다. 그는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국가, 시장, 산업화, 계획을 장기 자료로 분석했으며 러시아신경제학교에서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2021년 나탈리야 나우멘코, 낸시 치안과 함께한 연구는 1932~1933년 기근에서 우크라이나인의 높은 사망률이 식량 생산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민족적 편향이 반영된 조달 정책과 이동 제한이 사망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이 작업은 대규모 지역 자료를 통해 기근의 경제적 메커니즘과 국가 정책의 책임을 함께 묻는다.
"소련 경제는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고, 간주해야 한다"며 사프로노프는 그 역사를 중앙집권과 분권의 순환으로 읽는다.
알렉세이 사프로노프는 러시아의 경제학자이자 역사가로, 소련 경제의 전 시기를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한다. 그는 코시긴 개혁을 자유화와 컴퓨터화의 단순한 대립으로 보지 않고, 경제·수학적 방법과 물질적 유인을 결합하려 한 계획경제 개혁으로 해석한다. 그의 분석은 1965년 개혁의 구상이 당대의 통념보다 보수적이었으며, 실행의 불철저함이 성과와 한계를 함께 만들었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