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데멘체프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Деменцев

국가재정의 경고자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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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9치타·캄차카 지역 회계·재정 담당
  • 1944–1947캄차카주 통제·감사기관 감사관
  • 1949–1962고르노알타이·야로슬라블주 재정 책임자, 집행위 부의장
  • 1962–1965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가수입관리국장·차관
  • 1965–1973소련 재무부 차관
  • 1973–1986소련 재무부 제1차관
  • 1986–1987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의장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코나레프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Конар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07 ○ 자연사

소련 철도의 마지막 대장

1991년 2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유즈나야(남부) 철도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72년 철도국장까지 오른, 순수 철도인 출신 장관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가 철도 부문의 위기를 비판한 직후 기존 장관이 경질되자 후임으로 발탁되어 1991년까지 소련 철도를 이끌었다. 재임 중 화물 적재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1988년에는 연간 41억 톤이라는 소련 철도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철도보다 2배 많은 수치였다.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이유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으며, 이후 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를 설립해 생애 마지막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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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 졸업, 유즈나야 철도 오스노바 역에서 기술자로 시작
  • 1953–1960유즈나야 철도에서 부역장·운수과장·운행부장 등 역임
  • 1962유즈나야 철도 제1부국장
  • 1972–1976유즈나야 철도 국장
  • 1976–1977소련 교통부 차관
  • 1977–1982소련 교통부 제1차관 겸 열차운행총국장
  • 1982–1991소련 교통부 장관, 1988년 사상 최대 화물 적재량 달성
  • 1991–2007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 회장, 50편 이상의 과학 논문 발표

콘스탄틴 표도로비치 카투셰프

Константин Фёдорович Катуш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10 ○ 자연사

대외경제관계를 맡은 말기 경제 관료

치에르나 회담에서 카투셰프가 소련 입장을 변호하는 모습을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장 요세프 스므르콥스키는 그를 두고 "몰로토프 두 명을 합친 듯한 강경함"이라고 평했다.

고리키 자동차공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후원 아래 급성장하여, 1968년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소련 측 실무를 맡았고, 이후 사회주의권 관계를 총괄했다. 1977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고, 이후 쿠바 대사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기 대외경제관계 장관으로 개방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소련 붕괴 후에는 상업은행 경영진으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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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고리키 지역과 당 경제관리 라인에서 성장
  • 1968–1977중앙위 서기, 산업·경제 조정 업무 담당
  • 1977–1982각료회의 부의장, 경제 행정 실무에 관여
  • 1982–1985코메콘 관련 대외경제 협력 업무 수행
  • 1988–1991대외경제관계 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무역·합작 개방 관리

유리 페트로비치 바탈린

Юрий Петрович Батал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13 ○ 자연사

서시베리아 석유단지와 체르노빌 석관을 건설한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건설 총책

1986년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좌천되어 온 자리는 바탈린 휘하의 국가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이었다.

우랄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바시키르 탄광과 유전 건설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튜멘에서 소련 최대의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복합단지 건설을 주도하며 1980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5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을 총괄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석관 공사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지휘했다. 1989년 퇴임 후 러시아 공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석유가스건설자연합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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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5바시키르 석탄·석유 건설 트러스트에서 작업반장에서 트러스트 관리자로 승진
  • 1965–1970튜멘석유가스건설총국 주임기사 겸 제1부국장
  • 1970–1983석유·가스산업건설 차관, 후에 제1차관
  • 1983–1985소련 국가노동·사회문제위원회 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겸임)

보리스 이바노비치 고스테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Гост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7–2015 ○ 자연사

시장개혁을 거부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마지막 정통파 재무장관

협동조합원이 월 천 루블을 버는 현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사회에 부자 계층이 생기면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모스크바 경공업기술대학을 졸업한 기술자 출신 경제 관료로, 신발 공장 기사에서 출발해 국가계획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서를 거쳐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신임으로 1985년 12월 소련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재임 4년간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재정 악화, 급증하는 예산 적자, 협동조합 운동의 확산에 직면했으며, 시장개혁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협동조합원의 고소득에 누진과세를 부과하며 '노동자가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한 인물로, 사회주의적 평등을 훼손하는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다. 재임 중 오늘날의 예산·재무 아카데미인 재정실무자 연수원을 설립했고, 1989년 해임 후에는 그곳에서 교수로 13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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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59신발 공장 기사, 경공업부, 칼리닌 소브나르호스 노동임금 부장
  • 1959–1966국가계획위원회, 국가과학경제위원회 부문 부장
  • 1966–1975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 제1부장
  • 1975–1982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장
  • 1982–1985당 중앙위원회 경제부 제1부장 → 경제부장
  • 1985.12–1989.06소련 재무장관
  • 1989–2002재정실무자 연수원 교수

레프 알렉세예비치 보로닌

Лев Алексеевич Ворон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8–2008 ○ 자연사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의 수호자

1990년 말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심장마비로 입원하자 보로닌이 각료회의 의장 대행을 맡았다. 발렌틴 파블로프가 새 총리로 선출된 1991년 1월 14일까지 소련 정부의 일상 운영을 책임졌다.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1985~1989)으로서 후기 계획경제의 물자 공급 체계를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 속에서도 국가 공급망을 지켜낸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내각의 각료회의 제1부의장(1989~1991)으로 승진하여 경제 운영 전반을 조정했고, 1990년 말 리시코프의 심장마비 시 의장 대행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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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9스베르들롭스크 제356공장 작업반장 → 작업장장
  • 1959–1963카멘스크-우랄스키 및 스베르들롭스크 방산 기업 수석기사
  • 1963–1965중우랄 소브나르호스 무선전자공업 국장
  • 1965–1968국방공업부 크라스노고르스크 기계공장장
  • 1968–1979국방공업부 국장 → 계획생산총국장 → 차관
  • 1979–1980소련 국방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12 리시코프 입원 시 의장 대행
  • 1991유럽공동체 주재 소련 상임대표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탈리진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Талыз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1991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을 만든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고스플란 의장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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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 1965소련 통신부 차관
  • 1970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75–1980소련 통신장관
  • 1980–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5–198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88각료회의 사회발전국 국장
  • 1988–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비류코바

Александра Павловна Бирюко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9–2008 ↓ 실각 1990

고르바초프 시기 최고위 여성 정치인, 소비재 품귀를 해결하려 했던 '러시아의 마거릿 대처'

1989년 여름, 비류코바는 일주일 동안 서유럽 8개 도시를 돌며 타이츠 5,000만 켤레, 여성화 170만 켤레를 구매했다. 소비에트 부총리가 직접 생필품 쇼핑에 나선 광경이었다.

섬유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거쳐 고르바초프 시기 CPSU 중앙위 서기(1986~1988)와 각료회의 부의장 겸 사회발전국 의장(1988~1990)을 지내며 경공업·소비재·주택·보건을 총괄한 소련 최고위 여성 정치인이었다. 1988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라 옐레나 스타소바·예카테리나 푸르체바에 이어 소련 역사상 세 번째로 정치국에 진입한 여성이 되었으며,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한 주 만에 1억 6,500만 달러어치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파격적 쇼핑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 소비시장 붕괴와 당내 비판 속에 1990년 2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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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제1모스크바 날염직물 공장 기술자, 직장, 작업반장
  • 1959–1963모스크바 시 소브나르호스 섬유·니트 산업관리국
  • 1963–1968트료흐고르나야 마누팍투라 면직 콤비나트 수석기사
  • 1968–1985전소비에트 노동조합 중앙평의회(VTsSPS) 서기
  • 1985–1986VTsSPS 부의장
  • 1986–1988CPSU 중앙위원회 서기 (경공업·소비재 담당)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각료회의 사회발전국 의장

스테판 아라마이소비치 시타랸

Степан Арамаисович Ситар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30–2009 ○ 자연사

협동조합법을 폴리트뷰로에서 밀어붙인 소련 최고위 아르메니아 경제학자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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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 1974–1983소련 재무차관
  •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2–200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후에 센터) 소장

레오니트 이바노비치 아발킨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Абалкин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수석 경제 이론가,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의 '규제된 시장' 설계자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이 구상은 1990년 5월 최고회의에서 반려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샤탈린의 급진안을 택한 뒤 리시코프 내각이 무너지면서 1991년 초 부총리직을 떠났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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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8칼리닌그라드주 구세프 농업기술학교 교사·교무부원장
  • 1958–1966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 대학원 → 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조교·부교수·교수
  • 1966–1976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76–1985CPSU 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84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1기)
  • 1989–1990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겸 소련 부총리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05–12소련 대통령 고문
  • 1991–2005과학아카데미·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2기)
  • 1992–2011『경제의 제문제』(Voprosy Ekonomiki) 편집장

아르놀트 바실리예비치 보일루코프

Арнольд Васильевич Войлуков

개혁의 이면을 증언한 소비에트 은행가

그는 1991년 개혁의 발상이 국가보안위원회와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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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금융대학 졸업
  • 1955–1960년대국립은행 지역 기관에서 근무
  • 1960년대–1970년대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 국립은행 현금유통·출납업무 부장
  • 1980년대소련 국립은행 중앙기구 고위 간부
  • 1990–1991소련 국립은행 이사회 부의장
  • 1992–1994러시아 중앙은행 제1부총재

스타니슬라프 세르게예비치 샤탈린

Станислав Сергеевич Шаталин

500일 계획의 설계자, 소련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한 급진 개혁파 경제학자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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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59재무부 산하 재정연구소 경제연구원
  • 1959–1965고스플란 산하 경제연구소(NIEI) 연구원
  • 1965–1976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부소장·부문장
  • 1970–1983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수리경제분석학 주임교수
  • 1974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6–1986전연방체계연구소 수석연구원, MIPT 일반경제학 강의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과학기술진보경제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9.12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
  • 1989–1996과학아카데미·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 1990500일 계획 작업반장,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통합민주당 창당 조직위원장, '개혁' 국제재단 이사장
  • 1991.06러시아 대통령선거 옐친 신임인

콘드라트 지그문도비치 테레흐

Кондрат Зигмундович Терех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인 1935–

소비자협동조합 출신의 마지막 소련 무역장관

1987년 설탕 비축량 감소를 정부에 보고하며 소비 위기의 수치를 제시했다.

콘드라트 테레흐는 벨라루스 소비자협동조합의 현장 회계원으로 출발해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의 마지막 무역장관(1986~91)까지 오른 경제 관료였다. 계획경제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연방의 소비재 유통을 책임진 그는, 배급과 부족이 일상이 된 소비 위기의 최전선에 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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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4농촌 소비자협동조합 수석 회계원
  • 1954–1958소련 해군 복무
  • 1959–1963빌레이카 시 식품무역국장
  • 1967–1977민스크주 무역국장 및 벨코옵소유즈 제1부의장
  • 1977–1984벨코옵소유즈 의장
  • 1984–198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무역장관
  • 1992–대외경제협회 회장

발렌틴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Валентин Сергеевич Пав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03 ↓ 체포 1991

소련의 마지막 총리, 8월 쿠데타 가담자

총리 취임 8일 뒤인 1991년 1월 22일 저녁, 파블로프는 50루블·100루블 지폐를 사흘 안에 새 지폐로 교환하라고 명령하고 1인당 1,000루블까지만 즉시 교환하게 했다. 그보다 앞서 화폐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모스크바금융대학을 1958년에 졸업하고 러시아연방과 소련의 재무부에서 일했으며, 1962년 당에 입당해 1979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의 재정·가격 부문을 이끌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1989년부터 1991년 1월 14일까지 재무장관을 지냈고, 같은 날 각료회의가 내각으로 개편되며 고르바초프가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조직에 가담했고, 8월 22일 면직령과 8월 23일 체포로 수감되었으며, 8월 28일 최고회의가 사임을 확인했다. 1993년 1월 석방되고 1994년 2월 사면된 뒤 은행장과 자문으로 일했으며, 2003년 3월 30일 65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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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01–08총리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마슬류코프

Юрий Дмитриевич Маслю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타지키스탄 1937–2010 ↓ 해임 1991 · 병사

소련 말기의 마지막 고스플란 세대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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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1970년대방위산업과 국가계획기관에서 기술관료로 성장
  • 1980년대군수공업위원회와 계획기관에서 말기 소련 산업정책에 관여
  • 1988–1991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계획경제 해체 국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정치와 경제 관료제에서 계속 활동
  • 1998–1999러시아 정부에서 위기기 경제정책에 관여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게라셴코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Геращ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22 ○ 자연사

소련 말기와 러시아 초기의 중앙은행가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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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1970년대소련 대외은행과 국제금융 부문에서 성장
  • 1980년대브네슈토르그방크 등 대외금융기관을 거쳐 국가은행 지도부로 진입
  • 1988–1991국가은행 총재, 말기 소련 통화체계와 공화국 금융분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중앙은행에서 전환기 금융위기를 다룸
  • 1998 이후러시아 금융위기 뒤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셰르바코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Щерба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49–

소련 중앙계획을 폐기한 마지막 고스플란 의장

그는 소련 계획경제의 종말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시장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공공재에 다가가게 할 메커니즘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로, 파블로프 내각에서 고스플란을 경제예측부로 개편하면서 초대 장관 겸 제1부총리가 되어 중앙계획에서 시장으로의 이행을 관리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자동차 조립기업 '압토토르'를 설립해 성공한 포스트소비에트 기업가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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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74VAZ 건설 현장 엔지니어 → 톨리아티 콤소몰 간부
  • 1976–1982VAZ 계획경제국 차장·국장
  • 1982–1985KAMAZ 경제·계획 담당 부총책임자
  • 1985–1988국가노동위원회 국장 →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89–1991국가노동위원회 의장
  • 1991.03–05소련 부총리
  • 1991.05–11제1부총리 겸 경제예측부 장관 (고스플란 후신)
  • 1991 이후국제투자기금 설립 → 압토토르 홀딩 회장

아르툠 미하일로비치 타라소프

Артём Михайлович Тара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50–2017 ○ 심장질환

당비 9만 루블로 협동조합법을 두 번 바꾸게 한 소련 최초의 합법 백만장자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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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 1984–1986모스카프스트로이프로옉트 수석 엔지니어
  • 1987협동조합 '테흐니카' 설립
  • 1989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 소련 통합협동조합연합 부회장
  • 1990–1991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대표
  • 1994–1996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1소집)
  • 2003–2017혁신연구소(Институт Инноваций) 이사회 의장

발렌틴 보듈

Valentin Bodiul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몰도바 몰도바인 1951–2020 ○ 코로나19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포도밭 파괴를 증언한 크리코바 와인 공장장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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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슨제레이 와인 공장 기술자
  • 1974–1975드러게네슈티 와인 공장장
  • 1975–1978슨제레이(라조프스키) 구 콤소몰 지구위원회
  • 1978–1983몰도바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무과장
  • 1983–1985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검열원
  • 1985–1987크리코바 와인 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87–2016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 총책임자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야블린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Явлинский

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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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
  • 1990.07–11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 1991.08–12소련 국민경제 운영관리위원회 부의장 (부총리급)
  • 1991.10–12소련 대통령 직속 정치자문위원회 위원
  • 1990–1993EPICenter 경제·정치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93–2008야블로코당 창당자 겸 당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우소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сов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인 1954–1991 ✕ 유탄에 사망

코마리를 도우려다 유탄에 쓰러진 37세 경제학자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코마리를 도우러 달려갔다. 사수가 경고 사격을 했지만 우소프는 멈추지 않았고, 곧 유탄이 그를 스쳤다.

농업경제학을 전공하고 모스크바 합작기업 이콤에서 경제학자로 일한 평범한 시민이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드미트리 코마리를 도우려 달려가다 유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사흘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를 포함한 세 희생자에게 소련 최후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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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스탈린 농업기술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 1978–1980해군 해안통신부대 복무 (하사)
  • 1990년경–1991모스크바 합작기업 '이콤' 경제학자
  • 1991.08.218월 쿠데타 당시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백악관 방어 중 사망

예고르 티무로비치 가이다르

Егор Тимурович Гайдар

충격요법의 설계자: 계획경제를 해체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초석을 놓은 경제학자

1993년 10월 3일 밤 TV 생방송: "이 시간에 경찰과 보안군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모소베트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소련 작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와 파벨 바조프의 손자. 모스크바국립대 졸업 후 《콤무니스트》와 《프라우다》 경제편집자로 시장개혁을 주장했다. 1991년 11월 옐친 정부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으로 들어가 1992년 1월 2일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를 단행,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설계했다. 1992년 6~12월 총리 대행, 1993년 헌정위기 때 TV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기근과 국가 붕괴를 막았다는 평가와 국민 저축을 쓸어갔다는 비판이 교차하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정책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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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1987전연방체계연구소(VNIISI)·과학아카데미 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7–1990《콤무니스트》 경제정책 담당 편집자
  • 1990《프라우다》 경제부장, 경제정책연구소 설립·소장
  • 1991.11–1992.03러시아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 재무장관
  • 1992.03–12제1부총리; 6~12월 총리 대행
  • 1993.09–1994.01제1부총리 겸 경제장관 대행: 10월 위기 TV 호소
  • 1993–1995국가두마 의원, '러시아의 선택' 원내대표
  • 1994–2001'러시아 민주선택' 당대표, SPF 공동대표(2000)
  • 1999–2003국가두마 의원, 조세·예산법안 주도
  • 1992–2009경제정책연구소(현 가이다르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