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이반 모이세예비치 트레티야크

Иван Моисеевич Третья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KAL 007 격추 명령을 내린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 트레티야크는 참모본부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부하 부대에 그대로 하달했다.

소련의 육군대장(1976)으로, 독소전쟁에서 21세에 연대장을 지내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전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1967~1976)과 극동군관구 사령관(1976~1984)을 거쳐, 1986년 국방차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방공군 총사령관(1987~1991)으로서 소련 영공방어를 총괄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본부 명령을 하달하여 269명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82)에도 선정될 만큼 전후 소련 군사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해임되며 시대의 종언과 함께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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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쟁 참전: 제29근위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대대장·제93근위소총연대장
  • 1956–1957제26근위소총사단장
  • 1960–1964주독소련군 제3연합군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64–1967자캅카스군관구 제4군 사령관
  • 1967–1976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
  • 1976–1984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4–1986극동방면군 총사령관
  • 1986–1987국방차관 겸 국방부 감찰총국장
  • 1987–1991국방차관 겸 방공군 총사령관

야코프 페트로비치 포그레브냐크

Яков Петрович Погребняк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8–2016 ○ 자연사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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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0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2서기
  • 1960–1962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63–1964폴타바 공업주당 제1서기
  • 1966–1969이바노프란코프스크 주당 제1서기
  • 1969–1971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
  • 1971–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통상·반알코올 캠페인)
  • 1987–1990리보프 주당 제1서기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마요레츠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Майоре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9–2016 ○ 자연사

체르노빌 현장에 투입된 마지막 소련 에너지장관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사고 첫 보고를 받은 마요레츠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총리에게 이를 알린 직후 현장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정격 출력으로 가동 중인 두 원자로 블록을 즉각 정지·비상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자포리자 변압기 공장의 전기기사에서 소련 전기공업장관·에너지장관까지 오른 산업 관료로, 송배전망과 원자력 발전을 사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가장 먼저 보고받아 곧장 현장으로 가 가동 중인 두 원자로를 비상 정지시키고, 소련 원자력 안전 체계 재편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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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 전기기사 → 선임 작업반장 → 책임자
  • 1962–1965자포로지에 변압기 공장장
  • 1965–1974소련 전기공업부 차관
  • 1974–1980소련 전기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전기공업장관
  • 1985–1989소련 에너지·전화장관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위원회 위원 (셰르비나 위원장)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이바시코프

Владимир Антонович Ивашк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1932–1994 ↓ 당 해체 1991

해체 직전 공산당의 마지막 부서기장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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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90–1991공산당 부서기장
  • 1991.08고르바초프 사임 뒤 며칠간 서기장 대행

비톨트 파블로비치 포킨

Вітольд Павлович Фокін

소련 경제관료에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첫 총리로

소련 해체 협정에 서명했던 포킨은 2016년 인터뷰에서 '남자로서 부끄럽지만 크림반도가 병합됐을 때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고 고백했다.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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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3루한스크 지역 탄광 기술자·관리자
  • 1963–1971돈바스 무연탄 산업 관리자
  • 1971–1987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부서장·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1–1992우크라이나 초대 총리
  • 1991벨로베시 협정 우크라이나 서명자
  • 2020우크라이나 삼자접촉그룹 대표단 제1부대표

레오니트 마카로비치 크랍추크

Леоні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4–2022 ○ 사망

공산당 선전가에서 시작해 소련을 서명으로 끝낸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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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70정치경제학 교사에서 체르니우치 주당 선전선동 부장까지
  • 1970–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서에서 승진
  • 1980–198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부장
  • 1988–19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이념 부장
  • 1989–1990.0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정치국원, 제2서기
  • 1990.07–1991.08우크라이나 최고소비에트 의장; 독립선언 주재
  • 1991.12–1994.07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벨로베즈 협정 서명, 쿠치마에 패배
  • 1994–2006인민대의원, SDPU(o) 원내대표

발렌티나 세메니브나 셰우첸코

Валентина Семенівна Шевч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 1935–2020 ○ 사망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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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크리비리흐에서 피오네르 지도자, 지리 교사, 학교 콤소몰 서기
  • 1957–1962크리비리흐 시 콤소몰 서기, 이후 제르진스키 구 당위원회 서기
  • 1962–1969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겸 부서장
  • 1969–1972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차관
  • 1975–1985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85–199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 1985–1989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레벤코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Ревенк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6–2014 ○ 자연사

키예프 주당위 지도자에서 고르바초프 마지막 비서실장까지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관료로,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에서 소련 해체기 고르바초프 대통령 비서실장(대통령장)으로 옮겨가며 당권에서 대통령제로 넘어가는 행정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5년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1986년 CPSU 중앙위 위원이 되었다. 1990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을 거쳐 1991년 8월 대통령장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측근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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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 1984–1985CPSU 중앙위 감사원, 조직당사업부 부부장
  • 1985–1990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 1990–1991소련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
  • 1991–1992소련 대통령장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하르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Харченк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36–

숨가이트의 참상을 목격한 조직당사업부 부장, "우리는 하루 늦었다"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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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모스크바철도공학원 졸업, 자포리자 전기기관차수리공장 근무
  • 1960–1967콤소몰 서기 → 자포리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67–1974레닌 구 당 제1서기 → 자포리자 시집행위 의장
  • 1974–1986자포리자 주당 산업담당 서기 → 제2서기
  • 1987–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
  • 1988.02볼스키 조에 합류, 숨가이트 파견
  • 1988–1990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
  • 1990–199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

비탈리 알렉세예비치 코로티치

Виталий Алексеевич Коротич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6–2025 ○ 자연사

『오고뇨크』를 글라스노스트의 충격파로 바꾸어, 70년간 억압된 진실을 쏟아부은 편집자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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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6의사, 키이우
  • 1966–1967『라노크』 편집장
  • 1967–1969우크라이나작가동맹 서기
  • 1978–1986『프세스비트』 편집장
  • 1986–1991『오고뇨크』 편집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 1992–1998보스턴대학 교수
  • 1999–2014『불바르 고르도나』 편집위원장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골루시코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Голуш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7–2025 ○ 자연사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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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케메로보 검찰청 수사관
  • 1963–1974케메로보주 KGB, 작전요원 → 제5과 부과장
  • 1974–1983KGB 제5총국 제2과(민족주의 담당) 과장
  • 1983–1984KGB 제5총국 부총국장
  • 1984–1987KGB 사무국 제1부국장 겸 당직근무국장
  • 1987–1991우크라이나 공화국 KGB 의장, KGB Collegium 위원
  • 1991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SNBU) 의장 대행
  • 1992–1993러시아 보안부 제1차관
  • 1993러시아 보안장관
  • 1993–1994러시아 연방방첩국(FSK) 국장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코베츠

Константин Иванович Кобе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9–2012 ○ 사망

8월 쿠데타 당시 옐친 편에 선 최고위 장성, 백악관 방어를 지휘했다

"군대는 국민에게 총을 겨누지 않을 것입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기자회견)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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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 참가
  • 1987–1991소련 국방부 통신병대 총책임자 겸 참모총장 차장
  • 1990RSFSR 인민대표로 선출
  • 1991.01RSFSR 국가방위안보위원회 위원장
  • 1991.08.20RSFSR 국방장관 임명, 8월 24일 대장 진급
  • 1993–1997러시아 연방 국방차관
  • 1997부패 혐의 체포, 유죄 판결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카잔니크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Казанник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19 ○ 병사

옐친에게 의석을 양보한 날 선 양심의 법학자

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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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카자흐 SSR 테미르타우에서 목수로 노동
  • 1960–1963소련군 공병대 복무
  • 1963–1975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 졸업, 대학원, 조교, 전임강사
  • 1975–1991옴스크대학 부교수(환경법·국가법)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지역간대의원그룹 회원
  • 1993–1994러시아 검찰총장
  • 1996–2003옴스크주 부지사
  • 2003–2019옴스크대학 교수; 옴스크법학연구소 제1부소장(2003–07)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구벤코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уб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20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문화장관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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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1문화장관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프라비크

Володимир Павлович Прави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62–1986 ✕ 급성 방사선 증후군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체르노빌 3호기 지붕에 오른 첫 소방대장

'모든 게 괜찮아졌어. 우리 백 살까지 살 거야'... 방사능이 몸을 파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 병상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블라디미르 프라비크는 체르노빌 원전 소방대(VПЧ-2) 제3교대를 지휘한 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였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폭발 2분 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이윽고 대원 넷과 함께 3호기 지붕에 올라 가동 중인 원자로로의 연소 확대를 저지했다.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당 6,000뢴트겐 이상의 방사선장에서 작업했으며, 체르노빌 희생자 중 가장 높은 1,520REM(치사량의 약 3배)에 피폭되어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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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1982체르카시 소방기술학교 졸업
  • 1982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 임관
  • 1982–1986체르노빌 원전 제2군사화소방대(VПЧ-2) 제3교대장
  • 1986.04.26체르노빌 참사 첫 대응, 3호기 지붕 화재 진압
  • 1986.05.11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모스크바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