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예브게니 빅토로비치 탈레

Евгений Викторович Тарле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55 ○ 자연사

나폴레옹 전기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아카데미 사건의 유배에서 스탈린의 비호로 복귀한 역사가

1951년 가을, 반유대주의 캠페인이 한창이던 MГИМО 첫 강의에서 탈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내 성은 탈레다."

키예프 출신 유대인 역사가. ≪대륙봉쇄≫(1913)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아카데미 사건' 유배 후 ≪나폴레옹≫(1936)이 스탈린의 주목을 받아 복권, 스탈린상 3회 수상. 소련 서양사학의 제1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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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키예프대학(성 블라디미르) 역사·문헌학부 졸업, 루치츠키 사사
  • 1900–1903루나차르스키 강연 모임에서 체포, 헤르손으로 유배; 사강사로 페테르부르크대학 강의 시작
  • 1909–1911≪프랑스혁명기 노동계급≫(2권)으로 박사학위 취득; 1913년 ≪대륙봉쇄≫ 출간
  • 1913–1918유리예프(타르투)대학 교수; 런던 국제역사학회의(1913)에서 논문 발표
  • 1918–1927페트로그라드 중앙기록부 지도부; 1921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1927년 정회원
  • 1929–1932'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1931년 8월 알마아타 유배, 1932년 말 레닌그라드 귀환
  • 1936–1939≪나폴레옹≫(1936) 출간 — 스탈린의 주목으로 복권;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937), ≪탈레랑≫(1939) 출간
  • 1941–1945카잔대학 교수(1941–1943); ≪크림전쟁≫ 1·2권 출간(1941, 1943); 나치 전쟁범죄 조사 국가특별위원
  • 1942–1955스탈린상 1급 3회(1942, 1943, 1946); 소르본·오슬로·프라하·브르노·알제 명예박사; 영국학사원 통신회원(1944); 1955년 1월 사망, 노보데비치 안장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스베친

Александр Андреевич Свеч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러시아의 클라우제비츠」. 전략과 작전술의 이론가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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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 1918–19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 1926–1927주저 『전략』 출간 — 작전술 개념 정립, 전략적 소모 이론 제시
  • 1931–1932「봄」 사건으로 체포, 5년형 선고 후 1932년 석방
  • 1938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
  • 1956사후 복권

예멜리얀 미하일로비치 야로슬랍스키

Емельян Михайлович Ярослав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43 ○ 위암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린 당의 수석 무신론자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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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트란스바이칼 철도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5–1907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군사전투조직 지도, 제4·5차 당대회 대의원
  • 1907–19175년 카토르가형 후 야쿠티아 유형, 야쿠츠크 향토박물관장 역임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초대 군사위원
  • 1918–1919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
  • 1921RKP(b) 중앙위원회 서기, 조직국 위원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
  • 1925–1943전투적 무신론자동맹 중앙평의회 의장, 반종교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아도라츠키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Адорат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45 ○ 병사

IMEL 소장, 스탈린을 이론가로 공인한 첫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레닌은 내 순진함 때문에 나를 '아두라츠키'라고 놀렸다.」 — 가족 회고록

카잔 출신 볼셰비키 철학자. 1929년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이론가'로 찬양한 첫 인물로, 1931년 IMEL 소장이 되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을 편찬, 공산권의 정전 독법을 수십 년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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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카잔대학 수학과 입학 후 법학과 전환, 1900년 혁명운동 참여, 1903년 졸업 후 해외 망명
  • 1904–1908제네바에서 RSDLP 가입(1904), 귀국 후 체포·아스트라한 유형; 1905년 카잔에서 불법 볼셰비키 신문 『라보치』 발간
  • 1908–1918파리·런던·베를린 망명; 뮌헨에서 1차대전 민간인 포로로 억류, 레닌의 포로교환으로 귀국
  • 1920–1928중앙기록관리국 부국장, 모스크바대학 교수; 『마르크스주의 변증법』(1922) 등 첫 저작 출간
  • 1928–1931레닌 연구소 부소장; 1929년 『이즈베스티야』에 「이론가로서의 스탈린」 발표, 부하린 실각 후 『레닌 전집』 편집 인수
  • 1931–1939IMEL 소장;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러시아어판 15권·독일어판 8권 편집, 서한집 발간 준비
  • 1936–193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겸임; 마르크스-엥겔스 아카이브 매입 위원회 위원장
  • 1939–1945건강 악화로 소장직 사임, IMEL 책임편집자; 대조국전쟁 중 알마아타로 대피, 194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헝가리 1879–1964 ○ 자연사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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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당 기관지 《넵서버》 경제부 편집
  • 1909부다페스트대학 철학박사 — 칸트의 이율배반론 연구
  • 1919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20소련 망명,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 활동 시작
  • 1921–1927코민테른 통계정보연구소(베를린 '바르가 사무소') 소장
  • 1927–1947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 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현대 자본주의 연구로 레닌상 수상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셰르바코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Щербаков
소련 러시아계 1893–1966 ○ 자연사

우라늄 탐사의 지질학적 설계자

1943년, 그는 광범위한 우라늄 탐사 대신 중앙아시아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드미트리 셰르바코프는 중앙아시아와 희소금속을 연구한 소련의 지질학자·지구화학자·지리학자이자 과학 조직가였다. 그는 파미르와 중앙아시아 탐사를 이끌며 광상 분포를 예측하는 금속생성학적 방법을 발전시켰고, 전시에는 전략 자원 탐사에 기여했다. 1943년 우라늄위원회에 참여해 소련의 우라늄 매장 가능성을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중앙아시아 탐사에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이 선택은 초기 소련 원자력 사업에 필요한 우라늄 탐사망을 조직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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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페르가나 라듐 탐사대 선임 채집원
  • 1921–1930자연생산력연구위원회 연구원
  • 1925–1930국립 라듐 연구소 광물·지구화학 부문 책임자
  • 1928–1936파미르·중앙아시아 종합 탐사대 학술 책임자
  • 1930–1938지구화학연구소 및 지질과학연구소 부소장
  • 1942–1943소련 과학아카데미 지질과학연구소 코카서스 탐사대 대장
  • 1943전연방 광물원료연구소 우라늄위원회 위원
  • 1953–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친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Бахтин
소련 러시아 1895–1975 ○ 자연사

대화와 카니발의 철학자, 30년의 망각을 뚫고 귀환하다

“예술 속에서 내가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에 나는 내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 「예술과 책임」(1919)

1920년대 '바흐친 서클'을 이끈 문학이론가로, 대화주의·폴리포니·카니발화 개념을 통해 언어와 문학 서사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30여 년의 망각 끝에 재발견되어 세계 인문학 전반을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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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네벨·비테프스크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바흐친 서클' 형성, 「예술과 책임」 발표
  • 1924–1928레닌그라드에서 연구활동,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1929) 집필
  • 1929–1934OGPU 체포 → 솔로프키 5년형 → 쿠스타나이(카자흐스탄) 유배, 회계원으로 생계
  • 1936–1961사란스크 교육대학 교수, 1946년 라블레 논문으로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63–1975재발견 — 『도스토예프스키 시학』 개정판(1963)·『라블레』(1965) 출간, 1967년 복권, 1970년 작가동맹 가입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 야놉스카야

Софь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Яновская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6–1966 ○ 당뇨병

소련 수리논리학을 부활시킨 볼셰비키 수학자

백군이 그녀를 총살하려 했을 때, 그녀의 키가 너무 작아 총알이 높은 모자에만 맞았고, 그녀는 다리 밑 강물로 떨어져 갈대숲에 숨어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의 소비에트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련에서 수리논리학을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부활시키고 제도화한 창시자다. 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3년 마르크스의 『수학 초고』를 발굴·출판하여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수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1930년대에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관념론적' 수학을 공격했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여 스탈린 시대에 탄압받던 수리논리학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되살려냈고, 1935년 비트겐슈타인의 소련 이주를 만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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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오데사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하 적십자사 서기
  • 1919–1920제12군 정치국 신문 《적군》 편집보좌·정보부장
  • 1920–1923오데사 현당위원회 정보부 당원
  • 1923–1929적색교수양성소 수학·수강생, 이후 교원
  • 1931–1941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1935년 물리수학 박사
  • 1943–1966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논리학 세미나 조직·지도
  • 1944–1955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과학사 학과장
  • 1959–1966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논리학 학과 교수

니콜라이 카로탐

Nikolai Karotamm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901–1969 ○ 자연사

1944~1950년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비호」로 해임된 당 지도자

1901년 패르누 지방에서 태어나 1925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공산당에 들어갔고, 1926년 소련에 정착해 서방소수민족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1938년 대숙청 때 체포되었다가 기소 없이 풀려났다. 독일 점령기에는 사실상 에스토니아 공산당을 이끌며 에스토니아 파르티잔 운동 참모부장을 지냈고, 1944년 9월 28일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섬멸대대 중앙참모부를 이끌었고, 1949년 3월 추방에 앞서 각 군의 전권위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950년 제8차 전원회의 뒤 해임되어 요한네스 캐빈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경제학자로 일하며 1964년 박사 학위를 받았고, 캐빈과의 불화로 에스토니아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69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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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네덜란드 공산당 입당
  • 1928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1에스토니아 공산당 제2서기
  • 1944–1950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
  • 1950제8차 전원회의 뒤 해임
  • 1964경제학 박사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튤파노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Тюльп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1901–1984 ○ 자연사

소련 군정청 선전국장으로 사회주의통일당 결성과 동독 소비에트화를 밀어붙인 장교

레닌그라드에서 교육받은 정치경제학자로 1927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대숙청 때 몸을 숨겼고 부모는 탄압을 받았다. 독소전쟁 중 여러 전선 정치국의 제7부를 이끌었다. 1945년 10월부터 1949년 9월까지 소련 군정청 선전국(뒤의 정보국) 국장으로, 독일어에 능했고 울브리히트를 강하게 지지했다. 1946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통합을 밀어붙였고, 1948년부터 소련식 별도 국가 수립을 추진했다. 스탈린이 그와 울브리히트의 급속한 사회주의화 구상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 드러나며 입지를 잃었고, 1949년 방첩 기관의 고발 끝에 소환되었다. 그 뒤 레닌그라드 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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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공산당 입당
  • 1942–1945여러 전선 정치국 제7부장
  • 1945–1949소련 군정청 선전국(정보국) 국장
  • 1949독일에서 소환, 소장 진급
  • 1957레닌그라드 대학교 현대 자본주의 경제학과장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리프시츠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ифшиц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3 ○ 자연사

절대적 진리와 미를 옹호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건설자

「우리 시대의 유행어와 달리 절대적 아름다움은 절대적 진리만큼이나 존재한다」 — 1927년 브후테인 학보

멜리토폴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브후테마스에서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후 마르크스 미학의 체계적 재구성에 평생을 바쳤다. 1930년대 루카치와 함께 '저속사회학'을 논박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예술론을 정립했고,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과 『레닌 예술론』이라는 기념비적 선집을 편찬했다. 전후에는 반세계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었고, 1960년대 모더니즘 비판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말년에는 '존재인식론' 개념으로 독자적 철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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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5브후테마스 회화 수학, 아방가르드와 결별하고 리얼리즘·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25–1929브후테마스 변증법적 유물론 강사; '바그라먄 사건'으로 축출
  • 1930–1933IMEL 선임연구원; 루카치와 공동 작업 시작
  • 1933–1938『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1933/37), 『레닌 예술론』(1938) 편찬; 저속사회학 논박
  • 1938–1941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학술부부장, IFLI 예술론 학과장
  • 1941–1946핀스크 소함대 복무, 부상·포로 탈출; 해군 문예교관, 적성훈장 수훈
  • 1954–1968『샤기냔의 일기』(1954)로 재등장; 『왜 나는 모더니스트가 아닌가』(1964), 『추함의 위기』(1968)
  • 1973–1983철학박사(1973), 예술아카데미 정회원(1975); 일리옌코프와 '이상적인 것' 논쟁

이사이 이스라일레비치 구레비치

Исай Израилевич Гуревич
소련 러시아계 1912–1992 ○ 자연사

원자로 설계를 가능하게 한 핵이론가

구레비치의 연구진은 뮤오늄 원자 속 양뮤온 스핀이 약한 자기장에서 두 개의 가까운 주파수로 세차해 맥놀이를 만든다는 새 현상을 예측하고, 1969년 실험으로 확인했다.

이사이 구레비치는 소련의 이론물리학자로, 핵분열과 중성자 물리를 연구했다. 1943년 실험 자원이 부족한 전시 상황에서 이사크 포메란추크와 함께 연구하여, 흑연 감속재 속 우라늄을 격자 형태로 배치하는 불균질 조립체 이론을 세웠다. 이 계산은 우라늄의 공명 흡수를 줄이는 설계 원리를 제시했고, 쿠르차토프 연구진이 F-1 원자로를 건설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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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출생
  • 1930년대이론물리 연구 시작
  • 1943실험실 제2호에서 포메란추크와 불균질 우라늄-흑연 조립체 이론 연구
  • 1946F-1 원자로 가동으로 이론의 실험적 구현
  • 1950년대–1980년대소련의 이론물리학자로 연구 지속
  • 1992사망

레오니트 모이세예비치 삽소비치

Леонид Моисеевич Сабсович
소련 러시아 ?–1938 ✕ 처형

스탈린 가속 공업화의 청사진을 쓴 경제학자, '사회주의 도시' 우르바니스트의 기수

1929년 3월 고스플란 총회에서 삽소비치는 이렇게 선언했다: '사회주의적 생활방식은 자본주의적 생활방식보다 더 경제적이고 값싸야 하며, 따라서 승리해야 한다.'

소비에트 경제학자·우르바니스트. 1929년 『15년 후의 소련』으로 스탈린 가속 공업화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도시·농촌을 집단적 사회주의 도시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1930년 실명 비판 후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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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년경브세스베하(ВСНХ) 계획경제국 철야금속부장
  • 1928.11『상공신문』에 「10월 혁명 이후 25-30년 뒤」 발표 — 최초의 일반계획 가설
  • 1929.03『15년 후의 소련』 출간 — V차 고스플란 대회와 동시 발행, 3판까지 증쇄
  • 1929.03V차 고스플란 대회에서 브세스베하 대표로 최적(가속) 5개년계획 옹호
  • 1929.07『계획경제』에 「도시의 문제」 발표 — 우르바니스트-디스우르바니스트 논쟁 촉발
  • 1929–1930『미래의 도시』(1929), 『10년 후의 소련』(1930), 『사회주의 도시들』(1930) 연속 출간
  • 1930.05.16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결정에서 '반환상적 도약 시도'로 실명 비판 — 이후 소멸
  • 1938숙청으로 사망 (정확한 날짜·장소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