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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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1918–19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43년, 그는 광범위한 우라늄 탐사 대신 중앙아시아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드미트리 셰르바코프는 중앙아시아와 희소금속을 연구한 소련의 지질학자·지구화학자·지리학자이자 과학 조직가였다. 그는 파미르와 중앙아시아 탐사를 이끌며 광상 분포를 예측하는 금속생성학적 방법을 발전시켰고, 전시에는 전략 자원 탐사에 기여했다. 1943년 우라늄위원회에 참여해 소련의 우라늄 매장 가능성을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중앙아시아 탐사에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이 선택은 초기 소련 원자력 사업에 필요한 우라늄 탐사망을 조직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백군이 그녀를 총살하려 했을 때, 그녀의 키가 너무 작아 총알이 높은 모자에만 맞았고, 그녀는 다리 밑 강물로 떨어져 갈대숲에 숨어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의 소비에트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련에서 수리논리학을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부활시키고 제도화한 창시자다. 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3년 마르크스의 『수학 초고』를 발굴·출판하여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수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1930년대에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관념론적' 수학을 공격했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여 스탈린 시대에 탄압받던 수리논리학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되살려냈고, 1935년 비트겐슈타인의 소련 이주를 만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944~1950년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비호」로 해임된 당 지도자
1901년 패르누 지방에서 태어나 1925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공산당에 들어갔고, 1926년 소련에 정착해 서방소수민족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1938년 대숙청 때 체포되었다가 기소 없이 풀려났다. 독일 점령기에는 사실상 에스토니아 공산당을 이끌며 에스토니아 파르티잔 운동 참모부장을 지냈고, 1944년 9월 28일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섬멸대대 중앙참모부를 이끌었고, 1949년 3월 추방에 앞서 각 군의 전권위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950년 제8차 전원회의 뒤 해임되어 요한네스 캐빈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경제학자로 일하며 1964년 박사 학위를 받았고, 캐빈과의 불화로 에스토니아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69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레닌그라드에서 교육받은 정치경제학자로 1927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대숙청 때 몸을 숨겼고 부모는 탄압을 받았다. 독소전쟁 중 여러 전선 정치국의 제7부를 이끌었다. 1945년 10월부터 1949년 9월까지 소련 군정청 선전국(뒤의 정보국) 국장으로, 독일어에 능했고 울브리히트를 강하게 지지했다. 1946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통합을 밀어붙였고, 1948년부터 소련식 별도 국가 수립을 추진했다. 스탈린이 그와 울브리히트의 급속한 사회주의화 구상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 드러나며 입지를 잃었고, 1949년 방첩 기관의 고발 끝에 소환되었다. 그 뒤 레닌그라드 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지냈다.
「우리 시대의 유행어와 달리 절대적 아름다움은 절대적 진리만큼이나 존재한다」 — 1927년 브후테인 학보
멜리토폴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브후테마스에서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후 마르크스 미학의 체계적 재구성에 평생을 바쳤다. 1930년대 루카치와 함께 '저속사회학'을 논박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예술론을 정립했고,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과 『레닌 예술론』이라는 기념비적 선집을 편찬했다. 전후에는 반세계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었고, 1960년대 모더니즘 비판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말년에는 '존재인식론' 개념으로 독자적 철학을 전개했다.
구레비치의 연구진은 뮤오늄 원자 속 양뮤온 스핀이 약한 자기장에서 두 개의 가까운 주파수로 세차해 맥놀이를 만든다는 새 현상을 예측하고, 1969년 실험으로 확인했다.
이사이 구레비치는 소련의 이론물리학자로, 핵분열과 중성자 물리를 연구했다. 1943년 실험 자원이 부족한 전시 상황에서 이사크 포메란추크와 함께 연구하여, 흑연 감속재 속 우라늄을 격자 형태로 배치하는 불균질 조립체 이론을 세웠다. 이 계산은 우라늄의 공명 흡수를 줄이는 설계 원리를 제시했고, 쿠르차토프 연구진이 F-1 원자로를 건설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