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펠로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пе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79 ○ 자연사

스탈린의 전기를 쓰고, 그 신화를 해체한 역사가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포스펠로프는 주체할 수 없이 흐느꼈다. 베리야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무슨 일이야? 그만해!"라고 외쳤다. 불과 3년 뒤, 바로 그가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된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를 작성했다.

스탈린 공식 전기를 집필하고 『프라우다』를 9년간 이끈 당 역사가. 흐루쇼프 시기에는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로 스탈린 신화 해체의 기초를 마련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1918볼셰비키 입당, 트베리에서 노동조합·당 활동, 첼랴빈스크에서 백군 점령 하 지하운동, '죽음의 열차'로 알렉산드롭스크 중앙형무소 수감 후 탈출, 시베리아 파르티잔 활동
  • 1924–1930중앙위 선전선동부 교관, 붉은 교수양성소 경제학부 졸업
  • 1931–1939잡지 『볼셰비키』 및 『프라우다』 편집, 당통제위원회 출판 담당, 「볼셰비키 전연방공산당사 단기강좌」 집필 참여, 아지트프로프 부책임자 (1937–1939), 제1부책임자 (1939–1940)
  • 1940–1949『프라우다』 주필, 전시 스탈린상 수상금을 국방기금에 기부, 증보판 「이오시프 스탈린 약전」 편찬 참여
  • 1949–1952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
  • 1961–1967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 다권본 「소비에트 연방 대조국전쟁사」·「레닌 전기」 편집 주도
  • 1953–1960중앙위 서기, '포스펠로프 위원회' 위원장으로 스탈린 시대 대량 탄압 조사 — 보고서는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됨
  • 1957–1961중앙위 간부위원회 후보위원, 1959년 제21차 당 대회에서 말렌코프 반당 그룹 비판 연설
  • 1972–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부 아카데미크 서기 대행, 1973년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말년에 『볼셰비키』 지를 통해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스탈린의 역할을 옹호하는 복합적 입장 견지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콘스탄티노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Константи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91 ○ 자연사

『철학 백과사전』 주필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 교과서의 설계자

「이건 그들에 대해 쓴 겁니까, 아니면 우리에 대해 쓴 겁니까?!」 — 레바다의 『철학 백과사전』 '파시즘' 표제어 원고에 친필로 남긴 결재 의견

해빙기 소련 철학의 공식 교리를 수호한 이념 관료. 5권 『철학 백과사전』 주필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설정했고, 동료들 사이에선 흔들림 없는 '스탈린주의자'로 기억된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니제고로드 현 노보숄키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출생
  • 1917–192010월혁명·시베리아 내전 참전, 1918년 RKP(b) 입당
  • 1932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IMEL 선임연구원(1932~1933)
  • 1933–1941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학술비서(1933~1935), 『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주필 겸 『프라우다』 부장(1935~1941), 1935년 교수·철학박사
  • 1941–1945중앙위 선전선동국 강사(1941~1942), 자원입대해 제84소총군단 전리품 부서장, 중령, 적성훈장 2회
  • 1945–1954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부소장·당위 비서(1945~1951), 『철학의 제문제』 주필(1952~1954), 모스크바대학 철학부 주임(1953~1954),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1954~1955)
  • 1955–1958중앙위 선전선동부장(1956년부터 연방공화국 담당), 중앙위원 후보(1956~1961)
  • 1958–1967『콤무니스트』 주필(1958~1962), 철학연구소장(1962~1967),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4)
  • 1960–19705권짜리 『철학 백과사전』 주필 — 소련 철학의 공식 지식 총서 총괄
  • 1967–1991과학아카데미 철학·법학부 학술비서(1967~1975), 소련철학회 창립 회장(1971~1987), 『지식』협회 부회장(1968~1987), 노환으로 사망, 트로예쿠로보 묘지 안장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

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Сус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82 ○ 자연사

크렘린의 회색 추기경

수슬로프가 출장을 가면 키릴렌코가 서기국을 대신 주재했다. 돌아오자마자 수슬로프는 자신의 부재 중 내려진 결정을 모조리 뒤집었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사라토프현 샤호프스코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의 당·국가 인물로, 스탈린 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내 1921년 입당했다. 1947년 5월부터 죽는 날까지 중앙위 서기를 지냈고 1949~1950년에는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았으며, 1965년부터는 서기장 브레즈네프 아래 제2서기로 당의 이인자였다. 이념·선전·문화·검열·교육을 관장하며 '회색 추기경'으로 불렸고,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참여했다.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 묘역에 안장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년대–1930년대당 학교와 경제 행정에서 성장, 북캅카스·스타브로폴 당직 수행
  • 1944–1946리투아니아 당국에서 전후 소비에트화와 반민족주의 통제에 관여
  • 1947–1982중앙위 서기, 이념·선전·정통 노선의 장기 관리자
  • 1956스탈린 비판 이후에도 당 정통성과 통제 언어를 재정리
  • 1964–1982브레즈네프 체제의 보수적 이념 심판관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

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1903–1978 ○ 자연사

아르메니아 선율을 소비에트 교향악에 녹여낸 작곡가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9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 부의장
  • 1943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4아르메니아 SSR 국가 작곡
  • 1950그네신 음악교육원 교수
  • 1951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54소비에트 인민예술가
  • 1957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서기
  • 1958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5소집)

보니파티 미하일로비치 케드로프

Бонифатий Михайлович Кедр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5 ○ 자연사

자연과학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화하고 '케드로프 삼각형'을 정립한 과학철학자

「이게 무슨 개인의 비극이란 말인가?! 당과 인민의 비극 — 그게 진짜 비극이다!」 —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 『로지나』 1995년 제8호

야로슬라블 출생, 15세 볼셰비키. 모스크바대학 화학과·적색교수양성원 철학과 졸업. 1947년 『철학의 제문제』 창간 편집장. 돌턴·멘델레예프·과학 분류론 중심 1000여 편 저술, '케드로프 삼각형' 제시. 1940년대 말 반공명이론 캠페인 주도. 이후 과학사연구소 소장(1962–1972)·철학연구소 소장(1973–1974) 역임하며 과학사·방법론 제도화.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으로 진급 지연,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1966년 아카데미크, 1985년 사망.

상세 이력 보기
  • 1918–1919볼셰비키 입당; 『프라우다』 책임비서 M.I. 울리야노바 보좌, 체카 근무
  • 1930–1935모스크바대학 화학과 졸업; 화학 준박사 (깁스 역설)
  • 1935–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과학부 지도원
  • 1939–194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1946년 철학 박사; 1941–1945년 붉은군대
  • 1947–1949『철학의 제문제』(Вопросы философии) 창간 편집장
  • 1955–1972과학사연구소(IIET) 선임연구원 → 소장(1962–1972)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7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드미트리 트로피모비치 셰필로프

Дмитрий Трофимович Шепи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05–1995 ↓ 실각 1957

흐루쇼프의 이론가에서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가 된 사람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모스크바대 법학부 졸업, 야쿠츠크 검찰 업무
  • 1931–1933적색교수학원, 농업경제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
  • 1937–1941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학술서기, 경제학 교육·연구
  • 1941–1946전쟁기 정치장교, 소장 계급으로 종전
  • 1946–1949군 선전부와 당 선전선동부 실무
  • 1949–1952중앙위 선전부장, 스탈린 말기 이념 장치 운영
  • 1952–1956『프라우다』 주필,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기의 이론가
  • 1955–1956중앙위 서기, 흐루쇼프 노선의 이론적 지원
  • 1956–1957외무장관, 수에즈 위기와 제3세계 외교
  • 1957반당그룹 가담으로 실각
  • 1957–1960키르기스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로 좌천
  • 1960–1982모스크바 국가문서보관소 하급직, 정치적 주변화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포노마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ономарё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5 ○ 자연사

국제공산주의 노선을 관리한 당 국제부장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년대–1943코민테른 기관에서 활동, 국제공산주의 네트워크 실무를 익힘
  • 1943–1955코민테른 해산 뒤 중앙위 국제 라인에서 각국 공산당 관계 관리
  • 1955–1986중앙위 국제부장, 세계 공산당과 민족해방운동 지원 노선 관리
  • 1960년대–1970년대중소분쟁과 유로코뮤니즘 속에서 모스크바의 정통 노선을 방어
  • 1986 이후고르바초프의 외교·당 개혁 속에서 퇴장

레오니트 표도로비치 일리초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Ильичё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9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를 모두 편집하고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한 철학자

1952년, 스탈린은 정치국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라우다 편집장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 더 강한 사람을 임명하고, 이 사람은 좀 더 배우게 하라."

흐루쇼프 시대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을 지내며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하고 라디오 마야크를 창설했다. 이후 24년간 외무차관으로 중국과의 국경협상을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북캅카스 공산대학 졸업
  • 1937적색교수양성소 졸업 (철학)
  • 1938–1944잡지 《볼셰비크》 책임비서
  • 1944–1948《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51–1952《프라우다》 편집장
  • 1953–1958소련 외무부 출판국장, 《메주두나로드나야 지즌》 편집장 겸임
  • 1958–1961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연방공화국 담당)
  • 1961–1965CPSU 중앙위원회 서기, 이념위원회 의장, 이념부장
  • 1965–1989소련 외무차관
  • 1962소련 과학원 학술원 회원 (철학)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페도세예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Федосе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8–1990 ○ 자연사

소련 이념 장치의 철학 행정가

1973년 사하로프 규탄 공개서한에서, 페도세예프를 비롯한 소련 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은 사하로프가 '소련의 국가 체제와 대내외 정책을 비방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고 규정하며 그의 활동을 '소비에트 과학자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소련의 철학 행정가로, 농민 출신에서 과학아카데미 부총재까지 올라 30년 가까이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관리한 당 이념의 수호자였다. 철학연구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중앙위원(1961~1989)을 지내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감시했고, 1973년 사하로프를 공개 규탄한 과학아카데미 서한에 서명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고리키 사범대학 졸업, 동 대학 철학 강사
  • 1936모스크바 역사철학연구소 대학원 수료, 철학 후보박사
  • 1936–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41–194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국 제1부국장
  • 1945–1949당 중앙 기관지 『볼셰비키』 주필 (1949년 7월 중앙위 결정으로 해임)
  • 1950–1954중앙위원회 감사관 · 고등당학교 변증법적 유물론 주임
  • 1954–1955『파르티나야 지즌』(당 생활) 주필
  • 1955–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장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2–1967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인문사회과학 담당)
  • 1967–1973중앙위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 1971–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재임)
  • 1961–1989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28년간)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ма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98 ○ 자연사

매주 월요일 지도부 전화를 수확하던 정체기 영화 총책

로마노프는 월요일 출근길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 별장에서 영화를 본 지도부의 전화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 분은 이렇게 말하고 다른 분은 정반대로 말한다. 같은 영화인데. 내가 어쩌란 말인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낸 당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툴라현 벨료프 출신으로, 고리키주와 벨로루시의 신문 편집국을 거쳐 1955년부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했으며, 1961년에는 중앙위원 후보와 러시아공화국 당뷰로 위원이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타르콥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검열, 흐루쇼프 해빙기 말부터 브레주네프 정체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영화 정책을 총괄했으며, '온건하지만 지나치게 규율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1972년 필리프 예르마시에게 자리를 넘기고 《소비에트 문화》 신문 주필로 옮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1929건설 노동자 → 고등국립문학과정 수료(3년)
  • 1929–1944신문 《스텝의 진리》(악튜빈스크), 《고리키 코뮌》 기자·부장·책임비서·부편집장
  • 1944–1946《프라우다》 고리키주 특파원
  • 1946–1949《고리키 코뮌》→《소비에트 벨로루시》 책임편집자
  • 1949–1955부쿠레슈티 발행 공산당 기관지 부주필
  • 1955–1963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부장 → 이념부 제1부부장
  • 1961–1986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63–1972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
  • 1972–1983《소비에트 문화》 주필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푸르체바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Фурцева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74 ○ 자연사

해빙과 통제 사이의 장기 문화장관

1957년 주코프가 흐루쇼프로부터 국방장관 해임을 통보받고 물었다. "누구로 교체합니까?" "말리놉스키." 주코프가 답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푸르체바인 줄 알았어." 소련 최고 지도부의 유일한 여성 정회원을 향한 동시대 남성 권력의 시선을 압축한 장면이다.

소련 공산당 상임간부회(정치국)에 진입한 유일한 여성 정회원이다.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지지했고, 1960년부터 1974년까지 문화장관으로 해빙기 문화를 관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0–1974문화장관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트라페즈니코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Трапезни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8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학문 정통성의 문지기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역사학부는 그를 통과시켰지만, 총회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이 반대 연설을 하자 표결은 부결되었다. 10년 뒤 통신회원 선출은 '절대 정회원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가능했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을 지내며 소련 학계의 인사·교과과정·출판을 통제한 브레즈네프 시대 이념 관료였다. 박사 학위 논문과 주요 저작들은 집단화의 공식 역사서술을 형성했고, 1960년대 중반 스탈린 복권 캠페인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모스크바 고등당학교 부학장과 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을 거쳐 브레즈네프의 개인 비서관을 지냈으며, 그 인연으로 과학·교육 부문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1966년 아카데미 정회원 선거에서 노벨상 수상자 이고리 탐의 반대로 낙선할 정도로 불신을 샀으나, 10년 후 통신회원으로 선출되며 학계 내 입지를 유지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1934중부볼가 지방 콤소몰 활동, 1931년 당 입당
  • 1935–1944펜자주 당 간부, 세르돕스크 지역위 제1서기, 펜자주당 농업부장
  • 1948–1956몰도바 공화당학교 교장 겸 『몰도바 공산주의자』 편집장
  • 1956–1960중앙위 서기 L.I. 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0–1965중앙위 고등당학교 연구부학장
  • 1965–1983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학계 인사·교육과정·출판의 최종 심판관

블라디미르 일리치 스테파코프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Степак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87 ○ 자연사

레닌 테제 오류로 축출된 브레즈네프기 아지트프롭 수장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 테제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문구를 레닌의 말로 잘못 인용한 사건은 스테파코프가 아지트프롭에서 축출되는 공식 명분이자 셸레핀 계열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브레즈네프 초기 5년간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당의 일상적 이념 장치를 운영했다. 수슬로프·데미체프가 서기국에서 이념을 총괄하는 동안 레닌 탄생 100주년과 프라하의 봄 대응 선전을 지휘한 실무자였다. 역사학 박사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론을 체계화했으며,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어 1970년 레닌 테제 오류 사건으로 축출된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옮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53모스크바주 MGB 부국장
  • 1957–1961모스크바 시당 선전선동부장 → 제2서기
  • 1964–1965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65–1970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브레즈네프기 일상 이념 장치 총괄
  • 1967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 1971–1978주유고슬라비아 소련 대사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라핀

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п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2–199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15년간 소련 TV·라디오를 장악한 방송 총책

“나는 어제 레오니트 일리치와 점심을 함께 했네.” — 라핀이 부하와 동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기 전에 건네던 상투적인 첫마디로, 이 말이 나온 뒤에는 브레즈네프와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 국가방송위원회(고스텔레라디오) 의장을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대 방송을 총괄한 언론 관료다. 레닌그라드 신문기자로 출발해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에서 훈련받았고,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리아·중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거쳐 TASS 사장을 지냈다. 고스텔레라디오 의장 재임 동안 올림픽 텔레비전센터 건설과 위성 방송망 확충으로 기술적 기반을 크게 넓혔으나, 동시에 생방송을 철폐하고 유대계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엄격한 이념 검열을 시행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적 신임을 등에 업고 당 선전부의 지시조차 거부할 만큼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인 1985년 12월 해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44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출판부 선임지도원·부문장
  • 1944–1949전연방 방송위원회 정치방송 주필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방송위원회 부의장
  • 1953–1955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55–1956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장·당위원회 서기
  • 1956–1960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0–1962러시아소비에트연방공화국(RSFSR) 외무장관
  • 1962–1965소련 외무차관
  • 1965–1967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0TASS(타스) 사장
  • 1970–1985소련 각료회의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1978년부터 고스텔레라디오)

바실리 필리모노비치 샤우로

Василий Филимонович Шаур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2007 ○ 은퇴 1986

21년간 소련 문화의 당 문지기로 군림한 '위대한 무언가'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브레즈네프 체제 21년간 중앙위 문화부장으로서 어떤 문학·영화·음악이 소련 대중에게 닿는지를 결정한 문화의 당 문지기였다. 벨라루스 교사 출신의 그는 보수 진영의 지지를 업고 1973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중앙위에서 몰아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 1965–1986중앙위 문화부장
  • 1986연금 은퇴

세르게이 미트로파노비치 코발료프

Сергей Митрофанович Ковалё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3–1990 ○ 사망

프라우다 지면에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정식화한 소련 이념가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8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
  • 1948–1951전연방공산당 쿠르스크주위원회 서기
  • 1951–1956국영정치출판사(고스폴리티즈다트) 사장
  • 1960–1965『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편집자
  • 1965–1971『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
  • 1971–1980『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
  • 1980–1990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지먀닌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Зимян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4–1995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

표트르 닐로비치 데미체프

Пётр Нилович Демич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7–2010 ○ 자연사

문화정책을 관리한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61년 10월, 모스크바 시당 국 회의에서 데미체프는 단호히 말했다. '스탈린의 시신을 마우솔레움에 두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며칠 뒤 10월 31일 밤, 시신은 비밀리에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묻혔다.

흐루쇼프의 보좌관에서 출발해 24년간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낸 핵심 이념 관료였다. 1961년 스탈린 시신의 마우솔레움 철거를 직접 발의한 탈스탈린화의 주역이었으나, 브레즈네프기 문화장관으로서는 보수적 통제를 행사했다.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글라주노프·솔로우힌 같은 향토주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복합적 면모를 지녔으며, 소련 말기까지 문화·이념 영역의 핵심 관리자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년대모스크바 당 조직과 중앙위 선전 라인에서 성장
  • 1961–1974중앙위 서기, 이념·문화 담당으로 해빙 이후 문화통제 관리
  • 1974–1986문화장관, 정체기 공식 예술·공연·출판 행정 총괄
  • 1986 이후고르바초프기 문화정책 변화 속에서 중앙 무대에서 물러남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쿠노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ку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9–1989 ○ 자연사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서 연방회의 의장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의 공보 엘리트이자 최고 입법기관의 얼굴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잡자, 톨쿠노프는 한때 중앙위에서 함께 일했던 그에게 신문 복귀를 요청했다. 안드로포프는 『프라우다』를 제안했지만 톨쿠노프는 『이즈베스티야』를 택했다.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프라우다』 기자로 출발한 소련의 언론인·국가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특파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고, 1960년대 초부터 CPSU 중앙위원회 사회주의국가연락부에서 근무하며 당의 대외 선전 라인을 관리했다. 1965년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 취임해 11년간 신문을 이끌었고, 1976년 노보스티 통신사 사장으로 전출된 뒤 1983년 안드로포프 집권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로 복귀했다. 1984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8년까지 재임하며 입법부의 제도적 수장 역할을 수행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1939『프라우다』 정보부 기자 → 문예담당, 주필 보좌관
  • 1941–1944전쟁 특파원 (칼리닌·북서·브랸스크·제4우크라이나·제2벨로루시 전선)
  • 1946–1947『프라우다』 근무
  • 1951–1957『프라우다』 근무
  • 1957–1965CPSU 중앙위 기구 → 사회주의국가 공산·노동자당 연락부 차장·제1차장
  • 1965–1976『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76–1983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3–198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재임)
  • 1984–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메샤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Месяц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20–2011 ○ 자연사

조작된 의사 사건을 밝혀낸 관료

1953년 재검토반의 결론은 명확했다. “의사 사건은 조작되었고, 의사들은 무죄이므로 석방해야 한다.”

니콜라이 메샤체프는 전후 소련의 콤소몰·국가기관·방송을 거친 관료로, 정치적 명령과 사실 조사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1953년 말렌코프의 지시로 의사 사건과 아바쿠모프 사건을 재검토했고, 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신속히 판정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훗날 스탈린도 생전에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회고했지만, 이 주장은 다른 사료와 함께 검토해야 하는 논쟁적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이후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를 이끌며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건설과 다중 프로그램 방송 확대를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해군 인민위원부·내무인민위원부 특별부·스메르시 수사관
  • 1946–1952전연방 레닌주의 청년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
  • 1953국가보안기관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의사 사건 재검토
  • 1955–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62–1964중국 주재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공산당 관계 부서 부부장
  • 1964–1970소련 국가텔레비전·라디오방송위원회 위원장
  • 1970–1972오스트레일리아 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2–1988사회과학정보연구원 선임연구원·역사학부장

빅토르 그리고리예비치 아파나시예프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Афанас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22–1994 ○ 암

프라우다 최장기 편집장이자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수문장

그는 우리 역사의 더러운 빨래를 들추어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출신으로,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아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최종 수문장으로 군림했다. 재임 중 《프라우다》 발행부수는 1,060만 부로 정점을 찍었고, 소련 언론인연맹 의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겸하며 당의 공식 입장을 신문 지면에 충실히 구현했다. 1989년 옐친의 음주 의혹을 다룬 이탈리아 기사를 전재했다가 사상 초유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임되었으며, 이는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구시대적 편집 노선이 붕괴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1953적군 복무, 공수부대 및 SMERSH 방첩 장교
  • 1953–1960첼랴빈스크 사범대학 철학 강사·학과장
  • 1960–1968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 1968–1974《프라우다》 부편집장·제1부편집장
  • 1974–1976《콤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9《프라우다》 편집장 (역대 최장기)
  • 1976–1990소련 언론인연맹 의장, 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0–199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주임연구원

레오니트 미트로파노비치 자먀틴

Леонид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мят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2–2019 ○ 자연사

브레즈네프 체제의 정보 설계자

자먀틴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미국은 세계 헌병 역할에 나서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며, 하피줄라 아민이 CIA 요원이었다는 주장을 소련 고위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 제기했다. — FRUS, 1980년 1월 28일

소련의 외교관이자 당 선전 책임자로, TASS 사무총장과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을 거치며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해외 정보·선전 체계를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의 집필진을 이끌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주영 대사로 부임했다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냉전기 소련의 대외 이미지와 정보 통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44–1946모스크바 항공대학·고등외교학교 졸업, 외무부 입부
  • 1946–1962외무부에서 UN·IAEA 대표부 근무, IAEA 상임대표 역임
  • 1962–1970외무부 공보국장, 대외 발표와 언론 브리핑 총괄
  • 1970–1978TASS 사무총장, 소련 공식 통신사의 수장
  • 1978–1986중앙위 국제정보부장, 당의 대외 선전·정보 활동 총괄
  • 1978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 집필진 지휘, 레닌상 수상
  • 1986–1991주영 소련 대사, 8월 쿠데타 규탄 거부로 해임

필리프 티모페예비치 예르마시

Филипп Тимофеевич Ермаш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2 ○ 자연사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꾼 정체기 영화 총책

안드로폰프가 《시베리아다》를 보고 "이거 반소비에트 영화 아니냐"고 묻자, 예르마시는 "나도 시베리아인입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라고 답하며 영화를 지켰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내며 정체기 영화계를 총괄한 당 관료이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공병으로 참전했고, 콤소몰과 스베르들롭스크 당 기구를 거쳐 1962년 중앙위원회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가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이념 통제와 대중 흥행을 병행해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승무원》 등 블록버스터와 타르콥스키·콘찰롭스키의 작품을 모두 관리하며 소련판 스튜디오 시스템을 추구했다. 1986년 영화인대회의 비판 속에 물러났으나, 임기 중 소련 영화는 오스카 2개를 수상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붉은 군대 복무, 공병, 적성훈장·용기메달 수훈
  • 1951–1956스베르들롭스크 시 콤소몰 제2서기 → 제1서기
  • 1956–1962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과학·학교·문화부장
  • 1962–1972중앙위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 → 문화부 부장
  • 1972–1986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
  • 1976–1989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보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칼린

Борис Иванович Стукал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23–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기 출판·검열의 최고 책임자

불가코프 작품에 대한 긍정적 평론을 실은 출판사들을 질책하며 그가 남긴 말: '소비에트 권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를 왜 출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브레즈네프 시대 12년간 소련 출판·인쇄·서적 유통 전체를 관장한 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 모든 책·신문·잡지의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실질적 검열 최고 책임자였다. 언론인 출신으로 지역 신문 편집장에서 시작해 『프라우다』 부주필을 거쳐 1970년 국가출판위원회 수장에 올랐으며, 200권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대규모 출판 기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을 1인당 도서 출간 세계 1위로 올려놓는 한편, 불가코프 같은 '소비에트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의 출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념적 보수성을 견지했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중앙위 선전부장으로 승진했으나, 고르바초프 등장과 함께 헝가리 대사로 전출되며 중앙 무대에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1941보로네시주 지역 신문 『노바야 지즌』 문예부원
  • 1942–1946서부전선·제2벨로루시전선 통신대대 무선기술병, 베를린 입성
  • 1948–1960보로네시주 지역신문 편집장 → 주(州) 당 기관지 『콤무나』 편집장
  • 1960–1963CPSU 중앙위 선전부 RSFSR 담당 지도원 → 출판·방송·TV 섹터장
  • 1963–1965RSFSR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1965–1970『프라우다』 부주필 → 제1부주필
  • 1970–1982소련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국가출판·인쇄·서적유통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
  • 1982–1985CPSU 중앙위 선전부장
  • 1985–1990주 헝가리 소련 특명전권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