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 공격에서 그는 소부대를 이끌고 다우가바 다리를 건너 수백 명의 포로가 갇힌 성채로 돌진했고, 이 돌격에서 쓰러졌으나 부대는 성채에 이르러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쿠를란트의 발트 독일계 남작으로 1차 대전에서 바이에른군 창기병 장교로 싸웠고, 1919년 발트 향토방위군의 참모 장교 겸 돌격대장이 되었다. 4월 16일 리예파야에서 울마니스 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이끌었고, 5월 22일 붉은 군대에서 리가를 탈환하는 공격 중 스물다섯 살에 전사했다.
1939년 소련–라트비아 상호원조조약에 서명하고 1940년 소련으로 추방된 라트비아 외무장관
리가에서 에스토니아인 상인 아버지와 발트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라트비아 독립전쟁 때 에스토니아군에서 복무했다. 1920년부터 외무부에서 일하며 1933년 사무총장이 되었고, 1934년 울마니스의 쿠데타 뒤 사실상 외무부를 이끌다 1936~1940년 외무장관을 지냈다. 1939년 6월 독일–라트비아 불가침조약에, 10월 5일 소련–라트비아 상호원조조약에 서명했다. 소련 점령 뒤 1940년 7월 내무장관 빌리스 라치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족과 함께 보로네시로 추방되었고, 1941년 6월 체포되어 1952년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 1954년 풀려나 1958년 라트비아로 돌아왔고, 해외 라트비아인 단체를 비난하는 글을 쓰다 1967년 숨졌다.
루프트바페 하청 일을 이용해 리가 게토와 수용소의 유대인 수십 명을 빼내 숨긴 항만 노동자
옐가바에서 태어나 1919~1920년 라트비아 독립전쟁 때 라트비아군 포병으로 복무했고, 그 뒤 리가 항구에서 하역 노동자로 일했다. 거리에서 유대인 박해를 목격하고 구조를 결심해 루프트바페의 하청업자가 되었고, 1941년 11월 말부터 리가 게토와 주변 수용소의 유대인 노동자를 빼냈다. 아내 요한나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들을 창고와 집 마당에 판 은신처 등에 숨겨 1944년 10월 붉은군대가 올 때까지 지켰다. 살린 사람은 문헌에 따라 40명에서 약 55명이다. 전후 국가보안위원회는 그를 여러 차례 심문했다. 1966년 야드 바셈이 부부를 「열방의 의인」으로 인정했고, 1987년 그가 숨지자 리가의 유대인들이 장례를 치렀다.
발도네에서 라트비아인 대장장이 아버지와 발트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라트비아군에서 복무하고 라트비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938년까지 경찰관으로 일했다. 1941년 7월 독일군이 리가에 들어오자 슈탈레커를 만나 대학생 단체와 뇌성십자 출신으로 부대를 꾸렸고, 이 부대는 7월 4일 리가 회당 방화에 가담했다. 아라이스 특공대는 라트비아와 벨라루스에서 약 2만 6,000명을 죽였고, 그는 1943년 친위대 소령이 되었다. 전후 1949년까지 영국군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가명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했다. 1979년 함부르크 지방법원은 1941년 12월 8일 리가 게토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죄로 종신형을 선고했고, 1988년 카셀의 감옥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