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이념·선전

5 명

소속 인물

천보다

陈伯达
중공 이념·선전 중국 중국 1904–1989 ↓ 실각 1970 · 자연사

마오의 정치비서 겸 「마오쩌둥 사상」의 이론가, 중앙문혁소조 조장에서 1970년 실각

「문화대혁명은 광기의 시대였고, 그때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 1988년 석방된 뒤 천보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비극이다. 사람들이 내 비극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푸젠 출신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배운 뒤 1937년 옌안에서 마오의 정치비서가 되어 마오의 저작을 다듬고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 건국 후 『홍기』 편집장과 선전 분야 책임자로 대약진의 이론을 썼고,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으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했다. 1970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 쪽에 서 국가주석직 문제로 마오의 분노를 사 실각했고, 1981년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재판에서 18년형을 받았다.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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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6『홍기』 편집장
  • 1966–1970중앙문화혁명소조 조장

덩퉈

邓拓
중공 이념·선전 중국 중국 1912–1966 ✕ 자살

『인민일보』 편집장, 『연산야화』로 대약진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자가 된 언론인

푸젠 출신 역사학자·언론인으로 항일전쟁기 진차지 근거지에서 신문을 만들고 최초의 『마오쩌둥 선집』을 편집했다. 1949년부터 『인민일보』 편집장·사장을 맡았으나 1957년 마오에게 「서생 논정(書生辦報)」이라 질책받고 물러났다. 베이징시 당위원회 서기로 1961~1962년 『베이징만보』에 연재한 잡문 『연산야화』와 우한·랴오모사와 함께 쓴 『삼가촌 찰기』는 1966년 「반당 독초」로 규정되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되었고, 그는 그해 5월 자살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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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8『인민일보』 편집장 · 사장

장칭

江青
중공 이념·선전 중국 중국 1914–1991 ✕ 자살

상하이 무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정점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중국 혁명예술을 재편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고 외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좌익 연극·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1937년 옌안으로 가 마오쩌둥과 결혼했고, 20년간 정치에서 배제된 후 1963년 경극 혁명을 계기로 공적 무대에 복귀했다.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에 임명되어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8개의 혁명적 양판희를 제정해 전통 예술을 프롤레타리아 주제로 재편했으며, 1969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19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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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중국 공산당 입당
  • 1935–1937상하이 좌익 영화·연극 배우 (예명: 란핑)
  • 1938마오쩌둥과 결혼, 옌안 루쉰 예술학원 연극 강사
  • 1949–1951영화지도위원회 부주임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 1969–1976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0–1991사형 선고 → 무기징역 → 의료 가석방 → 자살

장춘차오

张春桥
중공 이념·선전 중국 중국 1917–2005 ○ 사형 선고 후 감형, 1998년 석방

문화대혁명 '사인방'의 이론가,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부르주아지 전면독재를 주창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춘차오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수년 후 가족 면회가 허용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이론가이자 '사인방' 구성원.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상하이에서 《해방일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부르주아 법권 사상을 타파하자」를 발표해 마오쩌둥의 주목을 받았고, 문화대혁명기 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으로 1967년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해 기존 시 정부를 전복시켰다. 1975년 부총리로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전면독재를 실시하자」를 집필해 사회주의 이행기 계급투쟁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마오 사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98년 석방될 때까지 마오주의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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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중국 공산당 입당
  • 1949–1966《해방일보》 편집장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
  • 1967–1976상하이 혁명위원회 주임 (시장)
  • 1969–1973정치국 위원 → 1973–1976: 정치국 상무위원
  • 1975–1976부총리 겸 총정치부 주임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4–1998사형 선고 → 무기징역 → 18년형 → 의료 석방

야오원위안

姚文元
중공 이념·선전 중국 중국 1931–2005 ↓ 체포 1976 · 자연사

『해서파관』 비판문으로 문화대혁명의 문을 연 4인방의 이론가, 「몽둥이」라 불린 평론가

상하이의 문예평론가로 1957년 반우파 투쟁 때 공격적 비판문으로 마오의 눈에 들었다. 장칭·장춘차오의 지시로 1965년 11월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발표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중앙문혁소조원으로 선전을 장악했다. 1969년 정치국원이 되어 상하이 그룹의 일원으로 「린뱌오와 공자 비판」 등 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받았고 1996년 출소 뒤 200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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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원
  • 1969–1976중공 중앙 정치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