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테제
April Theses
레닌이 1917년 4월 스위스 망명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한 직후 볼셰비키 당에 제시한 10개 조항의 행동 강령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일체의 지지 거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 제국주의 전쟁의 즉시 종식, 토지 국유화와 은행 통합, 당의 명칭을 공산당으로 바꿀 것 등을 주문했으며,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끝났고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7차 전러시아 당협의회(4월)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 볼셰비키의 공식 노선이 되었고, 7월 사태와 10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전환의 출발점이 되었다.
원문
나는 4월 3일에야 밤에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기 때문에, 4월 4일 집회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에 관한 보고를 내 이름으로, 그리고 준비가 불충분한 점을 유보하면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작업을, 그리고 성실한 반대자들의 작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문서로 된 테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읽었고 그 텍스트를 체레텔리 동지에게 전달했다. 나는 매우 천천히 그리고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집회에서, 그다음에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합동 집회에서 읽었다.
나의 이 개인적인 테제를 인쇄한다. 여기에는 가장 간략한 해설 주석만을 붙였으며, 이 주석들은 보고에서 훨씬 더 상세히 전개되었다.
테제
1.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이 전쟁은 신정부 리보프 일당 치하에서도 러시아 측으로 보아 그 정부의 자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무조건 약탈적 제국주의 전쟁으로 남아 있으므로,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에 대한 사소한 양보도 용납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정당화하는 혁명 전쟁에 대해, 자각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만 동의할 수 있다. 즉, (a) 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 및 그에 동조하는 농민의 최빈곤 계층의 손에 넘어갈 것, (b) 말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병합을 포기할 것, (c) 모든 자본의 이익과 실제로 완전히 단절할 것.
정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가피성 때문에 전쟁을 인정하는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의 광범위한 대중적 대표자들의 의심할 여지없는 성실성, 그리고 그들이 부르주아지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그들의 오류를 특히 상세히, 끈질기게,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해명하고, 자본과 제국주의 전쟁의 불가분한 연관성을 해명하며, 자본을 전복하지 않고서는 참된 민주적, 비폭력적 평화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현역군 내에서 이 견해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선전을 조직할 것.
형제화(전선의 병사끼리 어울리는 일).
2. 러시아에서 현재 시기의 독특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불충분한 자각과 조직성으로 인해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준 혁명의 제1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최빈곤 계층의 손에 권력을 넘겨주어야 하는 제2단계로 이행하는 데 있다.
이 이행은, 한편으로는 합법성의 최대치(러시아는 현재 모든 교전국들 중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이다)로 특징지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에 대한 폭력의 부재로, 나아가 평화와 사회주의의 최악의 적인 자본가 정부에 대한 대중의 맹목적-무자각적 태도로 특징지어진다.
이 독특성은 우리에게, 정치 생활에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전례 없이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속에서 이루어지는 당 작업의 특수한 조건들에 적응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3. 임시정부를 조금도 지지하지 않을 것. 임시정부의 모든 약속, 특히 병합 포기를 내세우는 약속이 완전히 거짓임을 해명할 것. 묵과할 수 없는, 환상을 퍼뜨리는 행위인, 이 정부, 자본가 정부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버리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이를 폭로할 것.
4. 우리 당이 대다수의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서 소수파에 있으며, 인민사회주의자, 사회주의혁명당부터 조직위원회(치헤이제, 체레텔리 등), 스테클로프 등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받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그 영향을 관철시키는 모든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 분자들의 블록에 맞서, 아직은 약한 소수파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야말로 혁명 정부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이며, 따라서 이 정부가 부르주아지의 영향에 굴복하고 있는 동안에는 대중에게 그들의 전술상 오류를 끈기 있게,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특히 대중의 실제적 요구에 맞추어 해명하는 일만이 우리의 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대중에게 해명할 것.
우리가 소수파인 한, 우리는 비판과 오류 해명의 작업을 수행하는 동시에, 대중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오류에서 벗어나도록 모든 국가 권력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이행할 필요성을 선전한다.
5.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서 의회제 공화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후퇴가 될 것이다 ― 전국에 걸쳐 아래로부터 위까지 노동자·농업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의 공화국.
경찰, 군대, 관료 기구의 철폐.[3]
모든 관료의 선출 및 상시 교체 가능성을 전제로, 모든 관료에 대한 보수는 우수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초과하지 않을 것.
6. 농업 강령에서 무게 중심을 농업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옮길 것.
모든 지주 토지의 몰수.
국내 모든 토지의 국유화, 토지는 지방의 농업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가 처분한다. 빈농 대표 소비에트의 분리 구성. 각 대규모 장원(면적 약 100데시아티나에서 300데시아티나까지, 지방 및 기타 조건과 지방 기관의 결정에 따름)에서 농업노동자 대표의 통제하에, 공적 경비로 모범 농장을 조성할 것.
7. 국내 모든 은행을 즉시 하나의 전국 단일 은행으로 합병하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통제를 도입할 것.
8. 사회주의의 「도입」이 우리의 당면 과제가 아니라, 우선은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 분배에 대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통제로 이행할 것.
9. 당의 과제:
가) 당 대회의 즉시 소집;
나) 당 강령의 변경, 주된 내용은:
1)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관하여,
2) 국가에 대한 태도와 우리의 「코뮌 국가」[4] 요구,
3) 낙후된 최소 강령의 수정;
다) 당 명칭의 변경[5].
10. 인터내셔널의 쇄신.
혁명적 인터내셔널, 사회배외주의자들에 반대하고 「중앙파」[6]에 반대하는 인터내셔널 창설의 발의.
내가 왜 성실한 논적들의 「경우」를 극히 드문 예외로서 유독 강조해야 했는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이 테제들과 골덴베르크(Гольденберг) 씨의 다음 반론을 비교해보시길 권한다. 레닌은 「혁명적 민주주의 내부에 내전의 깃발을 꽂았다」 (플레하노프 씨의 「통일」지 제5호에 인용됨).
진주가 아닌가?
나는 쓰고, 읽고, 씹어서 풀이한다. 「혁명적 조국방어주의의 광범한 대중적 대표 계층의 의심할 여지 없는 성실성으로 인해… 그들이 부르주아지에게 기만당하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그들의 오류를 특히 상세히, 집요하게, 끈기 있게 해명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사회민주주의자라 칭하는 부르주아지 출신의 신사들, 조국방어주의의 광범한 계층에도 대중적 대표자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이, 맑은 이마로 내 견해를 전달하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내부(!!)에」 「내전의(!) 깃발을(!) 꽂았다」(테제에는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없고, 보고에서도 한 마디도 없었다!)…
이게 무엇인가? 이것이 포그롬 선동과, 「루스카야 볼랴」와 무엇이 다른가?
나는 쓰고, 읽고, 씹어서 풀이한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야말로 혁명 정부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이며,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오직 대중의 실제적 요구에 특히 맞추어 그들의 전술상 오류를 끈기 있게,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해명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특정한 부류의 논적들은 내 견해를 마치 「혁명적 민주주의 내부에서의 내전」에 대한 호소인 양 표현한다!!
나는 임시정부가 제헌의회 소집의 빠른 시기는 물론이고 어떤 시기조차 정하지 않고 빈 약속으로 얼버무리는 것을 공격했다. 나는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없이는 제헌의회 소집이 보장되지 않으며 그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했다.
마치 내가 제헌의회의 조속한 소집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것처럼 떠넘기다니!!!
수십 년간의 정치 투쟁이 나로 하여금 논적의 성실함을 극히 드문 예외로 간주하도록 길들이지 않았다면, 나는 이 표현들을 「망령된」 것이라 불렀을 것이다.
플레하노프 씨는 자신의 신문에서 내 연설을 「망령된」 것이라 불렀다. 아주 좋소, 플레하노프 씨! 하지만 당신이 논쟁에서 얼마나 서툴고 어설프고 눈치 없는지 한번 보시오. 만약 내가 두 시간 동안 망령된 연설을 했다면, 어떻게 수백 명의 청중이 그 「망령된 소리」를 참아 주었겠소? 더 나아가, 어째서 당신 신문은 하나의 칼럼 전체를 그 「망령된 소리」를 서술하는 데 할애했소? 당신의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소, 정말이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소.
물론 소리치고 욕하고 고함치는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71년, 1872년, 1875년에 파리 코뮌의 경험과 어떤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한지에 관해 어떻게 논의했는지를 설명하고 해명하고 상기시키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다.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플레하노프 씨는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에 관해 상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1914년 8월 4일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악취 나는 시체」라고 부른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인용했다. 그런데 플레하노프, 골덴베르크와 그 일당들은 「분개한다」… 누구 때문에? — 배외주의자라고 불린 독일의 배외주의자들 때문에!
가련한 러시아 사회배외주의자들, 말로는 사회주의자요 행동으로는 배외주의자인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상세
기원과 작성
레닌은 1917년 4월 3일(구력 3월 16일) 저녁과 밤에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4월 4일 회의에서 그는 자기 이름으로,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유보를 달아 보고를 했으므로 테제를 글로 준비해 낭독하고 그 원고를 체레텔리에게 건넸으며, 볼셰비키 회의와 볼셰비키·멘셰비키 합동 회의에서 두 번에 걸쳐 아주 천천히 읽었다. 초고는 4월 3일(구력 3월 16일)자로 남아 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레닌은 4월 3~4일 밤 크셰신스카야 저택의 볼셰비키 모임에서 테제를 처음 알렸는데, 수하노프에 의하면 그 연설은 강한 인상을 주었으나 지지를 얻기보다 청중을 놀라게 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와 러시아사학회에 따르면 4월 4일(신력 17일) 타우리다 궁에서 그는 소비에트 전러시아 대표자회의에 참석한 볼셰비키들에게 「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과제에 대하여」라는 본보고를 낭독했고, 멘셰비키와의 합동 회의에서 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브리태니커는 같은 발표를 사회민주주의자 모임과 볼셰비키 위원회에서 각각 이루어졌고 둘 다 즉시 거부했다고 다르게 서술하므로, 두 서술은 합치지 말고 각각 출처에 귀속시킨다.
발표와 카메네프의 반론
테제 본문은 1917년 4월 7일(신력 20일)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에 레닌의 논문 「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과제에 대하여」(제26호, N. 레닌 서명)로 실렸다. 편집부의 저항에도 레닌의 압력으로 게재되었다. 이튿날 카메네프는 『프라우다』에 「우리의 차이」를 발표해 테제의 '분해적 영향'을 공격하고, 테제는 전적으로 레닌의 '개인적 의견'이라고 주장하면서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끝난 것으로 취급하고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환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 총도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브리태니커는 『프라우다』가 테제를 실으면서 그것이 레닌의 개인적 사상임을 신중히 밝혔다고 적는데,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 단서를 카메네프의 후속 논문에 돌리므로 이 두 서술은 동일시하지 말고 각각 출처에 귀속시켜야 한다.
당내 저항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지도부는 테제를 '경악과 적대'로 받았다. 1917년 4월 6일(신력 19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국에서 지노비예프, 실랴프니코프, 카메네프가 반대 발언을 했고, 카메네프는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에 성숙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테제가 채택되면 당이 공산주의 선전가 집단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위원회 표결은 찬성 2, 반대 13, 기권 1이었다. 레닌 자신도 테제와 보고가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그리고 『프라우다』 편집부 안에서도 의견 차이를 불러일으켰다'고 인정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볼셰비키 지도자들, 예컨대 카메네프는 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고 임시정부의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온건 노선을 주장했다. 처음 협력을 지지했던 스탈린은 테제를 읽고 입장을 바꾸어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도시회의에서 이 강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전환과 채택
레닌은 물러서지 않았고 얼마 안 되어 대부분의 당 조직의 지지를 얻었다. 테제는 4월 6일(신력 19일) 페트로그라드 구 볼셰비키 총회, 4월 9일(22일) 나르바 구, 4월 10일(23일) 바실레오스트롭스키 구와 제2도시구 등에서 승인되었다. 스탈린은 4월 11일(24일) 지지 연설을 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도시대표자회의는 1917년 4월 14~22일(신력 4월 27일~5월 5일)에 열렸고, 레닌의 현 정세 보고와 4월 테제에 기초해 전쟁과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결의를 작성해 테제를 당 업무의 기초로 삼았다. 얼마 후 지방 당 조직들도 이를 승인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제7차 전러시아(4월) 대표자회의(4월 24~29일, 결정권 대의원 133명·협의권 18명)에서 격렬한 토론 끝에 4월 테제는 지방 대의원 다수의 지지를 받아 전당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이 정책은 자유주의 진영과 멘셰비키 양쪽에서 격렬한 거부를 샀다.
영향과 평가
4월 테제는 이후 몇 달의 7월 사태와 10월 혁명에 영향을 주었고 레닌주의와 동일시된다. 일부 볼셰비키에게는 여전히 유보가 있었지만 그 개념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를 얻어, 7월에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도록 강제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0월에 이르러서야 레닌의 당이 강령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해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임시정부로부터 권력을 장악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테제가 사실상 레닌주의의 기초를 정식화했다고 평가한다. 10월 이전 시기 볼셰비키의 행동 강령이 되었고, 권력 장악 이후 공산주의 활동의 사상적 기초와 소련 체제 정당화의 근거로 기능했으며, 소련 시기에는 4월 테제 학습이 사상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구체적 강령과 방법
농업 테제는 강조점을 농업노동자 대표자 소비에트로 옮기고, 모든 지주 영지를 몰수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여 지방 소비에트가 처분하도록 했으며 대영지에 100~300데샤티나 규모의 모범 농장을 세우게 했다. 은행 테제는 모든 은행을 노동자 대표자 소비에트의 통제 아래 단일 국립은행으로 즉시 통합할 것을 규정했다.
테제는 당이 대부분의 소비에트에서 소수임을 인정하면서도, 방어주의 다수의 오류를 '인민이 경험으로 자기 실수를 극복하도록' 끈기 있고 조직적이며 집요하게 설명하는 과제를 세웠고, 모든 국가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파하며 전선 군대에서 이 견해를 위한 가장 폭넓은 운동, 형제애적 화합을 포함한 운동을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플레하노프의 신문 『예딘스트보』는 레닌의 연설을 '헛소리'라 불렀고 골덴베르크는 레닌이 '혁명적 민주주의 한가운데에 내전의 기치를 꽂았다'고 비난했다. 레닌은 게재한 논평에서 테제와 연설 어디에도 그런 표현이 없다고 반박하며 플레하노프와 골덴베르크 류의 왜곡을 공격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출처 목록에는 플레하노프의 반박 논문 「레닌의 테제와 헛소리가 때로 흥미로울 수 있는 방식에 대하여」가 남아 있다.
구별
의회제 공화국과의 구별. 제5테제는 의회제 공화국 수립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노동자 대표자 소비에트에서 의회제 공화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퇴보적 조치'라 불렀다. 그 대안으로 전국 각지의 노동자·농업노동자·농민 대표자 소비에트 공화국을 제시하고 경찰·군대·관료제의 폐지, 모든 공직자의 선출과 언제든 해임 가능성, 유능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넘지 않는 보수를 요구했다. 레닌은 각주에서 상비군을 전 인민의 무장으로 대체할 것을 덧붙였다.
4월 위기와의 구별. 4월 위기는 러시아의 대외 정책 목표와 이중 권력 체제를 둘러싸고 1917년 4월에 터진 별개의 사건이다. 밀류코프 외무장관이 4월 18일 러시아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권리를 선언한 각서를 냈고, 이 각서가 4월 20일 인쇄되면서 대규모 시위와 거리 폭력이 일어나 밀류코프와 구치코프 전쟁장관이 사임했다. 4월 위기는 볼셰비키를 임시정부와 결탁하지 않은 유일한 주요 사회주의 정당으로 남겨 그 인기를 높였으므로, 테제와 4월 위기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방어주의와의 구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장악한 사회주의 정당들은 2월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해석하고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쥐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아 임시정부의 통치를 받아들였으며, 노동자와 병사의 이익을 위해 임시정부와 협력하고 조언하기로 했다. 레닌은 두 기구를 계급투쟁 속에 맞선 계급의 기구로 보아 양자가 무한정 공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에 근거해 볼셰비키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며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할 것을 촉구했다. 이것이 테제가 '혁명적 방어주의'와 갈라서는 지점이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Full content of the ten theses, background of Lenin's return by sealed train, the intra-party debate, and adoption at the VII All-Russian Conference of the RSDLP(b).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language article with detailed account of the theses' reception, the resistance from Kamenev and the Petrograd Bolshevik leadership, and the process by which they became party policy.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Primary text: Lenin's 'The Tasks of the Proletariat in the Present Revolution,' published in Pravda on April 7, 1917, containing the full April Theses.
- britannica.com Britannica entry confirming the theses' role in the July Days and October Revolution, the initial rejection by the Bolshevik committee, and subsequent adoption at the April conference.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britannica.com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