Азиатский способ производства

아시아적 생산양식

Asiatic Mode of Production

마르크스가 1850년대에 동아시아 사회 분석에서 제시한 생산양식 개념으로, 토지 사유재산의 부재, 자급적 촌락공동체, 관개를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조세·부역으로 공동체의 잉여를 수취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마르크스 자신이 이를 독립된 이론으로 정식화한 적은 없고,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한 번 언급했을 뿐이다. 1920년대 말 소련에서 중국 혁명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서 로미나제와 머저르 러요시 등은 중국에 봉건제가 아니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잔재가 지배적이라고 주장하며 국민당과의 연대 노선에 이의를 제기했다. 1931년 논쟁은 강제 종결되고 개념은 트로츠키주의 편향으로 몰려 공식 배제되었으며, 이후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란된 개념의 하나로 남았다.

상세

개념의 형성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동방 사회의 성격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1853년이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 기사를 준비하던 마르크스는 동방 사회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검토했고, 엥겔스와 주고받은 1853년 5~6월 서신이 아시아 사회의 특수성이라는 발상을 낳았다. 마르크스는 베르니에의 관찰, 즉 동방에서는 토지 사유재산의 부재가 모든 현상을 규정한다는 지적을 인용했고, 엥겔스는 사적 토지소유의 부재를 주로 기후와 토양, 특히 거대한 사막 지대 탓으로 돌렸다. 인공 관개가 필요했고 그것은 공동체·주·중앙정부의 과업이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도의 영국 지배」(1853년 6월 10일자)에서 이 발상을 되풀이하면서, 관개의 필요만으로 전제정치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인도론과 『자본론』

1852~1858년의 인도 관련 기사에서 마르크스는 인도에 지배적이던 생산양식의 기본 특징을 정리했다. 토지 사유재산의 부재(자급적 공동체), 농업과 수공업의 결합(수직기와 물레), 상품생산과 교환의 미약함, 그리고 침략과 정복과 기근에 맞선 인도 사회·문화의 안정적 역할이 그것이다. 『자본론』에서 그는 아시아적 생산 유기체의 '단순성'이 왕조 교체 속에서도 아시아 사회가 변하지 않는 까닭을 설명하는 열쇠라고 썼다.

코민테른과 스탈린 시대의 금지

스탈린주의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1921년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거부했다. 식민지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민족부르주아지의 반제국주의 동맹을 지지하기로 하면서, 토착 지배계급을 '봉건적'이라고 규정하고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은 피했다. 이 개념이 정치적 전제정치와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스탈린 체제 자체를 겨냥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930년 이후 스탈린이 생산양식의 기계적 계승을 확정하면서 개념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최종적으로 삭제되었다. 브라이언 피어스에 따르면 이 공식은 소련에서 '다섯 단계'(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냉소적으로 불렸고, 『간명과정』의 스탈린 집필 부분에서 지리와 인구는 역사적 유물론에서 명시적으로 배제되었다.

1920년대 말 중국 혁명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서 소련의 혁명가 베소 로미나제와 머저르 러요시는 아시아 국가들에 사유재산과 봉건계급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 개념을 옹호했다. 이 노선은 반봉건 투쟁을 강조하던 코민테른 방침과 충돌했고, 논쟁 참가자들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소련 공식 언론에서 비판받았다. 1931년 논쟁은 강제로 종결되었다. 1920년대 소련 저자들 사이에서도 이 용어는 격렬하게 논쟁되었는데, 일부는 개념 자체를 거부했고 '아지아트치키'로 불린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의 토지소유 구조가 한때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유사했다고 주장했다가 트로츠키주의 혐의를 받았다. 소련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의는 1931년부터 흐루쇼프 시기까지 사실상 금지되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논쟁 참가자 거의 전원이 여러 이유로 탄압받아 총살되었다고 서술하나, 이는 해당 출처의 규정이며 본 사전의 로미나제 항목이 전하는 것은 1935년 체포 위협 속의 자살이다. 따라서 참가자 개개인의 처형을 확인된 사실로 단정하지 않는다.

동양적 전제주의와의 관계

마르크스에게 따른 전통적 공식은 터키·페르시아·인도·중국(일본은 예외로 보았다)의 사회 형태를 서유럽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이 없고, 모든 토지 소유권이 최고 통치자에게 집중되며, 조세와 지대가 구별되지 않고, 세습 귀족이 아니라 해임 가능한 수입 징수관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동양적 전제주의'의 토대였다. 전직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중국학자 카를 비트포겔은 『동양적 전제주의: 전체 권력의 비교 연구』(1957)에서 마르크스의 원래 공식을 소련 국가에 대한 논쟁적 고발로 전용했다. 그가 보기에 이 개념이 소련에서 인기를 얻지 못한 진짜 이유는 스탈린 러시아의 현실과의 불편한 유사성이었고, 소련 국가는 아시아의 '수력 문명'과 유사한 전체주의의 한 형태였다.

개념사적 변형과 구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의 흩어진 언급들로부터 일관된 '동양적 전제주의' 개념을 구성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해석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노예제와 함께 원시사회에서 계급사회로 가는 두 갈래 가능한 경로 중 하나였으며, 구성체들은 반드시 순차적일 필요가 없고 병렬적일 수 있었다. 중국이나 고대 이집트의 경제적 논리는 고전적 생산양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레하노프는 동방에서 국가와 직접 생산자의 관계를 계급 관계로 파악했고, 관료기구는 단순한 집단적 착취자가 아니라 착취자 계급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중국의 봉건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끼던 '중국 봉건제' 관념과 어긋나는 발언을 남겼으나, 이를 오단계 도그마에 대한 명시적 비판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중국 혁명의 새로운 기회」(1927년 9월)에서 그는 말을 가지고 놀지 않는 한 중국에 봉건제는 없다고 썼고, 「프레오브라젠스키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1928년 3~4월)에서는 중국에 토지 귀족이 없다고 했으며, 「중국 혁명의 총괄과 전망」(1928년 6월)에서는 '봉건적' 관계보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지배적이라고 보았다.

존 할던과 크리스 위컴 같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마르크스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례로 본 사회들이 '공납적 생산양식'(TMP)으로 더 잘 이해된다고 주장했다. 토지에 대한 지대적 통제를 행사하지 않는 농민으로부터 잉여를 수취할 배타적 또는 거의 배타적 권리를 가진 '국가계급'이 특유한 지배계급 형태라는 것이다.

1960년대의 부활과 비판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반식민지·반제국주의 투쟁이 격화되던 1960년대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인류학에서 다시 등장했다. 프랑스 잡지 『라 펑세』에 기고한 모리스 고들리에 등은 생산양식 문제가 마르크스와 엥겔스 전반에서 중심적이었다고 주장했고, 장 슈노는 이 개념의 타당성을 아시아를 넘어 다양한 전통 사회로 확장하며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유럽중심적 편향에서 벗어난 역동적 시각을 제안했다. 소련·유럽·아시아 역사가들이 참여한 두 번째 논쟁 단계에서도 최종적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를 봉건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옹호론의 논거였고, 토지를 보유하고 처분할 권리로서의 사유재산이 존재했다는 것이 반대론의 논거였다. 1970년대 초부터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V. P. 일류셰치킨은 독자적 견해를 폈다. 구성체 이론의 논리상 생산양식은 생산력의 역사적 유형과 그에 상응하는 잉여 수취·분배 방식으로만 구별될 수 있으며, 생산력 수준과 잉여 수취 방식이 같다면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봉건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개념은 집중적인 비판에 직면했다. 배리 하인데스와 폴 허스트는 이 개념이 사회적 관계의 분석을 통해 국가를 설명하지 않고 국가를 전제한다는 이유로 생산양식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페리 앤더슨은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1974)에서 경험적 비판을 가했고, 막심 로댕송은 지나치게 복잡한 사회들을 다루기에 둔탁하고 단순화된 방식이라고 보았으며, 클로드 메이야수는 공납적 잉여 수취를 공유하는 다양한 사회 구성체를 뭉뚱그리는 과잉 일반화를 지적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 이후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는 이 개념을 유럽 제국주의 팽창을 떠받친 문화적 고정관념의 반영으로 거부했다. 자본주의 이전 아시아의 사회경제적 구성체가 봉건 유럽과 특별히 구별될 만큼 다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념 전체를 거부하는 비판자들도 있었다.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core Marx/Engels formulation, AMP characteristics, Soviet suppression in 1931
  2. 위키백과 (러시아어) detailed account of Marx–Engels correspondence, Plekhanov's interpretation, Comintern debates, Lominadze and Madyar as AMP proponents, 1931 forced closure and repression of participants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Brian Pearce on the 'set of five' dogma, Comintern suppression of AMP, Trotsky's implicit AMP arguments on China
  4. encyclopedia.com Comintern rejection of AMP in 1921, Stalinist codification of rigid succession of modes after 1930, Wittfogel's Oriental Despotism critique
  5. encyclopedia.com
  6. 위키백과 (영문)
  7. 위키백과 (러시아어)
  8.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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