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国共产党第七届中央委员会第二次全体会议 · 1949.03.05–13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 (1949)

Second Plenary Session of the 7th CCP Central Committee (1949)

1949년 3월 5~13일 허베이성 젠핑현(지금의 핑산현) 시바이포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내전 승리를 앞두고 당 사업의 중심을 농촌에서 도시로 옮기고, 관료자본 몰수와 국영 경제의 영도, 사적 자본의 「제한」을 축으로 하는 신민주주의 경제 구조와 새 정치협상회의 소집을 정했다. 마오쩌둥은 「사탕 바른 총알」을 경계하며 승리는 「만 리 장정의 첫걸음」일 뿐이라고 했다.

상세

중앙위원 34명과 후보 중앙위원 19명이 참석했고 20명은 교통 사정 등으로 오지 못했다. 전회는 1945년 7기 1중전회 이후 정치국의 지도를 승인하고 랴오청즈·왕자샹·천보다·황커청을 중앙위원으로 올렸으며, 1949년 1월 14일 마오의 시국 성명과 「반동분자」를 뺀 새 정치협상회의 및 민주연합정부 수립 제안을 승인했다. 마오의 제안으로 당 지도자의 생일 축하와 지도자 이름을 딴 지명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고 군기에 관한 결의도 통과시켰다.

마오의 보고는 새 경제를 사회주의 성격의 국영 경제, 반(半)사회주의 성격의 합작사 경제, 사적 자본주의, 개체 경제, 국가자본주의의 다섯 부문으로 그렸다. 그는 사적 자본을 너무 많이 제한해서도 너무 빨리 없애려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제한과 제한에 대한 반대가 신민주주의 국가에서 계급투쟁의 주요 형태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나라를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바꾼다는 방향도 이 보고에 이미 들어 있었다.

결론 보고는 「당위원회의 공작 방법」 12조로 정리되었다. 회의는 겸손·신중과 소박한 생활, 고된 투쟁의 기풍을 지키자는 당부로 널리 기억된다. 회의 뒤 3월 하순 당 중앙은 베이핑으로 옮겼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zh.wikipedia.org
  2.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