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
Comintern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창립된 공산당들의 국제 조직으로, 제3인터내셔널이라고도 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에 맞서 치머발트 좌파에서 출발했고, 세계혁명의 단일한 참모부를 자임하며 21개조 가입 조건으로 각국 당을 재편했다. 집행위원회가 각국 지부를 지도하는 중앙집권 조직이었으나, 소련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이 굳어지면서 점차 소련 외교의 도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43년 스탈린이 연합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해산했다.
상세
왜 만들어졌나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레닌은 개혁이 불가능한 파산으로 규정했다. 전쟁 중 치머발트 운동 안에서 그의 좌파 그룹은 새 인터내셔널 건설을 주장했고, 10월 혁명이 그 주장에 현실적 기반을 만들었다. 1919년 3월 모스크바 창립 대회는 규모가 초라했지만, 이듬해 제2차 대회부터는 유럽 각국의 대중정당이 가입을 타진하는 조직이 되었다. 자기 이해는 분명했다. 코민테른은 정당들의 연합이 아니라 단일한 세계 공산당이며, 각국 당은 그 지부라는 것이다.
어떻게 움직였나
1920년 제2차 대회가 채택한 21개조 가입 조건이 조직의 성격을 결정했다. 가입하려는 당은 개량주의자를 제거하고, 당명을 공산당으로 바꾸고, 코민테른 결의에 복종해야 했다. 이 조건은 각국에서 사회당의 분당을 강제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공산당이 이렇게 태어났다. 일상 지도는 집행위원회(ECCI)와 그 상설 기구가 맡았고, 자금과 요원이 모스크바에서 각국으로 나갔다. 초기의 전략 논쟁도 활발해서, 의회 참여를 거부하는 좌익에 맞서 레닌이 『'좌익' 소아병』을 쓴 것이 이 시기다.
기구는 어떻게 짜여 있었나
명목상 최고 기관은 세계대회였고, 대회와 대회 사이는 집행위원회(ECCI)가 지도했다. 실권은 갈수록 위로 올라가 상임간부회와 정치서기국이 일상 결정을 내렸고, 나라별 담당 서기국이 지역 단위로 지부를 관리했다. 눈에 덜 띄는 곳에는 국제연락부(OMS)가 있어 자금 전달, 여권 위조, 비밀 연락망 운영 같은 비합법 업무를 맡았다. 간부 양성 기관으로 국제레닌학교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이 모스크바에 있었고, 노동조합의 프로핀테른, 청년의 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농민의 크레스틴테른, 정치범 구원의 모프르 같은 부문별 위성 조직이 나란히 움직였다.
대회는 어떻게 이어졌나
세계대회는 모두 일곱 번 열렸다. 창립 대회(1919)는 선언에 가까웠고, 제2차 대회(1920)가 21개 조건과 민족·식민지 테제로 조직의 뼈대를 세웠다. 유럽 혁명의 물결이 물러가자 제3차 대회(1921)는 「대중 속으로」를 내걸고 통일전선 전술로 돌아섰으며, 제4차 대회(1922)가 이를 다듬었다. 레닌 사후의 제5차 대회(1924)는 각국 당의 볼셰비키화를 결의해 지부들을 소련식 당 모형에 맞춰 다시 짰다. 제6차 대회(1928)는 제3기 정세론과 사회파시즘론을 채택했고, 제7차 대회(1935)는 그 노선을 뒤집어 인민전선을 공식화했다. 규약이 정한 대회 주기는 일찍부터 지켜지지 않았고, 제7차 대회 이후 대회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노선은 어떻게 바뀌었나
코민테른의 역사는 노선 전환의 역사다. 초기의 공세 노선은 1921년 이후 통일전선 전술로, 1928년 제6차 대회에서는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제3기 노선으로, 1934년 이후에는 파시즘에 맞서 자유주의 세력까지 포괄하는 인민전선 노선으로 바뀌었다. 전환을 공식화한 것이 1935년 제7차 대회이고, 그 기조 보고가 디미트로프의 「파시즘의 공세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임무」다.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배외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자들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로 규정한 이 보고의 정의는 이후 공산주의 운동의 공식 규정으로 남았다. 소련의 공식 설명은 정세 변화에 따른 전술 조정이었다. 비판자들은 전환의 시점이 소련 국가의 필요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국사회주의 노선이 굳어진 뒤 코민테른의 우선순위는 세계혁명에서 소련 방위로 옮겨 갔고, 대숙청기에는 모스크바에 있던 각국 공산당 간부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식민지와 동방에서는 무엇을 했나
유럽 혁명이 물러간 뒤에도 코민테른은 식민지·반식민지 세계에 체계적으로 힘을 쏟은 유일한 국제 조직이었다. 1920년 바쿠에서 동방민족대회를 열어 동방의 피억압 인민에게 반제 투쟁을 호소했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과 국제레닌학교가 아시아 각국의 간부를 길렀다. 중국에서는 국민당과의 합작을 지도하다 1927년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파국을 맞았고, 이 실패는 소련 당내 투쟁의 화약이 되었다. 조선 운동과의 관계도 깊다. 코민테른은 1926년 조선공산당을 지부로 승인했으나, 파벌 투쟁이 그치지 않자 1928년 이른바 12월 테제로 당을 해체하고 노동자·농민 속에서 재건할 것을 지시했고, 한 나라 한 당 원칙에 따라 국외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소재국 당으로 옮겨 활동하게 했다. 베트남의 호치민, 인도의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처럼 식민지 세계의 혁명가 다수가 코민테른의 학교와 기구를 거쳐 갔다.
대숙청은 코민테른을 어떻게 지나갔나
1937~38년의 대숙청은 코민테른 본부를 정면으로 지나갔다. 모스크바에 망명해 있던 각국 공산당 간부는 소련 시민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처지였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쿤 벨러, 폴란드당 지도부 거의 전원, 독일·유고슬라비아·발트 당들의 중핵이 처형되었고, 1938년 폴란드공산당은 도발자들에게 장악되었다는 이유로 아예 해산되었다. 집행위원회 기구도 인사부를 통해 숙청 협력을 피하지 못했다. 파시즘을 피해 소련으로 온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서 목숨을 잃은 이 역설은 흐루쇼프 시대의 명예회복에 이르러서야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해산과 평가
1943년 5월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해산했다. 명분은 각국 당의 성숙이었지만, 미국과 영국에 보내는 신호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전후의 코민포름이 유럽 당들에 한정된 형태로 그 기능 일부를 이었다. 평가는 갈린다. 소련 사학은 코민테른을 반파시즘 투쟁과 식민지 해방운동의 학교로 기록했고, 실제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족해방운동 간부 다수가 그 학교에서 나왔다. 서방 학계와 트로츠키주의 전통은 각국 혁명운동의 자율성이 소련 국가 이익에 종속된 과정으로 읽는다. 아카이브 개방 이후의 연구는 두 측면이 모두 실재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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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용어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Kevin McDermott and Jeremy Agnew, The Comintern: A History of International Communism from Lenin to Stalin (Macmillan, 1996)
- Serge Wolikow, L'Internationale communiste 1919–1943 (Les Éditions de l'Atelier, 2010)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Marxists Internet Archive: history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 E. H. Carr, The Twilight of the Comintern, 1930–1935 (Macmillan, 1982)
- Александр Ватлин, Коминтерн: идеи, решения, судьбы (РОССПЭН,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