Československé legie / Чехословацкий корпус · 1914–1920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Czechoslovak Legion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결성한 의용군이다. 제국 러시아군 안의 부대로 출발해 러시아 제국 거주 체코인·슬로바키아인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로 출신으로 늘어났고, 1918년 1월 15일부터 프랑스 지휘부에 예속되었다. 1918년 5월 첼랴빈스크에서 볼셰비키 당국과 충돌한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반볼셰비키 진영에서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전 전선을 합치면 14만 명을 넘었고, 이 가운데 7만여 명이 러시아 전선에 있었다.

상세

정의와 발생

1914년 7월 25일 러시아의 체코 민족위원회가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했고, 같은 해 7월 30일 러시아 각료회의가 체코 부대(체스카 드루지나) 편성을 결정했다(8월 5일 총사령부 승인). 이 부대는 1914년 10월 제3군 전선에 배치되었고, 1915년 말 제1체코슬로바키아 소총연대(약 2,100명)로 확대되었으며 1916년에는 여단 규모가 되었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는 천천히 성장했다.

이 부대는 러시아 제국 안에 거주하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싸우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출신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들을 주된 인적 기반으로 했다. 1917년 2월 혁명 뒤에는 병력 규모가 빠르게 늘어 두 개 사단과 예비 여단으로 구성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1917년 9월 26일 러시아군 소속으로 정식 편성되었고, 당시 장교와 병사는 약 3만 9천 명이었다. 1918년 1월 15일부터 이 군단은 프랑스 지휘부에 형식적으로 예속되었다. 케렌스키 공세 때 즈보로프에서 보인 전투력은 사단 승격과 두 번째 사단 추가의 계기가 되었고, 제2사단은 1917년 10월에 편성되었다.

1918년 5월 봉기

1917년 11월 볼셰비키가 집권한 뒤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위원회 의장 마사리크는 군단을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빼내려 했고, 대부분의 러시아 항구가 봉쇄된 탓에 우크라이나에서 태평양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이 선택되었다. 첫 제대는 1918년 3월 27일 출발했고, 각 열차는 화차 40량씩 63개 편성이었다.

1918년 3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는 펜자 협정을 맺었다. 군단병은 무기의 대부분을 넘기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방해 없이 통과하기로 했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포로의 서방 송환을 우선시한 볼셰비키와 군단 사이에는 상호 불신이 남았다. 1918년 5월 14일 첼랴빈스크역에서 동쪽으로 가던 군단병과 서쪽으로 끌려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로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헝가리계 포로가 던진 난로 다리미에 체코 병사가 중상을 입자 군단병들은 열차를 세우고 가해자를 사살했고, 소비에트 당국은 다음 날 군단병 10명을 체포했으며, 5월 17일 동료들이 무력으로 구출하면서 지역 적위대를 무장해제하고 소총 2,800정과 포대를 빼앗았다.

트로츠키는 5월 25일 철도 연선의 체코슬로바키아 제대를 무장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무장한 군단병은 현장에서 총살하라고 위협했다. 첼랴빈스크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대회는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으며, 5월 25일부터 27일까지 마랴노프카·이르쿠츠크·즐라토우스트에서 적위대와 충돌이 일어났다.

내전으로

봉기는 1918년 5월 볼셰비키 당국에 대한 군단의 무장 행동에서 시작되어 1920년 시베리아에서 유럽으로의 철수까지 이어졌다. 봉기는 볼가·우랄·시베리아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전개되었고, 이는 볼셰비키가 먼저 가한 무장해제 위협에 대한 반응이었다. 5월 말 철도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져 6월이면 펜자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양측이 싸웠고, 6월 말에는 미하일 디테리흐스가 이끄는 군단병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으며, 9월 초에는 철도 전 구간에서 볼셰비키 세력을 몰아냈다. 5월 27일 보이체홉스키의 부대가 첼랴빈스크를, 5월 29일 체체크의 부대가 하루에 걸친 전투 끝에 펜자를 점령했고, 페트로파블롭스크·쿠르간·노보니콜라옙스크·마린스크·니즈네우딘스크·칸스크가 뒤따랐다. 볼셰비키는 이에 맞서 1918년 6월 13일 동부전선을 창설했는데, 이는 붉은 군대의 첫 전선 편성이었고 1920년 1월 15일 해체되었다. 동부전선의 각 군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코무치의 인민군, 시베리아군과 싸웠다.

군단의 승리는 최초의 반볼셰비키 정부들을 가능하게 했다. 1918년 6월 8일 사마라에 코무치가, 옴스크에 임시 시베리아 정부가 세워졌고, 러시아 각지에서 지역 반볼셰비키 정부 편성이 이어졌다. 코무치의 인민군은 체코슬로바키아 부대의 큰 도움을 받아 1918년 8월 6~7일 카잔을 점령하고 제정 러시아의 금 보유고를 확보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측의 압력은 시베리아 반볼셰비키 세력이 1918년 9월 우파에서 결성된 전러시아 임시정부 아래 명목상 통일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군단은 볼셰비키와만 싸운 것이 아니라 점령지에서 벌어진 대량 총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군단 문서는 러시아사에서 백군·체코군의 역할이 지닌 양의성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부대의 테러 때문에 기념비 사업이 종종 항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도 함께 지적한다.

콜차크 아래에서, 철수까지

1918년 가을 콜차크의 쿠데타 뒤 군단은 전선에서 빠져 시베리아 횡단철도 경비로 전환되었다. 군단 사령관 얀 시로비는 1919년 1월 27일 노보니콜라옙스크와 이르쿠츠크 사이 철도를 체코슬로바키아 작전 구역으로 선언해 시베리아 백군의 작전을 방해했다. 1918~1919년 겨울 군단은 노보니콜라옙스크와 이르쿠츠크 사이 철도를 빨치산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른 포로 출신 군단들과 함께 1919년 내내 콜차크의 유일한 보급로를 지켰다.

1920년 초 이르쿠츠크에서 시로비는 자무레츠 등 체코슬로바키아 열차의 동방 통과를 대가로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적색정치중심 대표들에게 넘기기로 합의했다. 콜차크는 2월에 처형되었고, 백군은 1919년 11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라돌라 가이다가 시도한 반란까지 들어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을 반역이라 비난했다. 1920년 2월 7일 쿠이툰역에서 붉은 군대 사령부와 러시아의 체코슬로바키아군은 극동으로의 통과와 철수를 보장하는 휴전에 서명했고, 금 보유고는 마지막 체코슬로바키아 제대가 이르쿠츠크를 동쪽으로 떠난 뒤 소비에트 측에 넘기기로 되어 3월 1일 이전이 이루어졌다.

군단은 1919년 12월부터 1920년 9월 사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로로 철수했다. 마지막 체코슬로바키아 부대는 1920년 9월 3일 미국 수송선 헤프런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고, 마지막 제대는 1920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다. 1919년 12월부터 배들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기 시작해 42척으로 72,644명이 유럽으로 수송되었으며(장교 3,004명, 사병·준사관 53,455명), 4천 명이 넘는 이들이 러시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구분과 평가

체코군단은 단일 부대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편성되었다. 러시아 제국군 안의 소규모 부대(1914년부터), 전쟁 개시 때부터 프랑스에서 편성된 체코 의용병 '나즈다르' 중대, 그리고 이탈리아와 세르비아에 뒤늦게 편성된 부대들이 있었고, 러시아 군단·프랑스 군단·이탈리아 군단은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위원회 아래의 별개 편성이었다. 체코어 체코슬로바키아 레기에(Československé legie)는 이 의용 편성 전체를 가리키는 데 비해, 러시아어 용법은 체코슬로바키아 레기오니(Чехословацкие легионы)와 러시아의 군단을 가리키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Чехословацкий корпус, 약칭 ЧСК)을 구분한다. 러시아어 군단 문서는 표제어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체코슬로바키아 레기온)'을 쓰고 약칭 очск, ЧСК, ЧСА를 함께 제시한다. 1917년 재편 뒤에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Československý sbor na Rusi)으로도 불렸다.

군단병 가운데 소수는 혁명 편에 섰다. 마사리크의 동의 아래 체코슬로바키아 부대에서도 볼셰비키 선전이 허용되었고, 야로슬라프 하셰크를 포함한 200명 남짓이 군단을 떠나 훗날 붉은 군대의 국제 여단에 합류했다. 여러 소련 역사가들은 군단의 행동을 협상국이 계획한 개입의 일환이라 보았으나,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이 설을 뒷받침할 문서상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문서에 따르면 협상국은 군단이 시베리아와 동부 러시아 대부분에서 이미 빠른 승리를 거둔 뒤에 그것을 이용해 볼셰비키와 싸웠으며, 봉기를 유발한 것은 아니었다.

군단병들의 이후 진로도 갈렸다. 얀 시로비를 비롯한 군단병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핵심이 되었고, 군단은 오늘날에도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으로 기념되지만, 점령지에서 벌어진 대량 총살과 이후의 논란들은 그 기억을 단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영어 위키백과는 군단의 러시아 탈출을 아케메네스 왕조 내전기의 그리스 용병 만인대에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는 적대 지역에 고립된 원정군이라는 전례를 가리키는 것이지 상황 자체가 같다는 뜻은 아니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comprehensive article on the Legion's formation, structure, WWI service, and role through the Russian Civil War
  2.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formation timeline, Penza Agreement, Chelyabinsk incident, and troop numbers by group in spring 1918
  3. 위키백과 (영문) dedicated article on the May 1918 revolt: Chelyabinsk clash, Trotsky's disarmament order, rapid seizure of the Trans-Siberian Railway, and the revolt's effect in triggering full-scale civil war
  4. thecollector.com TheCollector (Ilyas Benabdeljalil, Dec 2021): narrative of the Legion's origin, evacuation plan, the Chelyabinsk confrontation with Hungarian POWs, and the ensuing revolt
  5. 위키백과 (영문)
  6.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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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위키백과 (러시아어)
  11. thecollect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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