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중앙집권파
Group of Democratic Centralism
러시아 공산당 내부에서 당 권력의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당·소비에트 기관의 관료화, 기업의 1인 관리제에 반대한 반대파 분파다. 1919년 초에 형성되어 사프로노프·오신스키·스미르노프 등이 지도했다.
상세
어원과 형성
'민주중앙집권파'(러시아어: Группа демократического централизма, 데치스트)는 1918년의 좌익공산주의파로부터 인적 구성과 사상 모두에서 직접 이어져 나온 분파로, 1919년 초에 형성되어 처음에는 지방 소비에트와 당 기관 근무자들을 기반으로 했다. 지도부는 오래된 볼셰비키 지식인들로, 오볼렌스키-오신스키,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 티모페이 사프로노프, V. N. 막시몽스키, M. S. 보구슬라프스키, A. Z. 카멘스키, 이사크 다시콥스키, 라파일 파르프만 등이었다. 형성 시점에 대해서는 사료가 엇갈린다. 이 항목의 초기 1919년설 외에 제8차 당대회가 열린 1919년 3월설이 있고, 미셸 올리비에는 1918년 좌익공산주의파에서 1919년 12월에 나왔다고 본다.
강령과 활동
이들은 '민주적 중앙집권'을 '관료적 중앙집권'에 대립시켰다. 제9차 당대회(1920년 3~4월)에서 분파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러 톰스키와 유레네프 등 중진의 일부 지지를 받았으나 제안은 부결되었고, 오신스키는 중앙위원회 지침을 지역 조직을 통해 집행하되 그 조직의 자율성과 개별 업무 영역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적 중앙집권이라고 규정해 레닌의 정의에 맞섰다. 이들은 당과 소비에트 기관의 관료화, 기업의 1인 관리제에 반대하고 당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개적으로는 테르미도르 세력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1927년 6월 27일자 '15인 그룹' 강령을 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13인 강령'보다 급진적으로 작성했다. 새 조직은 당내 분파가 아니라 최대 5명 단위 세포로 이루어진 비합법적 네트워크로 건설되었고, '노동자 문제'라는 타자 인쇄 팸플릿과 1928~29년의 대중 전단 살포로 공장 노동자들에게 접근했다. 사프로노프는 1931년 유배지에서 쓴 '소부르주아 독재의 종말'에서 소련 경제체제를 '기형적 국가자본주의', 스탈린 체제를 소부르주아 독재로 규정했고, 이 저술은 훗날 재판에서 증거로 쓰였다.
다른 조류와의 구별
민주중앙집권파는 당과 국가의 의사결정에 더 많은 민주적 참여를 요구했지만 트로츠키나 노동반대파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았다. 노동반대파가 대부분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조합을 축으로 소비에트 국가로부터 독립한 노동조합의 생산 관리권을 요구한 반면, 민주중앙집권파는 중앙위원회와 당의 지도 기관 구성원이 다수였고 당·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었다. 이들은 1923년 반대파에 트로츠키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들어갔고, 1923년 소련 언론은 반대파를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라 '사프로노프와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지지자들'이라 불렀다. 1926년 가을에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의 노선, 특히 분파 활동을 철회한 1926년 10월 16일 공개 선언에 반발해 '볼셰비키-레닌주의자' 블록에서 이탈했다. 해산 시점도 논쟁적이다. 미셸 올리비에는 1921년 제10차 당대회 결정으로 다른 분파들과 함께 해산되었다고 보는 반면, 다른 사료들은 지도부가 당내에서 계속 활동하다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제명되었다고 본다.
탄압과 말로
1923년 이들은 46인 선언에 참여했고, 사프로노프 등 지도부는 그 '발기인'과 '핵심'으로 여겨졌다. 모스크바 본부는 막시몽스키가 묵던 내셔널 호텔의 아파트에서 모였고, 막시몽스키는 1924년 1월 하모브니체스키구 당 회의를 장악했다가 두 달 안에 밀려났다. 1926년 사프로노프와 스미르노프가 결성한 '15인 그룹'은 트로츠키·지노비예프·카메네프가 이끄는 통일반대파에 합류했고, 그 구성원들은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통일반대파의 나머지와 함께 제명되었다. 규모에 대해서는 GPU 수장 아그라노프가 1927년 당시 활동적인 데치스트 전원에게 '방 한 칸이면 충분했다'고 인정했을 만큼 당국이 과소평가했지만,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만 해도 약 500명이 있었고 이들 자신은 약 2천 명으로 추산했다. 1928년 3월 당 중앙통제위원회는 사프로노프파와의 투쟁을 위한 특별회의를 열었다.
제명된 지도부는 유배에서 정치고립소와 수용소로 옮겨졌고, 1930년대 초 GPU는 사프로노프파 지하조직을 파괴했다. 구성원들의 말로는 획일적이지 않았다. 사프로노프는 1937년 8월 10일 수감 중 다시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28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법정에서 최고형을 선고받고 그날 총살되었으며 1990년 3월 28일 복권되었다.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는 1937년 5월 26일 군사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했으나 그날 총살되었고 1960년 부분 복권, 1990년 완전 복권되었다. 오신스키는 1937년 10월 14일 체포되어 1938년 9월 1일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반면 주요 지도부의 한 사람인 막시몽스키는 1937년 7월 27일 체포되었으나 공식 기록상 1941년 11월 유배지에서 뇌출혈로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대숙청기에는 1920년대 중반에 이미 반대파에서 이탈했던 옛 데치스트들까지 총살되었고, 옛 구성원들은 1936~37년 보르쿠타와 콜리마 수용소의 단식투쟁과 저항에 참여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faction history, leaders, platform, and fate
- 위키백과 (러시아어) состав группы, платформа, политизоляторы и расстрел
- britannica.com Britannica entry: origin 1919–1920, leaders, joining Left Opposition, expulsion at 15th Congress
- historicalmaterialism.org Decists Working Group, primary documents, Sapronov letters from exile, Aleksei Gusev's 'The Left of the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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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co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