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stentialisme (Existenzphilosophie) · 1940년대–현재

실존주의

Existentialism

정해진 인간 본성이나 신이 부여한 목적 없이 먼저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 자기 선택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만들어 간다고 보는 철학 사조.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가 대표 명제이며, 1940~1950년대 프랑스에서 사르트르·보부아르·카뮈를 중심으로 크게 퍼졌다. 키르케고르와 니체가 선구자로, 야스퍼스와 하이데거의 독일 실존철학이 직접적 원천으로 꼽힌다. 마르크스주의와는 비판과 접근을 오가는 긴장 관계에 있었다.

상세

왜 실존주의는 전후 세대를 사로잡았나?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점령을 겪은 프랑스에서, 신도 역사의 필연도 인간을 구원해 주지 않는다는 느낌은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생활 감각이었다. 실존주의는 바로 그 상황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물었다. 대답은 이렇다.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으니, 각자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대로 자기 자신이 된다. 그 자유는 해방이면서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다.

이 생각은 소설과 희곡, 카페의 토론을 타고 대중에게 퍼졌다. 1945년 무렵부터 10년 남짓 파리 생제르맹데프레의 카페와 재즈 클럽은 ‘실존주의자’의 상징이 되었고,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이 흐름의 대표작으로 읽혔다. 공산주의 운동이 강했던 전후 프랑스에서 실존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지식인의 지지를 놓고 다투면서 동시에 대화한 사상이기도 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무슨 뜻인가?

‘실존주의’라는 말은 1940년대 중반 프랑스의 가톨릭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만들었다. 사르트르는 처음 이 꼬리표를 거부했지만, 1945년 10월 29일 파리의 ‘클럽 맹트낭’에서 한 강연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였고, 이 강연이 이듬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로 출간되어 실존주의를 대중에게 알렸다. 사르트르는 거기서 기독교 실존주의자(야스퍼스, 마르셀)와 무신론 실존주의자(하이데거, 자신)를 나누고, 둘의 공통점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곧 “주체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Ce qu'ils ont en commun, c'est simplement le fait qu'ils estiment que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ou, si vous voulez, qu'il faut partir de la subjectivité.

그는 종이 자르는 칼을 예로 들었다. 칼은 장인이 머릿속에 ‘종이칼’이라는 개념과 용도를 먼저 품고 만든 물건이므로, 그 본질이 존재보다 먼저 있다. 그러나 신이 없다면 인간을 미리 설계한 장인도 없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세상에 나타나고, 그 뒤에야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스스로 만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리다”라고 썼다. 같은 강연의 유명한 표현대로,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스스로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고받았고, 일단 세상에 던져진 뒤로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l'homme n'est rien d'autre que ce qu'il se fait. Tel est le premier principe de l'existentialisme.

이 생각의 이론적 토대는 1943년의 『존재와 무』다. 사르트르는 스스로를 넘어서는 의식(대자존재)과 그저 있는 사물(즉자존재)을 구분하고, 자유에서 도망치려 자기를 사물처럼 여기는 태도를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 불렀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1949)에서 같은 틀로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라는 분석을 펼쳐, 여성의 ‘본질’로 여겨지던 것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졌음을 보였다.

니체와 독일 실존철학은 어떤 자리에 있나?

실존주의라는 이름은 20세기 중반에 생겼지만, 그 뿌리로는 19세기의 쇠렌 키르케고르와 프리드리히 니체가 꼽힌다. 둘 다 이 말을 쓰지 않았지만, 체계적 이성이 개인의 구체적 삶을 놓친다고 비판했고 의미의 상실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특히 니체의 ‘신의 죽음’은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실존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르트르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라는 가정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니체가 던진 물음을 이어받은 것이다.

독일에서는 정신의학자이자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가 키르케고르와 니체에게서 크게 영향받은 자기 철학을 ‘실존철학’(Existenzphilosophie)이라 불렀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은 인간을 ‘현존재’로 분석하며 불안, 죽음을 향한 존재, 내던져져 있음 같은 개념을 내놓았고, 사르트르는 이를 크게 빌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1946년 장 보프레에게 보낸 편지(뒤에 「휴머니즘 서간」으로 출간)에서 사르트르가 자신을 주체성의 철학으로 잘못 읽었다고 거리를 두었다. 알베르 카뮈도 자신을 실존주의자로 여기지 않았고,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을 따로 내세웠다. 실존주의는 이처럼 하나의 학파라기보다 이름을 거부한 사람들까지 한데 묶인 넓은 흐름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실존주의를 어떻게 보았나?

사르트르의 1945년 강연 자체가 공산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는 첫머리에서 실존주의가 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절망의 정적주의이고 결국 부르주아 철학으로 돌아간다는 비난, 고립된 개인의 주체성에서 출발하므로 인간의 연대를 놓친다는 비난을 소개하며 “이것이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비난”이라고 적었다. 프랑스 공산당 쪽 지식인들은 실존주의를 패배한 소부르주아의 철학으로 보았고, 강연 뒤 토론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 피에르 나빌이 사르트르를 비판했다.

Ce sont surtout là les reproches des communistes.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는 1948년 프랑스어로 나온 『실존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에서 실존주의를 반박했다. 루카치에게 실존주의는 위기에 빠진 부르주아 지식인이 객관적 역사를 외면하고 고립된 개인의 내면으로 도망치는 사상이었고, 그는 이를 뒤에 『이성의 파괴』(1954)에서 다룬 독일 비합리주의의 계보와 이어 보았다.

그러나 관계는 적대만이 아니었다. 사르트르는 1950년대에 공산당의 동반자로 활동했고, 1960년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화해시키려 했다. 그는 이 책의 서론 격인 「방법의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철학이라고 부르고, 실존주의는 그 안에서 살아 있는 개인을 되살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자리매김했다. 이 시도는 1960년대 프랑스에서 구조주의와 알튀세르의 ‘이론적 반(反)인간주의’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그 논쟁에서 후기구조주의가 자라났다.

관련 인물

출처

  1. Jean-Paul Sartre,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Paris: Nagel, 1946
  2. de.wikipedia.org
  3. 위키백과 (영문)
  4. fr.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