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바라주의
Guevarism
체 게바라의 혁명 이론과 실천에서 나온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한 조류. 핵심은 포코 이론으로, 객관적 조건이 있는 나라에서는 농촌에 자리 잡은 소수의 게릴라 「포코」가 전위가 되어 주관적 조건을 스스로 만들고 전반적 봉기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물질적 유인 대신 도덕적 유인과 자원노동으로 길러지는 「새로운 인간」, 시장을 빨리 넘어서려는 예산재원제, 「둘, 셋, 많은 베트남」을 외친 무장 국제주의가 더해졌다. 프랑스의 레지 드브레가 1967년 『혁명 속의 혁명?』으로 이를 체계화했다.
상세
명칭과 성립
게바라주의는 1959년 쿠바 혁명의 승리 이후 아르헨티나 출신의 게바라가 자신의 경험을 다른 나라가 따를 수 있는 모델로 정식화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스페인어권에서는 「게바리스모」, 그 군사 이론은 「포키스모」라 부른다. 게바라는 1959년 1월부터 『게릴라전』을 쓰기 시작해 1961년 쿠바에서 출간했다. 책은 1956년 12월 그란마호를 타고 상륙한 82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바티스타 정부군을 상대로 벌인 2년간의 게릴라전을 일반화한 교본이었다. 게바라는 혁명 직후 쓴 글들에서 농촌 게릴라를 혁명의 주력으로 내세웠고, 이 서사는 새 정부의 건국 신화가 되었다.
포코 이론
『게릴라전』은 쿠바 혁명의 세 가지 교훈을 내세웠다. 인민의 군대는 정규군을 이길 수 있고, 혁명의 조건이 다 갖추어지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봉기 세력이 그 조건을 만들 수 있으며, 아메리카의 저개발 지역에서 게릴라의 기본 무대는 농촌이라는 것이다. 게바라는 1917년 10월 혁명처럼 프롤레타리아가 이끄는 레닌주의적 봉기가 아니라 농촌에서 힘을 키운 민중 봉기를 상정했고, 포코는 국가기구를 직접 장악하기보다 주민의 사기를 북돋우는 전위로 여겼다. 처음에는 포코가 개인 독재 정권에만 통하며 합법적 투쟁의 길이 다한 뒤에야 무장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보았으나, 뒤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모든 나라에 적용된다고 주장을 넓혔다.
새로운 인간과 경제 사상
게바라는 혁명이 구조뿐 아니라 사람의 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새로운 인간」은 이기심을 넘어 연대와 자기희생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이를 기르는 수단으로 자원노동과 도덕적 유인을 내세웠다. 공업부 장관으로서 그는 기업의 이윤을 모두 국가 예산에 넣고 손실은 국가가 메우는 예산재원제를 옹호했으며, 가치법칙과 물질적 유인에 기대는 소련과 동유럽의 방식을 자본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이 입장은 쿠바 대논쟁에서 소련식 독립채산제와 맞섰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예술 표현의 구속복이라 했고, 1966년에는 스탈린의 역사적 범죄가 공산주의 교육을 경시하고 권위 숭배를 세운 데 있다고 썼다.
무장 국제주의
게바라에게 제3세계의 저개발은 제국주의의 결과였고, 처방은 세계 혁명이었다. 1965년 2월 알제 연설에서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서방의 착취에 묵시적으로 공모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곧 쿠바 공직에서 사라졌다. 그해 콩고에서 로랑데지레 카빌라의 반군에게 포코 전략을 가르쳤으나 실패했고, 다시 볼리비아에 소규모 게릴라대를 세웠다가 1967년 10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그가 트리콘티넨탈 회의에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둘, 셋, 많은 베트남」을 만들자는 호소로 기억된다.
구별: 마오주의와 정통 공산당
포코 이론은 마오쩌둥의 지구적 인민전쟁에서 영감을 받았고, 농민과 토지개혁을 중시한 점에서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보다 마오주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근거지를 다지며 확장하는 마오의 지구전과 달리, 게바라는 게릴라의 지도력과 대담한 기습이 전반적 봉기를 불러온다고 강조했다. 게바라 자신은 마오의 게릴라전 저작을 읽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바티스타와의 정면 대결에서 물러섰던 쿠바 인민사회당의 경험 때문에, 게바라주의는 기존 공산당이라는 전위 정당 자리에 포코를 놓았다. 이것이 평화공존을 내건 소련 노선과 각국 공산당이 게바라주의와 부딪친 지점이다.
드브레의 체계화와 그 뒤
아바나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프랑스의 레지 드브레는 1967년 『혁명 속의 혁명?』으로 포코 이론을 하나의 통일된 이론 틀로 만들려 했다. 그는 그해 4월 볼리비아 무유팜파에서 체포되어 30년형을 받았다가 1970년 국제 캠페인으로 풀려났고, 뒤에 이 입장과 결별했다. 게바라의 죽음 뒤 쿠바는 게릴라 수출을 외교 수단에서 내려놓고 소련식 체제 정비로 돌아섰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인민혁명군, 우루과이의 투파마로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등 1960~1970년대 여러 조직이 게바라주의를 내걸었다. 도시 게릴라를 주장한 아브라암 기옌과 투파마로스는 농촌 포코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고, 1975년 아르헨티나 투쿠만의 포코는 군의 진압으로 무너졌다. 쿠바는 1986~1992년의 「오류 시정」 운동에서 다시 게바라의 도덕적 유인을 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