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검은 노트」
Heidegger's Black Notebooks
마르틴 하이데거가 1931년부터 1970년까지 검은 방수포 표지 공책에 적은 사유 일지(Schwarze Hefte). 사후 출간을 전제로 썼다. 2014년부터 페터 트라우니가 엮어 하이데거 전집 제94~102권으로 나왔다. 1938~1948년 무렵의 공책에 ‘세계유대교’ 같은 유대인에 관한 서술이 있어,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와 민족사회주의 관여가 그의 철학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하이데거 연구자 다수는 해당 대목을 반유대주의로 본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철학 전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해석이 갈린다.
상세
「검은 노트」는 어떤 기록인가?
「검은 노트」(Schwarze Hefte)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검은 방수포로 싼 공책에 적어 둔 사유 일지다. 이름은 표지 색깔에서 왔다. 하이데거 자신도 메모에서 ‘검은 공책의 기록’이라는 말을 썼다. 공책 크기는 대략 가로 13.6센티미터, 세로 19.2센티미터다. 하이데거는 이 공책을 ‘작업장 기록’이라고 불렀다. 그의 조교였던 프리드리히빌헬름 폰 헤르만에 따르면 공책은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었고, 하이데거는 밤에 자기 전에 여기에 글을 썼다.
공책에는 대체로 단순한 제목이 붙어 있다. ‘숙고’(Überlegungen) 열다섯 권, ‘주석’(Anmerkungen) 아홉 권, 그리고 ‘네 권의 공책’, ‘눈짓’(Winke), ‘잠정적인 것’(Vorläufiges) 등이다. 하이데거는 이 짧은 스케치들로 ‘존재’와 ‘인간됨’이 솟아오르고 몰락하고 다시 솟아오르는 거대한 이야기를 그리려 했다. 동시에 “지금 일어나는 일”을 드러내겠다고 자부했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쓴 사적인 일기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처음부터 이 공책을 자기 전집의 맨 끝에 사후 출간할 생각으로 썼다.
언제, 어떻게 출간되었나?
2013년 하이데거 전집의 공동 편집자인 철학자 페터 트라우니가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검은 노트」의 출간을 예고했다. 트라우니가 일부 발췌를 미리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알렸고, 그들이 이를 공개하면서 2013년 중반부터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2013년 12월부터는 독일 언론도 논쟁에 뛰어들었다.
첫 세 권은 2014년 2~3월에 하이데거 전집 제94권(1931~1938), 제95권(1938/39), 제96권(1939~1941)으로 나왔다. 2015년 3월에는 제97권(1942~1948)이 나왔다. 여기에는 출간 직전에 개인 소장품에서 발견된 공책 「주석 I」도 실렸다. 이 공책은 하이데거가 하이데거 연구자 질비오 피에타의 어머니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피에타는 이 공책에 “유대인에 반대하는 문장은 단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고, 편집자 트라우니는 이를 반박했다. 출간은 계속되어 1963~1970년의 공책을 담은 제102권이 마지막 권이 되었다. 가장 첫 공책인 「숙고 I」은 지금도 행방을 모른다.
몇 가지 기본 정보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독일어판 위키백과는 작성 기간을 1931~1975년, 공책 수를 33권으로 적는다. 영어판 위키백과는 1931년 10월~1970년, 34권으로 적었다가 같은 글 안에서 출판사 자료를 들어 33권, 아홉 권, 3384쪽이라고도 적는다. 실제 출간된 권은 1963~1970년 공책(제102권)에서 끝난다.
무엇이 쓰여 있나?
독일어판 위키백과의 정리에 따르면 공책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숙고 II~VI」(1931~1938)은 1933/34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직을 맡기로 한 결정을 다룬다. 「숙고 VII~XI」(1938/39)에서는 볼셰비즘과 인종 이론이 모두 ‘계략’(Machenschaft)의 구현으로 비판된다. 여기서 ‘유대교’가 처음으로 문제적인 방식으로 등장한다. 「숙고 XII~XV」(1939~1941)는 세계대전과 일상을 모든 삶의 영역에 퍼진 ‘계략’의 징후로 해석한다. 「주석 I~V」(1942~1948)는 독일인의 정신적 몰락을 해석하고, 유대교에 대한 또 다른 문제적 발언을 담고 있다. 하이데거는 전후를 존재의 역사에서 ‘다른 시작’을 열어야 할 독일의 사명을 스스로 배반한 시기로 받아들였다.
‘계략’은 하이데거 후기 사상의 핵심어다. 대략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획하고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근대 기술 문명의 지배 방식을 가리킨다. 문제는 그가 이 ‘계략’을 특정 민족, 곧 유대인과 결부했다는 데 있다.
확인된 사실은 무엇인가?
논쟁에서는 문헌으로 확인되는 사실과 해석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공책과 관련 문헌에서 확인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38~1941년과 1941~1948년 공책에서 하이데거는 유대교, ‘유대 족속’(Judenschaft), ‘세계유대교’(Weltjudentum)에 관해 쓴다.
- 1940년 무렵의 한 메모에서 하이데거는 세계유대교의 역할을 묻는 것이 “인종적 물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물음”이라고 쓴다. 곧 어떤 종류의 인간됨이 아무 데도 매이지 않은 채 모든 존재자를 존재에서 뿌리 뽑는 일을 ‘세계사적’ 과제로 떠맡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라는 것이다.
- 다른 대목에서 그는 제국주의적·전쟁적 사고방식과 인류주의적·평화주의적 사고방식, 곧 전체주의 국가와 민주주의의 사고방식이 모두 형이상학에 속한다고 쓴다. 그래서 ‘국제 유대교’가 둘 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1937년의 한 대목은 ‘무근거성’을 명시적으로 ‘유대교’와 연결하고, 그것을 존재 대신 공허한 계산을 하는 것으로 그린다. 또 다른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계산적인 것이 유대인의 힘을 키운다고 쓰며, 그 유대인 가운데 1886년 기독교로 개종한 자신의 스승 에드문트 후설도 넣는다.
- 1946년의 「주석 II」에서는 위대한 예언자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이 언급이 ‘반유대주의’와는 상관없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공책 밖의 기록도 있다. 하이데거는 1933년 4월 21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1일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해 정권이 끝날 때까지 당원으로 있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기리는 연설을 했고, 1933년 11월 라이프치히에서는 독일 교수들의 히틀러 지지 선언을 이끄는 연설을 했다. 동료 교수 두 명(유대인 한 명, 비유대인 한 명)을 밀고하기도 했다. 반면 총장으로서 몇몇 유대인 대학 구성원의 처지를 덜어 주려 애쓴 경우도 있었다. 1934년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한스 프랑크가 세운 법철학 위원회에서 적어도 1936년까지 활동했다. 1932년 카를 야스퍼스가 「시온 장로 의정서」를 “악의적인 헛소리”라고 하자 하이데거는 “그래도 유대인의 위험한 국제적 결속은 있다”고 대답했다고 야스퍼스는 전한다. 전쟁 뒤 하이데거에게는 1951년 정년까지 강의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해석은 어떻게 갈리나?
독일어판 위키백과의 정리에 따르면, 하이데거 연구의 대부분은 해당 대목을 반유대주의로 본다. 다만 그 반유대주의를 어떻게 규정할지가 갈린다.
일부 연구자는 ‘존재사적 반유대주의’ 또는 ‘형이상학적 반유대주의’라는 말을 쓴다. 하이데거가 유대인을 생물학적 인종으로가 아니라 존재의 역사 속에서 ‘계략’과 뿌리 없음을 떠맡은 형이상학적 형상으로 다뤘다는 뜻이다. 편집자 트라우니는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가 사생활에 그치지 않고 그의 존재사 철학까지 오염시켰다고 본다. 한편 트라우니 자신은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에 무비판적인 태도가 편집에 배어들었다는 비난도 받았다. 이 표현에는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를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떼어 놓으려는 시도라는 비판이 따른다. 더 나아가 해당 인용들이 ‘절멸적 반유대주의’와 이어지며 하이데거가 ‘최종 해결’을 지지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반대편에서는 하이데거가 ‘순진한 인종주의 추종자’는 아니었다고 반박한다. 하이데거 학회장을 지낸 헬무트 페터는 그의 태도를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종교적인 ‘반유대교’로 보았다.
영어권 논쟁도 비슷하게 나뉜다. 「검은 노트」가 공개를 전제하지 않은 ‘스케치’라는 점을 들어 무게를 낮추는 쪽이 있다. 헤수스 아드리안 에스쿠데로는 인종적·사회적·정치적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당대 독일 철학의 개념을 쓰는 방식에서만 나타나는 반유대주의라고 보았다. 반면 애덤 놀스는 하이데거가 「검은 노트」에서 민족주의적(völkisch) 반유대주의에 깊이 철학적으로 몰두했다고 기록한다. 이탈리아 철학자 도나텔라 디 체사레의 『하이데거, 유대인, 쇼아』(2016)도 이 논쟁의 주요 저작이다. 이 문제를 아예 열린 채로 두는 연구자도 있다.
어떤 파장이 있었나?
2015년 1월 프라이부르크 대학 철학 교수 귄터 피갈은 마르틴 하이데거 학회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검은 노트」의 반유대주의적 대목을 보고 나니 학회장으로서 하이데거를 공식적으로 대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독일에서는 하이데거의 이름을 딴 기관과 거리 이름을 바꾸라는 요구가 나왔다. 프라이부르크 시의회는 2018년 전문가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마르틴 하이데거 길’의 개명을 원칙적으로 결정했다. 위원회 보고서는 「검은 노트」의 출간으로 하이데거의 정치적 역할과 신념에 대한 검토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썼다. 2020년 이 길은 ‘오베러 하르부크 길’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이데거 전집의 편집 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전집에는 독립적인 학술 편집 위원회가 없고 가족이 편집자를 정한다. 그래서 출간 순서와 원고 공개를 가족과 그들이 지명한 편집자가 쥐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2014년 언론인 에게르트 블룸은 제69권 『존재의 역사』의 초판에서 “유대 족속이 행성적 범죄에 미리 정해져 있다”는 문장이 빠졌다고 폭로했다. 이 문장은 1998년 젊은 편집자였던 트라우니가 선임 편집자 폰 헤르만의 지시로 삭제한 것이었고, 2015년 제3판에서야 되살아났다. 리처드 월린은 유고 관리자와 편집자들이 친나치적·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체계적으로 지웠다고 주장했다. 출판사 비토리오 클로스터만은 이에 반론을 냈다.
마르쿠제와 주고받은 편지는 무엇을 보여 주나?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1947년 그에게 편지를 보내 민족사회주의와 공개적으로 거리를 두라고 요구했다. 하이데거는 1948년 1월 20일 답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로 그는 나치 추종자들이 “가장 역겨운 방식으로” 변절을 내보였고 자신은 그들과 아무 공통점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같은 답장에서 그는 연합국이 세계가 보는 앞에서 ‘동독인’들을 죽일 수 있었던 반면 유대인 학살은 나치가 숨겼다고 썼다. 이 대목은 아우슈비츠와 독일인 추방을 저울질한 것으로 읽혀 지금도 논란이 된다. 마르쿠제는 1948년 5월 13일 답장에서, 하이데거가 민족사회주의에 의한 ‘정신적 갱신’을 말한 것은 “서양 사유의 청산을 그 갱신과 혼동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연락을 끊었다. 이 편지들은 「검은 노트」보다 70년 가까이 앞서, 하이데거의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미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해석인가?
정리하면 이렇다. 하이데거가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했고, 총장으로서 정권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으며, 「검은 노트」에 ‘세계유대교’에 관한 문장들을 썼다는 것은 문헌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 문장들을 반유대주의로 보는 것이 연구의 다수 견해라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그 반유대주의가 『존재와 시간』을 비롯한 그의 철학 전체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는지, 그것을 ‘형이상학적’이라 부르는 것이 설명인지 변명인지, 그의 사상에서 무엇을 지금도 쓸 수 있는지는 해석의 영역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하이데거 연구와 그를 받아들인 좌파 사상, 곧 하이데거적 마르크스주의부터 프랑스 현상학까지가 지금도 다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