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파르트
Istpart
소비에트 당사(黨史) 편찬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연구기관으로, 정식 명칭은 '10월혁명 및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역사 위원회'이다. 1920년 미하일 올민스키의 주도로 창설되어 중앙 및 전국 70여 개 지방 뷰로를 통해 당원 회고록·문서를 수집·보관·출판했으며, 1921년부터 기관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를 발행했다. 1928년 레닌 연구소와 통합되어 독립기관으로서의 활동을 마감했으나, 1939년까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산하 부서로 존속하며 지역 이스트파르트를 지휘했다.
상세
창설과 조직
이스트파르트는 1920년 8월 각료평의회가 채택한 '10월혁명 및 러시아공산당 역사 자료 수집·연구 위원회 설치에 관한 결정'에 따라 창설되었다. 미하일 올민스키가 제안한 약칭이며, 처음에는 국립출판사 산하 부서로 출발해 같은 해 9월 인민교육위원회로, 1921년 12월 1일에는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직속 부서로 옮겨졌다. 레닌은 1920년 여름 미하일 포크롭스키에게 당의 공식 역사 편찬을 맡기면서 올민스키와 공동 작업하도록 지시했는데, 포크롭스키가 학술 연구를, 올민스키가 대중적 선전과 노볼셰비키 회고록 출판을 우선한 데서 초기의 노선 갈등이 비롯되었다.
기관은 평의회와 간부회(의장 올민스키, 부의장 포크롭스키, 서기 아도라츠키)가 이끌었고, 10월혁명사와 당사 두 분과를 두었다. 1921년 12월 3일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중앙 이스트파르트의 정원은 60명, 각 지방 뷰로는 2명으로 정해졌다. 지방 조직은 1921년 말 21개에서 1922년 중반 72개로 늘었으며 1925년 72개, 1927년 초 86개에 이르렀다가 1928년 10월 38개로 급감했다. 지방 이스트파르트는 중앙이 아니라 지역 당위원회에서 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중앙의 의제를 반드시 따르지는 않았고, 1920년대 전반에는 공식 정설과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수집·연구와 출판
1920년 9월 21일 결정은 국내외의 인쇄물과 필사본 등 모든 유형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이용을 위한 전문 문서고와 도서관을 조직하도록 규정했다. 1924년 4월 만들어진 이스트파르트 문서고는 1920년대 말 6만 점 이상의 문서를 소장했고, 제네바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문서고와 쿠클린 도서관 장서 일부를 포함했다. 기관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는 1921년 10월 창간되어 1941년까지 발행되었으며, 페트로그라드 뷰로의 『크라스나야 레토피스』(192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이스트파르트의 『혁명의 연대기』, 카잔 뷰로의 『혁명의 길』 등 30종이 넘는 잡지와 논집이 간행되었다.
수집과 연구는 처음부터 정치적 요구와 충돌했다. 레닌 연구소는 1923년 창설되면서 중앙위원회 자원을 두고 이스트파르트와 경쟁했고, 1923~1928년 이스트파르트는 2만 5천 점이 넘는 문서를 연구소에 넘겨야 했다. 1924년부터 이스트파르트는 중앙위원회 지도부의 당내 반대파 공격에 가담했으며, 올민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트로츠키의 편지를 공개해 반대파를 공격하는 데 이용했다. 1925년 1월 올민스키의 건강 악화로 세묜 카나치코프가 지도자가 되면서, 지방 이스트파르트에 실제 볼셰비키 활동 여부와 무관하게 당의 역할을 부각하라는 지령이 내려갔다. 1927년 1월 제4차 회의에서는 역사를 학문으로 옹호하는 목소리가 거의 사라지고 정치화가 요구되었고, 1929~1931년에는 문서에 기초해 서술한 비마르크스주의 역사가 100여 명이 체포·수감되었다. 1927년 2월부터 1929년 10월까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지시로 당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문서 2만 5천 톤이 파기되었는데, 뱌트카 이스트파르트는 이 가운데 101톤을 펄프용으로 넘겼다.
해체와 유산
1928년 5월 10일과 8월 20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이스트파르트는 레닌 연구소에 통합되어 독립 기관으로서의 활동을 마감했다. 지방 이스트파르트망은 100개에서 26개로 줄었고, 1931년까지 주요 지방 조직은 당사 연구소로 개편되었다. 이스트파르트는 1928~1931년 레닌 연구소의 학술 부서로, 1931~1939년에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ИМЭЛ)의 부서로 존속하며 지방 조직을 지도·통제했고,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는 1941년까지 연구소 기관지로 발행되었다.
1939년 12월 2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지방 당 문서고와 이스트파르트 기관에 관한' 결정을 채택해 당 문서고를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에서 각급 지방 당위원회와 연방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로 이관하고 지역 이스트파르트를 폐지했으며, 그 기능과 문서는 당 문서고로 넘어갔다. 페트로그라드 이스트파르트는 1929년 레닌그라드 당 문서고로, 1930년에는 레닌그라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연구소로 개편되어 1990년까지 존속했고, 모스크바 이스트파르트도 1934년 당사 연구소로 개편되어 1990년까지 남았다.
사학사적 평가
이스트파르트는 레닌 연구소,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와 함께 '이데올로기적 정전'을 만든 기관으로 평가된다. 프레드릭 코니는 참가자들의 회고를 1903년 분열 이후 레닌의 지도로 이어진 당 발전의 단일한 목적론으로 엮어냈다고 본다. 래리 홈스는 1920년대에 학문과 정치의 공생에 대한 초기 신념이 무너져 내렸고, 이스트파르트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당 권력을 정당화하는 1917년의 총체적 서사를 요구했다고 평가한다.
동시에 이스트파르트는 초기 수년 동안 문서 수집과 산출물에서 실질적 성과를 남겼다. 기관은 볼셰비키뿐 아니라 멘셰비키·사회혁명당원·분트주의자들의 회고를 모아 출판하는 보조 조직을 운영했고, 알렉산드르 슐랴프니코프가 1917년에 관해 문서에 충실한 연구를 쓰도록 지원했다. 뱌트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 조직은 실제 사료에 근거해 중앙이 요구한 서사와 다른 지역사를 내놓았고, 1927년 8월 뱌트카가 펴낸 논집은 볼셰비키의 지역 내 지도력과 역량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앙의 불만을 샀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full institutional history, structure, leadership, and timeline of Istpart (1920–1928 as independent body, merged into Lenin Institute 1928, dissolved 1939)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establishment by Lenin, Olminsky/Pokrovsky rivalry, 72 local bureaus by mid-1922, Proletarskaia revoliutsiia journal, merger with Lenin Institute
- historicalmaterialism.org Barbara C. Allen review of Larry E. Holmes's Revising the Revolution (2021): scholarly assessment of Istpart's inherent tension between scholarship and party politics, personal rivalries between Olminsky and Pokrovsky, and Istpart's role in constructing an ideological canon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historicalmaterialis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