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효용 혁명
Marginal Revolution
1871~1874년 영국의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 오스트리아의 카를 멩거, 스위스 로잔의 레옹 발라가 서로 따로 내놓은 이론 전환. 재화의 가치는 생산에 든 노동이나 비용이 아니라 소비자가 마지막 한 단위에서 얻는 효용, 곧 한계효용이 정한다고 보았다.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대신해 오늘날 신고전파 경제학의 바탕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는 루돌프 힐퍼딩(1904)과 니콜라이 부하린(『유한계급의 경제학』, 1914년 집필·1919년 출간)이 개인의 주관적 평가에서 출발해 사회적 생산관계를 지운다고 비판했다.
상세
무엇이 바뀌었나?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이은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를 생산 쪽에서 설명했다. 상품을 만드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가치를 정한다는 노동가치론이다. 고전파를 괴롭힌 수수께끼 하나가 “물과 다이아몬드의 역설”이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지만 값이 싸고, 다이아몬드는 장식품일 뿐인데 값이 비싸다.
한계효용 이론은 이 역설을 소비 쪽에서 풀었다. 중요한 것은 물 전체의 쓸모가 아니라 지금 손에 더 들어오거나 빠져나가는 “마지막 한 단위”의 쓸모라는 것이다. 설명용 가정으로 숫자를 들어 보자. 목마른 사람에게 첫 컵의 물은 만족도 10, 둘째 컵은 6, 셋째 컵은 3, 넷째 컵은 1을 준다. 이처럼 같은 재화를 더 가질수록 추가 한 단위의 만족이 줄어드는 것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다. 물이 넘쳐나는 곳에서 사람들은 이미 여러 컵을 가졌으므로 한 컵을 더 얻거나 잃어도 만족이 거의 바뀌지 않는다. 다이아몬드는 드물어 한 개를 얻거나 잃는 차이가 크다. 그래서 값은 전체의 쓸모가 아니라 한계에서의 쓸모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 전환으로 경제학의 관심은 생산과 분배의 계급 관계에서, 주어진 자원을 개인의 선호에 따라 어떻게 배분하는가로 옮겨 갔다.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이 “경제학”으로 바뀐 것도 이 흐름과 함께였다.
세 사람은 각각 무엇을 썼나?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1862년 발표하고 1863년 출간한 「정치경제학의 일반 수학 이론」에서 처음 이론을 내놓았고, 1871년 『정치경제학 이론』으로 완성했다. 그는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전통에 서 있었지만 “가치는 전적으로 효용에 달려 있다”고 강조해 고전파 선배들과 갈라섰다. 카를 멩거는 같은 1871년 『국민경제학 원리』를 내놓았다. 그는 개인이 여러 용도에 순위를 매기고 한계효용으로 선택한다고 설명했고, 그를 따른 사람들은 오스트리아학파 또는 빈 학파로 불린다. 레옹 발라는 1874년 『순수정치경제학 요론』 1부를 비교적 수학적인 방식으로 펴냈다. 당시에는 읽는 사람이 적었지만 20년 뒤 파레토와 바로네가 이어받아, 모든 시장이 동시에 균형을 이루는 일반균형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세 사람의 작업이 주류가 된 것은 2세대 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와 프리드리히 폰 비저, 영국의 필립 윅스티드와 앨프리드 마셜, 스위스의 빌프레도 파레토, 미국의 존 베이츠 클라크 등이다. 뵘바베르크는 한계효용 체감과 시간 선호로 이자와 이윤을 설명했고, 마셜은 1890년 『경제학 원리』에서 한계효용으로 수요를, 비용으로 공급을 설명해 오늘날 교과서의 수요·공급 곡선을 세웠다. 클라크 등은 같은 한계 원리를 분배에 적용해, 각 생산요소가 마지막 한 단위의 기여만큼 받는다는 한계생산력설을 만들었다. 1930년대 힉스와 앨런은 효용을 숫자로 재지 않아도 되는 무차별곡선 분석으로 이론을 다시 짰다.
마르크스와는 어떤 관계였나?
『자본』 1권은 1867년 7월에 나왔고, 제번스·멩거·발라의 작업은 그 무렵 이미 쓰였거나 진행 중이었다. 당시 마르크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으므로 이들이 마르크스를 겨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한계주의가 노동운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그리고 그 앞의 리카도파 사회주의 착취론의 부상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해석도 널리 퍼져 있다. 에르네스토 스크레판티와 스테파노 차마니는 한계주의가 1873년 이후 장기 불황과 계급 갈등의 재연에 대해, 자유시장을 자원을 최적으로 배분하는 완전한 체제로 그리고 그 부작용을 노동자 단결의 간섭 탓으로 돌릴 수 있게 해 준 이론이었다고 본다.
다음 세대는 직접 마르크스를 겨냥했다. 첫 비판은 윅스티드의 「마르크스의 가치론」(1884)이었고, 가장 유명한 것은 뵘바베르크의 『마르크스 체계의 종결』(1896)이다. 뵘바베르크는 『자본』 3권의 이윤율과 생산가격이 1권의 가치론과 모순된다고 주장했고, 이 비판은 이후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의 “고전”이 되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쪽에서 말하는 전형 문제 논쟁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다.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반박했나?
마르크스 자신은 한계주의가 주류가 되기 전에 죽었지만, 『자본』 3권에서 수요와 공급으로 장기적인 시장가치를 설명하는 방식을 이렇게 물리쳤다.
수요와 공급이 같으면 둘은 작용을 멈추고, 바로 그 때문에 상품은 시장가치대로 팔린다. 두 힘이 반대 방향으로 똑같이 작용하면 서로 상쇄되어 밖으로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이 두 힘의 작용 말고 다른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면 둘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시장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왜 시장가치가 하필 이 금액으로 표현되고 다른 금액으로는 표현되지 않는지에 대해 우리를 더욱 어둠 속에 남겨 둔다.
If supply equals demand, they cease to act, and for this very reason commodities are sold at their market-values. Whenever two forces operate equally in opposite directions, they balance one another, exert no outside influence, and any phenomena taking place in these circumstances must be explained by causes other than the effect of these two forces. If supply and demand balance one another, they cease to explain anything, do not affect market-values, and therefore leave us so much more in the dark about the reasons why the market-value is expressed in just this sum of money and no other.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루돌프 힐퍼딩은 1904년 「뵘바베르크의 마르크스 비판」에서 뵘바베르크를 반박했다. 그는 심리학파가 경제 현상의 사회적 연관을 보지 못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경제 현상의 사회적 결정을 밝히려는 것이어서 “출발점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인데, 뵘바베르크는 자기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그것을 읽어 이론에 없는 모순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힐퍼딩은 마르크스가 이전 경제학자들이 물적 관계를 본 곳에서 인격적 관계를, 개인적 관계를 본 곳에서 사회적 관계를 드러냈다고 썼다.
니콜라이 부하린은 1914년 『유한계급의 경제학』을 탈고했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한 뒤 빈 대학에서 뵘바베르크의 강의를 듣고 오스트리아학파 문헌을 읽었으며, 스위스 로잔에서는 발라의 로잔학파를 연구했다. 원고는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에 두고 왔다가 노르웨이 공산주의자 아르비드 한센의 노력으로 1919년 2월 소비에트 러시아로 옮겨져 그해 출간되었다. 부하린은 한계효용 이론을 금리 생활자의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신용의 발달로 생산과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에게 잉여가 흘러가면서 커진 금리 생활자층은 생산에서 떨어져 소비의 영역에서 살고, 극단적 개인주의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지닌다. 생산의 관점을 이어받은 고전파와 프롤레타리아 정치경제학과 달리, 오스트리아학파가 소비의 관점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 것은 이 사회심리의 논리적 등가물이라는 것이다. 이론 내부의 비판으로 부하린은 가격을 끌어내려는 주관적 평가가 실은 이미 그 가격에서 출발한다는 순환을 지적했고, 결론에서 뵘바베르크의 가치론은 이윤론의 바탕을 놓기 위한 구실이며 가치론은 현대 사회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출발점으로 쓰인다고 썼다.
뒤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비판을 이었다. 에르네스트 만델은 한계주의가 생산의 역할을 무시하며, 수백만의 서로 다른 개인적 “욕구”가 부딪쳐 어떻게 균일하고 오래 안정된 가격이 나오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일시적 단기 변동만 설명한다고 보았다. 모리스 돕은 소비자가 선호를 표현하는 능력이 구매력, 곧 소득 분배에 달려 있으므로 한계주의 가격 이론은 소득 분배가 가격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든 공동체의 부의 불평등과 양립하는 한도 안에서” 교환이 최대의 사회적 이익을 낳는다는 제번스의 말을 들어, 한계주의가 주어진 소득 분배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가격을 그려 시장경제를 비판에서 보호하려 한다고 보았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
20세기에 한계주의와 노동가치론의 대립을 다룬 문헌이 크게 늘었고, 신리카도학파 피에로 스라파의 비판도 중요한 반론이 되었다. 한편 오스카르 랑게, 브워지미에시 브루스, 미하우 칼레츠키처럼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경제학자들은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통찰과 한계주의·신고전파를 통합하려 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에게 정교한 가격 이론이 없고 신고전파에는 경제 활동의 사회적 틀에 관한 이론이 없다고 보았다. 1980년대 존 로머 등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명제를 한계주의적 토대 위에 다시 세우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