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Master and Slave Morality
니체가 『선악의 저편』(1886) 260절과 『도덕의 계보』(1887)에서 도덕의 두 기본 유형으로 나눈 것. 주인 도덕은 지배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긍정하며 ‘좋음(고귀함)’과 ‘나쁨(비천함)’을 가르는 데서, 노예 도덕은 지배받는 자들이 지배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 반대를 ‘선’이라 부르는 데서 생긴다. 니체는 기독교 도덕을 르상티망에서 나온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의 승리로 보았다. 헤겔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는 다른 개념이다.
상세
두 가지 도덕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1886년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의 260절에서 지금까지 지구 위에 있었던 여러 도덕을 두루 살핀 끝에 두 가지 기본 유형을 찾았다고 썼다.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이 있다.” 그는 곧바로 덧붙였다. 모든 높고 섞인 문화에는 두 도덕을 조정하려는 시도와 둘이 뒤섞이고 서로 오해하는 일이 있으며, 때로는 “같은 사람 안에서, 한 영혼 속에서” 둘이 맞붙어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것은 두 계급의 사람을 나누는 분류라기보다 가치가 생겨나는 두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Es gibt Herren-Moral und Sklaven-Moral
주인 도덕에서 ‘좋다’를 정하는 것은 지배자 자신이다. 그들은 자기의 고양되고 자부심 있는 상태를 ‘좋음’이라 부르고, 그 반대의 상태를 드러내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래서 이 도덕에서 ‘좋음’과 ‘나쁨’은 ‘고귀함’과 ‘경멸스러움’과 같은 뜻이다. 노예 도덕은 반대로 움직인다. 고통받는 자들은 힘 있는 자들을 의심하고, 그들이 지닌 힘과 위험성을 ‘악’이라 부른다. 그리고 동정, 도움을 주는 손, 따뜻한 마음, 인내, 근면, 겸손 같은 약자의 삶을 견디게 해 주는 성질을 ‘선’으로 높인다. 니체의 말로는 “노예 도덕에서는 ‘악한 자’가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주인 도덕에서는 바로 ‘좋은 자’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Nach der Sklaven-Moral erregt also der »Böse« Furcht; nach der Herren-Moral ist es gerade der »Gute«, der Furcht erregt und erregen will
노예 반란은 어떻게 일어났다고 보았나?
1887년 『도덕의 계보』 제1논문은 이 구분을 역사 이야기로 풀었다. 그 출발점이 유명한 문장이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르상티망 자체가 창조적이 되어 가치를 낳을 때 시작된다.” 행동으로 되갚을 수 없는 자들은 상상의 복수로 자기를 달랜다. 모든 고귀한 도덕이 자기 자신에 대한 승리에 찬 긍정에서 자라나는 데 반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바깥’, ‘다른 것’, ‘자기 아닌 것’에 ‘아니오’라고 말하며, “이 ‘아니오’가 그들의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다.
Während alle vornehme Moral aus einem triumphierenden Ja-sagen zu sich selber herauswächst, sagt die Sklaven-Moral von vornherein Nein zu einem »Außerhalb«, zu einem »Anders«, zu einem »Nicht- selbst«: und dies Nein ist ihre schöpferische Tat.
니체는 이를 양과 맹금의 비유로 그렸다. 양들이 큰 맹금을 미워하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양들이 “저 맹금들은 악하다. 그러니 맹금과 가장 거리가 먼 자, 곧 양이야말로 선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맹금에게 맹금이 아니기를 요구할 때 노예 도덕이 생긴다. 니체는 이 반란이 고대 유대교의 사제 계급에서 시작되어 기독교를 거쳐 2천 년 동안 승리해 왔다고 보았다. 이 서술은 뒤에 반유대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했지만, 니체 자신은 같은 책에서 르상티망이 지금 “아나키스트와 반유대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게 핀다”고 쓰며 반유대주의자들을 경멸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름은 비슷하지만 이 개념은 헤겔이 1807년 『정신현상학』에서 펼친 ‘주인과 노예’(Herr und Knecht)의 변증법과 다르다. 헤겔에게 주인과 노예는 서로를 인정받으려는 생사의 투쟁에서 생긴 관계이며, 노동하는 노예가 사물을 가공하면서 오히려 자기의식을 얻어 주인을 넘어선다. 마르크스는 이 노동의 변증법을 이어받았다. 니체에게는 이런 역사의 전진이 없다. 노예가 이긴 것은 노동을 통해 자유를 얻어서가 아니라 주인의 가치를 뒤집어 도덕으로 주인을 길들였기 때문이고, 니체는 그것을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왜소화로 보았다.
니체는 이 진단을 근대 정치에 그대로 옮겼다. 『선악의 저편』 202절은 민주주의 운동을 기독교의 상속자로 보고, “자기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며 ‘자유로운 사회’를 원하는 얼간이 같은 사이비 철학자와 형제애의 몽상가들”까지 같은 무리 짐승 도덕으로 묶었다. 이들이 ‘주인’과 ‘노예’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 니체의 불만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이론을 어떻게 비판했나?
이 이론을 가장 일찍 정면으로 다룬 마르크스주의자는 프란츠 메링이다. 그는 1891년 글 「자본주의의 철학과 시에 관하여」에서 니체가 사람들 말처럼 “귀족의 사회철학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사회철학자”라고 썼다. 메링에 따르면 니체도 계급투쟁과 그에 맞는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을 알기는 했지만, 그것을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발전하는 세계사의 변증법적 과정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고 옮길 수 없는 자연법칙으로” 보았다.
Nietzsche kennt zwar auch einen Klassenkampf und eine ihm entsprechende „Herren-“ und „Sklavenmoral“, aber er kennt ihn nicht als einen dialektischen Prozess der Weltgeschichte, in welchem sich eine Entwicklung von Niederem zu Höherem vollzieht, sondern als ein unerschütterliches und unverrückbares Naturgesetz.
메링은 차이를 이렇게 정리했다. 도덕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은 이미 헤겔에게 싹으로 있었지만, 니체는 거기서 “엥겔스와 마르크스처럼 도덕의 역사적 제약성이 아니라 모든 도덕의 무조건적 무가치”를 끌어냈다. 마르크스주의도 도덕이 계급 관계에서 생긴다고 보는 점에서는 니체와 닮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지배계급의 도덕이 그 사회의 지배적 도덕이 된다는 분석에서 출발해 피억압 계급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반면, 니체는 같은 관찰에서 지배자의 도덕을 복권하려 했다. 메링은 니체의 약자 경멸이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인용한 영국 구빈법 반대론자들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뒤에 죄르지 루카치도 이 노선을 이어 니체의 도덕 비판을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맞선 부르주아 반동의 철학으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