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화폐이론
Modern Monetary Theory
자국 통화를 발행하는 정부는 그 통화가 바닥날 수 없으므로, 세금이나 국채로 먼저 돈을 모아야 지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출로 돈을 만들고 세금으로 거둬들인다고 보는 거시경제 이론. 정부 지출의 제약은 재정 적자 자체가 아니라 노동력과 설비가 다 쓰인 뒤의 인플레이션뿐이라고 주장하고, 완전고용 수단으로 일자리 보장을 내세운다. 크나프의 국가화폐설(차탈리즘), 러너의 기능적 재정, 민스키와 고들리의 이론을 엮었다. 주류와 케인스주의 다수가 거부했고, 마르크스주의 쪽 마이클 로버츠는 가치론 없이 화폐를 국가의 창조물로 본다고 비판했다.
상세
무엇을 주장하나?
흔히 나라 살림은 집안 살림처럼 이해된다. 세금을 걷어 그 돈으로 쓰고, 모자라면 빌리며, 빚이 너무 늘면 언젠가 갚느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현대화폐이론(MMT)은 이 비유가 자기 통화를 발행하는 정부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국 달러, 일본 엔, 영국 파운드처럼 자국 통화로 빚을 지는 정부는 그 통화를 만들어 내는 독점 발행자이므로, 세금보다 먼저 지출로 통화를 세상에 내보내야 납세자가 그 통화로 세금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순서가 “세금 걷고 쓰기”가 아니라 “쓰고 세금 걷기”다.
MMT의 핵심 명제는 다음과 같다. 자국 법정화폐를 발행하는 정부는 모든 지출로 화폐를 만들고, 과세로 사실상 화폐를 없앤다. 자국 통화로 표시된 빚을 갚지 못해 부도에 몰릴 수 없다. 화폐 창출을 제약하는 것은 경제의 실물 자원(노동, 자본, 천연자원)이 완전고용 수준까지 쓰인 뒤 빨라지는 수요 견인 인플레이션뿐이다. 국채는 공공 지출의 재원이 아니라 통화정책 수단이거나 민간의 저축 수단이다. 세금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고 지출할 여력을 만들고 통화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내는 장치다.
설명용 가정으로 숫자를 들어 보자. 한 해에 정부가 100을 지출하고 세금으로 90을 거두면 정부는 10의 적자를 낸다. MMT가 기대는 부문별 수지 회계에 따르면 이 10은 정부 밖 부문(가계·기업·해외)이 그만큼 순자산을 늘린 것과 같다. 정부의 적자는 민간의 흑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업자와 놀고 있는 설비가 있는 한 적자 지출로 수요를 늘려도 괜찮고, 완전고용에 이르러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에게 세금을 올려 민간의 지출 능력을 줄이고 실물 자원을 풀어 주면 된다.
수요와 인플레이션 관리를 위해 대부분의 MMT 경제학자는 일자리 보장, 곧 “최종 고용자” 프로그램을 내세운다. 정부가 일하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정해진 임금으로 일자리를 주면, 경기가 나쁠 때 고용이 자동으로 늘고 좋을 때 줄어드는 안정 장치가 되고 그 임금이 물가의 명목 기준점이 된다. 주류의 통화정책이 금리를 움직이고 실업자를 인플레이션 완충재로 쓰는 것과 반대다. MMT는 또 중앙은행 독립이라는 관행을 거부하고, 물가 안정 속 완전고용의 책임을 선출된 정부가 지고 중앙은행은 정부의 재정 필요를 뒷받침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본다.
어디서 왔나?
MMT는 여러 갈래의 이론을 엮었다. 독일 경제학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나프는 1905년 『국가화폐론』에서 “화폐는 법의 피조물”이라고 썼다. 화폐의 가치가 금속 함량에서 온다는 “금속주의”와 달리, 국가가 공공 수납 창구에서 받아 주는 것이 그 나라의 화폐라는 국가화폐설이다. 이름은 증표를 뜻하는 라틴어 카르타(charta)에서 왔고, 차탈리즘이라 불린다. 케인스는 1930년 『화폐론』 첫머리에서 크나프를 언급했다. 앨프리드 미첼이니스는 1914년 정부 화폐를 정부가 과세로 거둬들이는 빚으로 보았고, 아바 러너는 1947년 「국가의 피조물로서의 화폐」에서 화폐를 만들거나 세금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국가가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막을 책임을 진다고 했다. 러너의 “기능적 재정”은 재정을 균형 여부가 아니라 경제에 미치는 결과로 판단하자는 생각이다. 여기에 하이먼 민스키의 은행론, 바질 무어의 내생화폐론, 윈 고들리의 부문별 수지 분석이 더해졌다.
전 헤지펀드 매니저 워런 모슬러, 랜들 레이, 스테퍼니 켈턴, 빌 미첼, 파블리나 체르네바가 이 차탈리즘을 화폐 창출의 설명으로 되살렸고, 레이는 이를 신차탈리즘이라 불렀다. 미첼이 “현대화폐이론”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2008년 조앤 뮈스켄과 함께 쓴 『버려진 완전고용』에서 이 말을 썼다. 2019년 1월 미국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가 이 이론이 논의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치 쟁점이 되었고, 같은 해 2월 미첼·레이·와츠의 『거시경제학』이 이 이론에 기반한 첫 교과서로 나왔다. 버니 샌더스의 경제 자문이었던 켈턴의 『적자의 본질』은 2020년 6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주류와 케인스주의는 왜 반대하나?
2019년 시카고 대학 부스 경영대학원이 주요 경제학자들에게 물은 조사에서, 자국 통화로 빌리는 나라는 언제든 돈을 찍어 빚을 갚을 수 있으므로 재정 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명제와, 그런 나라는 화폐 창출로 원하는 만큼 실질 정부 지출을 할 수 있다는 명제에 동의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경제학자 마크 스쿠센은 MMT가 케인스주의자에서 오스트리아학파까지 넓은 이념 스펙트럼에서 비판받는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했다.
신케인스주의자 폴 크루그먼은 MMT가 경제가 성장할 때 적자를 유지하는 것의 인플레이션 효과를 무시한다고 비판하며, MMT 지지자들을 놀이 도중 규칙을 마음대로 바꾸는 만화 속 “캘빈볼” 놀이에 빗댔다. 그레고리 맨큐는 MMT에 “몇 가지 진실의 알맹이”가 있지만 가장 새로운 정책 처방은 그 전제에서 설득력 있게 따라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포스트케인스주의자 토머스 팰리는 MMT가 대체로 기초적인 케인스 경제학을 다시 말한 것이며, 예산을 정하는 의회와 통화를 다루는 중앙은행이 협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재정-통화 갈등” 문제를 가정으로 지워 버린다고 보았다. 마크 라부아는 신차탈리즘의 주장이 “본질적으로 옳다”고 하면서도, 그 직관에 반하는 주장 다수가 정부와 중앙은행의 운영을 하나로 합친 “허구적” 통합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스트리아학파 로버트 머피는 MMT가 “완전히 틀렸다”고 했다.
MMT가 주목받은 배경으로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말까지의 낮은 실질 금리와 인플레이션, 양적완화의 확산이 꼽힌다. 이런 환경이 정부에 더 큰 적자를 낼 여지를 주어, 화폐 증발로 지출해도 인플레이션이나 국채 시장의 반작용이 없다는 겉모습을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2021년 「현대 화폐 속임수」(『샐비지』 10호)에서 MMT를 비판했다. 그는 MMT가 왼쪽에서 인기를 얻은 까닭부터 짚었다. 재정긴축이 복지와 공공 서비스를 깎는 상황에서, 국가가 돈이 떨어질 수 없으니 적자와 공공부채를 두려워하지 않고 완전고용을 이룰 수 있다는 이론은 노동운동에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로버츠는 비판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MMT의 화폐 창출과 유통에 대한 설명이 옳은가, 정부가 원하는 만큼 화폐를 만들어도 문제가 없는가, 그리고 MMT가 풀려는 문제는 무엇인가다.
첫째, 이론. 마르크스에게 화폐는 국가가 정한 약속이 아니라 상품 교환에서 생겨난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세』에서 “화폐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약속에 의해 생겨나지 않는다. 화폐는 교환에서, 교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고 썼다. 로버츠에 따르면 오늘의 불환지폐도 이 성격을 바꾸지 않으며, 그 가치는 여전히 자본 축적에서 만들어진 노동시간으로 잰 가치에 묶여 있다. 국가는 지폐에 어떤 숫자든 찍을 수 있지만 그 숫자가 무엇을 가리킬지는 정할 수 없다. 로버츠는 슘페터의 말을 빌려, 차탈리즘은 “뻔하고 옳거나, 흥미롭고 틀렸다”고 요약한다. MMT의 순환은 국가에서 시작해 민간을 거쳐 세금으로 국가에 돌아오지만, 마르크스에게 화폐 M이 더 많은 화폐 M′이 되는 것은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생산에서 가치가 늘어날 때뿐이다. 세금은 생산된 소득에 매기는 것이므로 세금이 화폐를 “없앤다”는 설명도 순서가 거꾸로라고 본다. 무엇보다 MMT에는 가치론이 없어서, 화폐를 가치에서 떼어 내 변화의 주된 힘으로 삼는다는 것이 로버츠의 비판이다. 그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착취가 아니라 화폐 제도에서 찾은 1840년대 프루동과 닮았다고 보고, 유통 수단을 바꿔 생산관계를 바꾸려는 “유통의 속임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인용한다.
둘째, 실천. 켈턴 자신도 화폐 발행국이 마주하는 경제적 제약은 인플레이션과 실물 경제의 노동·자원뿐이라고 인정한다. 로버츠는 이것이 큰 제약이라고 본다. 국가가 통화를 통제해도 기술과 노동 조건, 숙련과 노동 강도, 곧 노동생산성은 자본주의 부문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신용도가 의심받으면 통화 가치가 무너질 수 있으며, 로버츠는 베네수엘라·짐바브웨·아르헨티나를 예로 든다. 셋째, 목표. 로버츠는 MMT가 결국 완전고용을 위한 무제한 정부 지출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귀결하며, 자본 축적이 왜 주기적으로 무너지는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윤율의 단층선이 반복되는 공황의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비추어, 실업과 공황의 답은 화폐 발행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화폐 경제 자체를 바꾸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