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공존
Peaceful Coexistence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전쟁 없이 공존할 수 있으며 공존해야 한다는 소련 외교 정책의 기본 원칙.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공식 노선으로 확립했으며, 핵전쟁 회피라는 현실적 필요와 레닌의 '평화적 공존' 개념을 결합한 것이었다. 이 노선은 중소분열의 핵심 쟁점이 되었고, 중국과 알바니아는 이를 수정주의로 규정하며 반발했다.
상세
기원과 초기 실천
'평화공존'이라는 표현은 1920년대 소련 지도부가 쓰기 시작했으나, 당시에는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지배적 개념이었으므로 '평화적 휴식'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 1922년 4월 10일 제노바 회의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대표 게오르기 치체린은 레닌의 지시에 따라 사회제도가 다른 국가들 사이의 평화공존과 경제협력 원칙을 공식 제안했다. 레닌 자신은 '평화공존'이라는 용어를 저작이나 연설에서 쓰지 않았으나, 1920년 한 인터뷰에서 '평화적 공존'(мирное сожительство)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소련 측 저자들은 대개 레닌이 이 원칙을 처음 정식화했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는 평화공존 구상이 일련의 불가침 조약으로 구체화되었다. 1932년 소련-프랑스, 소련-폴란드, 소련-핀란드 조약,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1941년 소련-일본 중립 조약 등이 그것이다.
흐루쇼프 시기의 공식 노선화
흐루쇼프 집권 이후 평화공존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발전했다. 스탈린도 1952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양측의 협력 의사가 있고 상호 의무와 내정 불간섭 원칙이 지켜진다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평화공존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는 평화공존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원칙으로 채택했고, 제3차 당강령 등 여러 당 문서에 이를 못박았다. 서방 역사학계에는 평화공존 정책이 흐루쇼프 때 비롯했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으나, 흐루쇼프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미 놓인 기초 위에서 이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평화공존 개념의 핵심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사이에 적대적 계급 모순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항상 군사력으로 해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으며, 이 결론은 핵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실천적 측면에서 이 이론은 한쪽의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국가들, 다른 쪽의 미국과 나토 국가들 사이의 평화공존으로 해석되었다. 흐루쇼프는 양 진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경쟁이 '평화적 경쟁'으로 전환되어 우월한 체제가 최종적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보았다. 소련 국가는 평화공존 구상에 동조하는 서방의 평화주의·반전 운동을 지원했으며, 1949년 결성된 세계평화평의회가 주요 전달 조직이 되었다.
계급투쟁 형식이라는 해석
평화공존 이념은 세계 혁명 과정의 불가역성을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및 두 체제의 적대성 원칙과 상당히 충돌했다. 그래서 평화적 공존은 계급투쟁의 한 형식으로 해석되었다. 다른 한편 레닌과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의 각국 내부 혁명을 주장했을 뿐, 이웃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가 자본주의 국가를 침공하는 식의 국제전쟁에 의한 혁명 확산을 주장한 적은 없었다. 흐루쇼프는 레닌 정치의 이 측면을 들어 사회주의가 무력이 아니라 모범으로 자본주의를 이겨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암묵적으로 이는 혁명의 폭력적 확산에 대한 소련의 지지를 끝내는 것을 뜻했고, 세계 여러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혁명적 공산주의 원칙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다. 이 노선 전환에 대한 불만은 흐루쇼프 실각의 한 요인이 되었으나 후계자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필연적 충돌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중소분열과 중국의 오대원칙
평화공존에 대한 해석 차이는 1950~60년대 중소분열의 한 축이었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호전적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며 평화공존론을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거부했다. 1972년 미국과의 무역 관계 수립 이후 중국은 비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에 이 이론의 한 변형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고, 1980년대 초 중국 특색 사회주의 채택에 이르기까지 자국 평화공존 개념을 모든 국가로 확대했다.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는 이 개념을 규탄하고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서방 접근에 반대하여 중국과 결별했으며, 오늘날에도 호자주의 정당들은 평화공존 개념을 규탄한다.
중국의 평화공존 구상은 별개의 계보를 가진다. 1954년 저우언라이가 인도와의 티베트 교역·교류 협정 교섭에서 '평화공존 오대원칙'을 제안했고, 이 원칙들은 그해 저우언라이와 네루가 서명한 협정에 명문화되었다. 오대원칙은 영토 보전과 주권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평등과 상호 이익, 평화공존이다. 이 원칙은 반둥 회의에서 재확인되어 회의 선언에 반영되었고 1960년대 이후 비동맹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198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명기되었다.
서구 공산당에 미친 영향과 노선의 종언
평화공존은 소련식 공산주의 해석에 묶인 모든 국가와 사회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여러 개별 공산당의 활동 방식이 되었고, 특히 선진국 공산당들이 무장 봉기적 혁명을 위한 지지 세력 결집이라는 장기 목표를 포기하고 선거 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평화공존 노선에는 이데올로기적 수정이 없었으나 흐루쇼프가 시작한 데탕트 정책은 계속되었다. 전략무기제한협상(SALT)과 1975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창설이 이 시기의 주요 성과였고, 197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데탕트 과정을 늦추었다. 1991년 12월 이후 옛 소련 공화국 가운데 사회주의 국가가 하나도 남지 않았고, 바르샤바 조약도 1991년 7월 1일 프라하 회의에서 공식 해체되면서 전통적 소련 평화공존 노선도 존재 이유를 잃은 것으로 보였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overview of Soviet peaceful coexistence doctrine, its codification at the 20th Congress, and its role in the Sino-Soviet split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language article tracing the concept from Lenin's 'мирное сожительство' through the Cold War-era doctrine, including its formal adoption in CPSU documents
- opil.ouplaw.com Max Planck Encyclopedia of Public International Law entry distinguishing the Soviet concept from the Chinese Five Principles and documenting its Leninist origins and Khrushchev-era codification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CPA Political Committee statement (1956) discussing the 20th Congress decisions on peaceful coexistence as a 'creative development of Marxist-Leninist theory'
- 위키백과 (러시아어)
- opil.ouplaw.com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