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주의
Perspectivism
모든 앎은 특정한 관점에서 이루어지며 관점을 떠난 ‘그 자체로의 진리’는 없다는 니체의 인식론적 입장. 니체는 1887년 『도덕의 계보』에서 “오직 관점적인 봄, 관점적인 ‘인식’만이 있다”고 썼고, 유고에서는 실증주의에 맞서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고 적었다. 다만 그는 같은 대상을 더 많은 눈으로 볼수록 ‘객관성’이 더 완전해진다고 덧붙였기 때문에, 이 입장을 단순한 상대주의로 읽을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상세
관점주의는 무엇을 말하나?
니체가 관점주의를 가장 분명하게 펼친 곳은 1887년 『도덕의 계보』 제3논문 12절이다.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의지도 고통도 시간도 없는 ‘순수한 인식 주체’를 꿈꾸었다. 니체는 그것이 아무 방향도 보지 않는 눈, 보는 일을 비로소 무언가를 보는 일로 만드는 능동적인 힘들이 빠진 눈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비꼬았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오직 관점적인 봄, 오직 관점적인 ‘인식’만이 있다.”
Es gibt nur ein perspektivisches Sehen, nur ein perspektivisches »Erkennen«; und je mehr Affekte wir über eine Sache zu Worte kommen lassen, je mehr Augen, verschiedne Augen wir uns für dieselbe Sache einzusetzen wissen, um so vollständiger wird unser »Begriff« dieser Sache, unsre »Objektivität« sein.
이 문장의 뒷부분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태에 대해 더 많은 정동이 말하게 할수록, 같은 사태에 더 많은 눈, 서로 다른 눈을 들이댈 줄 알수록 그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 우리의 ‘객관성’은 더 완전해질 것이다.” 니체는 객관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바꾸었다. 관점이 없는 시점에서 보는 객관성은 불가능하고, 객관성은 여러 관점을 다룰 줄 아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는 의지와 정동을 아예 없애려는 시도는 “지성을 거세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는 어떤 뜻인가?
1886~1887년 유고에서 니체는 더 날카롭게 썼다. “현상에 머물러 ‘사실만 있다’고 말하는 실증주의에 맞서 나는 말하겠다. 아니다, 바로 사실이야말로 없고 해석만 있다. 우리는 어떤 사실 ‘그 자체’도 확정할 수 없다.” 같은 메모는 이렇게 이어진다. “‘인식’이라는 말이 도대체 뜻이 있는 한 세계는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달리 해석될 수 있고, 그 뒤에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셀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관점주의.’”
Gegen den Positivismus, welcher bei den Phänomenen stehn bleibt »es gibt nur Tatsachen«, würde ich sagen: nein, gerade Tatsachen gibt es nicht, nur Interpretationen.
이 메모는 니체가 책으로 낸 글이 아니라 유고이고,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와 페터 가스트의 편집본 『권력의지』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졌다. 1887년 『즐거운 학문』 제5권 374절은 책으로 낸 글에서 같은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한다. 인간의 지성은 자기를 분석할 때도 자기의 관점적 형식 아래에서만 볼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우리의 모퉁이 너머를 볼 수 없다.” 다른 메모에서 니체는 관점주의를 권력의지와 이었다. 모든 힘의 중심은 자기에게서 나머지 세계를 구성하고 자기 힘으로 재며, 관점은 바로 그 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상대주의인가?
‘관점’이라는 말을 철학에 들여온 사람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였다. 그의 『단자론』에서 각각의 단자는 같은 우주를 저마다의 자리에서 비춘다. 니체와 같은 시기 바젤 대학에 있던 구스타프 타이히뮐러도 모든 철학 체계를 인식 내용을 투영하는 관점들로 보았고, 연구자들은 니체가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니체의 관점주의를 어떻게 읽을지는 크게 엇갈린다. 20세기 후반의 탈근대 사상은 이를 보편적 진리를 해체하는 선언으로 받아들였고, 비판자들은 모든 진리가 해석일 뿐이라면 니체 자신의 주장도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으니 스스로를 무너뜨린다고 반박했다. 반면 많은 연구자들은 니체가 말한 관점성이 자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관점은 각자가 세계를 하나의 그림, 하나의 해석으로 짜 맞추는 조건이며, 니체 자신이 더 많은 관점을 통해 더 완전한 객관성에 이를 수 있다고 썼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관점과 진리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나?
니체가 모든 앎이 관점에 묶여 있다고 말하던 무렵, 마르크스주의도 앎이 사회적 처지에 묶여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배계급의 사상이 그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 된다고 썼고, 이데올로기 비판은 겉으로 보편적인 진리가 특정한 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그 비판이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 경계를 둘러싼 논쟁이 러시아 사회민주당 안에서 벌어졌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경험일원론』에서 “나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진리이든 그 무조건적 객관성을 부정하고 모든 영원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을 뜻한다”고 썼다. 진리를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의 형식으로 본 것이다. 레닌은 1909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이 주장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보그다노프의 객관적 진리 부정은 불가지론이자 주관주의다.” 레닌은 우리의 지식이 역사적으로 상대적이고 늘 고쳐지지만, 그것이 우리와 독립해 있는 세계를 점점 더 정확히 반영한다는 점에서 객관적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Отрицание объективной истины Богдановым есть агностицизм и субъективизм.
레닌이 니체를 직접 다룬 것은 아니지만, 이 논쟁은 관점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 던지는 물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 사회적 처지가 앎을 제약한다는 통찰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출발점이 되지만, 모든 앎을 해석으로만 본다면 지배를 비판할 근거도 사라진다. 죄르지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이 사회 전체를 볼 수 있는 특권적 관점이라고 주장해 이 문제에 답하려 했고, 위르겐 하버마스는 1985년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니체 이후의 이성 비판이 스스로의 근거를 잃는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