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udhonisme · 1840

프루동주의

Proudhonism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사상과 그것을 따른 사회주의 조류. 같은 가치끼리의 교환, 곧 상호성을 경제의 기초로 삼아 소생산자와 직인의 자유로운 계약, 상호 신용과 무이자 「인민은행」으로 착취를 없애려 했고(상호주의), 정치 행동과 국가를 거부하며 연방주의를 내세웠다. 1860년대 국제노동자협회 프랑스 지부의 주류였으나 1860년대 말부터 바쿠닌의 집산주의에 밀렸고, 파리 코뮌에서는 소수파를 이루었다. 엥겔스는 코뮌이 프루동 학파의 무덤이었다고 평했다.

상세

프루동은 1840년 『재산이란 무엇인가』에서 「재산은 도둑질이다」라고 선언했다. 소유자는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며, 임금노동은 집단적 생산의 가치를 가두어 이윤이라는 지대를 뽑아내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1846년 『경제적 모순의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에서는 상호성을 사적 소유와 공동 소유의 종합으로 내세웠다. 불평등 교환이 노동 착취의 뿌리이며, 강제 없는 시장에서는 교환이 생산비만 반영하는 등가 교환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상호 부조, 상호 신용, 상호 보험이 모두 이 원리에서 나왔다. 그는 협동조합과 같은 힘의 결합보다 서비스와 생산물의 교환을 상호성의 핵심으로 보았다.

1848년 혁명 뒤 제헌의회 의원이 된 프루동은 프랑스 은행을 노동자 모두에게 상호 신용을 보장하는 「인민은행」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인민은행은 정식으로 설립되었지만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한 뒤 프루동이 체포·투옥되면서 실제로 문을 열지 못했다. 마지막 저작 『노동계급의 정치적 능력』(1865)은 노동자 자주 관리의 「상호주의 체계」를 제안했다. 말년의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보다 연방주의자로 불렀고, 추종자들도 상호주의자라고 자칭했다.

마르크스는 1847년 프랑스어로 쓴 『철학의 빈곤』으로 『빈곤의 철학』을 비판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노동, 가치, 가격의 관계에 대한 프루동의 오해와, 부르주아적 소유에 대한 공격을 부르주아 윤리의 틀 안에서 벌인다는 점이었다. 프루동은 모든 정치 행동을 계급 협조로 보고 노동계급이 경제 행동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860년대 초 프랑스 노동자들은 프루동의 이론에 따라 노동조합과 상호 신용 조직을 세웠고, 1865년 프루동이 죽은 뒤 그 추종자들은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인터내셔널 초기의 제네바 대회(1866)와 로잔 대회(1867)에는 상호주의의 색채가 짙었지만, 1860년대 말에는 외젠 바를랭과 브누아 말롱이 프랑스 지부를 바쿠닌의 집산주의로 돌려세웠다. 바쿠닌 자신은 집산주의를 「크게 발전시켜 끝까지 밀고 간 프루동주의」라고 했다.

엥겔스는 1891년 『프랑스 내전』 서문에서 코뮌 의원의 다수파는 블랑키파, 소수파는 주로 프루동 사회주의 학파의 지지자인 인터내셔널 회원이었고 코뮌의 경제 포고는 주로 프루동파의 책임이었다고 썼다. 그런데 소농과 수공업 장인의 사회주의자인 프루동은 결사를 증오했는데도, 코뮌의 가장 중요한 포고는 각 공장 노동자들의 결사를 하나의 큰 연합으로 묶는 대공업 조직이었다. 그것이 프루동 교리의 정반대인 공산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코뮌은 프루동 학파의 무덤이기도 했고, 이제 프루동파는 「급진」 부르주아지 가운데에만 남았다는 것이 엥겔스의 평가였다. 그 뒤 프루동의 상호주의는 벤저민 터커 같은 미국의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이어졌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fr.wikipedia.org
  3. 위키백과 (영문)
  4. 위키백과 (영문)
  5.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