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주간 (1871)
Bloody Week (1871)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베르사유 정부의 정규군이 파리에 들어와 코뮌을 무너뜨린 한 주간의 시가전과 학살. 코뮌 측 1만~1만 5천 명이 전투에서 죽거나 붙잡혀 즉결 처형되었고, 4만 3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코뮌 측도 인질 약 100명을 처형하고 튀일리 궁과 시청 등에 불을 질렀다.
상세
5월 8일부터 20일 사이 정규군은 파리 주변을 되찾고 시내를 포격했다. 5월 21일 일요일 오후 정규군이 남서쪽 생클루 문으로 들어왔지만 코뮌 지도부는 경보를 늦게 울렸고, 대대들은 한데 모이지 않고 저마다 제 동네를 지키러 흩어졌다. 서둘러 쌓은 바리케이드가 900개쯤 되었다. 정규군은 4월 초 5만 5천 명에서 독일에서 풀려난 포로들로 5월 말 12만 명까지 불어나 있었고, 독일군은 직접 싸우지 않았지만 성벽 밖 서쪽에 프랑스군이 자리 잡도록 허락했다.
5월 22일 몽소 공원에서 첫 처형이 기록되었다. 무기를 들고 잡혔거나 손에 화약 자국이 있는 자, 탈영병, 외국인은 대개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고, 나머지는 군사 법정을 거쳐 북역 공사장, 뤽상부르 공원, 샤틀레 광장, 페르라셰즈 묘지 같은 곳에서 처형되었다. 코뮌 측은 튀일리 궁, 시청, 법원 등에 불을 질렀고, 24일 라로케트 감옥에서 파리 대주교 다르부아를 비롯한 인질을, 26일 아쇼 거리에서 성직자와 헌병 등 60여 명을 총살했다. 25일 저녁 들레클뤼즈는 샤토도 광장 바리케이드에 올라가 총에 맞아 죽었다. 27일 페르라셰즈에서 붙잡힌 147명이 묘지 담장 앞에서 총살되었고, 28일 벨빌의 마지막 저항이 무너졌다.
정규군 전사자는 877명이었다. 코뮌 측 사망자 수는 오래 논란이 되었다. 리사가레는 2만 명 이상, 펠탕은 3만 명으로 보았고, 묘지 기록에 기댄 최근 역사가들은 1만~1만 5천 명으로 추정한다. 포로 4만 3,522명 가운데 절반 넘게 곧 풀려났지만, 1만 3,50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95명이 사형, 251명이 강제노동, 1,169명이 주로 뉴칼레도니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로셀과 페레가 처형되었고, 수천 명이 영국, 벨기에, 스위스로 망명했다. 1880년 사면으로 모두 돌아올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을 피의 주간이 끝난 이틀 뒤인 5월 30일 총평의회에서 낭독했다. 그는 부르주아 질서의 문명과 정의가 그 질서의 노예들이 주인에게 맞서 일어설 때마다 섬뜩한 빛을 드러내며, 그때 이 문명과 정의는 숨김없는 야만과 무법한 복수로 나타난다고 썼다. 1880년부터 해마다 5월 마지막 주에 코뮌 전사의 벽으로 가는 행진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