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랄-시베리아 방식
Ural-Siberian Method
1928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도입된 소련의 강제적 곡물 징수 방식이다. 마을 총회에서 쿨라크에게 할당량을 배정하고, 거부하면 기준량의 5배까지 벌금(‘5배 벌금’)을 부과했으며, 이마저도 거부하면 RSFSR 형법 제107조에 따라 최대 3년 징역과 재산 몰수에 처해졌다. 스탈린이 1928년 1월 시베리아 출장 중 지시하여 우랄과 시베리아에서 먼저 시행되었고, 1929년 3월 정치국의 승인으로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이 방식의 상대적 ‘성공’은 스탈린에게 행정적 강제가 농민에게 유효하다는 확신을 주어 전면 집단화와 탈쿨라크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상세
우랄-시베리아 방식(러시아어: урало-сибирский метод)은 소련이 농촌에서 곡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동원한 비상적 조치다. 우랄과 시베리아에서 처음 시행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P1]] 이는 레닌의 신경제정책(NEP) 이전 시기, 즉 전시공산주의의 강압적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P1]]
배경: 1927~1928년 곡물 조달 위기
1927년 가을부터 국가의 곡물 수매량이 급락했다. 1927년 10~12월 분기 계획 수매량 700만 톤 가운데 210만 톤이 채워지지 않았다. [[P42]] 국가는 이 물량을 곡물 비축분 마련과 수출 목표 달성뿐 아니라 도시 노동자와 붉은 군대 식량 공급에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P42]] 스탈린은 이를 부농(쿨라크)이 곡물 가격 인상을 강요하려 벌인 '사보타주'로 규정한 반면, 부하린은 가격이 매력적이지 못해 판매가 줄어든 것이라고 보았다. [[P43]] 이러한 수매 부진은 도시 식량 공급을 위협했다. 1927년 11월 무렵 일부 산업 중심지의 식량 공급 문제가 제기되었고 [[P209]], 1928년 가을에는 대도시에 빵 배급제가 도입되었다. [[P133]]
1928년: 우랄과 시베리아에서의 시작
1928년 1월 9일 정치국은 곡물 지대에 중앙위원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몰로토프는 우랄로, 미코얀은 북카프카스로, 오르조니키제는 시베리아로, 쿠뱌크는 카자흐스탄으로 갔다. [[P410]] 오르조니키제의 병으로 시베리아 파견이 취소되면서 1월 15일 그곳으로 스탈린이 향했다. [[P410]] 스탈린은 비공개로 노보시비르스크, 바르나울, 룹촙스크, 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돌았다. [[P410]] 그는 시베리아에서 자신이 곡물 조달 계획을 집행하도록 파견되었다고 말하면서, 특히 부농이 곡물을 내놓지 않고 투기를 벌인다며 1922년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형법 제107조(투기 처벌)를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P422]] [[P426]] [[P427]] [[P428]] 1월 18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열린 시베리아 지방위원회 서기국 회의는 스탈린의 제안에 따라 부농에 대한 압류와 사법 처벌을 요구하는 결정을 채택했다. [[P411]]
우랄-시베리아 방식의 최초 형태는 우랄 지방위원회가 1928년 실제 관행을 바탕으로 제안한 것이었다. [[P5]] 여러 저작은 이 방식을 1928년 1월 스탈린의 시베리아 순회와 연결한다. [[P422]] [[P410]]
1928~1929년: 제도화
스탈린은 1928년 4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공동 전원회의에서 이 방식을 '우랄-시베리아식'이라고 명명했다. [[P5]] 정치국은 1929년 3월 20일 우랄 지방위원회의 제안을 승인하고 소련 동부 지역에 적용하도록 권고했으며, 시베리아 구위원회가 제안한 '표야티크라트카'(오 배수 벌금)가 이때 채택되었다. [[P5]] 우파 반대파는 이를 비상조치의 부활이라 비판했지만, 이 방식은 관철되어 1929년 6월 입법적 뒷받침을 받았다. [[P2]]
작동 방식
이 방식의 집행 절차는 1918~1919년의 빈농위원회(콤베트) 관행과 닮았다. [[P6]] 마을 총회가 자기 마을의 곡물 조달 계획을 승인하고, '계급적 접근'에 따라 개별 할당량을 배정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부농이 할당량을 이행하지 않으면 할당량의 최대 5배까지 벌금이 부과되었고, 이 벌금은 속칭 '표야티크라트카'라 불렸다. [[P6]] 계속 거부하면 최대 1년의 강제노동 수용, 집단적 저항의 경우 최대 2년의 구금과 재산 몰수 및 그에 뒤따르는 국내 유형이 뒤따랐다. [[P6]] 이러한 관행은 이후의 '쿨라크 소탕'(라스쿨라치바니예) 정책을 예고했다. [[P6]] 1928년부터 형법 제107조는 정부 가격에 곡물 '잉여분'을 넘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P412]]
농민의 저항과 결과
우랄-시베리아 방식은 농민 사이에서의 불안을 키웠고, 이에 상응해 농촌에서는 농민에 대한, 도시에서는 사재기꾼으로 규정된 사적 곡물 상인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P8]] 1929년에는 '집단 소요'와 '부농 테러'가 크게 늘었고, 1929년 11월 오GPU는 반혁명 혐의로 12,808명, 경제 범죄 혐의로 15,536명을 체포했다고 보고했다. [[P8]] 이들 체포는 시베리아, 북카프카스, 우크라이나, 중앙흑토지대, 우랄 등 주요 곡물 생산 지역에 집중되었다. [[P8]]
이 강경 조치로 스탈린은 '만족스러운 조달'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P9]] 일부 연구자들은 이 상대적 성공이 스탈린으로 하여금 농민에 대한 강제적 행정 접근의 효율성을 확신하게 했고, 이것이 이후 전면 집단화 정책으로 전개되었다고 본다. [[P9]] 1929년 11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이 정책을 즉각적 우선 과제로 선언했다. [[P9]]
사학사와 명칭
소련 사학에서는 이 방식이 노보시비르스크 구의 자뱌로보 마을의 발의로 도입되었다고 주장했고, 한동안 '자뱌로보 방식'이라는 말이 쓰였다. [[P11]] 1929년 3월 22일 신문 《소비에트 시비리》는 '자뱌로보 발의'를 보도하며 다른 곳으로도 확산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 보도가 3월 20일 정치국 결정을 감추기 위한 선전이었다는 견해가 제기된다. [[P11]] 서방 사학에서는 문서 사료의 부족 때문에 사건 연대기 여러 판본이 나왔으며, 특히 이 방식이 시베리아에서 먼저 도입되고 우랄에서는 나중에 도입되었다고 서술하는 저작들이 있다. [[P12]] 소련 해체 이후 사료가 더 공개되면서 이 방식의 채택 경위가 보다 분명해졌다. [[P12]]
이 방식의 기원을 둘러싼 서로 다른 강조점은 문서 기록의 한계와 함께 한국어·영어 양쪽 서술에서 모두 유지되어야 한다. 러시아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일리니흐는 1928년 1월 스탈린의 시베리아 방문이 이 방식의 출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계보를 제시했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overview of the method: origins in Urals and Siberia, Politburo approval March 1929, pyatikratka (five-timer) fines, Article 107 prosecutions, role in paving way to collectivization and dekulakization
- statehistory.ru Ivnitsky monograph: Stalin's January 1928 Siberian tour, Article 107 application, directives to party organs, S.I. Zagumenny's protest letter warning it would be seen as a return to war communism and prodrazvyorstka, Stalin's dismissive marginalia ('kha-kha')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statehistory.ru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