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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인물 50명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유데니치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Юденич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2–1933 ○ 폐결핵

캅카스 전선을 승리로 이끌고 백군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제국 러시아의 마지막 명장

러시아 백위대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 볼셰비키를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유일한 강령은 볼셰비키 타도뿐이다!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육군에서 가장 꾸준한 승리를 거둔 지휘관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사르카미시·에르주룸·트레비존드 전투를 지휘하며 오스만 제3군을 궤멸시켰다. 2월 혁명 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내전기에는 북서군을 이끌고 1919년 가을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으나 적군의 반격으로 에스토니아로 패주했다.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자로, 망명 후에는 백계 정치에서 물러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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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1–87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제18소총연대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산데푸·무크덴 전투에서 부상
  • 1913–15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 캅카스군 참모장 → 보병대장 진급 및 캅카스군 사령관
  • 1916에르주룸·트레비존드·에르진잔 점령,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
  • 1917.5캅카스 전선 총사령관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불복종'으로 해임
  • 1919.6–10북서군 총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 공세,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 후 패퇴
  • 1920.1북서군 해산 명령, 에스토니아에서 체포 후 석방, 프랑스로 망명

세르게이 예피모비치 크리자놉스키

Сергей Ефимович Крыжанов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62–1935 ○ 자연사

1907년 「뻔뻔한」 선거법으로 두마를 길들인 제국의 법률 설계사

자신이 초안한 세 가지 선거법 중 채택된 두 번째 안을 두고 크리자놉스키는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의석을 배정해놓고 실제로는 지주들이 그 대표를 골라내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1905년과 1907년의 국가두마 선거법을 설계한 인물이다. 내무차관으로서 그는 1907년 선거법 초안을 세 가지 작성했고, 그중 채택된 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최소 의석을 보장하면서도 실제 대의원 선출권은 지주가 장악한 도 선거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혁명 후 망명하여 파리에서 군주제 회고록을 편집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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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1896내무성 경제국 과장
  • 1904–1906내무성 지방경제총국 부국장
  • 1906–1911내무차관 (스톨리핀의 오른팔)
  • 1907상원의원 · 추밀고문관
  • 1911–1917제국 국무장관 (마지막 재임자)
  • 1917국가평의회 의원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

차르 체제 안에서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한 경찰사회주의의 창안자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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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89모스크바 오흐라나의 비밀정보원으로 혁명조직 침투
  • 1889–1896모스크바 오흐라나 특별임무관, 부국장으로 승진
  • 1896–1902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 정치사찰 체계 근대화
  • 1901–1903친정부 합법노조 설립 — '경찰사회주의' 주도
  • 1902–1903경찰국 특별부장, 전국적 오흐라나 네트워크 구축
  • 1903–1917플레베에 의해 해임·유배, 후일 사면받았으나 공직 복귀 거부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키시킨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Кишк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4–1930 ○ 자연사

10월 혁명 당일 페트로그라드의 마지막 전권자로 임명된 카데트 장관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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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 1917.3–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 1917.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 1918–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 1921–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 1923–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코즐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Козлов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러시아인 1864–1940 ○ 사망

크론시타트 포병대장으로 봉기했고, 볼셰비키가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한 구제국 장군

"공산주의자들은 크론시타트 봉기를 백위대 음모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이름을 이용했다. 내가 요새에 있던 유일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 포병 장교로 30년간 복무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베리아 포병 여단을 지휘했다. 2월 혁명 후 예편했다가 1918년 붉은 군대에 군사전문가로 입대했고, 1920년 12월 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당시 봉기군의 방어를 조직했으나, 볼셰비키는 3월 2일 포고에서 봉기를 '코즐롭스키 전 장군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외자로 선언했으며, 가족과 지인 27명을 인질로 체포했다. 봉기 진압 후 8천여 명의 크론시타트 수병과 함께 핀란드로 탈출했고, 망명지에서 교사와 정비공으로 일하다 1940년 헬싱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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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블라디미르 키예프 사관생도단 입대
  • 1884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90미하일롭스키 포병아카데미 1등급 졸업
  • 1905–1912제33포병여단 제2대대장
  • 1912소장 진급; 제11시베리아 포병여단장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4군단 포병감
  • 1918–1920적군 군사전문가로 복무
  • 1920.12–1921.03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 봉기 중 방어 지휘
  • 1921–1940핀란드 망명: 교사, 도로 노동자, 정비공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준콥스키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Джунков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5–1938 ✕ 처형

오흐라나를 개혁하고 라스푸틴을 고발한 마지막 제국 헌병대 사령관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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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05세르게이 대공 전속 부관 (모스크바 총독 보좌)
  • 1905.8–1905.11모스크바 부주지사
  • 1905–1913모스크바 주지사, 소장 진급, 민생·문화 사업 주도
  • 1913–1915내무차관 겸 헌병대 사령관, 오흐라나 개혁 단행
  • 1915.8라스푸틴 보고 후 전격 해임
  • 1915–1917서부전선: 제15시베리아사단장, 제3시베리아군단장, 중장
  • 1918–1921체포·수감, 혁명재판 5년형, 1921년 석방
  • 1920s오게페우(OGPU) 비밀 고문, 「트레스트」 작전 자문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프로토포포프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Протопоп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6–1918 ✕ 처형

라스푸틴에 기대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린 최후의 내무장관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관료 경력 없이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도 혁명의 위협을 부정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에 무능했으며, 각료와 총리의 거듭된 사임 요구를 무시했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체포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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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0월당 소속으로 제3대 국가두마 의원 당선
  • 1912제4대 국가두마 의원 재선
  • 1914–1916제4대 국가두마 부의장
  • 1916.4–6두마 대표단장으로 연합국 방문, 스톡홀름에서 독일 측과 비밀 접촉
  • 1916.9–1917.2러시아 제국 내무장관
  • 1917.2.28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하여 체포됨
  • 1917–1918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타간카 교도소 수감
  • 1918.10.27체카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처형됨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발크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Балк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시장, 2월 혁명의 물결 앞에 선 경찰 관료

2월 24일, 발크는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의 이동과 집결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이양했다.

알렉산드르 발크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경찰 관료로, 16년간 바르샤바 경찰에서 근무하며 도시 치안을 책임졌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 시장(градоначальник)에 임명되어 식량 공급과 교통 문제에 적극 대처했으나, 1917년 2월 혁명 발발 나흘 만에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넘긴 뒤 체포되었다. 내전기 백군에 가담했고, 망명길에 올라 브라질의 한 수도원 양로원에서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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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제16라도가 보병연대 배속
  • 1887근위 볼린스키 연대로 전속
  • 1903–1915바르샤바 부경무총감 (1906 정식 임명, 1912 소장 진급), 독일군 점령 후 모스크바 주재
  • 1916.11–1917.02페트로그라드 시장 (градоначальник)
  • 1917.02–062월 혁명 중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
  • 1918–1920백군 의용군 및 남러시아군 참전, 크림에서 철수
  • 1920–1945유고슬라비아 망명, 볼린스키 연대 퇴역병회 및 러시아 장교협회 베오그라드 지부장
  • 1945–1957브라질 이주, 상파울루 근교 오자스쿠의 수도원 양로원에서 사망

블라디미르 제노노비치 마이-마옙스키

Владимир Зенонович Май-Маев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7–1920 ✕ 자살

의용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으나, 무리한 전선과 알코올 의존으로 무너진 백군 장군

1919년 여름, 영국 사절단은 '하리코프 장군'에게 수여하라는 훈장을 들고 의용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하리코프는 도시의 이름일 뿐이었고, 세인트마이클·세인트조지 훈장은 하리코프 주둔 사령관인 마이-마옙스키에게 주어졌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정 러시아 중장으로, 1918년 의용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뒤 빠르게 사단장으로 올랐고 1919년 5월 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모스크바 공세에서 하리코프·쿠르스크·오룔을 연이어 점령하며 백군 중 가장 깊숙이 볼셰비키 수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늘어진 전선과 돈군과의 협조 실패, 후방의 마흐노 봉기로 공세는 붕괴했고, 악화된 알코올 의존 탓에 1919년 11월 데니킨브란겔로 교체했다. 1920년 11월 크림 철수 중 세바스토폴에서 사망했으며, 권총 자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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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96제1사관학교·니콜라옙스크 공병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러일전쟁 참전, 대령 진급
  • 1914–17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1근위군단 지휘, 중장 진급
  • 1918의용군 사병 입대, 드로즈돕스키 사후 제3소총사단장 취임
  • 1919.5의용군 사령관 임명, 하리코프 점령 후 지역 총사령관 겸임
  • 1919.6–10모스크바 공세 주도, 쿠르스크·오룔 점령
  • 1919.11공세 붕괴로 해임, 브란겔이 승계
  • 1920크림에서 후위부대 지휘, 세바스토폴 철수 중 사망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8–1918 ✕ 처형

전제(專制)를 신이 맡긴 의무로 믿은 마지막 차르

1917년 3월 2일 밤, 퇴위 조서에 서명한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주위는 온통 배신과 비겁함과 속임수뿐이다!"

1905년 군중에게 발포한 뒤에도, 1915년 총사령관을 자임해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쓴 뒤에도, 그는 물려받은 전제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는 신탁으로 믿었다. 1917년 2월 쏠 군대가 사라지자 300년 왕조는 일주일 만에 끝났고, 이듬해 7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가족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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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차르 즉위
  • 1904–05러일전쟁 패배, 1905년 혁명
  • 1906기본법 공포, 제한된 두마 체제 출범
  • 1915총사령관을 자임하고 전선으로, 패전 책임이 왕좌로 직결
  • 1917.3퇴위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리티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иттих

곡물 강제 징발로 빵 위기를 폭발시킨 마지막 차르 체제 농업장관

1917년 2월 17일 두마 연단에서 곡물 징발의 정당성을 역설했으나 야당의 냉소만 샀다. 닷새 뒤 페트로그라드의 빵 가게 앞에 선 여성들이 혁명을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농업장관으로, 1916년 11월 29일 곡물 강제 징발령(продразвёрстка)에 서명했고 1917년 1월 말 페트로그라드의 제분소 공급을 하루 3만 5천 푸드로 제한했다. 이는 빵 부족과 줄서기 공황을 촉발해 2월 혁명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원래 스톨리핀 농업개혁의 핵심 설계자였던 유능한 관료였으나, 전시 경제의 수송 붕괴와 인플레이션 앞에서 도구를 잘못 쥔 개혁가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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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알렉산드르 관립학교(리체이) 금메달 졸업
  • 1888–1905내무성 지방국·경찰국·이주관리국 근무, 농업문제 특별회의 서기
  • 1905–1912토지정리·농업총국 국유지부장, 스톨리핀 개혁 입법 설계
  • 1912–1916농업차관, 궁정 시종장(1913), 원로원 의원(1916)
  • 1916.11–1917.02농업장관 — 곡물 징발령 서명(11.29), 페트로그라드 제분 제한(1917.1)
  • 1919–1930영국 망명, 런던 소재 러시아 은행장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Ефимович Распутин
정치·당 지도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16 ✕ 살해

제국의 침실까지 들어온 시베리아의 「성자」

1905년 11월 1일,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4시에 세르기옙카로 갔다. 밀리차 및 스타나와 차를 마셨다. 하느님의 사람 — 토볼스크 출신 그리고리와 알게 되었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 신비가. 황태자의 혈우병을 진정시켜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고, 전시에 장관 인사까지 좌우했다. 1916년 12월 군주제를 구하려던 귀족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왕조는 두 달 뒤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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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시베리아 순례자에서 페테르부르크 살롱으로
  • 1905–07황실에 소개되어 황태자의 발작을 진정
  • 1911–16인사 개입 스캔들, 전시의 「장관 도약」
  • 1916.12유수포프 저택에서 살해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Красн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47 ✕ 처형

반볼셰비키 돈 카자크 국가를 세우고 나치와 협력한 백군 아타만이자 노벨상 후보 작가

1917년 11월 트로츠키에게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가석방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이튿날 바로 돈 지역으로 탈출해 반소비에트 투쟁에 합류했다.

돈 카자크 장군 가문 출신의 제국 육군 중장으로, 1918년 아타만에 선출되어 독일의 지원 아래 독자적인 반볼셰비키 국가 '전대돈군주'를 세웠다. 망명 후 다작 소설가로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카자크 중앙관리국을 이끌며 소련에 대항하는 카자크 부대를 조직했다가 종전 후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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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근위 아타만 연대 복무, 러일전쟁 종군기자, 제10돈 코사크 연대장
  • 1914–1917제2복합 코사크 사단장 겸 제3기병군단장, 루츠크 돌파 주도, 소장 진급
  • 1917.10–11케렌스키-크라스노프 봉기: 700명의 카자크로 페트로그라드 진격, 실패 후 체포되었다가 트로츠키에 의해 석방
  • 1918.5–1919.2돈 카자크 아타만 당선, 독일 지원으로 돈 군대 조직, '전대돈군주' 수립
  • 1919–1936도임 후 북서군 신문 편집, 독일·프랑스 망명, 반소비에트 망명 정치 활동
  • 1921–1939『쌍두독수리에서 붉은 기까지』 3부작 등 20여 편 집필,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
  • 1943–1945나치 동부점령지부 카자크 중앙관리국장, 대소련 카자크 부대 조직
  • 1945–1947영국군에 체포되어 소련 송환,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1947년 1월 16일 교수형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Лавр Георгиевич Корнил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1870–1918 ✕ 전사

「강한 손」을 자처한 장군

1914년 11월 야간 전투에서 코르닐로프가 직접 이끈 기습으로 오스트리아군 포로 1,200명과 함께 사로잡힌 라프트 장군: 「코르닐로프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힘이오.」

카자크 병사의 아들로 태어나 총사령관까지 오른 입지전의 군인. 1917년 8월 소비에트를 부수러 수도로 군단을 보냈으나, 철도 노동자와 선동가들 앞에서 군대는 도착하기도 전에 녹았다. 내전 초기 백군 의용군을 이끌다 1918년 예카테리노다르 공격 중 포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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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6사단장, 오스트리아 포로가 되었다 탈출해 전국적 명성
  • 1917.3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황후의 연금을 집행
  • 1917.7총사령관 임명
  • 1917.8수도로 군단 이동, 실패, 비호프 수도원 연금
  • 1917.11–1918.4탈출, 백군 의용군 창설, 예카테리노다르에서 전사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리모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ым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계 1871–1917 ✕ 자살

코르닐로프의 페트로그라드 진군을 이끈 제정 러시아 기병 장군

1917년 8월 31일(구력, 신력 9월 13일) 케렌스키 앞에서 권한 이양을 요구받은 크리모프는 함정에 빠졌다고 판단하고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부상한 채 니콜라이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자살이라는 공식 설명 외에 다른 설명도 전한다.

알렉산드르 크리모프는 제정 러시아군의 기병 장군이다. 바르샤바 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스코프 생도단과 파블롭스크 군사학교를 거쳐 1902년 니콜라이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 부대를 지휘하며 결단력 있는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7년 4월 제3기병군단장이 되었고, 8월 코르닐로프 사건에서 페트로그라드 진군을 이끌었으나 철도 노동자들의 저지와 병사들의 동요로 좌절되었다. 케렌스키와 면담한 뒤 자해했고 니콜라이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자살이라는 공식 설명 외에 다른 사망 설명도 전하며, 코르닐로프 사건의 성격을 둘러싼 평가도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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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2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생도, 졸업 후 제6포병여단 소위
  • 1902니콜라이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4시베리아군단 사령부 복무
  • 1911–1913자바이칼 카자크군 제1아르군 연대 지휘
  • 1915–1916우수리 기병여단장, 1915년 12월 사단으로 확대된 뒤 우수리 기병사단장
  • 1917제3기병군단장, 코르닐로프의 페트로그라드 진군 지휘
  • 1917코르닐로프가 임명한 별개 페트로그라드군 사령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독일 1872–1918 ✕ 처형

라스푸틴에 의존해 제정 말기 정치를 좌우한 마지막 황후

남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신이시여, 이것이 러시아를 구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태어나 1894년 러시아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신이 내린 전제군주권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니콜라이 2세를 움직였다.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간 사이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료를 거듭 교체하며 내정을 좌우했다. 독일계 출신이라는 의심과 라스푸틴 스캔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고, 전제정치 고수와 개혁 거부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에서 남편과 다섯 자녀와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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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니콜라이 2세와 결혼, 러시아 황후
  • 1904황태자 알렉세이 출산
  • 1905라스푸틴과 첫 만남
  • 1915–17니콜라이 2세 부재 중 라스푸틴과 함께 내정 통제
  • 1917.3가택연금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안톤 이바노비치 데니킨

Антон Иванович Деникин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72–1947 ○ 심장마비

볼셰비키 정권을 모스크바 400km 앞까지 몰아붙인 백군 최대 규모 군대의 총사령관

1899년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부당하게 명단에서 제외되자 황제에게 탄원했다. 주변에서 청원을 취하하면 조용히 배려해 주겠다고 했을 때의 답: "나는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내 권리인 것만을 요구할 뿐이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국 육군 중장으로, '철의 여단'을 이끌며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에 섰다. 1918년 코르닐로프 사후 의용군 사령관을 이어받아 남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백위대 최대 병력을 지휘했고, 1919년 여름 모스크바 공세로 오룔까지 진격해 소비에트 정권을 가장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통일되고 불가분의 러시아'라는 경직된 구호로 민족·농민 문제에 실패했고, 통제 불능의 포그롬은 국제적 신뢰를 무너뜨렸다. 망명 후 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를 집필해 혁명과 내전의 기초 사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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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05러일전쟁 참전, 참모 장교로 무공을 세워 대령 진급
  • 1914–16제4소총 '철의 여단'(후 사단) 지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2회 점령
  • 1917.4–5최고사령관 알렉세예프의 참모장, 군의 민주화에 반대
  • 1917.8–11코르닐로프 지지로 체포, 비호프 수도원에 수감
  • 1918.4코르닐로프 전사 후 의용군 사령관 승계
  • 1919.1남러시아군 총사령관, 백군 최대 병력 편성
  • 1919.7–10모스크바 공세, 오룔 점령 후 적군 반격으로 패퇴
  • 1920.4브란겔에게 지휘권 이양, 망명길에 오름
  • 1923–27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 출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20 ✕ 처형

북극에서 총살형장까지, 제정의 마지막 무장 방어자

"파리에 있는 내 아내에게 내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소?" — 1920년 2월 7일, 총살 집행대 앞에서 사령관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로 이름을 떨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를 지휘했고 함대 사령관 중 유일하게 니콜라이 2세의 퇴위에 반대했으며, 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로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에 추대되어 시베리아 백군을 이끌었으나 1920년 2월 볼셰비키에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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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해군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00–1902러시아 북극 탐험대 수문학자 겸 지도제작자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구축함 세르디티 함장 → 뤼순 포대 지휘, 부상·포로
  • 1906콘스탄틴 메달 수상, 해군 참모본부 근무
  • 1914–1915발트함대 작전부장 → 기뢰부대 사령관,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 1916–1917흑해함대 사령관, 해군 중장
  • 1918–1919전러시아 최고 통치자 겸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옴스크)
  • 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넘겨져 이르쿠츠크에서 총살

미하일 콘스탄티노비치 디테릭스

Михаил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Дитерихс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37 ○ 사망

콜차크의 참모장이자 로마노프 일가 수사 책임자, 백색 프리아무르의 마지막 통치자

“러시아는 오직 그리스도의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1922년 8월, 젬스키 소보르에서 프리아무르 통치자 취임 연설.

콜차크 정권의 참모장을 지낸 제정 러시아 장군이자 독실한 군주주의자. 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작전 기획에 참여했고, 사로니카 전선의 러시아 원정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콜차크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인 토볼스크 작전을 이끌었으며,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에 대한 소콜로프 수사를 감독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지막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로마노프 왕조 복위를 선언하고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에 취임했으나, 그해 10월 붉은 군대에 패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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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포병여단 임관
  • 1900니콜라옙스크 참모대학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랴오양·사허·봉천 전투 참전, 중령 진급
  • 1914–1916제3군 참모장, 브루실로프 공세 기획 참여
  • 1916–1917사로니카 전선 러시아 원정군 사령관
  • 1919로마노프 일가 처형 수사 감독 → 동부전선 사령관, 콜차크 참모장, 토볼스크 공세 지휘
  • 1922프리아무르 젬스키 소보르 소집,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 → 패배 후 상하이 망명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극동부 의장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엥겔하르트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Энгельгардт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소련 러시아 1877–1962 ○ 자연사

수비대를 막사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으로 명령 제1호를 촉발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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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3파제스키 군단·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근위 울란 연대 복무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1만주군 사령부 근무
  • 1908건강 문제로 제대, 모길료프 현 지방 자치 활동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원, 10월당·진보블록
  • 1917.02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페트로그라드 혁명 사령관
  • 1918–1919백군 의용군 대표부 정치부장(키예프·오데사), 남러시아군 선전부
  • 1920–1940프랑스·라트비아 망명, 택시 기사·경마 조련사
  • 1940–1962소련 체포·호레즘 유형(1946년까지), 이후 리가에서 통역사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78–1918 ✕ 살해

하루 동안의 차르가 될 수 있었으나 제헌의회에 양보한 마지막 로마노프

1917년 3월 16일, 미하일은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우리 위대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제헌의회가 정부 형태를 결정하여 나에게 그 권력을 부여할 때에만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아들로, 형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제위 계승 1순위에 있었으나, 평민과의 모르가나틱 결혼을 감행해 스스로 왕조의 변방으로 물러났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가 아들 대신 그에게 양위했을 때, 이튿날 그는 제헌의회가 국민 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때까지 제위 수락을 유보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사실상 끝났고, 그는 가치나로 물러나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살해되어 볼셰비키 손에 죽은 첫 로마노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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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황태제(추정상속인), 국무회의 의원
  • 1912나탈리야 브라소바와 모르가나틱 결혼, 모든 공직 해임과 국외 추방
  • 1914–1916카프카스 원주민 기병사단('야생사단') 및 제2기병군단 지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1–3기병 총감
  • 1917.3.15–16니콜라이 2세의 양위로 미하일 2세로 선포됐으나 제헌의회까지 제위 수락 유보
  • 1918.3–6페름 유형, 체카에 납치·살해됨

바실리 비탈리예비치 슐긴

Василий Витальевич Шульгин
정치·당 지도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무국적) 러시아 1878–1976 ○ 자연사

차르의 퇴위를 직접 받아내고 백군 이데올로그가 된 두마의 군주제 보수주의자

프스코프 역의 차르 전용 열차에서, 나흘째 면도도 씻지도 않은 슐긴에게 황제의 측근이 말했다: '이 피자크 차림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오.'

바실리 슐긴은 러시아 제국 말기 두마(II·III·IV대)의 핵심 보수정치인이자 《키예블랴닌》 편집자로, 강력한 러시아 민족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주창했다. 1917년 3월 알렉산드르 구치코프와 함께 프스코프로 가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직접 받아냈으나, 혁명의 파국을 막지는 못했다. 남북전쟁기 백군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고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으며, 1944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12년간 수감되었다. 1956년 사면 후 소련에 남아 회고록을 집필하고 1965년 다큐멘터리 《역사의 심판》에 출연하여, 패배했으나 굴복하지 않은 구체제의 산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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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II·III·IV대 두마 의원 (볼린현)
  • 1913–1917《키예블랴닌》 편집자
  • 1915진보블록 공동창설, '진보적 민족주의자' 그룹 지도
  • 1917.3구치코프와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8–1920백군 운동 선전가·이데올로그, 《로시야》·《벨리카야 로시야》 편집
  • 1920–1944유고슬라비아 망명, 회고록 《날들》·《삼도시》 집필
  • 1947–1956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 25년형 수감 (12년 복역)
  • 1956–1976사면 후 블라디미르 거주, 《레닌의 실험》 집필, 영화 《역사의 심판》 출연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81–1970 → 망명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갈려 나간 웅변가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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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7두마 의원(트루도비키), 정치재판 변호사로 명성
  • 1917.3임시정부 법무장관, 정치범 사면, 사형 폐지
  • 1917.5육해군장관, 6월 공세 강행과 실패
  • 1917.7–10총리, 코르닐로프 사건, 10월에 실각
  • 1918–70파리·뉴욕 망명, 저술과 강연

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

Stanisław Bułak-Bałachowicz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폴란드 벨로루시·폴란드계 1883–1940 ✕ 살해

에스토니아에서 벨로루시까지 진영을 옮겨 다닌 반소비에트 유격 지휘관

필수드스키는 그를 '도둑이지만 도둑만은 아니고, 오늘은 러시아인, 내일은 폴란드인, 모레는 벨로루시인'이라고 평했다.

붉은 군대에서 백군으로 넘어가 1919년 프스코프를 점령하고 유데니치와 갈라져 에스토니아 편에 섰다가 1920년 폴란드로 옮겨 벨로루시 원정을 벌였다. 부대의 반유대인 폭력이 기록되어 있으며 1940년 독일 점령 바르샤바에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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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차르 군대에 징집되어 게오르기 십자훈장·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8붉은 군대에 입대, 트로츠키의 승인으로 루가 기병연대 편성
  • 1918-11약 4백 명을 이끌고 백군으로 전향
  • 1919대령에서 소장으로 승진, 유데니치 공세에서 프스코프 점령
  • 1920-01유데니치를 체포하고 에스토니아 편에 섬
  • 1920폴란드 군에서 핀스크 점령, 러시아 인민의용군 편성
  • 1920-11소비에트 벨로루시로 침입해 스스로 벨로루시 국가 수반이라 선언, 패배 후 폴란드로 도피
  • 1939바르샤바 방어에 참가, 1940년 5월 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