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사회운동·조직 ·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인물 27명

조건 모두 해제

니콜라이 에르네스토비치 바우만

Николай Эрнестович Бауман

국경을 넘나들며 이스크라 조직망을 구축한 '그라치', 혁명의 첫 순교자

망명지에서도 기타를 치고 즉석에서 풍자시를 짓고 캐리커처를 그리던 청년 — 역사가 블라들렌 로기노프가 전하는 바우만의 초상이다.

볼가 독일계 수의사 출신 볼셰비키로, 레닌의 《이스크라》 러시아 국내 불법 배포망을 책임졌다. 1905년 10월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10만 장례 행렬은 혁명 시위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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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카잔 수의과대학 졸업, 사라토프 현에서 근무
  • 1896–97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동맹」 활동
  • 1897–99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22개월 독방, 뱟카 유형
  • 1900스위스에서 레닌과 이스크라 창간 준비, 러시아 국내 불법 수송 책임
  • 1901–03모스크바 위원회, 키예프 체포·탈옥(「11인 탈주」), 제2차 당대회 대의원 — 볼셰비키
  • 1903–04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및 중앙위 북부국 지도, 체포 후 타간카 감옥 16개월
  • 1905.10석방 직후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이반 바실리예비치 바부시킨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Бабушкин

이스크라가 가장 신뢰한 노동자 조직가, 볼셰비키 노동자 전형의 원형

1902년, 알렉산드롭스크 감옥 창살을 톱으로 잘라 탈옥한 그는 외국어 하나 모르는 채 런던으로 향했다. '이스크라' 편집부와 당면 과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레닌의 노동자 서클에서 성장한 혁명가. 《이스크라》 특파원으로 오레호보-보고로츠크 조직을 건설했고 체포·유형·탈옥을 거듭했다. 1905년 치타 무장봉기를 지도했고 이듬해 무기 호송 중 체포·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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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91크론슈타트 어뢰 작업장 견습공
  • 1891–96페테르부르크 세먀니코프 공장 기계공
  • 1894–95레닌의 노동자 마르크스주의 서클 참여, '투쟁동맹'에서 서클·도서관 조직
  • 1896–97체포, 예카테리노슬라프 유형 ― 현지 '투쟁동맹'·RSDDP 위원회·《유즈니 라보치》 창간
  • 1900–01《이스크라》 특파원·배포책 ― 오레호보-보고로츠크 RSDDP 조직 건설
  • 1902–03체포·탈옥·런던 망명·귀국. 재체포 후 베르호얀스크 유형
  • 1905사면, 이르쿠츠크·치타 위원 ―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치타 무장봉기 지도
  • 1906.1무기 호송 중 슬류뎬카 역 체포, 미소바야 역에서 즉결 총살

크리스티안 게오르기예비치 라콥스키

Христиан Георгиевич Раковский

발칸 혁명가에서 우크라이나 수반으로: 반대파 이론가가 된 외교관

「우리의 불행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았고, 권력이 우리 머리를 돌게 했다는 데 있다」, 1938년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

불가리아 민족 출신으로 루마니아 시민권을 지닌 범유럽적 혁명가였고,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다. 1919–1923년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를 세웠고, 주영·주프랑스 소비에트 대사를 지냈다. 스탈린의 민족 정책과 당 관료화를 비판한 좌익 반대파의 이론가로 1927년 제명되었고, 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를 인정하고 1935년 복당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되었으며, 1988년 2월 4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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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6제네바·베를린·몽펠리에에서 의학 수학, 유럽 사회주의 운동 참여
  • 1910루마니아 사회민주당 재건 및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 창설 주도, 제1서기
  • 1919–1923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내무인민위원
  • 1919–1927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 1919–1920년 조직국 위원
  • 1923–1927소비에트 연방 주영·주프랑스 전권대표
  • 1927–1935좌익 반대파 지도자로 당 제명 및 유배 (아스트라한·사라토프·바르나울)
  • 1934–1937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 인정, 1935년 11월 복당, 보건인민위원부 학술연구소 관리국장
  • 1937–19411936년 재제명, 1937년 1월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20년형,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

바실리 니콜라예비치 카유로프

Василий Николаевич Каюров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 조직자, 여성의 날 시위를 혁명으로 이끌다

2월 28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카유로프는 병사들 앞에서 "동지들이여, 한 지주를 다른 지주로 바꾸기 위해 사흘 동안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노동자의 피가 흘렀단 말인가?"라고 외쳤다.

1898년 입당한 금속노동자 출신 볼셰비키로,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에서 활동하며 1917년 2월 23일 여성 방직 노동자들의 국제 여성의 날 파업을 당 위원회의 신중론을 뒤집고 혁명적 총파업으로 전환시켰다. 2월 27일에는 무장분견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습격해 소총을 확보하고 감옥을 열어 수감된 혁명가들을 해방시켰으며 경찰서를 공격했다. 혁명 후 5군 정치부장을 거쳐 경제 행정에서 일했고, 1932년 아들과 함께 류틴의 강령을 받든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을 결성하여 스탈린에 공개적으로 맞섰다가 1936년 카자흐스탄 유형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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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5소르모보 12월 무장봉기 참가
  • 1912–17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 비밀 활동
  • 1917.022월 혁명 주도, 비보르크 구 소비에트 의장
  • 1917.07레닌을 자택에 은닉
  • 1918–20제5군 정치부장 (동부전선)
  • 1921–22시브레브콤 특별전권위원, 시비르 당 숙청위 의장
  • 1932'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체포, 3년 유형
  • 1935–36재체포, 카자흐스탄 3년 유형, 유형지에서 사망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엘친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Эльцин
과학·기술 소속 미확정 소련 우크라이나 1876–1937 ✕ 처형

러시아 초대 대통령과 이름이 겹치는, 의사 출신의 좌익반대파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러시아어 표기도 이쪽은 Эльцин, 대통령은 Ельцин으로 다르다.

1876년 키예프현 즈베니고로드카에서 태어났다(1875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189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이듬해 오데사의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를 마친 의사였다. 1910년 혁명 활동으로 우파현에 유배되어 벨레베이에서 위생의사로 일하며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혁명 후 지역 소비에트와 여러 위원회에서 일했고,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에 속해 46인 선언에 서명했다.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이듬해 초 우스티-뷔미로 유배되었고, 1929년에는 수즈달 정치격리소에 수용되었다. 1936년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마가단에서 정치범 단식투쟁을 조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37년 처형되었고 1956년 11월 23일 복권되었다. 아들 빅토르 보리소비치 엘친도 반대파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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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898오데사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 졸업
  • 1910우파현 유배, 벨레베이 위생의사
  • 1923좌익반대파 가담, 46인 선언 서명
  • 1927당에서 제명
  • 1928–1929우스티-뷔미 유배, 수즈달 정치격리소 수용
  • 1936재체포, 시베리아 유배, 마가단 정치범 단식투쟁 조직
  • 1937처형
  • 1956복권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무랄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Муралов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77–1937 ✕ 처형

레닌 묘역 1번 초소를 세운 혁명 군인

1928년 6월 6일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고백서를 쓰느니 차라리 사지를 찢기는 편을 택하겠다. 나 홀로 남는다 해도 쓰지 않을 것이다."

농장 그레체스키에 로티에서 태어나 17세에 농업학교로 떠났고, 1903년 포돌스크에서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한 뒤 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내전기에는 동부전선과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3년 46인 성명에 서명해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옹호 연설을 한 뒤 제명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1924년에는 레닌 묘역의 1번 초소를 창설했다. 1936년 4월 17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어 1937년 1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86년 4월 대법원이 판결을 취소하고 사후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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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볼셰비키 입당, 1905년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여
  • 1917.10–1917.11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무장봉기 지도
  • 1917.11–1919.02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군사위원)
  • 1919동부전선 및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4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재임, 1번 초소 창설
  • 1925–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총장
  • 1927제15차 당대회 연설 후 제명, 시베리아 유형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예브게니야 보그다노브나 보시

Евгения Богдановна Бош

첫 여성 소비에트 정부 수반, 혁명과 병마 사이에서

독일군이 키예프로 진격하자 동료들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보시는 싸우지 않고 도시를 넘길 수 없다며 버텼다. 결국 그녀는 말 그대로 강제로 대피시켜야 했다.

독일계 볼셰비키로,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를 맡아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정부를 이끌었다. 망명 시절 레닌의 민족문제 노선에 맞섰고, 좌익 반대파 46인 선언에 서명했으며 투병 끝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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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가입, 볼셰비키 분파 활동
  • 1907–1911키예프에서 지하혁명운동, 키예프 위원회 서기
  • 1912–1914체포, 시베리아 유형, 탈출·망명
  • 1914–1917스위스 망명, '보지 그룹'으로 레닌과 민족문제 논쟁
  • 1917.04–07남서지역 당위원회 의장, 제6차 당 대회 대표
  • 1917.12–1918.03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 겸 내무인민비서
  • 1918–1919펜자 당위원회 의장, 카스피-캅카스 전선 정치위원
  • 1923–1924좌익 반대파 합류, 46인 선언 서명

지노비 야코블레비치 리트빈-세도이

Зиновий Яковлевич Литвин-Седой

프레냐 노동자 전투부대의 조직자

“우리는 투쟁을 끝낸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홀로다.”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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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혁명운동에 참가
  • 189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
  • 1905모스크바 프레냐 전투부대 지휘
  • 1906스베아보르그 수병 봉기에 참여
  • 1917–1918키예프 소비에트와 항공부대 당 조직에서 활동
  • 1919–1921군사교통 중앙관리국과 교통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1939모스크바 12월 봉기 기념 면방직 기술학교 교장
  • 1939–1947연금 생활

이반 니키티치 스미르노프

Иван Никитич Смирнов

좌익 반대파의 시베리아 볼셰비키

1927년 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스미르노프는 무일푼으로 노동교환소에 실업 등록을 하러 갔다. 서류의 '마지막 직위'란에 '우편·전신 인민위원'이라고 적자, 창구의 하급 관리가 눈앞에 서 있는 이 백발의 고매한 거한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1899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로, 일곱 차례 체포와 유배를 겪으며 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내전기 우랄·시베리아의 당 조직가이자 시브레프콤 의장으로 콜차크 백군 분쇄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20년대에는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27년 제명 후에도 1931년부터 비밀 반대파 조직을 이끌며 베를린을 통해 트로츠키와 연락을 재개했고, 1933년 체포되어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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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21시베리아·우랄 내전기 당 조직가
  • 1923–1927우편·전신 인민위원, 좌익 반대파 지도자
  • 1927–1930당 제명과 유배
  • 1933–1936재체포,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카모

Симон Тер-Петросян

볼셰비키의 전설적 무장약탈자, 광기를 연기해 사형을 네 번 피한 혁명가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티플리스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티플리스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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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03RSDLP 입당, 티플리스 위원회 청년조직 지도, 지하인쇄소 조직
  • 1903–05첫 체포 후 탈옥, 1905년 혁명 참가, 무기 밀반입
  • 1907티플리스 은행마차 습격 지휘 — 34만 루블 탈취, 레닌에게 전달
  • 1907–11베를린 체포, 3년간 광기 연기로 사형 면함,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 1912–17코조리 습격 실패 후 체포, 4건 사형선고 →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20년형
  • 1918–20캅카스·남러시아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 바쿠 봉기 준비
  • 1920–22참모아카데미 수학, 대외무역·그루지야 재무인민위원부 근무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안토노프-옵세옌코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нтонов-Овсеенко
군사·지휘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38 ✕ 처형

겨울궁전을 접수한 10월 봉기 지휘관, 21년 뒤 스탈린에게 총살되다

사형장으로 향하며 동료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어 건넸다. 유리 톰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볼셰비키였고 끝까지 볼셰비키로 남았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21년 전 그는 겨울궁전에서 임시정부를 체포했던 사나이였다.

체르니고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10월 군사혁명위원회 비서로서 포드보이스키·추드노프스키와 함께 겨울궁전 접수 작전을 준비하고 임시정부 체포를 집행했다. 내전기 남부·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1921년 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유독가스 사용 결정에 서명했다. 1922년 적군 정치총국장을 지내다 트로츠키를 옹호한 끝에 1924년 1월 해임되었고, 외교관으로 전환해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전권대표를 지냈다. 1937년 러시아 SFSR 사법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1956년 2월 25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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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비서; 겨울궁전 습격 지휘, 임시정부 체포
  • 1917.12–1918.05남러시아 소비에트군 총사령관
  • 1919.01–1919.06우크라이나 전선 사령관
  • 1921.02–1921.07탐보프 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
  • 1922.08–1924.01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정치총국장(1924년 1월 해임)
  • 1924–1934소련 전권대표: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1923년 중국 파견)
  • 1934–1937러시아 SFSR 검찰총장; 바르셀로나 총영사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라셰비치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Лашевич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4–1928 사망 경위 논란

1917년 봉기와 내전을 지휘한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

1917년 10월 24일 저녁, 라셰비치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벨리셰프를 통해 순양함 아브로라 호에 명령을 내려 전날 사관생도들이 끊어 놓은 니콜라예프스키 다리를 복구하게 했고, 이 임무는 완수되었다.

1884년 러시아 제국 오데사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1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봉기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제3군 사령관과 동부·남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5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에 올랐으나 1926년 통합 반대파 가담 뒤 강등되어 1926~1928년 하얼빈 중동철도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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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5RSDLP 입당, 오데사·니콜라예프·예카테리노슬라프·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반복적 체포와 유배
  • 1915–17제1차 세계대전 징집, 두 번 부상, 공로로 상급 하사관 진급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볼셰비키 분파 서기·의장,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지휘
  • 1918–20제3군 사령관, 동부·남부·서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7군 사령관 대행
  • 1922–25시베리아 혁명위원회 의장,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25–26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26–27통합 반대파 가담, 불법 집회 조직, 중앙위 후보위원 해임, 15차 당대회 출당
  • 1928반대파 철회 선언, 당적 회복, 하얼빈에서 사망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메드베데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Медведев

노동자 반대파의 금속노동자. 당 기관에 패배하고 숙청되다

1937년 9월 10일 군사합의회에서 58조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공범으로 누구도 지목하지 않았다. 당일 총살되었다.

모스크바 근교 빈농 가정 출신으로 열셋에 오부호프 공장 선반공이 된 볼셰비키 노동자였다. 1차대전 중 실랴프니코프와 함께 페트로그라드에서 당 중앙위 러시아국을 조직했고, 1917년 아친스크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내전 후 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으로 실랴프니코프와 '노동자 반대파'를 공동 지도하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와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22년 '22인 서한'에 서명해 코민테른에 당내 탄압을 호소했고, 1933년 출당 후 1937년 재판에서 끝내 자백을 거부하고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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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부호프 공장 파업 참가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합류
  • 1912–14지하 노동자보험운동 조직
  • 1915–17당 중앙위 러시아국 조직, 시베리아 유형
  • 1917아친스크 소비에트 결성, 제헌의회 의원 당선
  • 1918전러시아 중앙집행위 혁명재판소장, 적군 정치위원
  • 1920–22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 '노동자 반대파' 공동 지도
  • 1921–22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22'22인 서한' 코민테른 제출, 분파활동 혐의로 경고
  • 1920s 후반중공업인민위원부 근무
  • 1933당 제명, 북부 러시아 행정유형
  • 1935–37체포,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수감, 사형 선고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폴란드 1885–1939 ✕ 옥중 살해

재판에서 살아남아 감옥에서 죽은 논객

"스탈린과 모세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스탈린 동지는 유대인들을 정치국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축출된 뒤 라데크가 바자노프에게 던진 농담.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오간 저널리스트·외교가였다. 레닌의 측근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과 코민테른 창립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날카로운 논쟁과 비꼬는 유머로 이름난 좌익 반대파 지도자였으나, 1930년 공개 자아비판으로 복당했다. 대숙청 속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중심 피고로 법정에서 연극적 자백을 펼쳐 10년형을 받았고, 1939년 옥중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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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3국제 공산주의·외교 활동
  • 1923–1927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37–1939재판, 수감과 살해

예브게니 알렉세예비치 프레오브라젠스키

Евгений Алексеевич Преображенский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86–1937 ✕ 처형

신경제정책 논쟁의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의 회고: "회의 중에 언제든 쓰러져 잠들 것 같았지만, 두뇌는 여전히 맑고 통계치로 가득 차 있었다."

볼셰비키 경제 이론가이자 부하린과 함께 『공산주의 ABC』(1919)를 집필한 선전가로,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내며 초기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1923년 '46인 선언'의 발기인이자 좌익 반대파의 핵심 논객으로서, 『새로운 경제학』(1926)에서 농민 부문의 잉여를 공업화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을 정식화해 신경제정책 논쟁을 이끌었다. 1929년 스탈린 노선으로 복귀했으나 곧 집단화 폭력에 반대하며 다시 지하 조직을 결성했고, 1937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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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당 중앙 지도부와 경제 이론 활동
  • 1923–1927좌익 반대파·46인 선언
  • 1928–1937유배, 재체포와 처형

유리 흐리산포비치 루토비노프

Лутовинов, Хрисанфович Юрий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소련 러시아인(러시아어 사료의 서술) 1887–1924 ✕ 자살

루간스크의 금속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 노동반대파 지도자

1920~1921년 노동반대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산업의 집단적 관리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다 10차 당대회에서 레닌 노선에 패배했고, 신경제정책과 당 관료화에 환멸하여 1924년 5월 7일 권총으로 자살했다.

1887년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루간스크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루간스크 탄약 공장의 금속 선반공으로 일했다.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아르한겔스크와 야쿠츠크 현으로 유배되어 두 차례 탈출했으며, 1907~1910년 반동 시기에는 사회혁명당에 속했다가 볼셰비키로 돌아왔다. 1917년 3월 루간스크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8월 금속노동조합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전러시아 제헌의회 의원이 되었다. 1918년 3월 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를 이끌었고 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이후 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과 통신노동조합 의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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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루간스크 금속노동조합 의장, 루간스크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 1917.12도네츠-크리보이로크 지역 노동조합위원회 의장
  • 1918.3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 의장
  • 1918.4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18.7.12–10.17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 1919.1.25–1921.5.17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
  • 1919.12.10–1920.12.31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 1921.1.5–12.2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 1921–1922독일 주재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 통상대표부 차석 대표
  • 1922.9.22–1924.5.7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 통신 노동자·직원 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인노켄티 니콜라예비치 스투코프

Иннокентий Николаевич Стук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1887–1936 ✕ 처형

좌파 공산주의에서 통합반대파까지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한 혁명가

1918년 2월,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레닌의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수용 방침에 반대하는 결의를 주도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6년의 감옥 생활과 유형을 겪은 혁명가로, 1918년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에 반대하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내전기 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우파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이후 민주집중파(데치스트)·46인 성명·통합반대파에 차례로 가담하며 10년 넘게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했다. 1927년 제명·유배 후 복귀하여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으로 일했으나, 1936년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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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파
  • 1917모스크바 지역국(RSDLP(b)) 의장
  • 1918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9우파 현혁명위원회 의장
  • 1920우파 현당위원회(RCP(b)) 의장
  • 1920–1921『소베츠카야 시비리』 편집자, 민주집중파(데치스트) 참여
  • 1926–1927통합반대파 참여, 당 제명 및 유배
  • 1936RSFSR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스미르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Смирн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7–1937 ✕ 처형

모스크바 봉기 포병 지휘관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민주중앙집권파로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는 '유럽 사회주의라는 간선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곁길이며 실패할 운명'이라고 보았다.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모스크바 법대생으로, 니콜라이 부하린·오신스키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트리오를 이루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중포병을 지휘했고 1918년 초 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로 물러난 뒤, 민주중앙집권파·46인 선언·통합 야당을 거치며 당내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1921~1927년 고스플란 상임위원,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노동국방회의 이사로 중앙계획 기구에서 활동했다.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를 '유럽 사회주의의 곁길'로 보았고, 제명 후에는 '혁명과 볼셰비즘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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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09–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모스크바위원회 선동가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포병 준위, 서부전선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신문 《소치알-데모크라트》 편집, 10월 봉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중포병 지휘
  • 1918.02–1918.04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
  • 1918–1921좌파 공산주의자, '군사야당' 지도자, 최고경제회의(VSNKh) 근무
  • 1920–1923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 지도자
  • 1921–1927고스플란 상임위원, 노동국방회의 이사,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중앙통계국 이사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4–1926《프라우다》 및 《에코노미체스카야 지즌》 편집위원 겸직
  • 1926–1927사프로노프와 '15인 그룹' 결성, 통합 야당 참여
  • 1927.12제15차 당대회에서 제명, 우랄 유형 3년형
  • 1930–1937수감·유형 반복, 수즈달 정치격리소 수감 중 모스크바로 이송
  • 1937.05.26군사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티모페이 블라디미로비치 사프로노프

Тимоф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апронов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이런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계급 앞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을 실추시키는 일이다」.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1931년 12월 집필, 1932년 발표

툴라주 모스타우시카 마을의 러시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도장공으로 일했고, 1905년 혁명 운동에 들어가 1912년 볼셰비키가 되었다. 10월 혁명 후 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소인민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민주중앙집권파'를 이끌며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으나 1927년 제15차 당 대회에서 제명되어 유배되었고, 이후 좌익 반대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31년 12월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를 써서 소련 체제를 '기형적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으며, 1937년 9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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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모스크바에서 도장공 노동자 조직, 건설노조 결성
  • 1917–1919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0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및 집행위원회 의장
  • 1920–1921'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당내 민주화 투쟁
  • 1921–1923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 1923–1925소(小)인민위원회 의장,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26–192715인파 성명 주도, '국가자본주의' 테제 제출
  • 1927–1937당 제명, 유배,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집필, 체포 및 총살

세르게이 야코블레비치 바그다체프

Сергей Яковлевич Багдатьев

대중의 급진성을 앞세운 볼셰비키 실천가

“소비에트로 권력이 넘어가기 전에는 전쟁을 끝낼 희망이 없다.”

세르게이 바그다체프는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실천가로, 제정기의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당 조직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4월 그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건 전단을 발표했지만, 중앙위원회 결정과 어긋나 당 규율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의 성급한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실천 가능한 요구를 따져야 했던 혁명기의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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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 1908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및 집행위원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실천가, 4월 시위 전단 작성
  • 19176월·7월 시위 참가, 임시정부에 체포됨
  • 1918–1925모스크바와 자캅카스에서 당 활동
  • 1926–1939소련 인민위원평의회 관개위원회 부위원장, 레지노트레스트 의장 등
  • 1940–1949개인연금 수급자로 생활

세르게이 비탈리예비치 므라치콥스키

Сергей Витальевич Мрачк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8–1936 ✕ 처형

우랄의 붉은 지휘관

1926년 지노비예프파가 스탈린과 결별하자 좌익 반대파는 누구와 연합할지 고민했다. 므라치콥스키의 답은 단호했다: '아무와도 안 된다.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

우랄의 볼셰비키 조직가이자 내전 영웅으로, 특수북부원정대를 지휘해 토볼스크를 점령하고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초대 건설 책임자가 되었다. 좌익 반대파의 핵심 인물로,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으며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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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우랄 혁명·적군 지휘관
  • 1923–1927좌익 반대파 활동과 제명
  • 1935–1936수감,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가브릴 일리치 먀스니코프

Гавриил Ильич Мясников

레닌에게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먀스니코프주의'를 촉발한 노동자 볼셰비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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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 1918–1920미하일 대공 처형 조직, 제16사단 정치위원, 페름 현당위원장
  • 1921–1923'노동자 그룹' 결성, 언론자유 요구로 레닌과의 공개 논쟁 — '먀스니코프주의' 논쟁, RCP(b) 제명·체포
  • 1928–1944이란·터키 경유 프랑스 망명, 『최근의 사기(Ocherednoy Obman)』 집필 —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전개
  • 1944–1945소련 대사관 초청으로 귀국, 직후 체포되어 1945년 11월 16일 총살 (2001년 12월 25일 복권)

게오르기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

Георгий Леонидович Пятак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7 ✕ 처형

혁명과 산업 계획 사이의 볼셰비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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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7볼셰비키 입당, 키예프 지하활동, 유형과 망명
  • 1917–1918키예프 위원장, 국립은행 인수, 좌파 공산주의자
  • 1918–1920CP(b)U 중앙위 서기, 우크라이나 임시정부 수반, 군사정보국장
  • 1920–1927돈바스·고스플란·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좌익 반대파
  • 1928–1930복당, 고스방크 총재, 신용개혁
  • 1930–1936중공업 부인민위원·제1부인민위원, 5개년 계획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주피고인, 처형

야코프 나우모비치 드롭니스

Яков Наумович Дробнис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우크라이나 볼셰비즘의 창립자, 46인 선언 서명자

페틀류라 세력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지막 순간 부상당한 채 탈출하여 붉은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은신했다.

야코프 드롭니스는 1906년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유대인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19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다섯 차례 중앙위원을 지냈다. 내전기에는 페틀류라와 데니킨에 맞서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했으며, 폴타바·오데사에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192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가담했고 1927년 제명되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평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심' 사건의 피고로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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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8–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 중앙위원 (5기)
  • 1920–1922폴타바·오데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1922–192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3'46인 선언' 서명, 좌익반대파 가담
  • 1923–1927소인민위원회 부의장, 행정재정위원회 위원
  • 1927–1930당 제명·유배, 1930년 복당
  • 1937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