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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가기관 인물 36명

피에르 라발

Pierre Laval

공화정 정치가에서 비시 협력의 설계자로 변한 인물

1942년 노동력 동원을 호소하며 그는 독일의 승리를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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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22사회주의 운동가·변호사
  • 1914–1919하원의원
  • 1923–1944오베르빌리에 시장
  • 1931–1932각료회의 의장
  • 1934–1936외무장관·각료회의 의장
  • 1940.06–1940.12비시 부각료회의 의장
  • 1942.04–1944.08비시 정부 수반
  • 1945고등법원 재판·처형

에두아르 달라디에

Édouard Daladier

인민전선을 함께 세우고 제 손으로 청산한 급진당의 「보클뤼즈의 황소」

「저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 인용 여부와 장소·상대를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빵집 아들 출신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6일 폭동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부터 국방을 맡아 인민전선을 지탱했으나 1938년 4월 총리로 복귀한 뒤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폐기하고 총파업을 꺾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로 실각해 리옴 재판에 섰고 1943년부터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5월 5일 풀려났다.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 드골의 전권에 반대했고 197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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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914카르팡트라 빵집 아들, 역사 교사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사병에서 중위까지
  • 1919–1933급진당 하원의원, 당의 지도자로 부상
  • 1934.01–02총리, 2월 6일 폭동 이튿날 사임
  • 1936–1940국방장관, 1938년부터는 총리 겸임
  • 1938.04–09총리 복귀, 뮌헨 협정 서명
  • 1938.11법령으로 40시간제 해체,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 청산
  • 1939.09대독 선전포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 불법화
  • 1940.03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으로 실각
  • 1940–1945리옴 재판 피고,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
  • 1946–1958하원 복귀, 급진당 원로
  • 1970.10파리에서 사망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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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로제 살랑그로

Roger Salengro

극우 언론의 중상에 목숨으로 답한 인민전선의 내무장관

죽기 직전 블룸에게 남긴 유서: "그들이 나를 망신시킬 수 없었다면, 적어도 내 죽음의 책임은 지게 될 것이다. 나는 탈영병도, 배신자도 아니다."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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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 1925–1936릴 시장
  •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 1936.11.17릴 자택에서 자살, 장례에 수십만 추모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90–1970 ○ 자연사

패배 속에서 프랑스의 전쟁 지속을 선언한 국가 지도자

“희망은 사라져야 하는가? 패배는 endgült적인가? 아니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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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육군 보병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독일군 포로
  • 1932–1937국방최고회의 사무국 장교, 기갑전과 기동전 저술
  • 1940.05–06제4기갑사단 지휘, 준장 승진, 국방·전쟁 담당 국무차관
  • 1940–1943런던의 자유 프랑스 지도자, 프랑스군과 해외 위원회 조직
  • 1943–1944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공동의장 및 의장
  • 1944–1946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의장
  • 1958–1959국무총리, 제5공화국 헌법 제정 주도
  • 1959–1969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장 피에르 물랭

Jean Moulin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899–1943 ✕ 고문 후 사망

분열된 레지스탕스를 묶은 공화주의자

그는 독일군의 허위 서명 강요에 맞서 명예를 훼손하느니 자결을 택하려 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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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사부아 현 지사 비서실장
  • 1925–1930알베르빌 군 부지사
  • 1936인민전선 항공부 장관 비서실장
  • 1937–1939아베롱 현 지사
  • 1939–1940외르에루아르 현 지사
  • 1941–1943드골의 국내 레지스탕스 대표
  • 1943국가레지스탕스평의회 초대 의장

조르주 비도

Georges Bidault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99–1983 ○ 뇌졸중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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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프랑스 알리에주 물랭 출생
  • 1925역사·지리 교수자격시험 수석 합격,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민주주의 언론 활동
  • 1943–1944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 장 물랭 후임으로 레지스탕스 통합 지도
  • 1944–1946드골 임시정부 외무장관, 샌프란시스코 UN 창설회의 프랑스 수석대표
  • 1947외무장관,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와 대치하며 마셜 플랜 수용 주도
  • 1946, 1949–1950두 차례 총리(임시정부 주석·제4공화국 수상)
  • 1954외무장관, 디엔비엔푸 전투 위기 관리
  • 1962–1968알제리 독립 반대로 면책특권 박탈, 브라질 망명, 1968년 사면 귀국

레오 라그랑주

Léo Lagrange

노동자의 첫 휴가를 설계한 여가·스포츠 차관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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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32노르 출신, 파리에서 변호사
  • 1932–1940사회당 하원의원
  • 1936.06세계 첫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 1936「인민 티켓」으로 60만 명의 생애 첫 휴가 조직
  • 1936–1938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BSP) 창설
  • 1939–1940동원 자원, 1940년 6월 9일 엔 전선에서 전사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902–1947 ✕ 추락사

자유 프랑스의 기갑 지휘관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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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졸업
  • 1925–1939기병 장교, 모로코 복무 및 전쟁대학 수료
  • 1940자유 프랑스 합류, 드골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파견
  • 1940–1943카메룬·차드 군사 지휘관, 쿠프라·페잔 전역 지휘
  • 1943–1945제2기갑사단 지휘, 노르망디·파리·스트라스부르 해방전 참가
  • 1945–1946극동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일본 항복식 프랑스 대표
  • 1946–1947북아프리카 육군 감찰관

뱅상 앙리 바디

Vincent Badie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902–1989 ○ 자연사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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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앙리 롤탕기

Henri Rol-Tanguy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908–2002 ○ 자연사

파리 봉기를 지휘한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지도자

1944년 8월 21일, 그는 파리 전역에 바리케이드를 세우라는 명령을 게시했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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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탈보 금속공장 노동자, 공산주의 청년동맹 가입
  • 1936파리 지역 금속노동조합 CGT 서기
  • 1937–1938스페인 국제여단 제14여단 정치위원, 에브로 전투 참전
  • 1941–1942파리 지역 무장조직 책임자, FTP 창설 지도부
  • 1943파리 지역 FTP 재편, FFI 지역 참모부 합류
  • 1944파리 지역 FFI 사령관, 파리 봉기 지휘
  • 1945–1962프랑스 육군 중령, 전후 군사 보직
  • 1962–1987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

르네 부스케

René Bousquet

점령자와 협상한 비시 경찰 수장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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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홍수 때 구조 활동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음
  • 1931내무부 차관 피에르 카탈라의 보좌관
  • 1933부지사
  • 1939–1942마른현 지사 및 지역 지사
  • 1942–1943비시 경찰 사무총장
  • 1950년대–1993년금융·언론계 사업가 및 정치적 영향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