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굶주림으로 열차에서 실신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 1939년 영화 장면으로 퍼졌고 후대 선전에서 유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레닌이 1919년 6월 봉급을 두 배로 올리라고 지시한 일은 문헌으로 확인된다.
1870년 알료시키(현 우크라이나 올레슈키)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대가정에서 자랐고, 1891년 마르크스주의 학생 서클을 조직했다. 1893년 체포되어 헤르손 농업학교에서 제적된 뒤 통계사로 일했고, 1898년 RSDLP에 입당해 우파와 하르코프에서 이스크라 요원으로 활동하다 1902년 올로네츠현 3년 유형을 받았다. 1917년 우파 소비에트와 시두마를 이끌며 페트로그라드로 곡물을 보냈고, 1918년 2월부터 1921년 12월까지 식량인민위원으로서 5월 8일 식량 독재를 제안하고 곡물 분견대와 빈농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고스플란 의장을 지냈다. 1928년 5월 크림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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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898헤르손 농업학교 제적 후 통계사·농업기사, 사회민주주의 선전 활동
1898RSDLP 입당, 이스크라 요원으로 우파·하르코프에서 활동
1902–1904체포되어 올로네츠현으로 3년 유형, 1904년 11월 우파로 복귀
1905–1917우파현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한 볼셰비키 지하 활동
1917우파 RSDLP(b) 위원·시두마 의장, 페트로그라드로 곡물 열차 수송 조직
1917–19211917년 11월 식량인민위원 대리, 1918년 2월 25일부터 1921년 12월 2일까지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서 식량 독재·곡물 징발제·무장 식량분견대 주도
1921–1923RSFSR·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1923–1925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 고스플란 의장, 1925~26년 통제 수치로 연례 계획 수립 개시
1921년 8월 16일, 레닌은 포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ЦСУ를 '비공식 필자 집단보다도 뒤처진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고 불렀다.
파벨 포포프는 소비에트 중앙통계청(ЦСУ)의 초대 청장으로서 중앙계획의 데이터 기반을 구축했다. 젬스트보 통계학자였던 그는 우파 유형지에서 레닌 및 치우루파와 인연을 맺었고, 그 연결로 1918년 국가 통계 기구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ЦСУ는 1923/24년 세계 최초로 국민경제 산업연관균형표를 편찬했다. 1921년 레닌은 ЦСУ를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 질책했으나, 포포프는 1926년까지 자리를 지키고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으로 경제 데이터의 계획 통합을 주도했다. 1924년에야 입당한 비볼셰비키였음에도 대숙청을 넘기고 1948년까지 근무한 드문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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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1895우스티우다 교사, 정치 망명자들과 교류
1896–1898혁명 활동으로 체포, 우파현 유형 중 통계학 입문
1898–1917우파·사마라·스몰렌스크·볼로그다·하리코프·툴라 젬스트보 통계국 근무
1917–1918식량성·농업인민위원부·최고경제회의 통계 부서장
1918–1926ЦСУ РСФСР/소련 관리자 (인민위원급); 세계 최초 산업연관균형표 편찬 주도
1920년 12월 23일, 페트로그라드의 제8차 소비에트 대회. 크르지자놉스키의 GOELRO 계획 보고를 들은 레닌이 일어나 "당의 제2강령"이라고 선언했다. 거대한 지도 위로 30개 발전소의 붉은 등불이 점멸했다.
레닌의 가장 오랜 동지로, 1893년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고 함께 체포·유배되었다. 부티르카 감옥에서 혁명가 '바르샤뱐카'의 러시아어 가사를 썼다. GOELRO 전력화 계획의 수석 설계자이자 초대 고스플란 의장으로 세계 최초의 종합 국가발전계획을 주도하고 모든 소비에트 5개년 계획의 방법론적 원형을 세웠다.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으로 에너지연구소를 창설, 통합에너지시스템의 과학적 기초를 닦았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비판으로 모든 지도직에서 밀려났으나 숙청은 면했고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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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s–1917레닌의 오랜 동지, 지하활동과 전기공학 전문성을 함께 축적
1920GOELRO 전력화 계획 작성의 핵심 인물
1921–1923, 1925–1930초기 고스플란 의장, 계획경제의 기술관료적 언어를 정착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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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높은 템포를 위해 서 있는 것이 낮은 템포를 위해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 1920년대 계획방법론 논쟁에서 유전론자들을 향한 스트루밀린의 일갈.
소련 계획경제의 지적 토대를 세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 세계 최초의 물질수지 체계를 개발하고, 노동생산성의 '스트루밀린 지수'를 정식화했으며, 초등 의무교육의 경제적 수익률을 최초로 계측했다. 1897년 혁명운동에 투신해 멘셰비키로 세 차례 체포·유배되었고, 1923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193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닌상·스탈린상 수상, 사회주의노동영웅(1967).
1917년 10월 29일,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이 무장봉기를 촉구하자 밀류틴은 첫 반대 발언자로 나서 “우리는 첫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레닌은 그 자리에서 밀류틴과 쇼트만을 상대로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밀류틴은 바로 그 봉기의 식량 보급을 책임졌다.
최초의 소브나르콤 농업인민위원(1917)으로 혁명정부의 토지정책을 구상했다. 멘셰비키에서 시작해 1910년 볼셰비키로 전향한 경제이론가로, 중앙통계국(TSuU) 국장과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계산 기반을 정비했다. 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 5개년 계획으로 이행하는 시기 내내 국가경제 기구의 실무를 떠받친 기술관료였으나, 1937년 '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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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10RSDLP 입당,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쿠르스크·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에서 지하 조직
1910볼셰비키로 전향, 이후 8차례 체포로 약 5년간 수감과 유형 생활
1917사라토프 소비에트 초대 의장,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소브나르콤 초대 농업인민위원(10.26–11.4)
1917–1918연립정부 주장하며 당중앙위·인민위원직 사퇴했다가 번복, VTsIK 경제부장과 VSNKh 부의장 역임
1918–1924VSNKh 간부·북서지역 경제회의 부의장, 코민테른 발칸·오스트리아 대표로 대외 활동
1924–1930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부 간부, 공산주의아카데미 부의장, 중앙통계국(TSu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1930–1937고스플란 부의장,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기관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계획·학술 관료로 활동
1929년 산업화 속도 논쟁의 정점에서 펠트만은 "나라의 산업화 템포는 소부르주아적 저항에 의해 제한될 수 없으며, 한계는 오직 모든 노동자의 육체적·심리적 지구력 한계까지 긴장시킨 물질적 가능성뿐"이라고 선언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1928년 경제학 사상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을 정식화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자본재·소비재 2부문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으나, 1931년 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가 그의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알려져 인도 경제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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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22전기공학자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근무, 국민경제최고회의 전기부문에서 GOELRO 전력화 계획 수립에 참여
1923–1927크르지자놉스키의 초청으로 고스플란 세계경제정세부에서 근무, 『계획경제』지에 해외 경제정세 분석 발표
1928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 — 경제학史上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
1929–1930「분석적 계획 수립 방법」 발표, 펠트만 모형이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
1931–1934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을 떠나 계획아카데미 기술구축학부장 및 교원으로 근무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1924년 정부 연구 여행으로 독일·영국·캐나다·미국을 돌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농업 생산 조직을 연구하던 중 소로킨을 만났고, 소로킨은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콘드라티예프는 귀국해 연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1892년 3월 4일(신력 3월 16일) 코스트로마현 키네솀마 우예즈드 갈루옙스카야 마을에서 열 자녀를 둔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경제학자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약 50년 장기 순환을 규명한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의 창시자로, 1905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1906년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15년 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7년 케렌스키의 농업 비서관과 식량차관을 지냈고, 네프 시기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창립해 1928년까지 소장을 맡으며 1923~1928년 농업 장기계획을 주도했다. 1927년 1차 5개년 계획의 불균형을 지적했고 1928년 4월 해임, 1930년 체포되어 1932년 8년형을 받고 1938년 9월 17일 처형되었다.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1937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우익파가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에게 고용된 피비린내 나는 파괴공작자-살인자 덩어리'라고 규탄했다. 넉 달 뒤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내전기에는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을 지냈다. 1924년 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 체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우랄·레닌그라드 지역당 서기, 체신인민위원을 거쳐 1935년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당-국가 통제기구의 정점에서 중앙계획 규율을 감독했으나,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제명·체포되어 1938년 7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1956년 제20차 당 대회 준비 과정에서 카가노비치·몰로토프·보로실로프가 숙청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위대함'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부로프는 미코얀과 함께 반대하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소련의 핵심 경제계획 관료로, 고스플란 의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전후 공업 재건과 제5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국가계획의 중심에 서서 중공업 우선 노선과 소비재 균형 논쟁 속에서 실무를 책임졌다. 1957년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한 반당 그룹에 가담했다가 상임위에서 제명되고, 이후 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다.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3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사부로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워낙 짧아 많은 연구서가 이 임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소련의 경제 계획가로,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에서 적군 정치장교를 거쳐 중앙계획의 핵심 간부로 올라섰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군수 물자 생산을 조정하는 군사경제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전후 고스플란 기관지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의 편집장(1944–1949)을 지냈다.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말렌코프 제1차 정부 아래에서 사부로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사이에 잠시 고스플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57년까지 다시 제1부의장으로 복귀했다. 말년에는 재무차관과 재무부 산하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소비에트 재정 50년》(1967) 편찬을 주도했다.
1937년 2월 26일, 『이즈베스티야』 1면에 33세의 신임 고스플란 의장 스미르노프의 사진이 실렸다. 8개월 뒤 그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계획 이론가로, 고스플란 자본건설 부문과 종합계획국을 거쳐 1937년 2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다. 메즐라우크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해 임명되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8개월 동안 계획기구를 이끌다 1937년 10월 체포되었다.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938년 7월 총살되었으며, 1차 5개년계획을 설계한 계획 관료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된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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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20철도 공장 제도 보조, 농업 코뮌 활동, 콤소몰 지도원
1921–1924심비르스크 콤소몰 정치교육부장·서기, 시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1924–1929크룹스카야 공산주의교육 아카데미·경제연구소 대학원 수학, 최고경제회의 자본건설부장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보즈네센스키는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산업이 감당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곤 했다. 바실렙스키 원수는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국원. 35세에 고스플란 의장이 되어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 전시 경제 계획을 총괄했으며,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산업 대피와 군수 생산 전환을 지휘했다. 1947년 『전시 소련경제』로 스탈린상을 수상하고 전후 경제 부흥 계획을 주도하며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즈다노프 사후 말렌코프·베리야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몰락, 1950년 처형되었다.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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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우리에겐 다른 숫자가 없습니다. 스타롭스키 동무는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숫자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방 회계부서입니다. 나는 그를 신뢰합니다.» —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1964년 8월 19일.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중앙통계국(ЦСУ)을 이끌며 35년간 국가 통계를 총괄했다. 1939년 인구총조사를 시작으로 소련의 모든 공식 인구·경제 통계를 관장했으며, 고스플란이 국가계획을 세우는 기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명령경제의 정보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학 박사이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서 수리통계 방법론의 기초를 닦았고, 흐루쇼프가 공개적으로 신뢰를 선언한 유일한 통계 책임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글루시코프의 국가전산망(OGAS) 구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소련 정보기술의 경로에 논란의 여지가 큰 전환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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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3우스티시솔스크 현 통계국 사무원·통계사
1924–1926최고경제회의(VSNKh) 통계사,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졸업
1926–1930소련 중앙통계국(ЦСУ) 통계사·연구원; RANION 경제연구소 대학원 수료
베리야가 모스크바 대정전 책임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자, 지메린은 그 앞을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쏘시오,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전력화의 핵심 인물로, 1942년 35세의 나이로 전력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소 대피와 복구를 지휘했다. 1948년 모스크바 대정전 당시 베리야의 권총 위협에도 부하를 몸으로 감싸며 맞섰고, 흐루쇼프의 1955년 고스플란 분할 개혁기에는 제1부의장으로서 장기계획 체계 전환에 참여했다. 은퇴 후 국립 에너지연구소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내며 소련 에너지 과학의 제도화에 기여했고, 소련 전기화 역사에 관한 표준적 저작을 남겼다.
레닌 훈장 9회: 전시 무기생산에서 스푸트니크까지, 소련 군산복합체를 35년간 떠받친 조직자
R-7 발사가 성공하자 누군가 연회를 넌지시 꺼냈다. 랴비코프는 국가 예산이 아닌 각출로 자리를 마련하게 한 뒤, 손풍금을 집어 들고 러시아 왈츠와 「카튜샤」를 신나게 연주했다. 코롤료프가 코냑을 따르며 건배를 청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노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바노보 직물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행정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공장 동부 이전과 무기 증산을 지휘했고, 1945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을 이끌었고, 1957년 R-7 미사일 및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승인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련 우주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후 13년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 군수-민수 자원 배분을 조율하며 브레즈네프기 계획경제의 핵심 축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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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29이바노보주 직물공장 노동자, 이후 콤소몰·당 지역 간부
1929–1937레닌그라드 기술원·군사기계연구소·해군사관학교에서 공학 수학
1937–1939볼셰비크 공장 설계기사, 당위원회 서기,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조직자
1939–1950무장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이후 제1부위원 — 전시 공장 이전·무기 증산 지휘
1950–1953소련 각료회의 제3총국장 — 모스크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 주도
1955–1957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의장 — R-7 및 스푸트니크 1호 국가위원회 주재
1961–1962, 1965–1974고스플란 제1부의장 — 군수-민수 자원 배분과 경제 계획 조율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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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