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때 큰 쉬는 시간, 급우가 교실 문을 닫고 교단에 올라 불법 팸플릿 「죽음에는 죽음으로」를 낭독했다. 메젠초프 헌병사령관 암살에 대한 크랍친스키의 글은 올민스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출발해 1904년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적 문필가다. 차르 감옥에서 5년 가까이 독방 생활을 견뎠고, 신문 《즈베즈다》, 《프라우다》,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의 편집을 맡으며 볼셰비키 저널리즘의 얼굴이 되었다. 1920년 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를 창설해 소비에트 당사 편찬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고, 살티코프-셰드린 연구로 문학비평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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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1885나로드나야 볼랴 '청년동맹' 가입, 체포되어 보로네시로 추방
1891–1898'나로드노볼리치 그룹' 공동 창립, 재체포 후 약 5년 독방, 올레크민스크 유형
1904–1905스위스에서 레닌 지도 아래 볼셰비키 합류, 《프페료트》 《프롤레타리》 편집 참여
1905–1916《노바야 지즌》 《볼나》 《즈베즈다》 《프라우다》 《프로스베셰니예》 편집, 바쿠·사라토프에서 활동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 자모스크보레츠키 군사혁명위원, 6차 대회 공동의장, 제헌의회 의원
1918–1920《프라우다》 편집위원, 사회주의 아카데미 교수, 선동열차 강연단 활동
1920–1928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 창설·의장,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창간·편집
1932년 안나는 스탈린에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유대인에 대해 언제나 좋게 말했습니다'라고 쓰며 레닌의 유대인 혈통을 공개해 반유대주의에 맞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거부했다.
레닌의 맏누이이자 1898년 RSDLP에 입당한 구볼셰비키. 동생 알렉산드르의 차르 암살 기도 사건으로 5년 유형을 선고받은 후, 블라디미르의 옥중 연락망과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을 조직했다. 1917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10월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 후 이스트파르트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창립에 참여해 소비에트 역사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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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사건으로 체포, 5년 유형
1898RSDLP 입당, 모스크바 첫 당위원회 활동
1900–1902『이스크라』 유통망 조직 (베를린, 파리, 러시아)
1909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 조직
1913–1917『프라우다』 편집위원, 편집서기
1917RSDLP(b) 중앙위원회국 위원, 10월 혁명 준비
1918–1921인민위생인민위원부 아동보호부장, 교육인민위원부 근무
1920년대–1932이스트파르트·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공동창립,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서기
1920년 12월, 레닌은 포크롭스키에게 『가장 간결한 러시아사』에 대해 "구성과 접근이 독창적이며 굉장한 흥미로 읽힌다"고 썼고, 연표를 보충해 교과서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클류쳅스키의 제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로 전환한 인물로, 러시아사 전체를 계급 분석과 경제 결정론 위에 다시 세웠다. 볼셰비키로서 10월 혁명에 참여했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학문 제도(공산주의 아카데미, 붉은 교수양성원, 이스트파르트, 레닌 연구소, 중앙기록보관소)의 골격을 구축했다. 러시아 전제정을 '모노마흐의 모자를 쓴 상업자본'으로 파악한 그의 테제는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을 규정했으나, 사후 스탈린기에 '포크롭스키 학파'라는 낙인 아래 전면 부정되어 수많은 역사가 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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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91모스크바대학 사학과 졸업, 클류쳅스키·비노그라도프 사사; 대학 잔류하여 교수준비생 지위
1896–1905'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1905년 RSDLP(볼셰비키) 가입, 제네바에서 레닌 첫 대면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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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수동적으로 굶주리고 말없이 죽어가는 농촌 — 아니다, 이것은 사회 발전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가 아니다」 — 1919년 회고록에서 1891–1892년 기근이 자신의 세대에 끼친 영향을 회고하며
1898년 입당한 초기 볼셰비키. 마르크스 『자본』의 러시아어 번역을 주도했으며, 레닌이 최고의 번역으로 꼽은 판본을 남겼다. 1917년 10월 소비에트 정부의 초대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즈베스티야』와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레닌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철학 논쟁에서 '기계론자' 진영을 이끌었고, 야로슬랍스키와 함께 전투적 무신론 운동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25년부터 사망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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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차르 암살 준비 혐의로 체포, 툴라 유배 중 사회민주주의자로 전향
1901모스크바 사회민주당 위원회 조직 시도 중 체포, 시베리아 아친스크 유배
1907–1909보그다노프·바자로프와 함께 마르크스 『자본』 러시아어 번역 출간
1917.10RSFSR 초대 재무인민위원 임명 (취임하지 않음);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918년 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측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자, 스크리프니크가 속한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비서국은 전보로 반박했다: "우리 행동의 근원은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다."
1872년 1월 13일(구력 25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바흐무트 군 야시누바타 마을에서 철도 전신 기사인 아버지와 젬스트보 병원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2월 레닌의 지시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인 인민비서국 의장을 맡았으며, 1918년 7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체카 반혁명투쟁국 국장을 지냈다. 1927년부터 1933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화를 이끌었고, 1929년 6월 29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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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0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시작, 마르크스주의 문헌 독학
1900–1917페테르부르크 기술원 입학, 이스크라·프라우다 등 당 기관지 편집, 15차례 체포·7차례 유형, 6차례 탈옥
1917.3–1917.12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서기,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917.12–1918.4레닌 지시로 우크라이나 파견,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인민비서국 의장
1918.7–1919.1체카 전연방 위원회 위원 겸 반혁명투쟁국 국장,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비밀정치국 국장
"글라블리트의 업무는 예외적으로 어렵습니다. 항상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 1923년, 글라블리트 1주년을 돌아보며
1902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 제네바 망명 시기 보그다노프의 '브페료트' 그룹 서기로 활동했고, 혁명 후 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의장을 지냈다. 1922년 글라블리트 초대 수장에 취임해 1930년까지 전 출판물의 사전·사후 검열 체계를 구축했으며, 검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당 정치국 지침에 복무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아흐마토바 시집 출간 금지 등 문학계 이념 통제를 직접 주도했고, 말년에는 푸시킨 관장과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고전문학 전집 간행을 총괄했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956년 10월 미코얀 면담에서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답하며. 같은 대화를 전하는 문헌마다 문구가 다르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1929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아 주필과 자신이 세운 철학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이후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1940~1941년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를 지냈다. 1940년대 말 '세계주의' 공세 속에서 부하 직원들이 해임되었고,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1956년 이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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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1922–1930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2~1930)
1922–1930『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1925년부터 사실상 주필, 1930년 말 해임
1924–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1931 초)
1929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사회과학부 아카데미서기(1937),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40~1941),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강의
1943–1949역사연구소 근대사 분과장. '세계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가 선임연구원으로 복귀, 1949년 반세계주의 캠페인 지지를 거부
1956미코얀 면담, 1956년 10월 18일 미코얀의 당 간부회 결정 초안 제출, 저작 복간 개시
프롤레트쿨트가 가장 급진적이던 시기, 그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문화 유산을 넘어 자신의 문화를 '처음부터'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조 노동자 출신의 볼셰비키 문예비평가로, 독학으로 지식을 쌓아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문화론에 영향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자적 문화 창조를 주장했으며,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기관지 『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를 편집했다. 내전 중이던 1920년 38세로 요절하여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초기 급진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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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1903RSDLP 입당, 직조공으로 노동하며 독학
1917–1920프롤레트쿨트 운동 참여, 보그다노프·루나차르스키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화 건설 주도
1934년 11월 15일 크렘린. 《차파예프》를 아홉 번째 본 스탈린이 "전국 모든 군 중심지에서 상영하나?"라고 물었다. 슈먀츠키는 음향 영사기가 약 4~5백 대뿐이라 답했고, 스탈린은 대책을 요구했다.
제정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의 가난한 유대인 장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를 이끌었다. 1917년 첸트로시비리 의장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고, 극동공화국 제2대 총리 겸 외무장관, 페르시아 주재 전권대표(1923–1925),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총장을 지냈다. 1930년 11월 소유즈키노 이사장에 임명되어 1933년부터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GUKF)을 이끌며 소련 영화산업을 총괄했고, 1936년 예술위원회 부의장을 겸했다. 1938년 1월 7일 해임되고 1월 17–18일 밤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으며, 1956년 2월 22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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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치타·크라스노야르스크 철도노동자로 입당,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 지휘
1930년, 디만시테인은 유대인 민족지구에서의 강제 집단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가 스탈린 노선에서 이탈한 유일한 순간이었고, 당 견책을 받았다.
예시바에서 수학하고 랍비 서품을 받은 후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세묜 디만시테인은 소비에트 정권 초기 20년간 유대인 민족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민족문제인민위원부 산하 유대인위원회 위원장(1918), 예브섹치야 의장(1918~1920)을 지냈으며,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1932~1936)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OZET 의장으로서 유대인 농업 정착을 추진하고 유대인 자치주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혁명과 민족』 등 당대 민족정책의 주요 저널을 편집했다. 1938년 2월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그해 8월 처형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개표위원장으로서 스탈린 반대표가 대량 나왔음을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 아들 드미트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스스로에게 내린 사형선고로 여겼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의 창립 세대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결성을 주도하고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었고 소련 수립 조약에 서명했다. 교육인민위원으로 두 차례(1922~1924, 1933~1938) 재임했으며, 1933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후퇴를 집행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으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학술 기반을 구축했고, 중앙위원회 서기와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영화관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뜻하는 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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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멘셰비키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키이우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후 키이우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
1917.3–1917.11볼셰비키로 전향, 키이우 당위원회 위원장,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
1917.12–1918.3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비서국 교육담당 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우크라이나 대표단장
1918.3–1918.4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국가원수)
1918.7–1920좌파에스에르 반란 진압 공산대대 정치위원, 붉은군대 제12·13·14군 및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0.7–1920.9갈리치아 혁명위원회 의장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적기훈장 수훈
1921–1922전우크라이나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 의장
1922–1924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차), 소련 수립 조약 서명
1924–1925우크라이나·크림 군관구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정위원
1927–1932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1933–193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2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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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그론스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렇게 정의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레핀을 노동계급에 봉사하게 하는 것."
차르 치하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해 소비에트 문학 통제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 된 저널리스트이자 당 관료였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2대 신문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을 지냈고, 1932년 5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 문학예술의 공식 교의로 정착시켰다. 같은 해 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을 맡아 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노비 미르》 편집장으로서 스탈린과 문단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38년 체포되어 16년간 수용소와 유형 생활을 견뎠고, 1954년 복권된 뒤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 연설: "문학에서 자유로운 창조적 경쟁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노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노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대회는 8월 17일~9월 1일 열렸다.
스몰렌스크주 보로프시나 마을 출신으로 1915년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중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1~1923년 적색교수양성소에서 수학하며 부하린의 '적색 교수' 그룹에 속했다. 1925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주필, 1926~1930년 중앙위 북서부국과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선전부를 맡았고, 1928년 강제 곡물 수매에 반대했다가 스탈린 편으로 돌아섰다. 1930년부터 중앙위 문화선전부를 이끌며 1933년 작가동맹 조직위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노선으로 선언했으며 1935년 당 선전선동부장을 맡았다. 1938년 4월 체포되어 8월 1일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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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1932년 11월 8일 밤 보로실로프의 만찬에서, 스탈린이 그녀에게 오렌지 껍질을 던지며 '이봐!'라고 부르자 알릴루예바는 '나는 당신의 "이봐"가 아니에요!'라고 응수하고 자리를 떠났다.
올드 볼셰비키 가문의 막내딸로, 1917년 7월 봉기 당시 아버지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는 자택에 레닌을 은닉했고, 대부는 아벨 예누키제였다. 1918년 당 입당 후 레닌 비서실과 선동선전부에서 일했고, 1929년 산업아카데미에 입학해 합성섬유 공학을 공부하며 니키타 흐루쇼프의 당 셀 동료가 되었다. 스탈린과의 결혼은 그녀를 크렘린 중심에 두었으나, 독립적 정치 주체로 서려는 열망과 아내 역할 사이의 긴장 속에서 1932년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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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18–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비서
1919–1921V.I. 레닌 비서실 근무 (리디야 포티예바 지휘 하)
1921당 숙청으로 제명, 레닌의 개입으로 후보당원 복권 (1924년 정식 복권)
1924–1929선동선전부 국제농업연구소 보좌관
1929–1932모스크바 산업아카데미 섬유학부 학생 (합성섬유 전공), 니키타 흐루쇼프와 동문
1941년 10월 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20km 앞까지 진격해 시민들이 공황에 빠지자, 셰르바코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모스크바를 위해 끈질기게, 치열하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호소하며 도시의 질서를 되살렸다.
스탈린의 전시 최측근으로, 1938년부터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부터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으로서 대외선전과 국내 언론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을 겸해 군 정치교육과 사기 진작을 책임졌다.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을 당의 문학 정책 도구로 정비했다. 모스크바 당 책임자로서 전시 방공·피난·군수 생산을 조직했고, 1945년 승리 직후 43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탈린 말년 「의사들 음모」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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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1적위대 입대, 1918년 볼셰비키당 가입, 리빈스크에서 청년 조직 활동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
1930–1932적색교수양성소 역사-당 과정 수료, 이후 중앙위 조직지도부 및 문화선전부 근무
1934–1936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 참여, 고리키 아래 조직서기로서 문학 행정 장악
1936–1938레닌그라드 제2서기 → 동시베리아·이르쿠츠크 제1서기 → 스탈리노(도네츠크) 제1서기로 연쇄 이동
1938–1945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 1942년 총정치국장 겸 국방부인민위원
1941–1945정치국 후보위원(1941), 중앙위 서기(1941), 대장군 계급(1943), 전시 선전 및 군 정치사업 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