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인민의 적'과 사냥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입건되었다.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가 직접 나서 그의 무죄를 입증했다.
우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부터 일하며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로 공직에 들어간 후 평생 금융계에 몸담았다.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후 우파 시·주 재정과장을 거쳐 1940년 러시아공화국 재정차관, 이듬해 재정인민위원이 되었고, 전후 소련 재무차관·제1차관으로 즈베레프와 가르부조프를 보좌했다. 1963년 8월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하여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이윤 지표,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1966))의 신용·결제 측면을 집행했고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를 신설했다. 1937년 사냥 동행을 이유로 '인민의 적'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개입으로 복권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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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9제본소 견습공, 약국 창고 노동자
1919–1923붉은군대 복무, 제재소 노동자, 공장위원회 지도원
1923–1931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과장·차장·재정감독국장, 콜레기움 위원
1931–1934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수학, 경제·재정 전공
1934–1939우파 시 재정과장 →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선임감사관
1939–1940칼리닌주 재정과장
1940–1941러시아공화국 재정부인민위원
1941–1945러시아공화국 재정인민위원
1945–1960소련 재무차관 · 콜레기움 위원
1960–1963소련 재무제1차관
1963–1969국가은행 총재 — 1965년 개혁 신용·결제 집행,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 신설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1953년 6월 30일, 사포노프는 베리야 체포 영장 서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입니다. 대의원 면책특권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날로 그는 해임되었다.
야로슬라블현 로스토프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레닌그라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공장들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며 민법 강의를 병행했다. 1935년 검찰로 전환하여 비신스키의 눈에 띄어 1939년 35세에 소련 검찰 부검사장이 되었고, 제1부검사장으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소련 검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48년 2월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후 스탈린기 검찰을 5년간 이끌었으나, 1953년 6월 30일 라브렌티 베리야 체포 영장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면책특권을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며 즉시 해임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지방검찰청의 말단 직위로 강등되어 조용히 복무하다 1968년 은퇴했다.
전쟁 전야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내린 소련 해군의 설계자, 두 번 강등되고 사후 복권된 제독
1941년 6월 21일 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사전 승인 없이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했다. 몇 시간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소련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소련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평가받는 해군 지휘관. 34세에 해군인민위원이 되어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이자 최초의 전문 해군 장교 출신 수장이 되었다. 1941년 6월 21일 밤, 독일 침공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하여 육군과 달리 해군은 기습 첫날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전쟁 내내 해군을 지휘하며 스타프카와 국방위원회 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4년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계급과 더불어 영웅칭호를 받았다. 전후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1988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오늘날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붉은 군대 역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이자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에 이은 두 번째 항공 총원수였다. 1919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해 제59소총연대 정찰병으로 복무했고, 1924년 10월부터 OGPU에서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에 가담했으며, 이후 아에로플로트 조종사로서 백만 킬로미터 비행 조종사로 불렸다. 1942년 2월부터 스타프카 직속 장거리항공대(ADD)를 지휘했고, 1944년 12월 ADD가 제18항공군으로 재편되자 그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8년 5월 해임되었다. 1952년 공수군단장으로 전출되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건강상의 이유로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딸 올가의 증언에 따르면 죽는 날까지 스탈린주의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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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0붉은 군대 정찰병, 제59소총연대 (동부·남부전선)
1924–1931OGPU 특별부서 요원,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가담; 알마아타 근무
1932–1941아에로플로트 조종사·기장·특수비행대 지휘관, 백만 km 무사고 비행
1939할힌골 전투 참전, 고위 지휘부 수송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약 400시간 전투비행
1941.02제212장거리폭격연대장 (중령)
1941.08제81장거리항공사단장,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폭격 지휘
1942.02–1944.12장거리항공대(ADD) 사령관, 스타프카 직속
1943.08항공원수 진급, 붉은 군대 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
1944.08항공 총원수 진급
1944.12–1946.04제18항공군 사령관 (1944년 12월 6일 ADD에서 재편)
1946.04–1948.05소련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1948년 5월 해임
1948–1950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수학 (금메달 졸업)
1952–1953공수군단장 (TASS·«로디나»는 프스코프의 제15근위공수군단,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제37근위공수군단으로 기록)
1940년 1월 크렘린에서 스탈린이 말했다. '당신을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 임명하오. 고리키에 가서 인수인계할 시간조차 없소.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허비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소.'
1940년부터 종전까지 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서 Yak, MiG, Il-2, La-5 등 전투기·공격기의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했으나, 종전 직후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항공공업 차관으로 돌아왔다.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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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1942년 2월 26일 화학공업인민위원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스탈린에게 「저는 전기기술자이고 화학은 잘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1978년 7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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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936모스크바 경제원 졸업 후 카시라 발전소에서 기술자에서 소장까지 승진
1937–1939모스에네르고 수석기사, 글라브에네르고 국장을 거쳐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1939–1940발전소·전기공업인민위원, 에너지 인프라 확충 지휘
1942–1950화학공업인민위원(이후 장관), 1942년 2월 26일 임명, 부총리 겸임, 전시 화학 생산 재건·확대
1943–1949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 1945년 8월 20일부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 1949년 8월 RDS-1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
1952–1957CPSU 중앙위 간부회 위원·제1부총리, 1957년 반당 그룹 사건으로 강등
1941년 7월 22일 밤, 스탈린은 가피치 장군을 면전에서 해임한 뒤 페레시프킨에게 말했다: 「당신을 통신총국장으로 임명합니다. 체신인민위원직은 그대로 유지하시오.」 묻지도 않은 채 그는 국방부인민위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수은 광부의 아들로 도네츠크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키예프 군사정치학교와 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를 거쳐 통신병과 장교로 성장했고, 1939년 불과 35세에 소련 체신인민위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전쟁 한 달째인 1941년 7월 22일, 스탈린은 그를 국방부인민위원과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에 추가 임명해 전시 민간·군사 통신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는 24차례 전선을 직접 방문하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에서 스타프카와 야전군 사이의 안정적 통신을 보장했고, 1944년 39세의 나이로 사상 첫 통신병과 원수 계급을 받았다.
우랄마시에서 탱크를, 마야크에서 플루토늄을, 아르자마스-16에서 핵탄두를 찍어낸 산업 지휘관
1947년, 베리야가 그를 불러 “당 중앙과 스탈린 동지의 결정으로 자네를 기지-10의 책임자로 임명한다”고 통보했다. 무즈루코프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소련 최초의 플루토늄으로 이어졌다.
중공업과 원자력 산업을 세 단계로 이끈 소련의 생산 지휘관이다. 1939년 35세로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되어 7년간 7명이 바뀐 난국을 수습하고, 전시에는 소련 전차·자주포 5대 중 1대를 생산하는 기지로 전환시켰다. 1947년 베리야의 지명으로 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이 되어 1949년 8월 소련 최초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으로 전략·전술 핵탄두 개발과 양산을 총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레닌상, 스탈린상 2회 수상. 노동자 생활과 도시 기반시설까지 챙긴 실무형 지도자였다.
1941년 10월 설계국이 우랄로 철수하자, 36세 모로조프는 숙련공 없는 공장에서 T-34를 더 단순하게 만들면서도 더 강력한 전차로 개량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떠안았다.
14세에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 사환으로 출발해 소련 최장수 전차 수석설계자(1940~1976)가 된 공학자. 미하일 코시킨과 함께 T-34 개발을 주도했고, 코시킨 사후 36세에 설계국장을 이어받아 독소전쟁 내내 T-34의 양산 간소화와 전투력 개량(T-34-85)을 동시에 지휘했다. 전후에는 T-54/55를 설계해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 계열을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복합장갑·자동장전장치·활강포를 채택한 T-64로 2세대 주력전차 개념을 열었다. 그의 설계국은 오늘날까지 '모로조프 설계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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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하리코프 기관차공장 기술부 사무원·복사공·제도공
1926–28붉은군대 항공여단 항공기술병 복무
1928–31하리코프 기관차공장 설계국 복귀, 콤무나르 트랙터·T-24 전차 설계 참여
1931하리코프 기계제작 전문학교 졸업, BT-2·BT-5·BT-7 경전차 설계 참여
1936–38설계국 신규설계 부문장
1938–40설계국 부국장 겸 부수석설계자,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1940–41하리코프 183호 공장 수석설계자, T-34 양산화 지휘
1941–51우랄 전차공장(니즈니타길) 수석설계자, T-34 현대화·T-43·T-44·T-54 개발
1944년 8월, 스탈린은 아바쿠모프, 메르쿨로프, 쿠즈네초프, 수도플라토프를 불러 모아 놓고 새로운 전략적 기만 작전을 명령했다 —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소련 후방에 대규모 독일군 잔류 부대가 있다고 믿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표도르 쿠즈네초프는 소련 군사정보기관과 군 정치기관을 두루 거친 몇 안 되는 고위 장성이다. 1943년부터 종전까지 총참모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대독 승전의 정보적 토대를 관리했고, 1950년부터 스탈린 사망까지 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으로서 전군의 사상통제를 총괄했다. 메흘리스의 측근으로 대숙청기 군 정치장교 숙청에 관여했으나, 정보 분야로 전환한 뒤에는 전략적 기만 작전 수립에 직접 참여했다. 스탈린 사후 정치국장에서 물러나 국방부 인사국장,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북부군집단 정치국장을 거쳐 1969년 퇴역했다.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에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려 저우언라이와 약 3시간에서 3시간 반 동안 회담하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레닌그라드 봉쇄 시기 국가방위위원회 전권대표로 주민 소개와 라도가호 호저 송유관 부설을 맡아 「생명의 길」 보급선을 세운 기술관료 출신 정치가다. 1964년 10월 15일부터 1980년 10월 23일까지 16년간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 이 직위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고, 1965년 이윤과 판매를 기업 평가 지표로 삼는 경제개혁을 발의했다. 개혁이 시행된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은 소련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기로 꼽히지만, 개혁은 1968년 프라하 사태 이후 축소되었다. 1969년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와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했으며, 1980년 건강 악화로 본인 요청으로 물러난 뒤 그해 12월 18일 사망했다.
1961년 10월 30일, 수데츠가 지휘하는 장거리항공대의 Tu-95V 폭격기가 노바야제믈랴 상공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50메가톤 수소폭탄 차르봄바를 투하했다. 충격파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았다.
소비에트 공군원수로, 독소전쟁에서 제17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르스크·드네프르-카르파티아·야시-키시뇨프·프라하 공세에 항공지원을 제공했고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전후 공군 주참모장 겸 부총사령관(1946~1949)으로 제트기 전환을 추진했고, 장거리항공대 사령관(1955~1962)으로 Tu-95K 전략폭격기와 Tu-22 초음속폭격기 배치를 주도하며 1961년 차르봄바 투하를 관할했다.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1962~1966)으로 저고도 방공능력을 확충하고 쿠바 위기 시 아나디리 작전의 방공을 지원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과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도 받은 드문 소련 군사지도자다.
모스크바에 100명을 불러들여 입경 허가를 내고, 살 집과 배급 카드를 주고, 사이클로트론용 초고순도 철과 원자로용 99% 흑연을 구해야 했다: 바레진이 1943년 봄의 긴박했던 일상을 회고하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에 적군에 입대한 1세대 소비에트 화학자. GKO 과학 전권위원 카프타노프의 선임보좌관으로서 1942-43년 소련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렸다: 스타리노프가 노획한 독일 장교의 '원자 수첩'을 접수해 번역을 주선하고 의미를 알아챘으며, 플료로프의 편지를 검토하고, 쿠르차토프를 먼저 면담해 카프타노프에게 데려갔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 건물을 물색하고 과학자 100여 명의 모스크바 출입 허가·주택·배급 카드를 해결했으며, 이오페-카프타노프 공동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 1942년 9월 28일 GKO 결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레닌 사범대로 복귀해 금속 부식 억제제 분야의 학파를 세웠고 80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스탈린이 이그나티예프를 불러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네 목을 짧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비밀연설에서 이 장면을 공개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당 조직 전문가. 부랴티야·바시키르·벨라루스 등 민족 공화국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다 스탈린 말기 MGB 장관에 기용되었다. 의사 음모와 밍그렐 사건을 지휘했고, 스탈린의 직접적 위협 아래 복종했으나 체카 출신이 아닌 온순한 당료였기에 처형을 면했다. 실각 후 타타르 공화국 당 서기로 복귀해 타타르어 보존에 힘썼다.
1953년 7월, 샤탈린은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체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는 이런 악당의 체포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다.”
니콜라이 샤탈린은 스탈린 말기부터 후계 투쟁기까지 당 간부국과 조직부를 실무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38년 중앙위 기구에 들어가 말렌코프 밑에서 간부국 제1부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조직국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가 되어 내무성(MVD)을 감독하고 베리야 체포 작전에 관여했으며, KGB 창설 과정에서는 말렌코프를 대리해 세로프 임명에 반대했다. 말렌코프가 흐루쇼프에게 패배한 1955년, 샤탈린은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다.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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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1948년 2월 10일 정치국 결의는 "소련 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흐랍첸코 동지)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가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에게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고 못 박았다.
스탈린 시대 최고 문화행정가로,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후 각료회의) 산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모든 연극·음악·미술 기관을 총괄했고 스탈린상 예술·문학 분과 위원을 겸했다. 1948년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을 둘러싼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캠페인 때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문학연구자로 전향하여 고골·톨스토이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고, 196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선출되어 19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문학·언어 분과의 아카데미크-서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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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스몰렌스크 대학 졸업, 중등학교 교사
1928–193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보로네시 대학 문학사 강사
1931–1936공산아카데미 문학예술연구소 교무주임, 붉은교수문학연구소 러시아문학 주임
1938–1939소련 인민위원회 예술문제위원회 부의장
1939–1948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 스탈린상 예술·문학분과 위원
1945년 5월 2일 밤, 베를린. 부관이 루덴코를 깨웠다. "창밖을 보십시오, 저 불빛을! 전쟁이 끝난 게 틀림없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대공포와 소총이 허공에 꽂히고 있었다 — 패배한 제국의 수도 위로 번쩍이는, 즉흥적인 승리의 축포였다.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를 거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종전까지 제16공군 사령관으로서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대전 최고의 소련 공군 지휘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944년 벨로루시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1955년 공군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공수부대 사령관, 공군 주참모장,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공군 제1부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68년부터 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을 맡아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년에는 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복무하며 회고록 『승리의 날개』를 남겼다.
한때 주코프의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젤토프는 1957년 10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주코프를 가장 맹렬히 비난한 정치장교가 되었다.
알렉세이 젤토프 상장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사후 전환기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었다. 위대한 조국전쟁 동안 카렐리야·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우크라이나·발칸 해방 작전에서 당정치사업을 지휘했다. 1957년에는 흐루쇼프를 도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국방장관직에서 축출하는 반주코프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로 나섰다. 이후 군·KGB·내무성·검찰·사법 기관을 총괄하는 CPSU 중앙위 행정부장을 거쳐, 12년간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으로 정치장교 교육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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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27붉은 군대 입대, 제2모스크바 보병학교 졸업 후 소대장
1937–1939제24소총병사단 군사위원 → 프리볼시스크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1–1944극동·카렐리야 전선군, 제63군, 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7월 20일까지 자진 출두하면 사면한다. 이후의 모든 자는 조국의 배신자로서 체포·엄벌·섬멸될 것이다." — 1945년 5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에 내린 최후통첩.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콤소몰·당 경력을 쌓은 뒤 1937년 당 충원으로 NKVD에 들어갔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와 민족주의 지하조직을 무력 진압하는 작전을 지휘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규모 사면 회유와 가족 추방을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폈다. 이후 소련 내무차관,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거쳐 1952년 후보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1956년 '장교 명예를 실추시킨 행위'로 해임된 후 건설 부문에서 일했다.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 하리톤은 모든 문서의 글자 하나까지 증거를 요구했다. "어차피 전쟁하지도 않을 텐데"라는 말에 그는 분노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전부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과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계산했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서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과 1953년 첫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세 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