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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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지노비 야코블레비치 리트빈-세도이

Зиновий Яковлевич Литвин-Седой

프레냐 노동자 전투부대의 조직자

“우리는 투쟁을 끝낸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홀로다.”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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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혁명운동에 참가
  • 189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
  • 1905모스크바 프레냐 전투부대 지휘
  • 1906스베아보르그 수병 봉기에 참여
  • 1917–1918키예프 소비에트와 항공부대 당 조직에서 활동
  • 1919–1921군사교통 중앙관리국과 교통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1939모스크바 12월 봉기 기념 면방직 기술학교 교장
  • 1939–1947연금 생활
학술·연구 소련 국가기관 소련 헝가리 1879–1964 ○ 자연사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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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당 기관지 《넵서버》 경제부 편집
  • 1909부다페스트대학 철학박사 — 칸트의 이율배반론 연구
  • 1919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20소련 망명,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 활동 시작
  • 1921–1927코민테른 통계정보연구소(베를린 '바르가 사무소') 소장
  • 1927–1947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 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현대 자본주의 연구로 레닌상 수상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알렉신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Алексинский

혁명적 국제주의에서 전시 애국주의로 선회한 논객

1917년 7월, 그는 《Живое слово》에 레닌의 독일 간첩설 자료를 실었다.

그리고리 알렉신스키는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가이자 제2국가두마 의원으로 부상했지만, 전쟁과 혁명의 압박 속에서 사회애국주의로 급선회했다. 1917년 그는 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에 합류해 볼셰비키를 공격했고, 7월에는 에르몰렌코의 불충분한 증언을 레닌이 독일 간첩이라는 주장으로 포장해 대중 언론에 올렸다. 이 폭로는 군대와 소비에트 안에서 반볼셰비키 정치를 강화했지만, 그가 혁명가에서 반볼셰비키 망명자로 바뀐 경로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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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모스크바대학교 학생, 학생운동 참가
  • 1905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선동가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볼셰비키 출판물 필자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사회민주파 볼셰비키계 연설자
  • 1909–1914좌익 볼셰비키계 《전진》 그룹 지도자
  • 1914–1917전쟁 지지 사회민주주의자, 파리 《호소》 공동 편집자
  • 1917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 지도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
  • 1919–1967러시아 망명 정치가·논객, 파리 러시아 평의회 의장

미하일 파블로비치 톰스키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

노동조합의 수장, 우편향의 세 번째 사람

「해외에서는 우리가 일당제라 비난한다. 틀렸다. 우리에겐 여러 정당이 있다. 단 하나가 집권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을 뿐이다.」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톰스키가 던진 이 말에 회의장은 폭풍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1918년부터 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를 이끌고 1922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20–1921년 노조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노조 군사화 방안에 맞서 노조 자율성을 지켰고, 1929년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했다. 인쇄공 출신으로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1936년 8월 22일 조사 개시가 발표되자 볼셰보의 다차에서 권총 자살했다. 가족도 1930년대 후반에 탄압당했고, 1988년에야 혐의가 완전히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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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5볼셰비키 입당, 레벨(탈린) 소비에트 조직
  • 1907–1916런던 당대회 대의원, 카토르가와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모스크바 무장봉기 연락
  • 1918–1929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VTsSPS) 의장
  • 1922–1930정치국 위원, 1930년 해임
  • 1929노조 의장직 사퇴,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
  • 1929–1932전연방 화학공업협회 의장, 최고인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2–1936국가합동출판사(OGIZ) 책임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라스노쇼코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аснощёков

극동공화국을 설계한 실용주의 볼셰비키

크라스노쇼코프가 병으로 해임된 후, 레닌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괴롭혀왔다 —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두뇌와 에너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인데도 말이다."

극동공화국의 초대 수반(1920~1921)이자 소비에트 초기 혼합경제 실험의 핵심 설계자.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7년 러시아로 돌아와 곧바로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내전기 일본군 철수를 위해 레닌을 설득해 완충국 극동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직접 영어로 헌법을 기초하고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서 일본과의 고고타 협정을 성사시켰다. 이후 재무부인민위원, 최고경제회의 간부를 거쳐 산업은행(Промбанк)을 설립해 네프 시기 산업금융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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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키예프에서 불법 마르크스주의 그룹 가입
  • 1902독일로 망명, 1903년 미국 이주
  • 1912시카고대학 법학부 졸업, 노동변호사 개업
  • 1917–1918블라디보스토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비에트 지도자, 극동인민위원회의 의장
  • 1920–1921극동공화국 정부 주석 겸 외무장관
  • 1921–1922RSFSR 재무인민위원회 부인민위원
  • 1922–1923최고경제회의 간부회의 위원 · 산업은행(Промбанк) 설립 및 초대 총재
  • 1923도브롤료트(Добролёт) 초대 이사회 의장
  • 1924–1925부패 혐의로 체포·6년형 선고, 이듬해 사면
  • 1926–1937농업인민위원회 신규인피작물 총국장, 섬유작물 연구소장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 카르비셰프

Дмитрий Михайлович Карбыш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0–1945 ✕ 고문사

나치의 회유를 거부하고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교한 소련 최고의 축성공학자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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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 1941–1945포로, 나치 회유 거부,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국

니콜라이 일리치 포드보이스키

Николай Ильич Подвой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80–1948 ○ 심장마비

10월 무장봉기의 작전사령관, 혁명 뒤엔 뒷방으로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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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 1906–1916망명·지하출판; 『즈베즈다』·『프라우다』 창간 참여; 중앙위 러시아국 뷰로 재무위원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군사조직 책임자; 군인신문 편집; 적위대 조직
  • 1917.10VRK 작전트로이카 위원·부의장; 무장봉기·겨울궁전 습격 현장 지휘
  • 1917.11–1918.3초대 군사인민위원; 적군 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의장
  • 1918–1919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우크라이나 군사인민위원
  • 1920–1927스포르틴테른 의장·최고체육평의회 의장 — 혁명가에서 체육행정가로
  • 1935–1948개인연금자; 회고록 집필·선전활동; 1941년 모스크바 방어 참호 자원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데그탸료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Дегтярёв

DP-27·DShK·PTRD를 설계한 소련 소형화기 설계의 창시자

1943년 5월, 스탈린 앞에서 어느 기관총을 채택할지 묻자 자신의 DS-39가 아닌 경쟁작 고류노프의 SG-43을 택했다: 'SG-43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우수합니다.'

툴라의 대장장이 집안에서 교구학교 3년만 마친 데그탸료프는 차르 군대의 병사에서 소련 총기설계의 창시자가 되었다.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의 조수로 자동화기를 배워 1918년 코브로프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화기설계국을 이끌었고, 1927년 붉은군대 주력 경기관총 DP-27을 완성했다. DShK, PPD, PTRD-41, RPD 등 19종이 제식 채택되었고, 그의 설계국은 러시아 최대 군수기업 데그탸료프 공장(ZiD)으로 성장했다. 1940년 스탈린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스탈린상 4회,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을 지낸 그는 전간기부터 종전까지 소련 보병화기의 계보를 홀로 그려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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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오라니옌바움 사관학교 부설 총기작업장 사병 총기수리공
  • 1906–1917V.G. 표도로프의 조수 — 최초의 러시아 자동소총 개발 참여
  • 1918–1931코브로프 기관총공장 시험작업장장, 소련 최초 화기설계국 운영
  • 1927DP-27 경기관총 붉은군대 제식 채택
  • 1930–1939DK/DShK 대구경 중기관총, PPD 기관단총, DS-39 중기관총 개발
  • 1940–1949코브로프 공장 특별설계국(OKB) 국장, 기술과학 박사, 공병포병소장
  • 1941PTRD-41 대전차소총 긴급 설계·양산 (스탈린상 2급)
  • 1944RPD 분대지원화기 완성, 공병포병소장 진급

아브람 표도로비치 이오페

Абрам Фёдорович Иоффе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제국(폴타바 주 롬니)의 유대인 가정 출신 1880–1960 ○ 자연사 (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물리학 전체를 키워낸 '파파 이오페'

1905년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승 뢴트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반동의 시기에 러시아 밖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시민적 의무가 아니라고 보았고,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과학에서 만족을 찾는다고 말했다.

뢴트겐의 제자로 1918년 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소련 물리학의 산실로 키웠고, 쿠르차토프·카피차 등 핵물리학 세대를 길러냈다. 194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지냈으며, 1950년 12월 반세계주의 공세 속에 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2년 반도체 실험실을 세워 1954년 연구소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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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실험실장
  • 1918–1921국립방사선·방사선학연구소 물리기술부장
  • 1921–195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소장
  • 1926–1929, 1942–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2–1942LFTI 내 핵물리학 연구 주도·원자력 계획 추진
  • 195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반도체연구소 소장

세묜 이바노비치 아랄로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Ара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0–1969 ○ 자연사

소련 군사정보기관의 제도적 창시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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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러시아 제국군 입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대위까지 진급
  • 1918.1모스크바 군관구 작전과장, 체카 창립 참여
  • 1918.9–1919.7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8.11–1919.6적군 등록국(GRU 전신) 초대 국장
  • 1919–1920제12군·제14군·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7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중국 주재 전권대표
  • 1927–1937최고경제회의 간부, 국가보험총국장
  • 1938–1941국립문학박물관 부관장
  • 1941–194560세에 자원입대, 제33군 전리품부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코톱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от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몰도바 1881–1925 ✕ 살해

제정 무법자에서 소비에트 내전 영웅으로 전환한 베사라비아의 붉은 로빈 후드

1917년 5월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카르멘' 공연 중 사형수에서 풀려난 코톱스키가 등장하자 관객 전원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무대에 올라 혁명 연설을 했고, 경매에 부쳐진 그의 수갑과 족쇄는 1만 루블에 낙찰되었다.

베사라비아 출신 혁명 지휘관. 제정 시기 빈민 편의 약탈자로 명성을 쌓고, 내전에서 붉은 기병대를 이끌며 몰다비아 자치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생전에 소비에트 민속의 전설이 되었으며 1925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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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베사라비아와 오데사에서 무장 강도단 지도자, 반복적 체포·탈옥; 1916년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9172월 혁명으로 사면; 루마니아 전선에서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좌익 사회혁명당 입당
  • 1918–1919티라스폴 분견대 기병대 지휘,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방어; 오비디오폴 군사위원, 제45소총사단 제2여단장
  • 1920적기훈장 수훈, 러시아 공산당 입당;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에서 기병여단 지휘
  • 1921제17체르보노예카자크기병사단장; 마흐노·안토노프 봉기 진압 중 중상; 명예혁명무기·두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2–1924제2기병군단장; 몰다비아 ASSR 수립 기여; 세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4–1925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우크라이나·몰다비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카메네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амен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1–1936 ○ 심장마비

내전을 승리로 이끈 붉은 군대 총사령관

현대 전쟁에서 적의 패배는 전 전선에 걸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승리의 누적을 요구한다. 타격을 누적시킨 쪽이 승리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붉은 군대 총사령관(1919–1924)을 지낸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차르 군대의 참모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콜차크·데니킨·브란겔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시절 콜차크를 우랄 너머로 밀어낸 반격을 주도했고, 총사령관으로서 여러 전선을 연계한 공세로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했으며 '지속적 타격의 누적' 교리를 내전 승리의 원리로 정식화했다. 종전 후 정치적 군사 엘리트에게 밀려나 1934년 방공국장으로 좌천되었고 1급 군사령관에 머물렀다.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대숙청을 피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사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가 1960년대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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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동부전선 사령관
  • 1919–1924공화국 군대 총사령관
  • 1924–1925붉은 군대 감찰관
  • 1925붉은 군대 참모총장
  • 1925–1926붉은 군대 총감찰관
  • 1926–1927붉은 군대 총국장
  • 1927–1934군사·해군 담당 부인민위원 겸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 1934–1936붉은 군대 방공국장

이반 니키티치 스미르노프

Иван Никитич Смирнов

좌익 반대파의 시베리아 볼셰비키

1927년 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스미르노프는 무일푼으로 노동교환소에 실업 등록을 하러 갔다. 서류의 '마지막 직위'란에 '우편·전신 인민위원'이라고 적자, 창구의 하급 관리가 눈앞에 서 있는 이 백발의 고매한 거한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1899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로, 일곱 차례 체포와 유배를 겪으며 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내전기 우랄·시베리아의 당 조직가이자 시브레프콤 의장으로 콜차크 백군 분쇄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20년대에는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27년 제명 후에도 1931년부터 비밀 반대파 조직을 이끌며 베를린을 통해 트로츠키와 연락을 재개했고, 1933년 체포되어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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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21시베리아·우랄 내전기 당 조직가
  • 1923–1927우편·전신 인민위원, 좌익 반대파 지도자
  • 1927–1930당 제명과 유배
  • 1933–1936재체포,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리코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1–1938 ✕ 처형

레닌 뒤의 총리, 우파 반대파로 몰리다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정권이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데 반발해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했다. 사퇴 날짜는 11월 16일설과 17일설이 갈리고, 며칠 뒤 철회했다.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으며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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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인민위원회의 의장

파벨 이바노비치 레베데프-폴랸스키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Лебедев-Полянский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81–1948 ○ 자연사

소비에트 검열 기구의 설계자이자 첫 책임자

"글라블리트의 업무는 예외적으로 어렵습니다. 항상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 1923년, 글라블리트 1주년을 돌아보며

1902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 제네바 망명 시기 보그다노프의 '브페료트' 그룹 서기로 활동했고, 혁명 후 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의장을 지냈다. 1922년 글라블리트 초대 수장에 취임해 1930년까지 전 출판물의 사전·사후 검열 체계를 구축했으며, 검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당 정치국 지침에 복무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아흐마토바 시집 출간 금지 등 문학계 이념 통제를 직접 주도했고, 말년에는 푸시킨 관장과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고전문학 전집 간행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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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유리예프 대학에서 제적 후 혁명운동
  • 1908–1917제네바 망명, '브페료트' 그룹 서기
  • 191710월 혁명 참여, 성직자회의 및 학술위원회 청산
  • 1919–1922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평의회 의장
  • 1922–1930글라블리트(문학·출판 총국) 초대 책임자
  • 1934–1939『문학 백과사전』 주필
  • 1937–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푸시킨 관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아브람 모이세예비치 데보린

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Деборин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창설자,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정되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956년 10월 미코얀 면담에서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답하며. 같은 대화를 전하는 문헌마다 문구가 다르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1929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아 주필과 자신이 세운 철학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이후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1940~1941년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를 지냈다. 1940년대 말 '세계주의' 공세 속에서 부하 직원들이 해임되었고,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1956년 이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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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 1922–1930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2~1930)
  • 1922–1930『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1925년부터 사실상 주필, 1930년 말 해임
  • 1924–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1931 초)
  • 1929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사회과학부 아카데미서기(1937),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40~1941),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강의
  • 1943–1949역사연구소 근대사 분과장. '세계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가 선임연구원으로 복귀, 1949년 반세계주의 캠페인 지지를 거부
  • 1956미코얀 면담, 1956년 10월 18일 미코얀의 당 간부회 결정 초안 제출, 저작 복간 개시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이견 있음) 1881–1969 ○ 자연사

스탈린의 원수, 군사적 무능을 정치적 충성으로 버티다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142명 명단에는 더 짧게 "체포하라. K. V."라고 적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철도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금속노동자다. 1918년 스탈린과 함께한 차리친 지휘로 스탈린 인맥의 군사적 상징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전쟁인민위원과 국방인민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이끌며 소련 시기 누구보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대숙청의 책임을 함께 진다. 그의 서명은 185개 처형 명단에 남아 있고 그 명단으로 18,000명 이상이 총살당했으며, 1940년 3월 5일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5,700명 처형 결정에도 서명했다. 겨울전쟁 후 해임되었으나 1941~1944년 국가방위위원회 위원과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일했고,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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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차리친 방어와 내전 지휘, 스탈린 인맥의 군사 상징으로 부상
  • 1925–1940전쟁·국방인민위원, 붉은 군대의 정치적 충성 노선 대표
  • 1937–1938군 대숙청 국면에서 최고 군사지도부로 숙청을 승인
  • 1939–1940겨울전쟁 실패 뒤 티모셴코에게 국방인민위원 자리를 넘김
  • 1941–1945전시 원로 지휘관이지만 실전 지휘능력 한계를 드러냄
  • 1953–1960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상징적 국가원수로 이동
  • 1940–1953인민위원회 부의장,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 1945–1947헝가리 연합통제위원회 의장
  • 1941–1944국가방위위원회 위원, 북서방면군·레닌그라드 전선 지휘, 빨치산 총사령관

리디야 알렉산드로브나 포티예바

Лид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Фотиева

레닌의 개인비서, 마지막 정치투쟁의 전달자

1923년 3월 5일, 레닌은 포티예바에게 스탈린과의 관계 단절 편지를 받아쓰게 한 뒤 카메네프에게 '그루지야 문제에서 트로츠키 편에 섰다'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글랏세르는 트로츠키에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스탈린을 향한 폭탄을 준비 중입니다."

레닌의 개인비서(1918~1924)로, 1922년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를 구술받아 30년간 보관, 1956년 공개로 이끌었다. 1923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트로츠키와의 연락을 중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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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7모스크바 음악원과 베스투제프 여성고등과정 수학, 학생운동으로 페름 유형
  • 1904–1905제네바·파리 망명 중 RSDLP(b) 입당, 제1차 러시아 혁명 참가
  • 1917「프라우다」지에서 몰로토프의 보좌관,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 1918–1924V.I. 레닌 개인비서, 인민위원회의(Sovnarkom) 및 노동국방회의(STO) 서기 겸임
  • 1922–1923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 구술 필기, 그루지야 문제 자료 분석 및 레닌-트로츠키 연락 중개
  • 1918–1930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 서기 지속
  • 1938–1941중앙 V.I. 레닌 박물관 연구원
  • 1941–1945MOPR(국제혁명투사원조기구) 중앙위원회 근무
  • 1956–1975연방 등급 개인연금 수급자, 회고록 집필

표도르 이바노비치 칼리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2–1920 ○ 사망

프롤레트쿨트의 노동자-지식인, 직조공 출신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이론가

프롤레트쿨트가 가장 급진적이던 시기, 그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문화 유산을 넘어 자신의 문화를 '처음부터'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조 노동자 출신의 볼셰비키 문예비평가로, 독학으로 지식을 쌓아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문화론에 영향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자적 문화 창조를 주장했으며,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기관지 『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를 편집했다. 내전 중이던 1920년 38세로 요절하여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초기 급진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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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 1903RSDLP 입당, 직조공으로 노동하며 독학
  • 1917–1920프롤레트쿨트 운동 참여, 보그다노프·루나차르스키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화 건설 주도
  • 1918–1920『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 공동 편집자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아르샤코비치 카모

Симон Аршакович Тер-Петросян

볼셰비키의 전설적 무장약탈자, 광기를 연기해 사형을 네 번 피한 혁명가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티플리스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티플리스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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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03RSDLP 입당, 티플리스 위원회 청년조직 지도, 지하인쇄소 조직
  • 1903–05첫 체포 후 탈옥, 1905년 혁명 참가, 무기 밀반입
  • 1907티플리스 은행마차 습격 지휘 — 34만 루블 탈취, 레닌에게 전달
  • 1907–11베를린 체포, 3년간 광기 연기로 사형 면함,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 1912–17코조리 습격 실패 후 체포, 4건 사형선고 →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20년형
  • 1918–20캅카스·남러시아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 바쿠 봉기 준비
  • 1920–22참모아카데미 수학, 대외무역·그루지야 재무인민위원부 근무

유리 미하일로비치 라린

Юрий Михайлович Ларин

네프에서 계획으로 다리를 놓은 상상력의 경제이론가

"훨씬 덜 단단한 정신이라면 오래전에 굴복했을 신체적 장애를 그가 정복하는 진정한 영웅성." — 1920년 모스크바에서 라린을 만난 영국 저널리스트 아서 랜섬

심페로폴 출신 경제학자·혁명가. 고스플란 창립 멤버로, 독일 전시경제 연구를 바탕으로 계획경제를 주창했다. 유대인 농업정착(OZET) 운동을 주도하며 근위축증 속에서도 왕성히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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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3심페로폴·오데사에서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8년 유형 선고
  • 1904–1916망명 중 멘셰비키로 활동, 독일 전시경제 연구로 중앙계획 구상
  • 1917볼셰비키 합류, 최고경제회의(VSNKh) 창립 멤버·간부
  • 1921–1932고스플란 창립·간부, 연속노동주간 제안 등 계획경제 정책 구상
  • 1925–1932OZET 의장으로 유대인 농업정착 운동 주도, 반유대주의 비판 저술

스타니스와프 스타니스와보비치 페스트콥스키

Станисла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Пестковский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폴란드 1882–1937 ✕ 처형

폴란드 귀족에서 카자흐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된 국제주의 혁명가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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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06SDKPiL 입당, 1905-06년 주이사회 위원
  • 1906–124년 강제노동형 후 이르쿠츠크 영구유형, 1912년 크라쿠프로 탈출
  • 1917.10–11중앙전신국 인민위원 → 국가은행 인민위원
  • 1917–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스탈린 보좌)
  • 1919–20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 1920–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정치총국장
  • 1924–26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
  • 1926–37MOPR 중앙위 부의장,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얀손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Янсон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상한 소련 법무인민위원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열아홉 살 얀손은 아버지와 함께 겨울궁전 행진에 나섰다가 총격 속에서 아버지가 중상을 입는 장면을 목격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1905년 레벨(탈린)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후 미국 망명 시기 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을 조직했다. 1920년대 중앙통제위원회 간부로 당 숙청을 주도했으며, 1928년 톨마초프·야고다와 함께 기존 교도소 체계를 OGPU 강제수용소 모델로 전환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을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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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레벨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
  • 1907–1917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 서기 (미국)
  • 1921–1923금속노조 중앙위원회 서기
  • 1923–1927중앙통제위원회 서기
  •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28–1930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1–1934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
  • 1935–1937글라브세브모르푸티 부국장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보그다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Богданов

네프 산업화의 설계자, 트러스트 체제로 글라브키즘에 맞서다

“우리는 산업 관리의 분권화, 관리 기관을 공장 가까이 가져가는 것, 동시에 전체 산업 지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원칙을 토대로 해야만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 — 글라브키즘에 맞서 트러스트 체제를 옹호하며.

모스크바 상인 가문 출신의 볼셰비키 엔지니어이자 경제 관료로,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 의장을 지내며 네프 시기 산업 조직의 골격을 설계했다. 소르모보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전차 생산을 총괄했고, 군수공업회의 의장으로서 내전기 군수 공장 간 계획적 생산 협력을 도입했다. 트러스트를 광범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 기업 연합으로 육성하며 중앙집권적 '글라브키즘'에 맞섰고,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주요 양허위원회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암토르그 사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소련-미국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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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볼셰비키에 합류, 보로네시 당 위원회 군사조직 책임자
  • 1906–1908모스크바 당 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 학생조직 지도
  • 1909–1914모스크바 시청 엔지니어, 도시 가스망 책임자
  • 1917고멜 소비에트 군사부문 의장, 시 두마 의장, 11월 혁명위원회 의장
  • 1918–1921VSNKh 화학공업 부문 위원, 우랄·북부 화학산업 국유화 전권대표
  • 1919–1925군수공업회의(국방공업 총국) 의장
  • 1921–1925VSNKh 의장 겸 RSFSR 인민위원회 위원, 주요 양허위원회 의장
  • 1926–1929북카프카스 지역집행위원회 의장
  • 1930–1934암토르그(소련 대미 무역회사) 사장
  • 1935–1937RSFSR 지방공업 제1부인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