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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지노비예프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Зиновь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7–1934 ○ 자연사

공군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제1차 세계대전 공중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 4개를 받은 비행사는 혁명 편으로 돌아서 1920년 옛 부하라 성채 공략을 직접 지휘했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군용 비행사에서 혁명과 내전의 적군 지휘관으로 변모한 군인이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 반격에서 투르키스탄군을 이끌어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 참여했고, 콜차크군의 진격을 되돌리는 데 기여했다. 전후에는 군사교육과 공병 지휘를 맡으며 초기 소비에트 군대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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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서부전선 제2군 제3시베리아소총군단 항공대 비행사
  • 1917제3시베리아소총군단 병사위원회 의장
  • 1918스몰렌스크 주둔군 사령관
  • 1918–1919오렌부르크·악튜빈스크 전선 지휘관
  • 1919투르키스탄군 사령관
  • 1919–1920제1군 사령관
  • 1920–1921투르키스탄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32–1934군사공병아카데미장 겸 정치위원

인노켄티 니콜라예비치 스투코프

Иннокентий Николаевич Стуков

좌파 공산주의에서 통합반대파까지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한 혁명가

1918년 2월,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레닌의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수용 방침에 반대하는 결의를 주도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6년의 감옥 생활과 유형을 겪은 혁명가로, 1918년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에 반대하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내전기 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우파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이후 민주집중파(데치스트)·46인 성명·통합반대파에 차례로 가담하며 10년 넘게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했다. 1927년 제명·유배 후 복귀하여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으로 일했으나, 1936년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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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파
  • 1917모스크바 지역국(RSDLP(b)) 의장
  • 1918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9우파 현혁명위원회 의장
  • 1920우파 현당위원회(RCP(b)) 의장
  • 1920–1921『소베츠카야 시비리』 편집자, 민주집중파(데치스트) 참여
  • 1926–1927통합반대파 참여, 당 제명 및 유배
  • 1936RSFSR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글레보프-아빌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Глебов-Авилов

첫 체신인민위원에서 로스트셀마시 초대 소장까지

1918년 6월 노보로시스크에서 흑해함대 정치위원으로서 독일군에 넘기느니 자침하라 명령했다. "정부가 세바스토폴로 가라는 무전을 보내도 그건 명령이 아니다."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기 칼루가, 모스크바, 우랄에서 지하인쇄소 활동을 벌인 직업혁명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첫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에서 체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볼셰비키 노동조합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따르는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로 나섰다가 해임되었고, 이후 로스트셀마시(로스토프 농기계공장)의 초대 소장(1929-1936)으로서 소련 공업화의 상징적 기업을 건설했다. 1936년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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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칼루가 인쇄소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
  • 1905–1907칼루가·모스크바·우랄 지하인쇄소 혁명활동
  • 1912–1914볼로냐 당학교 수학, 『프라우다』 협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노조 중앙뷰로 서기, 군사혁명위 노조 대표
  • 1917.11–12초대 체신인민위원 (첫 인민위원회의)
  • 1918–1921흑해함대 정치위원, VTsSPS 간부, 우크라이나 노동인민위원
  • 1923–1926레닌그라드 노조평의회 의장, XIV차 대회 반대파 지도자
  • 1929–1936로스트셀마시 초대 소장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스미르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Смирнов

모스크바 봉기 포병 지휘관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민주중앙집권파로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는 '유럽 사회주의라는 간선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곁길이며 실패할 운명'이라고 보았다.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모스크바 법대생으로, 니콜라이 부하린·오신스키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트리오를 이루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중포병을 지휘했고 1918년 초 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로 물러난 뒤, 민주중앙집권파·46인 선언·통합 야당을 거치며 당내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1921~1927년 고스플란 상임위원,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노동국방회의 이사로 중앙계획 기구에서 활동했다.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를 '유럽 사회주의의 곁길'로 보았고, 제명 후에는 '혁명과 볼셰비즘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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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09–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모스크바위원회 선동가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포병 준위, 서부전선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신문 《소치알-데모크라트》 편집, 10월 봉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중포병 지휘
  • 1918.02–1918.04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
  • 1918–1921좌파 공산주의자, '군사야당' 지도자, 최고경제회의(VSNKh) 근무
  • 1920–1923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 지도자
  • 1921–1927고스플란 상임위원, 노동국방회의 이사,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중앙통계국 이사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4–1926《프라우다》 및 《에코노미체스카야 지즌》 편집위원 겸직
  • 1926–1927사프로노프와 '15인 그룹' 결성, 통합 야당 참여
  • 1927.12제15차 당대회에서 제명, 우랄 유형 3년형
  • 1930–1937수감·유형 반복, 수즈달 정치격리소 수감 중 모스크바로 이송
  • 1937.05.26군사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아우구스트 이바노비치 코르크

Август Иванович Корк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에스토니아 1887–1937 ✕ 처형

제국 장교에서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으로

“코르크는 나의 자랑이다. 각 전선마다 제1바이올린을 켜는 사령관이 있듯, 서부전선에서는 코르크가 그 바이올린이다” —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 1920년 투하쳅스키에게 보낸 직통 회선에서

에스토니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짜르 군대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예 장교였다. 1918년 자원입대한 붉은 군대에서 내전기 제15군 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 폴란드 전선에서 공세를 지휘했으며, 제6군 사령관으로 페레콥-촌가르 작전에서 브란겔의 백군을 격멸했다. 내전 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까지 오르며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2급 군사령관)이 되었고, 독일 주재 무관으로도 복무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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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4제98 유리예프스키 보병연대 장교, 이후 니콜라예프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급)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제20군단, 제3시베리아군단, 제10군 참모 장교; 서부전선 항공 담당 장교 (참모 대위)
  • 1918.06붉은 군대 자원입대, 전러시아 총참모부 작전과 근무
  • 1919.02–05에스토니아 적군 (에스토니아 노동코뮌 군대) 참모장
  • 1919.06–08제7군 부사령관 — 페트로그라드 방어, 유데니치 군 격퇴
  • 1919.08–1920.10제15군 사령관 —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 1920.10–1921.05제6군 사령관 — 페레콥-촌가르 작전, 브란겔 백군 최종 격멸
  • 1921–1922하리코프 군관구 사령관, 이후 우크라이나·크림 군 부사령관
  • 1922–1923투르케스탄 전선군 사령관 — 바스마치 반군 진압
  • 1924–1927서부 군관구 사령관 → 캅카스 적기군 사령관 →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27–1928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28–1929소련 주독 무관; 독일 국가방위군 교육 시설에서 연수
  • 1929.05–11붉은 군대 보급국장
  • 1929–1935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35–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겸 정치위원 (2급 군사령관)

안드레이 루키치 콜레가예프

Андрей Лукич Колегаев

소비에트 최초 연정의 농업인민위원, 토지 사회화 법안의 공동 입안자

「나온 것은 토지의 사회화가 아니라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었다」 — 볼셰비키가 수정한 토지법을 두고, 1918년 1월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농업인민위원(1917.11–1918.3)으로, 이반 마요로프와 함께 토지 사회화 법안을 공동 입안하여 3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통과시켰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항의해 사임했으나 1918년 7월 좌파 에스에르 봉기를 거부하고 혁명적 공산주의자당을 창당했으며, 같은 해 11월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혁명기 농업 개혁의 핵심 설계자로서 에스에르-볼셰비키 연정을 주도하다 내전기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한 독특한 정치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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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사회혁명당 입당; 하리코프 대학에서 정치활동으로 제적
  • 1909–1916해외 추방; 파리에서 수학하며 좌파 에스에르 그룹 참여
  • 1917카잔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카잔 현 농민대표 소비에트 의장; 에스에르 중앙위원;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 1917.11–1918.3RSFSR 농업인민위원; 마요로프와 토지 사회화 법안 공동 입안
  • 1918.5–7카잔 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좌파 에스에르 봉기 거부
  • 1918.7–11혁명적 공산주의자당 창당·지도; 11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1–1935교통인민위원부·모스크바 예술위원회 등에서 행정·경제 업무

티모페이 블라디미로비치 사프로노프

Тимоф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апронов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이런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계급 앞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을 실추시키는 일이다」.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1931년 12월 집필, 1932년 발표

툴라주 모스타우시카 마을의 러시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도장공으로 일했고, 1905년 혁명 운동에 들어가 1912년 볼셰비키가 되었다. 10월 혁명 후 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소인민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민주중앙집권파'를 이끌며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으나 1927년 제15차 당 대회에서 제명되어 유배되었고, 이후 좌익 반대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31년 12월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를 써서 소련 체제를 '기형적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으며, 1937년 9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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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모스크바에서 도장공 노동자 조직, 건설노조 결성
  • 1917–1919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0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및 집행위원회 의장
  • 1920–1921'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당내 민주화 투쟁
  • 1921–1923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 1923–1925소(小)인민위원회 의장,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26–192715인파 성명 주도, '국가자본주의' 테제 제출
  • 1927–1937당 제명, 유배,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집필, 체포 및 총살

발레리안 발레리아노비치 오볼렌스키

Валериан Валерианович Оболенский

최고경제회의 첫 의장, 좌파 공산주의와 민주집중제의 이론가

국가은행 관료들의 태업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맡아 1917년 11월 은행의 초대 관리자가 되었고 금고 열쇠와 인민위원회 자금을 넘겨받았으며, 12월 23일에는 최고경제회의 초대 의장으로 옮겼다.

쿠르스크현의 소지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1월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되어 은행 금고 열쇠와 자금을 확보했고, 그해 12월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에 올랐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의 이론적 지도자였으며, 1920~21년에는 소수파의 의견 개진과 공개 토론을 요구한 민주집중제 그룹을 공동 지도했다.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냈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9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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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트베리·하리코프에서 활동
  • 1911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 1917.12–1918.3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겸 국가은행 초대 관리자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플랫폼 공동 집필
  • 1920–21민주집중제 그룹 공동 지도자
  • 1921–23농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3–24스웨덴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5고스플란 간부회 위원
  • 1926–28소련 중앙통계국(CSO) 국장
  • 1929–30최고경제회의 부의장
  • 1932–37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수확고·총수확량 산정 국가위원회 의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정회원
  • 1935–37과학기술사연구소 소장
  • 1937.10체포
  • 1938.9.1처형; 1957년 복권

얀 에르네스토비치 루주타크

Ян Эрнестович Рудзутак

법정에서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한 라트비아 볼셰비키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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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 1937.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 1938.7.29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표트르 키릴로비치 코가노비치

Пётр Кириллович Коганович

이름 한 자 차이로 정치국원과 혼동되어 온 시베리아 식량 책임자

그의 성은 코가노비치(Коганович)이고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성은 카가노비치(Каганович)다. 46인 선언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가 누구인지를 두고 혼동이 생기는 까닭이다.

코스트로마에서 태어나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혁명 전까지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17년 코스트로마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식량 조달 계통에서 일했다. 1920년 4월부터 시베리아식량위원회 의장을 맡으면서 시베리아혁명위원회에 의결권을 가진 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좌익반대파에 가담해 83인 강령에 서명했다. 1937년 6월 20일 체포되어 1938년 3월 17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처형되었으며, 1958년 7월 10일 복권되었다. 서명자에 주석을 붙인 46인 선언 판본들은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를 그로 본다. 당시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이었던 라자르 카가노비치와는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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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코스트로마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
  • 1920–1922시베리아식량위원회 의장, 시베리아혁명위원회 위원
  • 1927좌익반대파 가담, 83인 강령 서명
  • 1937체포
  • 1938최고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 1958복권

파벨 페트로비치 포스티셰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Постышев

기근의 특사이자 공포의 집행자,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뒤 1939년 처형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에서 학교·아동원·소년궁전·클럽·극장에 새해 전나무를 세우자고 제안해 금지되었던 욜카가 되살아났고, 첫 공식 소비에트 욜카는 1935년 12월 30일 하르키우에서 열렸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8년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감옥과 이르쿠츠크 유형을 거쳤다. 10월 혁명기에 이르쿠츠크를 볼셰비키 손에 넘기고 극동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3년 우크라이나로 전보되어 1925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33~34년 약 1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어 그는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고, 1937년 쿠이비셰프 제1서기로 옮겨 대숙청을 확대하다 체포되어 1939년 처형되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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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이르쿠츠크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1905년 이바노보 파업 참가,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922이르쿠츠크 소비에트 부의장, 혁명재판소 의장, 중앙시베리아 위원, 극동공화국 군사위원
  • 1924–1930키예프·하리코프 당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30–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지도부장
  • 1932.11–12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별전권대표로 볼가하류·우크라이나 파견
  • 1933–193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대숙청·러시아화 주도, 당원 10만 명 숙청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7–193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 1938년 2월 체포, 1939년 2월 26일 총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7–1943 ○ 옥사

세계 최대 종자은행을 세운 유전학자, 리센코의 반대자

“우리는 화형대에 오를 것이다,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신념에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 1939년, 레닌그라드에서 리센코의 박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러시아와 소련의 유전학자·식물학자. 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을 발견하고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 이론을 수립했으며, 전 세계 180여 차례의 식물채집 원정을 통해 25만 점 이상의 세계 최대 종자 컬렉션을 구축했다.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초대 총재와 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농업과학을 이끌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리센코의 유사과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1943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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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사라토프 대학 교수, 식물면역 연구
  • 1920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 발견
  • 1920–1940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
  • 1926재배식물 기원중심지 이론 발표
  • 1929–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총재
  • 1930–1940소련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31–1940전연방지리학회 회장
  • 1935–1940VASKhNIL 부총재, 리센코 학설에 공개적 반대

세르게이 야코블레비치 바그다체프

Сергей Яковлевич Багдатьев

대중의 급진성을 앞세운 볼셰비키 실천가

“소비에트로 권력이 넘어가기 전에는 전쟁을 끝낼 희망이 없다.”

세르게이 바그다체프는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실천가로, 제정기의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당 조직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4월 그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건 전단을 발표했지만, 중앙위원회 결정과 어긋나 당 규율 위반으로 징계를 받았다. 그의 성급한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이양을 지지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실천 가능한 요구를 따져야 했던 혁명기의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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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 1908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및 집행위원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실천가, 4월 시위 전단 작성
  • 19176월·7월 시위 참가, 임시정부에 체포됨
  • 1918–1925모스크바와 자캅카스에서 당 활동
  • 1926–1939소련 인민위원평의회 관개위원회 부위원장, 레지노트레스트 의장 등
  • 1940–1949개인연금 수급자로 생활

표트르 라자레비치 보이코프

Пётр Лазаревич Войков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한 볼셰비키 외교관: 바르샤바에서 암살당하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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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멘셰비키
  • 1906얄타 경찰서장 겨냥 폭탄 테러 기도 실패, 도피
  • 1907–1917제네바 망명, 제네바 대학교 수학·화학 전공, 멘셰비키-국제주의파 활동
  • 1917.8볼셰비키 합류, 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및 군사혁명위원회 참여
  • 1918.1–12우랄 지역 소비에트 공급위원
  • 1918.7우랄 소비에트 특별회의에서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 황산 공급 서명
  • 1919–1920식량인민위원부 분배국 근무, 첸트로소유스(중앙소비자협동조합) 부의장
  • 1920–1921대외무역인민위원부 이사, 수출위원회 참여
  • 1924–1927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전권대사)
  • 1927.6.7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백계 망명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에게 암살

발레리안 블라디미로비치 쿠이비셰프

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

제1차 5개년계획기의 계획 관료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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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혁명과 내전기 당·군 행정에서 성장
  • 1920s노동자농민검사와 최고경제회의 등 경제감독 기관을 거침
  • 1930–1934고스플란 의장, 제1차 5개년계획기 지표와 공업화 행정 관리
  • 1934–1935당·국가 경제 원로로 남았으나 이른 사망
  • 1935 이후도시·공장명에 이름이 붙은 스탈린식 공업화 상징이 됨

세르게이 비탈리예비치 므라치콥스키

Сергей Витальевич Мрачковский

우랄의 붉은 지휘관

1926년 지노비예프파가 스탈린과 결별하자 좌익 반대파는 누구와 연합할지 고민했다. 므라치콥스키의 답은 단호했다: '아무와도 안 된다.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

우랄의 볼셰비키 조직가이자 내전 영웅으로, 특수북부원정대를 지휘해 토볼스크를 점령하고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초대 건설 책임자가 되었다. 좌익 반대파의 핵심 인물로,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으며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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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우랄 혁명·적군 지휘관
  • 1923–1927좌익 반대파 활동과 제명
  • 1935–1936수감,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게오르기 이폴리토비치 로모프

Георгий Ипполитович Оппок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초대 법무인민위원, 고스플란 부의장, 그리고 대숙청의 희생자

1917년 10월 24~25일, 스몰니 연구소에서 무장봉기 지도부의 일원으로 혁명을 지휘했으며, 열흘도 안 되어 29세의 나이로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사라토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에 참가했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 시베리아·우랄 경제 책임자, 네프테신디카트 의장, 돈우골 이사장을 거쳐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당내에서는 제6차 대회(1917년) 이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반대한 '좌익 공산주의자'였다가 이후 스탈린을 지지했다. 1937년 체포되어 허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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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7–1910모스크바 시·지구 당위원회, 페테르부르크 당비서
  • 1910–1913체포·아르한겔스크 유형
  • 1917.10–11초대 법무인민위원 (RSFSR)
  • 1918–1921최고경제회의(VSNKh) 간부·부의장, 연료 공급 책임
  • 1921–1923시브뷰로·우랄뷰로 위원, 시브프롬뷰로·우랄경제회의 의장
  • 1923–1926네프테신디카트(석유 신디케이트) 의장
  • 1926–1929돈우골(도네츠 석탄) 이사장
  • 1931–1933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7소비에트통제위원회 위원

모이세이 이오시포비치 칼마노비치

Моисей Иосифович Калманович

집단화 시기 국가은행을 이끈 혁명가 출신 금융행정가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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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민스크 수비대장,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 서부지역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9–1920벨라루스·리투아니아-벨라루스 식량인민위원, 서부전선 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0–1923우크라이나 식량부인민위원, 시베리아 식량위원회 의장
  • 1923–1924러시아 SFSR 식량인민위원, 소련 식량부인민위원
  • 1924–1929사하로트레스트·프롬방크·제르노트레스트 이사, 노농감독부 간부
  • 1929–1930소련 농업부인민위원
  • 1930–1934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 신용개혁 주관
  • 1934–1937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

세묜 세묘노비치 로보프

Семён Семёнович Лобов

체카에서 출발해 러시아 최고경제회의 의장을 지낸 볼셰비키 산업행정가

1936년, 임업인민위원부가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자 레닌 훈장을 받았다. 1년 뒤 같은 당이 그를 '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혐의로 체포했고, 1937년 10월 30일 선고와 동시에 총살했다.

스몰렌스크 현의 산림감독관 아들로 태어나 건설노동자·제도사로 일했고,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사라토프·바시키르 체카 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보안기구의 초기 간부로 성장했다. 네프기 연료·석유 신디케이트를 관리한 뒤 1926년 러시아 최고경제회의(ВСНХ РСФСР) 의장에 올라 공업화의 행정적 토대를 닦았다. 1932년부터 임업인민위원으로 5개년계획기 목재 공급을 책임졌고, 계획 초과 달성으로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0월 30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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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로젠크란츠 공장 노동자
  • 1917–1918페트로그라드·비보르크 당위원, 공장위원장, 소비에트 대표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9–1920사라토프 체카 의장 → 바시키르 체카 의장 겸 내무인민위원
  • 1921–1923석유신디케이트 연료국장
  • 1923–1926북서공업국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6–1930ВСНХ РСФСР 의장 겸 글라브에네르고 책임자
  • 1930–1932소련 공급인민위원부 부위원
  • 1932–1936소련 임업인민위원
  • 1936–1937러시아 식품공업인민위원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차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Чаянов

농민 경제의 도덕적 논리를 탐구한 농업경제학자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모든 노동경제에는 그 산출의 한계가 있으며, 그것은 연간 노동과 농가의 욕구 충족 정도 사이의 비례에 의해 정해진다"고 썼다.

1888년 1월 17일(구력 29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사망한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농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세우고 조직-생산학파를 이끌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농민가족농이 이윤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하며 소비 필요와 노동의 고역 사이에서 자기착취의 정도를 정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7월 '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5년 유형이 연장된 뒤 1937년 10월 3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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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 1921–1923농업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겸 고스플란 대표
  • 1930–1935'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5년형 선고, 유형지 알마아타로 이감
  • 1937알마아타에서 재체포, 당일 총살 — 1987년 전면 복권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쿨로프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Акулов

소련 검찰제도의 창설자, 국가보안과 사회주의 적법성의 틈바구니에서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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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b) 입당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운동
  • 1917–1918우랄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18–1920뱟카·오렌부르크 현당 위원회 서기
  • 1920–1921키르기스 당뷰로 서기
  • 1921–1922크림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22–1927도네츠크 광산노조 위원장
  • 1927–1931전우크라이나 노조평의회 의장
  • 1930–1931노농감찰 부인민위원 · 중앙통제위원회 간부
  • 1931–1932OGPU 제1부의장
  • 1933–1935소련 검찰총장 (초대)
  • 193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 계급적 적색 테러의 이론가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 첫 번째 질문은 피의자가 어느 계급 출신이며 어떤 양육과 직업을 가졌느냐다. 그것이 피의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 『크라스니 테로르』, 1918년 11월 1일

라트비아 출신의 소련 혁명가이자 저술가로, 본명은 야니스 수드랍스이다. 1918년 7월부터 11월까지 동부전선 제5군의 체카 및 군사재판소 의장을 지냈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으로서 키예프 체카를 직접 지휘했다. 1918년 11월 1일 카잔의 『크라스니 테로르』에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는 논설을 실어 계급 출신과 양육, 직업만으로 피의자의 운명을 정하자고 주장하며 계급적 적색 테러를 이론화했다. 자료들은 그가 개인적 잔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전하며, 데니킨 위원회의 전우크라이나 체카 관련 자료와 라치스 자신의 발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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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라트비아 사회민주당(SDLK) 입당, 비합법 활동
  • 1908–1915교사 자격 취득, 교편 생활; 모스크바 샤냡스키 인민대 청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 1918.5–7체카 간부위원·반혁명투쟁부장; 제르진스키 직무대행
  • 1918.7–11동부전선 제5군 체카 및 군사재판소 의장
  • 1919–1921전우크라이나 체카(VuChK) 의장
  • 1922–1932글라프솔·솔레신디카트·농업인민위원부 등 경제 행정
  • 1932–1937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 소장

볼로디미르 페트로비치 자톤스키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Затонский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건설자이자 학자정치인, 교육·당·통제를 관통한 혁명 관료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개표위원장으로서 스탈린 반대표가 대량 나왔음을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 아들 드미트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스스로에게 내린 사형선고로 여겼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의 창립 세대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결성을 주도하고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었고 소련 수립 조약에 서명했다. 교육인민위원으로 두 차례(1922~1924, 1933~1938) 재임했으며, 1933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후퇴를 집행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으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학술 기반을 구축했고, 중앙위원회 서기와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영화관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뜻하는 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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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키이우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후 키이우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
  • 1917.3–1917.11볼셰비키로 전향, 키이우 당위원회 위원장,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
  • 1917.12–1918.3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비서국 교육담당 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우크라이나 대표단장
  • 1918.3–1918.4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국가원수)
  • 1918.7–1920좌파에스에르 반란 진압 공산대대 정치위원, 붉은군대 제12·13·14군 및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7–1920.9갈리치아 혁명위원회 의장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적기훈장 수훈
  • 1921–1922전우크라이나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 의장
  • 1922–1924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차), 소련 수립 조약 서명
  • 1924–1925우크라이나·크림 군관구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정위원
  • 1927–1932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3–193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2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그리고리 야코블레비치 소콜니코프

Григорий Яковлевич Сокольник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8–1939 ✕ 옥중에서 살해되었다

네프의 화폐 안정화를 이끈 재무인민위원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대의원 1,306명)에서 소콜니코프는 연단에 올라 스탈린의 총서기직 사퇴를 공개 요구하고 네프의 계속을 주장했다. 연단에서 이를 요구한 발언자는 그가 유일했다. 제안은 다수를 얻지 못했다.

스탈린 시대에 옥중에서 살해된 볼셰비키 지도자. 본명은 그리고리 브릴리안트로, 소르본에서 법학 학위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섯 개 언어에 능통했다. 10월 혁명 뒤 은행 국유화를 주도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으며, 내전 시기 제8군을 지휘해 데니킨군을 격파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1922~1924년 화폐 개혁을 이끌어 금 태환 체르보네츠로 루블을 안정시켰고, 긴축 재정과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급속 공업화와 강제 집단화에 반대했다. 1925년 제14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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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볼셰비키 활동과 망명, 혁명기 당 실무에 참여
  • 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대표단에서 활동
  • 1920–1921투르케스탄 전선과 중앙아시아 소비에트화에 관여
  • 1922–1926재무인민위원, 체르보네츠와 네프 화폐 안정 추진
  • 1926–1936반대파와 연루되어 외교·경제직을 거쳐 점차 실각
  • 1936–1939모스크바 재판 뒤 수감, 수용소에서 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