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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보리소비치 크라신

Леонид Борисович Красин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70–1926 ○ 백혈병

혁명의 기술자에서 소비에트 외교의 설계자로, 서구 자본과 거래할 줄 알았던 유일한 볼셰비키

1893년, 젊은 크라신은 톨스토이를 찾아가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비폭력을 설교하던 대문호는 격노하여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고 동석했던 아내 류보비는 기록했다.

차르 치하의 시베리아 유형에서 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책임자로, 다시 소비에트 국가의 초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 크라신의 궤적은 볼셰비키 안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기술단을 지휘하며 무기 조달·자금책을 맡았고 바쿠 지하 인쇄소 '니나'로 《이스크라》를 찍어냈다. 1909년 정계에서 물러나 기술자로 복귀, 지멘스의 러시아 총대표까지 올랐다가 1918년 레닌의 부름으로 귀환했다. 대외무역 독점 체제와 1921년 영소통상협정을 주도한 서구 비즈니스계 유일의 고위 볼셰비키로, 레닌은 그를 당내 가장 유능한 실무 조직가로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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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RSDLP 중앙위원회 위원
  • 1905RSDLP 중앙위원회 전투기술단 책임자
  • 1913–1917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대표
  • 1918–1920RSFSR 통상산업인민위원
  • 1919–1920RSFSR 교통인민위원
  • 1920–1925소련 대외무역인민위원
  • 1921–1923RSFSR·소련 전권대표 (영국)
  • 1924–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브류하노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Брюхан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기근의 그림자에서 네프의 재정으로 이행을 이끈 인민위원

1930년 4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은 니켈 주화를 제안한 브류하노프를 조롱하는 음란한 쪽지를 돌렸고, 메줄라우크는 매달린 인민위원의 그림을 덧붙였다. 둘 다 1938년 총살되었다.

1902년 입당한 볼셰비키. 심비르스크에서 측량 기술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와 카잔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혁명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차르 체제에서 수차례 체포·유형을 겪으며 우파에서 볼셰비키 위원회를 이끌고 우파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으며, 제7차(4월) 전러시아 회의 대의원이었다. 내전기에 대규모 곡물 징발을 조직하고 식량징발대와 징벌 원정대를 지휘했으며, 1926년 1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되었다. 1930년 10월 해임 뒤 밀려났고, 1938년 2월 3일 체포되어 9월 1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일부 참고문헌은 사망일을 1942년 6월 30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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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5학생운동으로 체포·제적, RSDLP 입당(1902), 카잔·볼로그다에서 지하 활동과 유형
  • 1906–1917우파에서 볼셰비키 신문 편집, V차 당대회 대의원, 우랄 지역위원, 반복적 체포와 행정구금
  • 1917–1921우파현 식량위원, RSFSR 식량부인민위원, 동부전선 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1–1924RSFSR 및 소련 식량인민위원, 붉은 군대 주식보급 총국장 겸임
  • 1924–1926소련 재무부인민위원, 소콜니코프의 네프 재정 안정화 보좌
  • 1926–1930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차 5개년계획 초기 재정·주화 정책 관장
  • 1930–1937모스크바주 부집행위원장·주계획위원장, 공급 부인민위원, 중앙수확량위원회 부의장 역임 후 1937년 연금
  • 19382월 3일 체포, 9월 1일 총살. 1956년 복권

모이세이 일리치 프룸킨

Моисей Ильич Фрумкин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시골이 우리를 등졌다', 당에 직언한 재정 부인민위원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 1928년 6월 15일, 재정 부인민위원 프룸킨이 정치국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이 한 문장이 우편향 탄압의 신호탄이 되었다.

1898년 분트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한 구파 혁명가로, 내전기 식량인민위원부에서 일하고 네프기에는 대외무역·재정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28년 6월, 곡물 조달을 위한 강제 조치가 한창이던 때 정치국에 보낸 편지에서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쓰며 스탈린의 농촌 정책이 노농동맹을 파탄내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 한 통의 편지로 당내 '우편향' 제1호 피의자가 되었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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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분트 가입, 이어 RSDLP 가입
  • 1909–1911모스크바 중앙노조사무국 의장
  • 1911–1917예니세이현 유형
  • 1918–1922식량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식량 부인민위원
  • 1922–1928대외무역 부인민위원
  • 1928–1929재정 부인민위원
  • 1928–1930'우편향' 참여자로 지목, 첫 공식 비판 대상
  • 1932–1935대외무역 부인민위원 (복귀)
  • 1935–1937소유즈플라스트마스 트레스트 관리자

야코프 스타니슬라보비치 가네츠키

Яко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Ганецкий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폴란드 1879–1937 ✕ 처형

크라쿠프에서 스톡홀름까지 레닌의 돈줄을 책임진 폴란드 혁명가

1917년 4월 13일, 스톡홀름 역. 파르부스가 봉인열차로 도착한 레닌을 기다렸다. 레닌은 직접 만나기를 거부하고 가네츠키를 중간에 세웠다. 파르부스가 물었다: "평화가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가?" 가네츠키가 전하자 레닌은 답했다: "나는 외교에 관심 없다. 나의 임무는 사회혁명적 선동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혁명가로 SDKPiL 창립에 참여하고 레닌의 측근이 되어 볼셰비키의 지하 자금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1차대전기 파르부스와 코펜하겐·스톡홀름에 무역회사를 설립해 전시 상품 무역 이익을 혁명 자금으로 전환했으며, 이 경로는 독일 자금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0월 혁명 후 국유은행 부총재와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로 소비에트 금융체제 구축에 기여했고, 라트비아 전권대표와 카르스 조약 서명으로 외교 무대에도 진출했다. 말년에는 혁명박물관장을 지내다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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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12SDKPiL 창립 참여, 당 주간부, RSDLP 중앙위원 후보
  • 1912–1915레닌의 크라쿠프 이주 주선, 최측근 보좌
  • 1915–1917코펜하겐·스톡홀름에서 파르부스와 무역회사 운영, 볼셰비키 자금 조달
  • 1917–1920국유은행 부총재(인민은행장 대행), 재정부 인민위원, 고흐란 국장
  • 1920–1923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 카르스 조약 서명, 외교·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근무
  • 1923–1935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최고경제회의 상임위원, GO-MEZ 국장
  • 1935–1937모스크바 혁명박물관 관장
  • 1937NKVD 체포, 15분 재판 후 총살형, 1954년 사후 복권

미하일 파블로비치 톰스키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0–1936 ✕ 자살

노동조합의 수장, 우편향의 세 번째 사람

「해외에서는 우리가 일당제라 비난한다. 틀렸다. 우리에겐 여러 정당이 있다. 단 하나가 집권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을 뿐이다.」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톰스키가 던진 이 말에 회의장은 폭풍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1918년부터 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를 이끌고 1922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20–1921년 노조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노조 군사화 방안에 맞서 노조 자율성을 지켰고, 1929년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했다. 인쇄공 출신으로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1936년 8월 22일 조사 개시가 발표되자 볼셰보의 다차에서 권총 자살했다. 가족도 1930년대 후반에 탄압당했고, 1988년에야 혐의가 완전히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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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5볼셰비키 입당, 레벨(탈린) 소비에트 조직
  • 1907–1916런던 당대회 대의원, 카토르가와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모스크바 무장봉기 연락
  • 1918–1929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VTsSPS) 의장
  • 1922–1930정치국 위원, 1930년 해임
  • 1929노조 의장직 사퇴,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
  • 1929–1932전연방 화학공업협회 의장, 최고인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2–1936국가합동출판사(OGIZ) 책임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라스노쇼코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аснощёк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생, 유대인) 1880–1937 ✕ 처형

극동공화국을 설계한 실용주의 볼셰비키

크라스노쇼코프가 병으로 해임된 후, 레닌은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괴롭혀왔다 —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두뇌와 에너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인데도 말이다."

극동공화국의 초대 수반(1920~1921)이자 소비에트 초기 혼합경제 실험의 핵심 설계자.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7년 러시아로 돌아와 곧바로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내전기 일본군 철수를 위해 레닌을 설득해 완충국 극동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직접 영어로 헌법을 기초하고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서 일본과의 고고타 협정을 성사시켰다. 이후 재무부인민위원, 최고경제회의 간부를 거쳐 산업은행(Промбанк)을 설립해 네프 시기 산업금융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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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키예프에서 불법 마르크스주의 그룹 가입
  • 1902독일로 망명, 1903년 미국 이주
  • 1912시카고대학 법학부 졸업, 노동변호사 개업
  • 1917–1918블라디보스토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비에트 지도자, 극동인민위원회의 의장
  • 1920–1921극동공화국 정부 주석 겸 외무장관
  • 1921–1922RSFSR 재무인민위원회 부인민위원
  • 1922–1923최고경제회의 간부회의 위원 · 산업은행(Промбанк) 설립 및 초대 총재
  • 1923도브롤료트(Добролёт) 초대 이사회 의장
  • 1924–1925부패 혐의로 체포·6년형 선고, 이듬해 사면
  • 1926–1937농업인민위원회 신규인피작물 총국장, 섬유작물 연구소장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보그다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Богдан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2–1938 ✕ 처형

네프 산업화의 설계자, 트러스트 체제로 글라브키즘에 맞서다

“우리는 산업 관리의 분권화, 관리 기관을 공장 가까이 가져가는 것, 동시에 전체 산업 지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원칙을 토대로 해야만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 — 글라브키즘에 맞서 트러스트 체제를 옹호하며.

모스크바 상인 가문 출신의 볼셰비키 엔지니어이자 경제 관료로,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 의장을 지내며 네프 시기 산업 조직의 골격을 설계했다. 소르모보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전차 생산을 총괄했고, 군수공업회의 의장으로서 내전기 군수 공장 간 계획적 생산 협력을 도입했다. 트러스트를 광범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 기업 연합으로 육성하며 중앙집권적 '글라브키즘'에 맞섰고,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주요 양허위원회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암토르그 사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소련-미국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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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볼셰비키에 합류, 보로네시 당 위원회 군사조직 책임자
  • 1906–1908모스크바 당 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 학생조직 지도
  • 1909–1914모스크바 시청 엔지니어, 도시 가스망 책임자
  • 1917고멜 소비에트 군사부문 의장, 시 두마 의장, 11월 혁명위원회 의장
  • 1918–1921VSNKh 화학공업 부문 위원, 우랄·북부 화학산업 국유화 전권대표
  • 1919–1925군수공업회의(국방공업 총국) 의장
  • 1921–1925VSNKh 의장 겸 RSFSR 인민위원회 위원, 주요 양허위원회 의장
  • 1926–1929북카프카스 지역집행위원회 의장
  • 1930–1934암토르그(소련 대미 무역회사) 사장
  • 1935–1937RSFSR 지방공업 제1부인민위원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 야코블레바

Варвара Николаевна Яковлева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4–1941 ✕ 처형

체카에서 좌익 반대파로 간 재정 인민위원

죄수열차 안에서 발렌티나 폴랴코바가 추궁했다. 「당신의 거짓 증언으로 내 남편이 총살당했다.」 야코블레바가 답했다. 「예조프의 명령이었다. 15일 밤낮 잠을 못 자게 하더니 결국 서명했다.」

혁명기 페트로그라드 체카를 이끌었던 옛 볼셰비키이자, 1924~26년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였다. 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을 지낸 뒤 1937년 체포되어 장기형을 선고받았고, 1941년 오룔 감옥의 집단 처형에서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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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24–1926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29–1937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
  • 1937–1941체포, 수감과 오룔 감옥 처형

아론 리보비치 셰인만

Арон Львович Шейнман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5–1944 ○ 자연사

체르보네츠로 네프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스탈린 체제에서 이탈한 첫 고위 금융 관료

1922년 2월 28일, 레닌이 셰인만에게: "현재 국가은행은 관료적 서류 게임일 뿐이다. 달콤한 공산주의-관료적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듣고 싶다면, 이것이 진실이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로, 1917년 헬싱키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1~1924년과 1926~1929년 두 차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맡아 금태환 체르보네츠를 도입, 네프 시기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레닌으로부터 "관료적 서류 게임"이라는 신랄한 질책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제도 구축이 화폐 안정을 가능케 했다. 1929년 해외 출장 중 소환을 거부해 초기 네보즈브라셰네츠가 되었고, 대숙청을 피해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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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헬싱키 소비에트 의장 · 제헌의회 의원
  • 1918–1919스톡홀름 주재 재무관
  • 1920–1921그루지야 주재 전권대표
  • 1921–1924국가은행 총재 (1차) · 체르보네츠 도입
  • 1926–1929국가은행 총재 (2차) · 소환 거부, 망명
  • 1933–1939인투리스트 런던 지부장 · 영국 귀화
  • 1944런던에서 사망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시미트

Васил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Шмидт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비에트 독일계 1886–1938 ✕ 처형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도한 노동인민위원

아서 랜섬은 1918년 12월 임명 직후 그를 만나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고 기록했고, 슈미트는 인민위원부가 노동조합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고 말했다.

1886년 12월 17일(그레고리력 2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러시아어 전기에서는 독일계로 기재되어 있다.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철도 정비공으로 일했고,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독일에서 도장공으로 지내다 돌아와 1915년부터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1917년 11월 노동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까지 재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고, 1937년 1월 체포되어 1938년 1월 28일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7년 7월 30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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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918노동부인민위원
  • 1918–1928노동인민위원 (RSFSR, 1923년부터 소련),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간부
  • 1928–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국방평의회 부의장
  • 1930–1931농업부인민위원
  • 1931–1933소련 인민위원회의 수석중재관
  • 1933–1937프리모리예 변경주 계획위원회 의장 등 지방 경제직

발레리안 발레리아노비치 오볼렌스키

Валериан Валерианович Оболенский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7–1938 ✕ 처형

최고경제회의 첫 의장, 좌파 공산주의와 민주집중제의 이론가

국가은행 관료들의 태업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맡아 1917년 11월 은행의 초대 관리자가 되었고 금고 열쇠와 인민위원회 자금을 넘겨받았으며, 12월 23일에는 최고경제회의 초대 의장으로 옮겼다.

쿠르스크현의 소지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1월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되어 은행 금고 열쇠와 자금을 확보했고, 그해 12월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에 올랐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의 이론적 지도자였으며, 1920~21년에는 소수파의 의견 개진과 공개 토론을 요구한 민주집중제 그룹을 공동 지도했다.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냈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9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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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트베리·하리코프에서 활동
  • 1911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 1917.12–1918.3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겸 국가은행 초대 관리자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플랫폼 공동 집필
  • 1920–21민주집중제 그룹 공동 지도자
  • 1921–23농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3–24스웨덴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5고스플란 간부회 위원
  • 1926–28소련 중앙통계국(CSO) 국장
  • 1929–30최고경제회의 부의장
  • 1932–37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수확고·총수확량 산정 국가위원회 의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정회원
  • 1935–37과학기술사연구소 소장
  • 1937.10체포
  • 1938.9.1처형; 1957년 복권

얀 에르네스토비치 루주타크

Ян Эрнестович Рудзутак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라트비아 1887–1938 ✕ 처형

법정에서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한 라트비아 볼셰비키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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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 1937.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 1938.7.29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모이세이 이오시포비치 칼마노비치

Моисей Иосифович Калманович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집단화 시기 국가은행을 이끈 혁명가 출신 금융행정가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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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민스크 수비대장,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 서부지역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9–1920벨라루스·리투아니아-벨라루스 식량인민위원, 서부전선 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0–1923우크라이나 식량부인민위원, 시베리아 식량위원회 의장
  • 1923–1924러시아 SFSR 식량인민위원, 소련 식량부인민위원
  • 1924–1929사하로트레스트·프롬방크·제르노트레스트 이사, 노농감독부 간부
  • 1929–1930소련 농업부인민위원
  • 1930–1934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 신용개혁 주관
  • 1934–1937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

세묜 세묘노비치 로보프

Семён Семёнович Лоб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체카에서 출발해 러시아 최고경제회의 의장을 지낸 볼셰비키 산업행정가

1936년, 임업인민위원부가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자 레닌 훈장을 받았다. 1년 뒤 같은 당이 그를 '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혐의로 체포했고, 1937년 10월 30일 선고와 동시에 총살했다.

스몰렌스크 현의 산림감독관 아들로 태어나 건설노동자·제도사로 일했고,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사라토프·바시키르 체카 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보안기구의 초기 간부로 성장했다. 네프기 연료·석유 신디케이트를 관리한 뒤 1926년 러시아 최고경제회의(ВСНХ РСФСР) 의장에 올라 공업화의 행정적 토대를 닦았다. 1932년부터 임업인민위원으로 5개년계획기 목재 공급을 책임졌고, 계획 초과 달성으로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0월 30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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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로젠크란츠 공장 노동자
  • 1917–1918페트로그라드·비보르크 당위원, 공장위원장, 소비에트 대표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9–1920사라토프 체카 의장 → 바시키르 체카 의장 겸 내무인민위원
  • 1921–1923석유신디케이트 연료국장
  • 1923–1926북서공업국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6–1930ВСНХ РСФСР 의장 겸 글라브에네르고 책임자
  • 1930–1932소련 공급인민위원부 부위원
  • 1932–1936소련 임업인민위원
  • 1936–1937러시아 식품공업인민위원

그리고리 야코블레비치 소콜니코프

Григорий Яковлевич Сокольник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8–1939 ✕ 옥중에서 살해되었다

네프의 화폐 안정화를 이끈 재무인민위원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대의원 1,306명)에서 소콜니코프는 연단에 올라 스탈린의 총서기직 사퇴를 공개 요구하고 네프의 계속을 주장했다. 연단에서 이를 요구한 발언자는 그가 유일했다. 제안은 다수를 얻지 못했다.

스탈린 시대에 옥중에서 살해된 볼셰비키 지도자. 본명은 그리고리 브릴리안트로, 소르본에서 법학 학위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섯 개 언어에 능통했다. 10월 혁명 뒤 은행 국유화를 주도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으며, 내전 시기 제8군을 지휘해 데니킨군을 격파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1922~1924년 화폐 개혁을 이끌어 금 태환 체르보네츠로 루블을 안정시켰고, 긴축 재정과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급속 공업화와 강제 집단화에 반대했다. 1925년 제14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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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볼셰비키 활동과 망명, 혁명기 당 실무에 참여
  • 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대표단에서 활동
  • 1920–1921투르케스탄 전선과 중앙아시아 소비에트화에 관여
  • 1922–1926재무인민위원, 체르보네츠와 네프 화폐 안정 추진
  • 1926–1936반대파와 연루되어 외교·경제직을 거쳐 점차 실각
  • 1936–1939모스크바 재판 뒤 수감, 수용소에서 살해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밀류틴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лютин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1889–1942 ○ 위암

나르콤핀 건물을 발주하고 선형도시 『소츠고로드』를 쓴 RSFSR 재무인민위원

10월 혁명의 밤, 밀류틴의 부대는 참모본부 아치에서 알렉산드르 원주 바리케이드를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그 방어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니콜라이 밀류틴은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 습격에 참여한 볼셰비키 활동가로, 이후 RSFSR 재무인민위원(1924–1929)을 역임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모이세이 긴즈부르크의 나르콤핀 건물(소비에트 구성주의 건축의 기념비적 작품)을 발주했으며, 1930년에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을 위한 선형도시 개념을 제시한 저서 『소츠고로드』를 출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잡지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의 편집장을 맡았고, 1930년대 내내 교육·문화 행정직을 거치며 마르크스주의 정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대숙청을 살아남았으나(베개 밑에 권총을 두고 잠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1942년 위암으로 사망하여, 혁명적 국가건설과 아방가르드 건축 사상을 잇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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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볼셰비키에 가입
  • 1912–1916사무직원노조 이사 · 푸틸로프 공장 병원기금 관리
  • 19172월 혁명 · 7월 봉기 · 겨울궁전 습격 참여
  • 1921–1924RSFSR 사회보장 부인민위원
  • 1924–1929RSFSR 재무인민위원
  • 1929–1930RSFSR 소인민위원회 의장
  • 1931–1934RSFSR 교육 부인민위원 ·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 편집장
  • 1939–1941소비에트 궁전 건설 예술감독

그리고리 페도로비치 그린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нько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8 ✕ 처형

우크라이나 보로트비스트에서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의 재정 설계자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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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 1959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레프 예피모비치 마랴신

Лев Ефимович Марьясин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94–1938 ✕ 처형

스탈린이 '우리의 붉은 은행가'라 부르고서 일주일 만에 내친 고스방크 총재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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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
  • 1918–1920전러시아 총참모부 프세보부치 부서장
  • 1920–1921보로네시 시당위원장, 오룔 현당위원회 책임비서
  • 1922–1923투르케스탄 ASSR 중앙경제회의 의장
  • 1923–1924최고경제회의(ВСНХ) 중앙경제관리국 무역·금융정책 부장
  •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정보통계부장, 중앙위원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
  • 1928–1930적색교수양성소 수학
  • 1934–1936국가은행 총재, 재정부인민위원, 노동국방평의회 위원

야코프 일리치 골레프

Яков Ильич Голе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94–1960 ○ 자연사

전후 재건기에 고스방크를 이끈 재정 기술관료

1933년, 소련 전역이 대기근에 시달리던 때 골레프는 하리코프에 파견되어 국가 수확고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이후 그가 다룰 모든 재정 숫자들 뒤에는 이 장면이 놓여 있었다.

야코프 골레프는 소련의 재정·은행 기술관료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를 지냈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제정군 포병으로 1차 대전을 겪고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 복무했으며, 이후 지역 재무 부서를 거쳐 중앙 재정 기구로 진입한 전형적인 소비에트 승진 경로를 밟았다. 고스방크 총재 임기 동안 그는 전시 경제에서 평시 재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1947년 화폐 개혁 직전까지의 신용·발권 체계)를 관리했으며, 이는 전후 소련 재정 안정화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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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러시아 제국군 포병 복무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붉은 군대 복무
  • 1920–1924피야티고르스크 식량위원회 · 볼로콜람스크 현 재무과 근무
  • 1924–1930모스크바 주 재무국 근무
  • 1930–1933과학연구 콜호스 연구소 대학원생
  • 1933–1935국가 수확고 위원회 위원장 (하리코프) · 전권위원 (체르니고프, 스탈리노)
  • 1937–1939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부 계획부 부장 · 재정 담당
  • 1939–1940소련 농업은행 총재
  • 1940–1941소련 재무 부인민위원
  • 1941–1945소련 재무 제1부인민위원
  • 1945–1948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
  • 1948–1952소련 재무부 차관 겸 농업은행 총재
  • 1953–1959소련 농업은행 총재

폴리나 세묘노브나 젬추지나

Полина Семёновна Жемчужина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97–1970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장관: 크렘린 권력과 유대인 정체성 사이에서

1948년 11월 혁명기념일 리셉션에서 폴리나 젬추지나는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의 딸 사라를 끌어안고 이디시어로 속삭였다. 「몸조심하렴. 너희에게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온 세상 유대인에게도 잘 풀릴 테니까.」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인민위원(1939, 수산공업)으로서 소비에트 여성의 정치적 진출에 이정표를 세웠다.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기 정치장교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와 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를 거쳐 식품공업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아내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절친으로 스탈린 가문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으나, 전쟁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냈다. 1948년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와의 이디시어 대화가 빌미가 되어 1949년 체포·출당·유배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 풀려나 1970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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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볼셰비키 입당, 붉은군대 정치장교
  • 1930–32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
  • 1932–36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
  • 1937–39식품공업 부인민위원
  • 1939수산공업 인민위원 — 최초 여성 산업장관
  • 1939–48경공업부 방직·잡화 본부장
  • 1942–48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활동
  • 1949–53체포·출당·쿠스타나이 유배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카바노프

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Кабан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시 전기공업을 지휘하고 수소폭탄의 리튬-6을 낳은, 소련의 마지막 스탈린 시기 대외무역장관

1953년, 카바노프는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과 리튬-6 생산으로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그 기술로 소련은 이윽고 수소폭탄을 완성했다.

페름 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자물쇠공에서 출발해 내전 정치위원을 거쳐 전기공업 관료로 성장했다. 1941년 전기공업인민위원이 되어 전시 소련의 발전설비 대피와 재건을 총괄했고, 1945년부터 원자폭탄 계획에 참여해 우라늄 동위원소 전자기 분리법과 열핵무기용 리튬-6 생산기술 확립을 주도하여 1953년 스탈린상 1등급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외무역장관이 되어 흐루쇼프 시기 소련 대외경제의 방향 전환을 집행했으며, 1958년 파톨리체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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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러시아SFSR 공공주택인민위원 → 러시아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38–1939소련 식품공업인민위원 (수개월 만에 강등)
  • 1940–1941'디나모' 공장 주임기사 → 공장장 (모스크바)
  • 1941–1951소련 전기공업인민위원 → 전기공업장관 (1946년 개칭)
  • 1951–1953국가물자기술공급위원회(고스스나프) 제1부의장 → 의장
  • 1953소련 국내·대외무역부 제1차관
  • 1953–1958소련 대외무역장관
  • 1958–1962소련 각료회의 대외경제활동위원회 부의장 — 소련 장관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즈베레프

Арс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Звере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900–1969 ○ 자연사

전쟁과 전후 재정을 버틴 장기 재무장관

1960년 5월 16일, 흐루쇼프의 화폐개혁이 단순한 '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 평가절하라고 보고 재무장관직을 내려놓았다. 원자재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기울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했다. 1938년 38세로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된 뒤 22년간 재무장관을 지내며 대조국전쟁 군수 재원 조달, 국채 발행, 1942년 원자력 개발용 라듐·백금 지급을 감독했다. 1947년 전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화폐개혁을 설계했으며, 1960년 흐루쇼프의 새로운 화폐개혁 방안에 반대해 사임했다. 스탈린과 흐루쇼프 두 체제를 관통한 유일한 장기 재무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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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 스탈린기 재정관료로 부상
  • 1938–1941재무인민위원, 전쟁 전 재정동원 체계 정비
  • 1941–1945전쟁 재정, 국채, 배급경제의 재정 기반 관리
  • 1947전후 화폐개혁과 배급제 폐지 국면에 관여
  • 1950s–1960흐루쇼프와 재정 노선 충돌 뒤 퇴임

니콜라이 데먀노비치 프수르체프

Николай Демьянович Псурце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0–1980 ○ 자연사

모스크바 전투 통신을 책임지고 27년간 소련 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체신장관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대일전 승리 명령에서 '프수르체프 휘하 통신부대'를 특별히 지목했다. 3년 뒤 스탈린이 그를 체신장관으로 직접 지명했다.

니콜라이 프수르체프는 1948년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소련 체신장관을 지내며 전화·전신·우편·방송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장관이다. 키예프의 러시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전신기사가 되었고, 내전기에는 제9군과 제12군의 통신을 책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서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체신장관 시절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간선과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망 '오르비타'를 건설하고 국제위성통신기구 '인테르스푸트니크' 창설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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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 군대 통신병, 제9군 및 제12군 통신국 위원
  • 1924고등군사통신학교 졸업, 시베리아 군관구 통신 부책임자
  • 1927–1930제10독립통신연대장 겸 정치위원
  • 1934군사전자공학아카데미 졸업, 적군 통신국 보좌역
  • 1936–1937국방인민위원부 통신소장
  • 1937–1939체신인민위원부 시외전화전신국장, 극동지방 전권대표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북서전선 통신부장
  • 1940–1941적군 통신국 부국장
  • 1941–1944서부방면 및 서부전선 통신부장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르제프)
  • 1944–1946적군 통신총국 제1부국장
  • 1945대일전: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국장
  • 1946–1948참모본부 통신부장
  • 1947–1948소련 체신장관 제1차관
  • 1948–1975소련 체신장관 (27년 최장수 재임)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75–1980연방급 개인연금 수급자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코발료프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овалё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1901–1993 ○ 자연사

대군을 비밀리에 움직인 철도 장군, 귀걸이 하나로 실각하다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준 일이 스탈린에게 밀고되자, 아무 설명도 없이 당과 장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반 코발료프는 위대한 조국전쟁 중 붉은 군대 군사수송을 총괄하고 인민교통위원(1944–1948)을 지낸 소비에트 군수송 지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철도부대에서 경력을 시작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 대규모 병력의 비밀 재배치를 성공시켜 스탈린으로부터 전략작전 지휘에 비견된다는 평가와 함께 수보로프 훈장과 쿠투조프 훈장 1급을 받았다. 전후 철도 복구와 포츠담 회담 수행 후 1948년 스탈린의 개인 대표로 마오쩌둥에게 파견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기 양국 지도부 사이의 비밀 메신저 역할을 했다. 아내 생일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한 일이 밀고되어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참모대학교 교수와 IMEMO 연구원으로 일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1921붉은 군대 정찰병, 보로네시 체카 대대 적군 병사
  • 1935군사수송대학 우등 졸업
  • 1937–1939서부철도 관리국장
  • 1939–1941교통인민위원부 중앙군사부장 · 위원회 위원
  • 1941–1944붉은 군대 군사수송국장 · 중앙군사수송국장
  • 1944–1948소비에트 연방 교통인민위원 · 교통장관
  • 1948–1950스탈린의 중공 대표 · 주중 소비에트 군사고문단장
  • 1951–1957소비에트 연방 석탄공업 차관
  • 1960–1969참모대학교 전략학과 선임강사
  • 1969–1985IMEMO 선임연구원 · 연구실장 ·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