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중앙위원회가 나의 보고를 검토했고 승인했다」 —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폐막사에서. 이 한마디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민가정 출신 소비에트 농학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기술로 주목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 소비에트 생물학계를 장악했다. 멘델유전학을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으로 공격하고 후천획득형질 유전을 주장했으며,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승리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감자 여름심기·기장 재배법 등 실용적 농업기술도 제안했다. 3개 스탈린상·8개 레닌 훈장·사회주의노동영웅(1945) 수상. 흐루쇼프 실각 후 1965년 해임, 197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당원이 아니었다.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읽고 쓴 편지 한 통이 의사들 음모 사건의 불씨가 된 크렘린 심장 전문의
크렘린 주치의가 「내 말을 믿지 티마슈크 같은 사람 말을 믿겠느냐」며 그녀의 심근경색 진단을 묵살하자, 그녀는 상부에 편지를 썼고 4년 후 의사들의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26년부터 크렘린 병원에서 근무한 심장 전문의로, 1948년 8월 28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판독하고 '심근경색' 진단을 내렸으나 상급 의사들에게 묵살당했다. 이에 당과 국가보안부에 세 차례 항의 편지를 보냈고, 4년 후 이 편지들은 1953년 '의사들의 음모' 사건 조작의 근거로 부활했다. 1953년 1월 '의사-살인자들을 적발한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스탈린 사후 4월에 박탈당했고, 이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지목되며 '정보원'이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다녔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부하들이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고, 의료진은 생애 누적 피폭량을 치사량의 세 배에 해당하는 약 1,500뢴트겐으로 추산했다는 회고가 전한다.
도네츠크 마키이우카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품팔이꾼과 목동으로 일했고 교구 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1918년 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해 남북전쟁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싸웠고 1928년 제대한 뒤 1933년 비철금속·금 연구소를 졸업했다. 1946년 제1총국 부국장이 되어 원자폭탄 계획에 들어갔고 1947년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소련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57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핵산업을 이끌며 폐쇄 원자력 도시들을 세웠고 1991년 1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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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오늘 침묵하는 자는 스탈린의 공범이 된다.” — 1937년 7월 1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결별서
본명 나탄 마르코비치 포레츠키. 오스트리아-헝가리령 갈리치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고, 이후 ‘루트비히’와 ‘이그나티 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서 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의 불법공작망을 운영했다. 1928년 적기훈장을 받았으나 모스크바 재판과 대숙청을 겪으며 스탈린 체제와 결별했다. 1937년 7월 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훈장을 반납하고 제4인터내셔널 지지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4일 로잔 근교에서 오랜 지인 게르트루트 실트바흐에게 유인된 뒤, 세르게이 시피겔글라스가 지휘한 NKVD 암살조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1937년 11월 2일, 그가 이끌던 연구소의 수석기사 랑게마크 체포 뒤 클레이묘노프도 체포되었다.
이반 클레이묘노프는 소련의 초기 로켓 기술을 조직한 군사공학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기체역학연구소와 반응과학연구소를 연결해 연구를 군수 체계에 편입했고, 무연 추진제 로켓탄과 훗날 카튜샤로 이어진 기술 개발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연구기관은 대숙청 속에서 핵심 인력의 체포와 함께 붕괴했으며, 클레이묘노프 자신도 처형되었다. 1955년 무혐의로 복권되었고 199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재판은 50분 만에 끝났고, 1940년 1월 11일 비노그라도프는 참모장·정치부장과 함께 생존한 사단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트베리 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콜차크·마흐노·브란겔과 싸웠다. 1939년 초 급격한 승진으로 제44소총병사단장이 되어 폴란드 침공을 거쳐 겨울전쟁에 투입되었고, 포위된 제163사단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라테 도로로 진격했다. 핀란드군의 모티 전술에 사단이 궤멸되자 지휘를 포기하고 탈출했으며, 50분간의 군사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940년 1월 11일 생존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1936년 12월, 슬루츠키가 그에게 임박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협정에 대해 알렸다.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 아마도 히틀러와의 협정 체결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달뿐일 것...' 크리비츠키의 회고는 나우모프가 1936~1937년의 물밑 정치를 재구성하는 주요 사료다.
갈리치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명이 자무엘 긴즈베르크인 소련 군사정보 요원으로, 1930년대에 헤이그를 거점으로 서유럽 비합법 정보망을 이끌었다. 1936년 12월 해외정보부장 슬루츠키에게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물밑 접촉을 들었고, 1937년 여름 파리에서 시피겔글라스와 투하쳅스키 사건의 본질을 논한 끝에, 동료 이그나츠 라이스가 암살되자 그해 가을 망명했다. 1939년 회고록 '나는 스탈린의 요원이었다'를 펴내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으며, 1941년 2월 워싱턴의 호텔에서 총상 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되었으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38년 4월 핀란드 측에 독일이 핀란드를 거쳐 레닌그라드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리브킨은 야르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소련의 정보관이자 외교관이었다. 1938년 그는 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토 교환 요구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실패한 접촉은 협상과 안보 불신이 얽힌 채 겨울전쟁으로 향하던 소련·핀란드 관계의 첫 단계였다.
폭발 직전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이고르'라던 베리야는, 섬광이 솟아오르자 쿠르차토프와 하리톤을 달려가 껴안고서도, 곧 의심에 사로잡혀 비키니 실험 관측자에게 '혹시 쿠르차토프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그루지야 메르헤울리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어나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캅카스 지역 보안기관을 거쳐 1938년 11월 NKVD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대숙청의 대량 탄압을 축소했다. 1940년 트로츠키 암살을 감독하고, 같은 해 3월 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폴란드 장교·지식인 2만여 명의 카틴 학살을 집행했다. 1944년에는 체첸·잉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직접 지휘했고, 1945년부터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원폭 계획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1953년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사면·복권 등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6월 26일 체포되었고, 12월 23일 사형 선고와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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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31캅카스 체카·GPU
1931–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1938–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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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1941년 여름, 폭탄 파편이 말리닌의 뒷머리와 목에 박혔다. 중상이었지만 그는 병원 후송을 거부하고 야전 사령부에 남았다. 로코솝스키는 후일 '전쟁 내내 나의 오른팔이었다'고 회고했다.
농민 출신 목수에서 붉은군대 최고의 참모 장교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말리닌은, 스몰렌스크 포위망의 절망적인 순간부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작전의 승리까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로코솝스키가 지휘하고 말리닌이 치밀하게 계획한 이 긴밀한 동반 관계는 제16군, 돈·중앙·제1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를 소련 작전술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전후에는 소련군 독일주둔군 참모장, 지상군 주참모장을 거쳐 19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작전 계획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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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붉은군대 입대, 내전 참전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갑부대 근무
1939–40제9군 작전처장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1941–44로코솝스키 휘하 제16군·전선군 참모장;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1945년 8월,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3주도 안 되어 800킬로미터를 돌파하며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소련의 전차군 지휘관으로, 스탈린그라드 포위 고리를 닫은 제4전차군단을 지휘했고 쿠르스크와 드네프르에서 제5근위전차군단을 이끌었다. 1944년 제6전차군(이후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공세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그의 군대는 고비사막과 대싱안링 산맥을 초고속으로 돌파하며 관동군을 분쇄하는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 공로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전차병 대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기갑지휘관 중 한 명이다.
1943년 1월 31일 파울루스가 제64군에 사로잡힌 뒤, 보로노프는 자바리기노의 자크바냐에서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그를 신문해 저항 중인 북부 집단의 항복 명령을 요구했으나, 파울루스는 자신이 포로라 명령이 무효라며 거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기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갔고,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싸우다 1920년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볼테르'라는 이름의 포병 고문으로 파견되었고, 1937년 귀국해 적군 포병 총책임자가 되면서 중앙집중식 포병 운용을 밀어붙였으며, 그해 처형된 전임자 로고프스키를 대신한 자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스타프카 대표로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쿠르스크에 파견되어 천왕성 작전의 포병 준비를 감독했고, 1943년 파울루스의 신문에 참여했다. 1944년 최초의 포병 총사령관에 올랐고 전후에는 포병과학아카데미와 포병지휘아카데미를 이끌었으며, 1968년 2월 악성 종양 수술 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1941년 6월 22일, 적기 접근 보고에 옥탸브리스키는 "지시대로 행동하라"며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 참모장이 독자적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그 짧은 지연 동안 항만에 기뢰가 투하되었다.
소련 흑해함대의 전시 사령관. 1939년부터 흑해함대를 지휘하며 바르바로사 작전 발발 직후 오데사와 세바스토폴 방어전을 진두지휘했고, 케르치-페오도시야 상륙작전을 조직했다. 1943년 남오제레이카 상륙작전 실패로 경질되었다가 1944년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해 크림·오데사·야시-키시뇨프 작전에 기여했다. 1944년 제독으로 진급했고 전후 해군 제1부사령관을 지냈으며, 1958년 영웅도시 세바스토폴의 방어를 이끈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자신과 지휘부만 빠져나오고 수만 명의 수비대를 남겼다는 비판은 오늘날까지 논쟁으로 남아 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독일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도시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크리보셰인은 구데리안과 나란히 서서 나치 독일군과 붉은 군대의 합동 열병식을 주관했다.
소련 기갑군 중장. 보로네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북전쟁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후 기갑 부대로 옮겨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군 최초의 전차 지휘관으로 마드리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구데리안과 만나 독일군 철수와 합동 열병식을 함께 주관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 소속 제3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오보얀 축선을 방어, 호트의 주력 기갑 공세를 저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근위군단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베를린 공세에서 제1기계화군단을 이끌며 4월 25일 가장 먼저 시내로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1년 총재 S. I. 바빌로프가 사망하자 정치국원 말렌코프가 네스메야노프를 불러 총재직을 제안했다. 그는 채식주의 신념과 체포되어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 형제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으나, 말렌코프는 이를 묵살했다.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네스메야노프는 189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8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소련의 화학자이며 과학 조직가다. 1929년 금속 할로겐화물과의 디아조 반응, 즉 '네스메야노프 반응'으로 아릴수은 할로겐화물을 얻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는 탈륨·주석·납·비소 등 여러 금속의 유기화합물 합성으로 확장되었다. 소련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9)과 정회원(1943)을 거쳐 유기화학연구소 소장(1939–1954)과 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1954–1980)을 지냈으며,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아카데미 총재로 재임했다. 1961년 이후에는 농업을 우회하는 합성식품 연구를 추진해 인공 블랙 캐비어 등의 공정을 개발했다.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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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