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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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레베데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Лебед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2–1974 ○ 자연사

MESM·BESM의 창설자, 소련 컴퓨터 산업의 아버지

1970년대 초 IBM 호환 노선이 소련 컴퓨터 산업을 장악해가자, 이미 병상에 있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소련 컴퓨터 공학의 창시자. 1951년 키예프 외곽 폐허 수도원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MESM을 완성했고 1953년 BESM-1을 가동했다. 이후 20년간 ITMiVT 소장으로 BESM-6 등 15종의 컴퓨터를 개발했으며, 그의 기계들은 핵무기 계산과 우주비행 궤도 산출, 최초의 작전용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떠받쳤다. 1953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계산장치' 전공 정회원, 사회주의 노동영웅(1956), 레닌·스탈린·국가상을 받았다. IBM 호환 노선에 맞서 독자 병렬 아키텍처를 고수했고 제자들은 엘브루스 슈퍼컴퓨터로 계승했다. 사후 IEEE 컴퓨터 파이어니어 상(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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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6전연방 전기공학연구소(AEI) 연구원·자동화부장, 모스크바전력공학대학 교수
  • 1946–195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전력공학연구소장 → 전기공학연구소장
  • 1948–1951MESM(소형 전자계산기) 개발 총괄 — 소련 및 유럽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완성
  • 1950–1953정밀기계·컴퓨터공학 연구소(ITMiVT) 연구실장, BESM-1 개발 완료
  • 1953–1973ITMiVT 소장 — BESM-2, M-20, BESM-6 등 15종 컴퓨터 개발 지휘
  • 195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계산장치 전공)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멘시코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еньшиков

스탈린에게 바나나 때문에 해임되고 흐루쇼프 아래 냉전 대사로 복귀한 무역·외교 관료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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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 1921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참여
  • 1930–1936아르코스(ARCOS) 런던 지부 책임자
  • 1943–1946유엔구제부흥기구(UNRRA) 부국장 (미국)
  • 1946–1949소련 대외무역부 차관
  • 1949–1951소련 대외무역부 장관
  • 1953–1957주인도 소련 대사
  • 1957주네팔 소련 대사 (겸임)
  • 1958–1962주미 소련 대사
  • 1962–1968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

스테판 솔로모노비치 마물로프

Степан Соломонович Мамулов

NKVD 서기국을 쥔 문서의 관문

1938년 12월 베리야의 부름으로 트빌리시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왔다. 한 달 뒤 NKVD 서기국 제1부국장에 임명되어, 14년간 비밀경찰의 모든 문서가 그의 책상을 통과했다.

베리야 측근 당 관료. NKVD 서기국장으로 문서 흐름 전체를 통제했고, 내무 부장관으로 수용소 체계를 관장했다. 베리야 숙청 후 별도 재판으로 15년형을 살고 1968년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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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8압하지야·그루지야·카자흐스탄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 1939–1946NKVD·MVD 서기국장
  • 1946–1953내무 부장관(수용소·보급 관장)
  • 195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 1953–1968체포, 십오 년형 복역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고레미킨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Горемыкин

탄약에서 우주까지: 흐린 이름 뒤에 숨은 로켓부처의 첫 장관

1955년 4월, 의도적으로 모호한 이름으로 로켓·우주 개발을 감추기 위한 일반기계공작부가 창설되자, 고레미킨이 초대 장관에 올랐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국립공과대학을 졸업한 소련의 공업 관리자이자 국가 지도자이다. 방위공장 기술직에서 출발하여 독소전쟁 발발 직전 탄약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전쟁 첫해의 군수 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에는 농업기계공작부 장관을 지냈다. 1955년 소련 최초의 일반기계공작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반기계'라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명칭은 이 부처의 실제 임무인 탄도미사일과 우주로켓 개발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금속 잔여분 은폐'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복직했으며, 만년에는 공작기계 분야 과학기술 자문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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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보리소글렙스크 철도공장 견습 기계공, 당학교·노동자대학 수학
  • 1931바우만 MVTU 졸업, 모스기프로마시 기술자·부소장
  • 1936–1938제92공장(고리키) 주임기술자, 제8공장(모스크바) 기술부장
  • 1939–1940군비담당 부인민위원
  • 1941–1942탄약인민위원 — 전쟁 1년차 군수 지휘
  • 1946–1951농업기계공작부 장관 (1951년 체포·제명, 1953년 복권)
  • 1955–1957초대 일반기계공작부 장관 — 로켓·우주산업의 비밀 행정 수장

미하일 파블로비치 시레이데르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Шрейдер

대숙청기 NKVD의 내부 증언자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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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입부, 서부전선 사단 특별부 정찰 요원
  • 1922모스크바 주 GPU 비밀정치부 근무, 불라노프의 보좌관
  • 1925–1927외무인민위원부 암호부와 소프키노에서 근무
  • 1930–1931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 군관구 OGPU 전권대표부 근무
  • 1931–1933히비노고르스크 GPU 국장, 이후 타타르 자치공화국 OGPU 근무·카잔 형사수사
  • 1935–1938.1이바노보주 밀리치야 수사부서 책임자, 밀리치야 관리국장(내무인민위원부 부국장 겸임)
  • 1938.2–6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알마아타); 6월 체포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안드리아노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Андрианов

전시 스베르들롭스크를 이끌고 숙청된 레닌그라드를 재건한 스탈린 시대의 지역 당 보스

1942년,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는 「베르흐-이세츠키 제철소에서 전채요리와 술이 곁들여진 야회를 개최한 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공장 간부들의 연회를 규탄한 이 결의는 안드리아노프의 강경한 통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안드리아노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 소련의 주요 지역당 지도자로,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1939~1946)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3)를 지냈다. 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신타길 제철소와 스레드네우랄스크 제련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방산 생산을 총괄하여 네 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후 말렌코프의 추천으로 레닌그라드에 파견되어 대규모 당·국가 기구 개편을 주도했고, 1952년 10월 스탈린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간부회에서 제외되고 곧 레닌그라드 당직에서도 해임되었으며, 국가통제부 차관을 거쳐 1956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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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5붉은군대 복무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37–1938코브로프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9–1946스베르들롭스크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46–1952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49–1953레닌그라드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3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
  • 1953–1956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먀시셰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Мясищев

투폴레프가 거절한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1년 10개월 만에 현실로 만든 설계자

스탈린이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원했을 때 투폴레프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먀시셰프가 22개월 만에 M-4를 띄웠다. 투폴레프가 후일 인정했다: "먀시셰프가 아니었으면 우리에겐 그런 폭격기가 없었을 것이다."

소련 중폭격기 설계의 독보적 인물로, M-4(몰로트)를 통해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대륙간 터보제트 전략폭격기를 현실화했다. 투폴레프 설계국에서 TB-1, TB-3, ANT-20 개발에 참여했고, 1938년 체포되어 NKVD의 TsKB-29에서 페틀랴코프와 함께 Pe-2를 설계했다. 1951년 스탈린의 직속 지시로 OKB-23을 재건해 불과 22개월 만에 M-4를 띄웠고, 이후 초음속 전략폭격기 M-50과 세계 기록 19개를 수립한 3M을 개발했다. 1960년부터 7년간 TsAGI를 이끌며 소련 항공우주의 기초연구를 총괄했고, 사후에도 그의 설계국이 VM-T 아틀란트로 부란 우주왕복선 수송을 담당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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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4투폴레프 설계국(AGOS TsAGI) — TB-1, TB-3, ANT-20 날개 설계
  • 1934–37TsAGI 실험기 여단(KB-6) 책임자, ANT-41 어뢰폭격기
  • 1937–38제84공장 수석설계사 — DC-3을 Li-2로 개량, 약 14,000대 생산
  • 1938–40체포, NKVD TsKB-29에서 페틀랴코프 휘하 Pe-2 설계
  • 1940–43석방 후 자체 OKB — DVB-102, 소련 최초 여압식 객실 폭격기
  • 1943–46제22공장 수석설계사 — Pe-2 개량형(Pe-2I 등), DIS, DB-108
  • 1946–51MAI 항공기설계학과장·학장; OKB 해산 (낮은 생산성 이유)
  • 1951–60OKB-23 수석·총설계사 — M-4(1953), 3M(1956), M-50(1959); 세계기록 19건
  • 1960–67TsAGI 소장 — 초음속·가변익·수직이착륙 기초연구 총괄
  • 1967–78EMZ(먀시셰프 실험기계제작공장) 총설계사 — M-17, M-18, M-20, VM-T 아틀란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

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Суслов

크렘린의 회색 추기경

수슬로프가 출장을 가면 키릴렌코가 서기국을 대신 주재했다. 돌아오자마자 수슬로프는 자신의 부재 중 내려진 결정을 모조리 뒤집었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사라토프현 샤호프스코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의 당·국가 인물로, 스탈린 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내 1921년 입당했다. 1947년 5월부터 죽는 날까지 중앙위 서기를 지냈고 1949~1950년에는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았으며, 1965년부터는 서기장 브레즈네프 아래 제2서기로 당의 이인자였다. 이념·선전·문화·검열·교육을 관장하며 '회색 추기경'으로 불렸고,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참여했다.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 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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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당 학교와 경제 행정에서 성장, 북캅카스·스타브로폴 당직 수행
  • 1944–1946리투아니아 당국에서 전후 소비에트화와 반민족주의 통제에 관여
  • 1947–1982중앙위 서기, 이념·선전·정통 노선의 장기 관리자
  • 1956스탈린 비판 이후에도 당 정통성과 통제 언어를 재정리
  • 1964–1982브레즈네프 체제의 보수적 이념 심판관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베네딕토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недиктов

스탈린 말기와 전후 농업행정의 장기 관료

정치국에서 나는 스탈린 시절 버릇대로 '지도자' 귀에 거슬려도 내 생각을 말했다. 흐루쇼프는 처음엔 조용히 듣더니, 점차 냉담해졌고 마침내 노골적 적의로 돌아섰다.

1938년부터 20년 넘게 소련 농업을 지휘하며 전시 식량 공급과 전후 복구를 관리했다. 1939년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조직해 집단농업의 성과를 선전했고, 1953년 말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정책의 토대가 된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급진적 개혁(옥수수 강제 재배, 개인 텃밭 철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지방 이전)에 공개 반대하며 밀려났고, 이후 인도·유고슬라비아 대사로 12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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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55농업인민위원 · 농업장관

판텔레이몬 콘드라티예비치 포노마렌코

Пантелеймон Кондратьевич Пономаренко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총사령관, 후계 문턱에서 밀려나다

1941년 12월, 스탈린은 포노마렌코를 불러들여 여러 시간 면담한 끝에 전 유격대를 총괄할 중앙본부 설립안을 직접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독일군 후방을 향한 '철도전쟁'의 씨앗이 그날 뿌려졌다.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지휘관으로 '철도전쟁'을 기획해 독일군 후방을 마비시켰다. 1952년 간부국에 올라 후계자로 거론됐으나, 스탈린 사후 실권을 잃고 외교관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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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7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39년 서부 벨라루스 병합 관리
  • 1942–1944중앙유격대본부장, '철도전쟁'·'콘체르트' 작전 기획·지휘
  • 1944–1948벨라루스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48–1953중앙위 서기, 조달장관, 당 간부국원 — 스탈린 말기 급부상
  • 1953–1954소련 초대 문화장관
  • 1954–1955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 1955–1962폴란드·인도·네팔·네덜란드 주재 대사
  • 1965–1978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키릴 세묘노비치 모스칼렌코

Кирилл Семёнович Москал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2–1985 ○ 자연사

베리야 체포를 주도하고 부하를 '인민의 적'이라 부른 원수

베리야는 1953년 6월 26일 크렘린의 각료회의와 당 간부회의 합동 회의에서 체포되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은 모스칼렌코가 장교들을 이끌었다고 전하나, 다른 사료는 말렌코프의 책상 버튼 신호로 주코프의 무장 장교들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리시노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8월 적군에 입대해 제1기병군에서 복무했다. 1941년 5월 제1대전차여단을 시작으로 제15소총군단과 제6기병군단, 이어 제38·제1전차·제1근위·제40군을 차례로 지휘했으며, 드네프르 도하로 1943년 10월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같은 달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38군을 이끌었다. 1953년 6월 자신이 모은 군인 그룹을 이끌어 베리야 체포를 수행했고, 루덴코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으며 12월 특별재판부의 일원이었다. 1955년 소련 원수가 되었고 1960년부터 1962년 4월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78년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흐루쇼프는 그를 '제3의 모스칼렌코, 기회주의자'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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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22적군 제1기병군 복무, 내전 종군
  • 1939–41핀란드 전쟁, 이후 제1대전차여단장
  • 1942–43제1전차군·제1근위군·제40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 1943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련 영웅 칭호
  • 1943–45제38군 사령관, 키예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53베리야 체포 주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55/1960–62소련 원수,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 1978두 번째 소련 영웅 칭호

발레리안 알렉산드로비치 조린

Валери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орин

유엔 안보리에서 쿠바 미사일을 부인한 소련의 냉전 외교관

스티븐슨: "쿠바 미사일을 부인합니까, 예스 오어 노?" 조린: "나는 미국 법정에 서 있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직후 스티븐슨의 보좌관들이 미사일 기지 항공사진을 안보리 회의장으로 들여왔다.

소련의 냉전 외교관으로, 25년간 외무차관을 지내며 체코슬로바키아·서독·프랑스 대사와 유엔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유엔 안보리에서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추궁에 답변을 거부한 장면으로 냉전 외교사의 상징적 순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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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2콤소몰·피오네르 운동 조직가, 모스크바 당위원회
  • 1941–1945외무인민위원부 근무
  • 1945–1947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대사
  • 1947–1965소련 외무차관 (세 차례 재임)
  • 1949–1952소련 대외정보위원회 위원장
  • 1952–1953, 1960–1963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55–1956주서독 초대 소련 대사
  • 1965–1971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7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바카예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Бакаев

소련 상선대를 세계적 해운 강국으로 키운 16년 장관

1962년 가을, 바카예프는 '아나디리' 작전의 해상 수송을 진두지휘했다. 쿠바로 향하는 소련 상선들은 미사일과 부대를 은닉한 채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는 이를 '소련 해운 역사상 가장 복잡한 수송 임무'라고 불렀다.

브랸스크의 노동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항만 공장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19년 16세로 적군에 입대해 내전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을 졸업한 뒤 항만 건설과 해상 운송 조직화에 평생을 바쳤으며, 대조국전쟁 중에는 무르만스크 항에서 연합국 군수물자 하역을 총괄하는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로 활약했다. 1954년 해운부 장관에 오른 뒤 16년간 소련 상선대를 이끌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이 세계 최대 상선단 중 하나를 보유한 해운 강국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닦았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작전명 '아나디리'의 해상 수송을 조직한 핵심 실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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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5베르댠스크 항만 공장 견습공
  • 1919–1920적군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 1922–1929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 수운학부 수학
  • 1929–1937중앙해운관리국 기사 → 항만중앙관리국장
  • 1937–1942군사수송아카데미·레닌그라드 수운대학 교원
  • 1943–1945국방위원회 전권대표, 무르만스크 항 연합군 화물 하역 총괄
  • 1945–1952해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해운부 차관
  • 1952–1953해운부 제1차관
  • 1953–1954해운·하운부 제1차관 → 각료회의 운수·통신국 부의장
  • 1954–1970소련 해운부 장관
  • 1970–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 연구소 연구원

바실 파블로비치 므자바나제

Васил Павлович Мжаванадзе

19년 집권한 그루지야의 보스, 그림자 경제의 대부

1965년 6월, 스탈린 격하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므자바나제는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시 열게 하고 스탈린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 당은 검증된 사람에게만 문이 열리는 요새다."

1902년 9월 7일(구력)/9월 20일(신력) 쿠타이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공장에서 일했고, 1924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1927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레닌그라드 군사정치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군사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대조국전쟁 중에는 제42군·제2충격군·제21군 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53년 9월 20일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년간 공화국을 이끌었고,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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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24공장 노동자
  • 1924–37붉은 군대 복무, 1927년 입당
  • 1937–41군사정치위원,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5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 전선·여러 야전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5–53키예프·프리카르파티예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 1953–72그루지야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72CPSU 정치국(상임위) 후보위원
  • 1972.9부패 혐의로 해임, 연금 생활

겐나디 이바노비치 스미르노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Смирнов

8개월 만에 숙청으로 사라진 계획 수장

1937년 2월 26일, 『이즈베스티야』 1면에 33세의 신임 고스플란 의장 스미르노프의 사진이 실렸다. 8개월 뒤 그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계획 이론가로, 고스플란 자본건설 부문과 종합계획국을 거쳐 1937년 2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다. 메즐라우크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해 임명되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8개월 동안 계획기구를 이끌다 1937년 10월 체포되었다.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938년 7월 총살되었으며, 1차 5개년계획을 설계한 계획 관료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된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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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0철도 공장 제도 보조, 농업 코뮌 활동, 콤소몰 지도원
  • 1921–1924심비르스크 콤소몰 정치교육부장·서기, 시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4–1929크룹스카야 공산주의교육 아카데미·경제연구소 대학원 수학, 최고경제회의 자본건설부장
  • 1930–1934소유즈콜호즈방크 부총재, 고스플란 자본건설부문장·간부회 구성원
  • 1934–1937고스플란 부의장 겸 종합계획국장 — 메즐라우크의 최측근
  • 1937.02–10고스플란 의장, 공업화 계획 총괄
  • 1937.10–1938체포·기소·사형 — 대숙청이 계획기구마저 집어삼키다
  • 1956사후 복권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사레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сарев

콤소몰을 이끌며 대숙청을 집행하다 그 숙청에 삼켜진 젊은 지도자

북극점-1 부빙기지 귀환 기념 크렘린 연회에서 스탈린이 코사레프와 잔을 부딪히고 껴안아 입맞춘 뒤 귀에 속삭였다. 코사레프가 아내 마리야에게 전한 그 말은 '배신하면 죽인다'였다. 회고록과 유. 보린의 저술로 전해지는 일화다.

모스크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콤소몰 창립과 함께 가입하고 1919년 볼셰비키당에 들어갔다. 내전 참전 여부에 대해서는 적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기록과 병을 이유로 복무를 피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25세에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가 되어 스파르타크 협회를 세웠고, 대숙청기에는 콤소몰원 14만 1천여 명 제명을 관장했으며 1937년 2월 부하린·리코프의 체포와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샤코바 사건 뒤 1938년 11월 콤소몰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해임되고 11월 28일 체포되었으며,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채 1939년 2월 23일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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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콤소몰 창립과 동시 가입, 볼셰비키당 입당
  • 1922–26모스크바 바우만·펜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26지노비예프 지지파 숙청 위해 레닌그라드 파견
  • 1929–3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25세 최연소 지도자
  • 1934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정위원 — 최연소
  • 1936–38콤소몰 대숙청: 141,337명 제명
  • 1938–39베리야가 직접 체포,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 거부, 총살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보즈네센스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Вознесенский

전시계획의 천재, 레닌그라드 사건에 죽다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보즈네센스키는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산업이 감당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곤 했다. 바실렙스키 원수는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국원. 35세에 고스플란 의장이 되어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 전시 경제 계획을 총괄했으며,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산업 대피와 군수 생산 전환을 지휘했다. 1947년 『전시 소련경제』로 스탈린상을 수상하고 전후 경제 부흥 계획을 주도하며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즈다노프 사후 말렌코프·베리야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몰락,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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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레닌그라드 당·계획기관에서 빠르게 성장한 젊은 경제관료
  • 1938–1941, 1942–1949고스플란 및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전시 생산계획 조정
  • 1941–1945국가방위위원회와 전시 경제관리의 핵심 실무자
  • 1946–1949전후 유력 경제 지도자로 부상, 『전시 소련경제』 저술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처형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포프코프

Пётр Сергеевич Попков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실무 지휘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첫 희생자

1949년 8월 13일,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된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미르 현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목수 견습생에서 레닌그라드 시·주당 제1서기까지 오른 노동자 출신 당료였다. 1939년부터 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872일 포위전 내내 식량 공급, 방역, 에너지 수송, '생명의 길' 운영을 지휘하며 도시 방어의 핵심 실무를 맡았다. 전후 배급제 폐지와 도시 재건을 진두지휘했고 1946년 제1서기로 승진해 소련 제2도시 당 조직을 총괄했다. 1949년 1월 주최한 레닌그라드 무역박람회가 말렌코프의 공격을 받으며 '레닌그라드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그해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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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6블라디미르 볼로스트 콤소몰 서기
  • 1926–1937목수·연구직,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 1937–1938레닌그라드 레닌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1938–1939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39–1946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포위전 내내 도시 방어·보급 총괄
  • 1941–1944방어위원회 위원·방공군 군사평의회 위원·방역위원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이고리 바실리예비치 쿠르차토프

Игорь Васильевич Курчат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3–1960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의 과학 책임자

1942년 아내가 "면도할 거예요?"라고 묻자 쿠르차토프는 "승리한 다음에"라고 답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질 때까지 7년간 수염을 깎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를 그냥 '보로다(수염)'라고 불렀다.

소련 핵물리학 공동체를 구축하고 원자력 사업 전체를 지휘한 과학 책임자였다. 1930년대 LFTI에서 동료들과 유럽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고, 1943년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 지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핵실험을 이끌었다. 그의 연구소는 이후 수소폭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오브닌스크, 1954), 원자력 쇄빙선까지 개발했다. 무기 경쟁의 한복판에서 평화적 원자력 이용을 추진한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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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60원자력 과학지도자

티모페이 암브로시예비치 스트로카치

Тимофей Амвросиевич Строкач

베리야가 '수용소 먼지'로 위협하고 흐루쇼프에게 쿠데타를 경고한 내무장관

베리야가 전화로 "우리는 당신을 기관에서 쫓아내고 체포해 수용소에서 썩게 할 것이며, 가루로 만들어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대조국전쟁 시기 30만 빨치산을 지휘한 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사령부 책임자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장관을 지낸 소비에트 보안기관 간부다. 전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대규모 체포를 주도했고, 스탈린 사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르비우 주 경찰청장으로 좌천되었다. 1953년 6월 베리야가 당 기관을 우회해 MVD의 독자적 권력을 구축하려 한다고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경고했으며, 베리야로부터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 사건은 베리야 체포 결의의 결정적 방아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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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우크라이나 SSR 내무부인민위원
  • 1942–1945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 1946–1953우크라이나 SSR 내무장관
  • 1953.03–06르비우 주 내무국장
  • 1953–1956우크라이나 SSR 내무장관 (복귀)
  • 1956–1957소련 내무차관 겸 국경·내무군 총국장

바실리 표도로비치 포포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Попов

전후 화폐개혁을 집행한 10년의 국가은행 총재

1964년 부고에서 코시긴과 미코얀은 그가 소련의 "재정·신용 체계를 조직하고 강화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고 1923년 당에 들어갔다. 돈 강과 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11년간 실무를 쌓은 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치고 타타르 자치공화국, 러시아공화국, 연방 차원의 재정 요직을 거쳐 1948년 소련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다. 10년간 고스방크를 이끌며 1947년 화폐개혁의 후속 집행, 전후 복구 자금 배분, 1950년대 소비재·주택 건설 확대 국면의 신용 공급을 관리했고, 1958년 흐루쇼프 체제 아래 강등되어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노동자 출신 재정 관료가 스탈린 후기에서 탈스탈린화 초입까지 소련 통화·신용 시스템의 일상적 작동을 책임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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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3붉은 군대 자원입대, 돈 군소함대 복무 후 철도 형사 및 식량인민위원부 열차 사령관
  • 1923–1934돈·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금융 대리인·감독관·구·시 재정과장으로 승진
  • 1934–1937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 수료
  • 1937–1938타타르 자치공화국 재무부인민위원,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38–1940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소련 재무부인민위원 → 제1부인민위원
  • 1940–1948소련 국가통제부인민위원(후에 장관), 협동조합 총국장, 각료회의 무역·경공업국 부의장
  • 1948–1958소련 국가은행 총재 (1954년까지 재무차관 겸임)
  • 1958–1960국가은행 제1부총재로 강등, 1960년 6월 병으로 연금 퇴직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 소볼레프

Аркад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олев

유엔헌장을 공동 기초한 소련 외교관, 냉전기 유엔의 소련 얼굴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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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외무인민위원부 사무총장
  • 1942–1945주영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45–1946소련군정청(독일) 정치국장
  • 1946–1949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
  • 1949–1950소련 외무부 유엔국장
  • 1950–1951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51–1953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53–1954소련 외무부 미주국장
  • 1954–1955소련 유엔 차석대표
  • 1955–1960소련 유엔 상임대표 겸 안전보장이사회 대표
  • 1960–1964소련 외무차관

세묜 아리예비치 코스베르크

Семён Ариевич Косберг

3단 로켓엔진으로 루나와 가가린을 우주로 밀어올린 OKB-154 수석설계자

1941년 겨울, 베르츠크의 텅 빈 엘리베이터 건물. 밤새 기초공사를 파던 지친 직원들 앞에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나타났다. 수석설계자의 목소리: "노래는 우리가 건설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네!"

슬루츠크의 유대인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야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했다. 전시에는 직접분사장치를 개발해 La-5·La-7 전투기에 독일기를 압도할 상승력과 기동성을 부여했고, 이 공로로 붉은별훈장과 조국전쟁훈장을 받았다. 전후 OKB-154(현 KБХА)를 보로네시로 옮겨 액체로켓엔진으로 전환했고, 1958년 코롤료프와 만난 지 9개월 만에 세계 최초로 우주공간에서 점화되는 3단 엔진 RD-0105를 완성해 루나 1·2·3호의 탈출속도를 실현했다. 이후 RD-0109로 가가린의 보스토크 상단을 추진했고, 그의 설계국은 R-7·소유즈·프로톤 계열 전체의 상단 엔진을 공급하는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동력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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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직접분사장치 연구
  • 1940제33공장 OKB 부수석설계자, 직접분사 설계국장
  • 1941–46OKB-154(베르츠크) 수석설계자: ASh-82FN용 NV-3U 직접분사장치, La-5·La-7·Tu-2에 탑재
  • 1946–54OKB-154 보로네시 이전, 터보제트·터보프롭 연료장치 및 액체로켓엔진 전환
  • 1958–59RD-0105 개발(9개월): 루나 1·2·3호 3단 엔진, 세계 최초 우주 점화
  • 1960레닌상 수상, 기술과학 박사학위
  • 1961RD-0109: 보스토크 3단, 가가린 궤도 진입. 사회주의노동영웅
  • 1962–65소유즈·몰니야·프로톤 상단 엔진 개발 주도

니콜라이 일리치 벨랴예프

Николай Ильич Беляев

흐루쇼프를 지킨 측근, 테미르타우로 무너지다

1959년 8월,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총성이 멈춘 뒤 벨랴예프는 브레즈네프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16명이 사망한 진압의 책임을 두고 브레즈네프는 현지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몇 달 뒤 그 책임은 정작 벨랴예프에게 돌아갔다.

시베리아 바시키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당에 입문한 후,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서시베리아에서 집단화 사업을 주도하며 당 간부로 성장했다. 알타이 지방 제1서기 시절 전후 복구와 처녀지 개간에서 보여준 성과로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아 1955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를 단호히 옹호하여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고 곧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해임되었다. 이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의 몰락은 브레즈네프의 첫 고위 인사 숙청 중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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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39서시베리아 협동조합·당 경제사업
  • 1939–43노보시비르스크 식품공업 담당 당서기
  • 1943–55알타이 지방당 제1서기
  • 1955–58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57–60정치국원 ·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 196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 후 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