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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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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국제활동 인물 110명

바츨라프 바츨라보비치 보롭스키

Вацлав Вацлавович Воровский

혁명과 외교, 문학 사이를 오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로잔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1923년 5월 10일 로잔 호텔 세실 식당. 저녁 식사 중 백계 장교 모리스 콘라디가 다가가 권총을 쏘았다. 콘라디는 웨이터에게 리볼버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전체를 망쳤다… 이것은 온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보롭스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P. 오를롭스키' 등 여러 필명으로 당 기관지에 날카로운 문학비평과 정치 팸플릿을 발표했다. 1917년 말 스칸디나비아 3국 주재 외교대표로 임명되며 혁명 러시아의 첫 외교 창구를 열었고, 1921년부터 이탈리아 전권대표로 활동하며 제노바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로잔 회담 중 백계 망명 장교에게 암살당했으며, 범인에 대한 스위스 법정의 무죄 판결은 소련-스위스 국교 단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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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혁명운동 참여, 학생 비밀 모임
  • 1897–1899체포, 뱟카 유형
  • 1900–1904제네바 망명, 《이스크라》 기고, 볼셰비키 합류(1903)
  • 1903오데사 잠입, 지하활동, 볼셰비키-폴란드 좌파 연락 담당
  • 1905–1906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언론 활동, 무기 구매, 제4차 당대회 참가
  • 1915–1916페트로그라드 지멘스-슈케르트 공장 근무
  • 1917.4스톡홀름 자граничное бюро ЦК 위원 (가네츠키·라데크와 함께)
  • 1917–1919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주재 소비에트 외교대표
  • 1919–1920귀국, 국가출판사(Госиздат) 책임자
  • 1921–1923이탈리아 주재 전권대표 겸 무역대표
  • 1922제노바 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3.5.10로잔 회담 파견 중 백계 장교 M. 콘라디에게 암살

표도르 아로노비치 로트시테인

Фёдор Аронович Ротштейн

30년 영국 망명 끝에 소비에트 최초의 페르시아 대사가 된 볼셰비키 역사가

레닌은 1920년 7월 로트시테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러시아로 오는 문제에 대해 나는 양면적인 생각이다. 당신은 런던에서의 활동에 대단히 중요하다. 추방당하게 내버려두라 ― 감히 그럴 용기가 있는지 두고 보자."

30년간 영국에서 활동한 볼셰비키 망명가. 1921년 초대 주페르시아 소비에트 대사로 차르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했고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를 설립했다. 영국 노동운동과 제국주의를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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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정치적 이유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
  • 1895–1911사회민주연맹(SDF) 가입, 1901–1906년 집행위원
  • 1901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가입, 볼셰비키 파벌 지지
  • 1911–1920영국사회당(BSP) 좌파 지도자, 반전 입장 견지; 《The Call》 기고
  • 1914–1918영국 외무성 및 전쟁성에서 러시아어 통번역관으로 근무
  • 1920영국 공산당(CPGB) 창립 기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귀국
  • 1921–1923주페르시아 RSFSR 전권대표, 소련-이란 조약 체결
  • 1923–1930외무인민위원부 collegium 위원, 《국제생활》 책임편집자
  • 1924–1925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 초대 소장
  • 1927–1945《대소비에트백과사전》 제1판 주필진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45–1946레닌 훈장(1945), 노동적기훈장(1946) 수훈

코델 헐

Cordell Hull

자유무역과 국제기구를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41년 11월 26일, 그는 일본 대사에게 「미일 간 합의의 기초로 제안된 개요」를 전달했다.

코델 헐은 미국의 자유무역과 다자적 국제질서를 설계한 민주당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그는 1930년대 무역장벽 완화와 선린정책을 추진했지만,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자주 긴장했다. 1941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정리한 11월 26일 합의안 개요를 전달했으며, 이는 전쟁 직전 외교의 마지막 문서가 되었다. 전후에는 국제연합 창설을 이끈 공로로 194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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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7테네시주 하원의원
  • 1907–192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21–1924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 1923–193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31–1933테네시주 연방 상원의원
  • 1933–1944미국 국무장관
  • 1945국제연합 샌프란시스코 회의 대표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치체린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Чичерин

혁명국가를 외교 언어로 번역한 첫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1872년 탐보프현 카라울 영지에서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1930년까지 13년간 소비에트 외교를 이끌었다. 1918년 3월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취임했으며,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뚫었다. 1923년부터 소련 외무인민위원, 1930년 병으로 물러나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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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0외무인민위원
  • 1898–1904제정 러시아 외무성 관리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여성 해방을 혁명의 의제로 만든 최초의 여성 각료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스몰니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한 때를 두고 콜론타이는 «내 생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장군 미하일 도몬토비치의 딸로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핀란드 제재소주의 딸이었다. 1917년 10월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복지인민위원으로 선출되어 세계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었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반대해 곧 사임했다. 1919년 여성부(제노트델)를 세우는 데 앞장서 여성 문맹 퇴치와 노동·가족 제도 개편을 알리는 일을 맡았고, 1920년 노동자반대파에 가담했다가 패배했다. 1922년부터 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의 외교 사절로 나가 1943년 대사로 승진했는데, 이 임무는 사실상의 유배여서 국내 정치 활동은 막혔고 1952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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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7망명, 여성 노동운동 조직
  • 1909《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출간
  • 1917–18복지인민위원: 세계 첫 여성 각료
  • 1919–22여성부(제노트델) 지도
  • 1920–21노동자반대파 참여
  • 1921팸플릿 《노동자 반대파》 발표
  • 1923–45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 공사·대사: 세계 첫 여성 공사
  • 1923《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 발표
  • 1944소련-핀란드 강화 교섭 중개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포툠킨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Потёмкин

폴란드 국가의 사망을 선언한 외교관, 교육인민위원이 되다

1939년 9월 17일 새벽 3시, 포툠킨은 폴란드 대사에게 "폴란드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읽어주었다. 소련군은 이미 국경을 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포툠킨은 교사와 지하 마르크스주의 선전원에서 출발해 외교관으로 전환, 1939년 9월 폴란드 대사에게 국가 소멸을 통보한 인물이다. 이후 러시아 교육인민위원으로 교육학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3권의 『외교사』를 편찬해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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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17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김나지움 교사, 지하 마르크스주의 선전원
  • 1919–1920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남부전선 정치국장
  • 1924–1932주이스탄불 총영사 → 주그리스 전권대표
  • 1932–1934주이탈리아 전권대표 (1933년 소련-이탈리아 우호조약 서명)
  • 1934–1937주프랑스 전권대표 (1935년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서명)
  • 1937–1940제1외무인민부위원
  • 1940–1946러시아 교육인민위원 · 교육학 아카데미 초대 총재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

Максим Максимович Литвинов

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그의 집단안보 외교를 상징하는 구호는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였다. 사료는 이 말이 나온 자리를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평화의 불가분성'을 제목으로 내세운 국제연맹 총회 연설은 1936년 7월 1일의 기록이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외교관. 1876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태어났다. 1930~1939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집단안보를 주창했고, 1939년 5월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대숙청기에 그는 숙청과 트로츠키파 탄압을 공개 지지하고 부하린·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되 처형에는 반대했다. 1940년 NKVD는 그를 비밀리에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독소전쟁 후 복무에 나가 1941~1943년 주미 대사와 쿠바 공사를 겸했고, 외무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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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외무인민위원

바실 페트로프 콜라로프

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77–1950 ○ 자연사

불가리아 공산주의의 공동 창건자, 코민테른에서 국가원수까지

1923년 9월 22일, 콜라로프는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무장봉기를 개시했다. 진압 후 잔여 대원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로 탈출, 궐석 사형 선고와 함께 22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공동 창건자이자 코민테른 서기장(1922~24). 1923년 9월 봉기를 직접 지휘했으나 실패로 22년간 소련에 망명했고, 귀국 후 국가원수와 총리를 지내며 불가리아의 스탈린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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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입당
  • 1904–1919플로브디프 테스냐키 조직 책임자
  • 1905–1923중앙위원회 위원
  • 1913–1923국민의회 의원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2–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장
  • 19239월 반파시스트 봉기 공동 지도자
  • 1928–1939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의장
  • 1931–1941국제농업연구소 소장 (모스크바)
  • 1946–1947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
  • 1947–1949부총리 겸 외무장관
  • 1949–1950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총리

생디칼리슴에서 코민테른·제4인터내셔널까지: 혁명의 한 세기를 관통한 프랑스 국제주의자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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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 1940–1947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체류 — 1947년 프랑스 귀환
  • 1953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 출간 — 알베르 카뮈 서문
  • 1960알제리 전쟁 반대 '121인 선언' 서명

히로타 고키

廣田弘毅

군부의 압력 속에서 외교와 책임 사이에 선 정치가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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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외무성 입성, 외교관 시험 수석 합격
  • 1923–1926외무성 유럽미주국장
  • 1927–1930주네덜란드 공사
  • 1930–1932주 소련 대사
  • 1933–1936외무상, 사이토·오카다 내각
  • 1936–1937내각총리대신, 외무상 겸임
  • 1937–1938제1차 고노에 내각 외무상
  • 1945말리크 대사와 접촉, 소련 중재 타진

솔로몬 아브라모비치 로조프스키

Соломон Абрамович Лозовский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78–1952 ✕ 처형

프로핀테른을 이끈 볼셰비키,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와 함께 총살되다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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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 1909–1917파리 망명, 프랑스 사회당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
  • 1918–1921전러시아 섬유노조·철도노조·모스크바 주 노조평의회 책임자
  • 1921–1937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37–1939국립문학출판사(고슬리티즈다트) 소장
  • 1939–1946소련 외무부인민위원(부장관)
  • 1941–1948소빈포름뷰로 부책임자(1941–1945), 책임자(1945–1948)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 재판, 총살

얀 돔프스키

Jan Dąbski

리가 평화를 설계한 농민운동 외교가

협상이 교착에 빠지자 돔프스키는 상대 수석대표 아돌프 이오페에게 일대일 비공개 교섭을 직접 제안했고, 그것이 막힌 국경 문제를 풀어 예비조약 체결로 이끌었다.

얀 돔프스키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독립 이후 의회 정치와 외교를 연결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의 종결 국면에서 그는 폴란드 대표단을 이끌며 전쟁 수행의 성과와 동부 국경의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리가에서 아돌프 이오페와 비공개 교섭을 벌여 1920년 10월 12일 예비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최종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농민정당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리가 체제가 남긴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분할의 문제는 그의 외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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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갈리치아 폴란드 농민당 입당
  • 1907–1913빈 의회 담당 기자·『쿠리에르 르보프스키』 공동편집자
  • 1913–1918폴란드 군사·민족위원회 활동, 폴란드 군단 복무
  • 1919–1922제헌의회 의원, 농업위원회 위원
  • 1920–1921폴란드 외무차관, 민스크·리가 평화협상 대표단 수석대표
  • 1921외무부장, 비스와프 비토스 내각
  • 1923–1931농민정당 지도자, 세임 부의장
  • 1931『리가 평화』 회고록 출간, 바르샤바에서 사망

마쓰오카 요스케

松岡洋右

제국 일본의 대륙외교를 밀어붙인 외교가

1941년 4월 모스크바를 떠날 때, 스탈린이 직접 역에 나와 그를 전송했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진출과 국제적 고립을 함께 상징한 인물이다. 그는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을 옹호하며 일본의 탈퇴를 이끌었고, 만철 총재를 거쳐 외무상이 되었다. 1941년에는 독일·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는 한편 몰로토프와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소전쟁 뒤 대소전쟁을 주장하다 실각했다. 전후 전범으로 구금되었으나 재판 중 병사해 판결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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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외무성 외교관 시험 합격, 외무성 입성
  • 1919파리강화회의 일본 대표단 수행원
  • 1922–1930남만주철도 이사, 1927년 부총재
  • 1933국제연맹 일본 대표단 수석전권대표, 일본 탈퇴 선언
  • 1935–1939남만주철도 총재
  • 1940–1941제2차 고노에 내각 외무대신, 삼국동맹 추진
  • 1941몰로토프와 일소중립조약 서명
  • 1941제3차 고노에 내각 출범과 함께 외무대신에서 물러남

월터 라이먼 브라운

Walter Lyman Brown

구호를 외교 협상으로 바꾼 실무자

1921년 8월 20일 리가 합의문에 미국구호행정의 유럽 담당 이사로 서명했다.

월터 라이먼 브라운은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구호 행정을 이끈 실무 외교가로, 허버트 후버의 미국구호행정에서 유럽 업무를 맡았다. 1921년 러시아 기근이 심화되자 그는 리가에서 막심 리트비노프와 협상해 미국구호행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기아 지역에 들어갈 조건을 마련했다. 이 합의는 인도주의적 구호를 표방했지만 미국의 반볼셰비즘과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주권이 맞물린 절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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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미국구호행정 유럽 업무 담당
  • 1921.08리가 협정 미국 측 서명자
  • 1921–1923러시아 구호 작전 유럽 조정
  • 1921.12리가 이행 협정 미국 측 서명
  • 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사업 종료 과정 참여

세라피마 일리이니치나 고프네르

Серафима Ильинична Гопнер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80–1966 ○ 자연사

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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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데사에서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시작
  • 1903RSDRP 가입, 볼셰비키 파벌에 합류
  • 1905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 이후 서기
  • 1910–16프랑스 망명: 파리 볼셰비키 그룹, 프랑스 사회당, 베른 여성 사회주의자 회의
  • 1916–17러시아 귀환, 이르쿠츠크·예카테리노슬라프·브랸스크 지하 활동, 《즈베즈다》 편집
  • 191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 1919–20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
  • 1920–25예카테리노슬라프·모스크바·도네츠크·하르키우 주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5–2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출판분과장
  • 1927–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전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 편집장, 《콤무니스트》 부편집장
  • 1928–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7개 전 대회 대표
  • 1938–45《이스토리체스키 주르날》 부편집장
  • 1945–66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1960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여

오토 빌레 쿠시넨

Otto Wille Kuusinen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핀란드 1881–1964 ○ 자연사

핀란드 노동운동에서 코민테른을 거쳐 흐루쇼프의 이론가로

1920년 2월 그의 사망설이 퍼지자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추도 연설을 했고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집회 장소를 '쿠시넨 클럽'이라 불렀지만, 그는 헬싱키에 은신한 채 살아 있었다.

핀란드 라우카아의 재봉사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11~1913년 당 의장을 지냈고, 1918년 혁명정부의 교육담당 인민위원이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해 핀란드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로 국제공산운동을 지도했다. 겨울전쟁기 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을 맡았고, 대숙청기에는 아내 아이나와 아들 에사가 탄압받는 동안에도 자유와 지위를 지켜 1937~1939년 숙청을 살아남은 극소수 코민테른 최고 간부였다. 1957년 흐루쇼프를 지지하며 CPSU 중앙위 서기 겸 상임간부회 위원이 되어 '전인민국가' 테제로 탈스탈린화를 이론화했고, 1964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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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핀란드 사회민주당 입당
  • 1905알렉산드로프 대학 철학사
  • 1908–1917핀란드 의회 의원 (SDP)
  • 1911–1913핀란드 사회민주당 의장
  • 1918핀란드 혁명정부 교육담당 인민위원
  • 1918핀란드 공산당 창립 참여
  • 1921–1939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39–1940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 겸 외무장관
  • 1940–1956카렐로-핀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40–1958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부의장
  • 1952–1953, 1957–1964CPSU 중앙위 상임간부회 위원
  • 1957–1964CPSU 중앙위 서기
  • 1959《마르크스-레닌주의 기초》 편집 책임

오시프 아로노비치 퍄트니츠키

Осип Аронович Пятницкий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리투아니아 1882–1938 ✕ 처형

코민테른 지하 배달부에서 기구의 등뼈로, 그리고 기구에 먹혔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NKVD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퍄트니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당 전체를 총살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고, 그는 6월 25일 전원회의에서 축출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깨친 구(舊) 볼셰비키. 『이스크라』의 비밀 국제 배송망을 구축한 지하운동의 명수에서, 12년간 코민테른 서기로 각국 공산당의 연락·재정·간부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의 실무 등뼈로 성장했다.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의 비상권한 부여에 공개 반대했고, 한 달 뒤 체포되어 1년간 고문 끝에 이듬해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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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이스크라』 비밀 배송망 구축, '프레이다크'로 활동
  • 1903–1908볼셰비키 합류, 오데사·모스크바 위원회 활동, 1905년 혁명 참여
  • 1914–1917체포되어 예니세이스크주 유형,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복귀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전투당센터 구성원, 철도노선 적위대 지휘
  • 1921–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ККИ) 위원
  • 1923–1935코민테른 서기 — 연락·재정·간부 배치 총괄
  • 1935–1937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행정정치부장
  • 1937.06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 비상권한 반대, 축출·체포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불가리아 (1934–1945 소련 시민권 겸유)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사망 경위 일부 미확인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념과 이상을 변호한다.” 1933년 라이프치히 법정에서 한 이 말은 내 전 생애의 내용과 의미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봉기를 이끌었고, 1933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제7차 세계대회 직후인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랐고 1943년 코민테른 해산 뒤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정보부를 이끌었다. 대숙청 시기에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 숙청과 불가리아의 옛 동료 탄압에 관여했으며 일부 구제에도 나섰다. 1945년 불가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총리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 구상은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1949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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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3서기장

도고 시게노리

東郷茂徳

전쟁을 막지 못한 종전 외교가

1945년 7월, 그는 포츠담 선언을 평화의 기초로 삼되 소련과 먼저 교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 제국의 직업 외교관으로,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종결 때 외상을 맡았다. 그는 전쟁을 피하려는 대미 협상에 참여했지만 개전을 막지 못했고, 전쟁 뒤에는 그 외교적 책임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 1945년에는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조건부 종전을 모색하는 한편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으며, 이 선택은 종전을 앞당기려는 현실 감각과 소련의 의도를 오판한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그에게 금고 20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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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외무성 입성,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 합격
  • 1933–1935외무성 구미국장
  • 1937–1938주독일 대사
  • 1938–1940주ソ 대사, 국경·중립 협상 담당
  • 1941–1942도조 내각 외무대신 겸 척무대신
  • 1945스즈키 내각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 포츠담 선언 수락 추진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 금고 20년 선고

야코프 자하로비치 수리츠

Яков Захарович Суриц

멘셰비키에서 소련 최장수 대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브라질까지, 6개국을 횡단한 혁명 외교관

1940년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1919년 이래 뚱뚱하고 수염 난 야코프 수리츠는 아프가니스탄, 터키, 독일과 국제연맹 논쟁에서 빛나는 기록을 쌓은 소련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 191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합류한 후 덴마크·아프가니스탄·노르웨이·터키·독일·프랑스·브라질 등 7개국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특히 1923년부터 11년간 터키 대사로 재임하며 아타튀르크와 긴밀히 협력,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1925)을 체결했고 앙카라에 최초의 대사관을 건립했다. 1934년 베를린 주재 대사로 부임해 나치 집권 초기 독소 경제 관계를 관리했으며, 1937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단치히 위기와 겨울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국제연맹 외교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기 소비에트 외교가 당파적 아마추어에서 전문 외교기구로 변모하는 전 과정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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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유대인 노동총동맹(분트) 가입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분파
  • 1907–1910혁명 활동으로 체포, 토볼스크현 유배
  • 1910–1917독일 망명, 하이델베르크·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법학 수학
  • 1917러시아 귀국, RSDLP(b)에 합류
  • 1918–1919덴마크 주재 소련 외교사절단 부대표
  • 1919–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아프간 조약 기초
  • 1920–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투르키스탄 위원회 위원, 중앙아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
  • 1922–1923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대표
  • 1923–1934터키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 체결 (1925), 앙카라 대사관 건립 (1926)
  • 1934불가리아와의 외교관계 수립 교섭 주도
  • 1934–1937독일 주재 소련 전권대표, 초기 나치 시대 독소 경제 관계 관리
  • 1937–1940프랑스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국제연맹 소련 대표단원
  • 1940프랑스 정부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40–1945외무인민위원부 고문, 대사급 외교관
  • 1946–1947브라질 주재 초대 소련 전권대사
  • 1948은퇴

알렉산드르 안토노비치 트로야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нтонович Трояновский

차르의 포병 장교에서 스탈린의 첫 주미 대사로: 혁명과 외교를 오간 러시아 귀족

백악관 리셉션에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트로야놉스키 씨가 달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면, 신사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믿겠습니다."

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는 1933년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후 초대 주미 소련 전권대표(대사)로 부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와의 협력 기반을 닦은 소련 외교관이다. 세습 귀족 출신이자 차르 포병 장교였던 그는 1904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가 1914년 멘셰비키로 전향, 1918년 멘셰비키 중앙위원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2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스탈린의 대외무역·외교 라인에 편입되었다. 주일 전권대표(1927~1933)를 거쳐 워싱턴에 부임한 그는 1935년 미소 무역 협정 체결을 주도했고, 스탈린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대미 협력의 필요성을 누차 건의했다. 그의 아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 또한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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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분파) 입당, 키예프 군사조직 활동
  • 1909–1910예니세이현 유형, 탈출 후 망명
  • 1914–1917멘셰비키 방위파, 망명 중 레닌·스탈린과 협력
  • 1918멘셰비키 중앙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8–1921붉은 군대 복무, 교관
  • 1923RKP(b) 입당
  • 1924–1927RSFSR 국가무역청(Gostorg) 청장,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 1927–1933주일 소련 전권대표
  • 1933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33–1938주미 소련 전권대표 — 초대 대사
  • 1939–1955고등외교학교 교수, 소비에트정보국 활동

사토 나오타케

佐藤尚武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은 마지막 주소 대사

과거의 타성으로 저항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을 속히 끝내고, 국가 멸망의 한 걸음 앞에서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 대사를 거쳐 1937년 외무대신이 되었으나 평화협조 노선을 고수하여 군부와 충돌, 석 달 만에 사임했다. 1942년 주소 대사로 부임해 종전 시까지 모스크바에 주재하며, 소련의 중재는 불가능하고 조속한 무조건 항복만이 나라를 구할 길이라고 도쿄에 거듭 경고했다. 1945년 8월 8일 크렘린에서 몰로토프로부터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았다. 전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참의원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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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외무성 입성
  • 1917–1919하얼빈 총영사
  • 1927–1930국제연맹 일본 대표
  • 1930–1937주벨기에·프랑스 대사
  • 1937.03–06외무대신
  • 1942–1945주소련 대사
  • 1945–1946소련에 억류
  • 1949–1953참의원 의장

윌리엄 시즈

William Seeds

협상의 한복판에서 소련을 오판한 영국 외교관

시즈는 몰로토프를 두고 “농민 유형의 어리석은 교활함”이 있다고 평가했다.

윌리엄 시즈는 영국 외교관으로, 여러 유럽·아메리카 공관을 거쳐 1939년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영불소 상호원조 조약을 만들려는 협상에서 영국을 대표했지만, 서방의 지연과 소련의 안보 요구가 충돌하는 과정을 냉정하게 읽어 내지는 못했다. 리트비노프의 교체 뒤 몰로토프를 경멸적으로 평가한 그의 보고는 협상 실패를 바라본 당대 영국 외교의 시야와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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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7워싱턴 주재 영국 외교공관
  • 1908–1910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관
  • 1913–1919리스본 총영사관 대리공사·총영사
  • 1928–1930라인란트 영국 고등판무관
  • 1930–1935브라질 주재 영국 대사
  • 1939–1940소련 주재 영국 대사, 모스크바 삼국동맹 협상 대표
  • 1973런던에서 사망

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이오페

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장,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싸우는 자의 항의'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제명을 '테르미도르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유서 본문은 11월 15일 밤에서 16일 사이에 쓰고 16일자로 남겼으며, 사망일은 사료에 따라 16일과 17일로 갈린다.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볼셰비키 외교관.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12년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0개월 수감 뒤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났다. 10월 봉기를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준비했고 트로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고, 주독 전권대표로 베를린에 대사관을 세웠다가 1918년 11월 추방되었다(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다). 1922–23년 주중 대표로서 1923년 쑨원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좌익반대파에 섰다. 1927년 해외 치료가 거부되자 자살로 항의했고, 사후 가족도 탄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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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멘셰비키로 혁명운동 시작, 베를린·취리히에서 의학·법학 수학
  • 1908–1912빈에서 트로츠키와 《프라우다》 발행, 아들러에게 정신분석 수학
  • 1912–1917오데사에서 체포·10개월 수감 후 시베리아로 유형,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나다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후보·서기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0월 봉기 지휘
  • 1917.11–1918.1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협상 소비에트 대표단 의장
  • 1918.4–11주독 RSFSR 전권대표, 추가조약 체결; 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 가운데 11월 추방
  • 1922–1923주중 소비에트 대표, 쑨원-이오페 선언으로 국공합작의 길을 열다
  • 1924–1925주오스트리아 소비에트 전권대표
  • 1925–1927트로츠키의 양보위원회 부위원장, 좌익반대파 활동
  • 1919–192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국고통제 인민위원·노동국방위원회 위원
  • 1920–1921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강화조약, 폴란드와 리가 조약 체결
  • 1922제노바 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일원
  • 1923–1927좌익반대파 활동, 양보위원회 부위원장, 모스크바 대학 소비에트 법학부 교수(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