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도시의 수비병들을 구하지 못한 절망에 페트로프는 권총을 들어 자결하려 했다. 장교들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그는 잠수함으로 철수한 뒤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이반 페트로프는 대조국전쟁 최대의 방어전 두 곳인 오데사(1941)와 세바스토폴(1941~1942)을 지휘한 소련군 대장이다.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로 군 경력을 쌓았고,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으로 흑해 방어전을 이끌었다.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으로 타만 반도와 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으며, 제2벨로루시·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해 카르파티아를 넘었다.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으로 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수행해 소련영웅이 되었다. 메흘리스와 스탈린에 의해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매번 재기용될 만큼 대체 불가능한 작전 능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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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알렉세옙스크 사관학교 졸업, 제156예비보병연대 반중대장(준위), 건강 악화로 제대
1918–1922적군 입대·RKP(b) 가입, 내전에서 사마라·우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제17기병사단 군정위원
1922–1940중앙아시아 군관구에서 바스마치 토벌, 제1투르키스탄 산악소총사단장, 타슈켄트 보병학교장, 소장 진급
1941.7–10제25차파예프 소총사단장 →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 오데사 방어전과 철수 지휘
1941.10–1942.7세바스토폴 방어구역 부사령관 겸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만슈타인의 3차 공세까지 250일 방어
1942.8–1943.11제44군 사령관 → 흑해집단군 사령관 →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타만 해방·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
1944.3–1945.3제33군 사령관 →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 대장 진급 후 강등, 재진급
1945.4–5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 베를린·프라하 작전, 소련영웅 수훈
1945–1958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소련군 총감찰부 제1차장, 지상군 제1부총사령관, 국방부 총감찰관
그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스타브카 보고 때마다 2~3시간씩 준비했다 — 부하 장군 시테멘코의 회고
소련군 총참모장(1945~1946)이자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초대 참모장(1955~1962). 1942년 12월 작전국장으로 기용된 이후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 이르기까지 소련군의 모든 주요 전략작전 입안을 실무적으로 지휘했다. 야전사령관이 아닌 참모장교로서 전쟁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탈린의 크렘린 집무실을 그 누구보다 자주 드나들며 직접 작전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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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제국 러시아군 소위; 남서전선에서 참전해 부상, 성 안나 훈장 수여
1919–1922붉은 군대 남북전쟁 참전: 사단 부참모장에서 여단 참모장; 시바시 도하·크림 작전
1928–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작전학부 → 참모아카데미 수료; 모스크바 군관구 참모장
1939년, NKVD는 그를 감옥 뜰로 끌어내 총성을 울렸다. 빈 총성이었다. 고문으로 이가 아홉 개 부러지고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으나 허위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 후에는 파울루스에게서 빼앗은 작은 권총을 늘 지녔다.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사베리 로코소프스키(1853~1902)는 철도 검사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는 일찍 고아가 되어 제과점과 치과 조수,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4년 8월 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 자원입대해 게오르기 십자훈장 4급을 받았고, 1917년 10월 붉은 근위대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고 1919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8월 17일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슈팔레르나야의 감옥에 1940년까지 갇혀 고문당했으나 거짓 자백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를 지휘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했으며, 소련 원수(1944)와 폴란드 원수(1949)를 겸한 유일한 인물이다. 1968년 사망했다.
후난 상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전설을 남겼고, 1927년 난창 봉기를 지휘한 뒤 제2방면군을 이끌고 대장정에 올랐다.
후난 서부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방 무장을 이끌다 국민혁명군 군장이 되었고, 1927년 8월 1일 난창 봉기의 총지휘를 맡은 직후 입당했다. 후난·후베이 서부에 근거지를 세우고 대장정에서 제2방면군을 이끌었으며 항일전쟁기 120사단장이었다. 건국 후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과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린뱌오·캉성의 공격을 받아 감금되었고 1969년 치료를 거부당한 채 사망했다. 1974년 복권되었다.
1945년 5월 9일 0시 43분 모스크바 시각,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는 소련 대표로 독일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6월 24일 붉은광장에서 승리 열병식을 주관했다.
칼루가주 스트렐콥카의 가난한 러시아 농가에서 태어나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용기병 연대 하사관까지 올랐고,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1919년 당에 입당했다.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싸웠고 1939년 할힌골에서 관동군을 포위 격파해 소련 영웅이 되었다. 1941년 1월부터 참모총장을 지내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어를 지휘했고, 1942년 8월부터 최고부사령관 대리로서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공세를 이끌었다. 1945년 5월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으나, 1946년 전리품 사건으로 오데사, 1948년 우랄로 밀려났다. 1953년 국방차관으로 복귀해 베리야 체포에 가담했고, 1955년부터 국방장관을 지내다 1974년 사망했다.
스타프카는 1942년 6월 8일 그를 해임하며 "서류 중심의 관료적 부대 관리와 부대와의 단절로 제2충격군의 통신선이 차단되어 예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고 적었다.
미하일 호진은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적군에 들어가 내전을 치렀다. 1938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9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을 거쳐, 독소전 발발 후 주코프를 따라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가 참모장과 제54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1941년 10월 주코프가 떠난 뒤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이 되어 첫 봉쇄 겨울의 방어와 티흐빈 공세를 지휘했으나, 1942년 6월 제2충격군을 포위에서 구출하지 못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제33군, 제20군 사령관 등 현장 지휘를 거쳐 전후에는 군사교육 기관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1929년, 프리마코프는 튀르크 장교 '라기브 베이'로 위장하고 아프간 군복을 입은 2천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서방은 그를 '붉은 로렌스'라 불렀다.
비탈리 프리마코프는 적군(赤軍)의 군사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붉은 카자크(Червонное казачество) 부대를 창설해 남북전쟁에서 14차례의 후방 급습과 60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에는 '라기브 베이'라는 가명으로 아프간 군복을 입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지휘하여 서방에서 '붉은 로렌스'라 불렸으며,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일본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과 함께 '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당했고, 1957년 복권되었다. 마야콥스키의 연인으로 유명한 릴리야 브릭의 세 번째 남편이기도 하다.
「그는 비행 장교들을 직접 점검했다… 오늘날 소비에트 공군이 강력한 무기로 존재하는 것은 주로 그 덕분이다」 ― 망명자 알렉산드르 바르민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붉은 군대 공군을 세계 최대의 폭격기 전력으로 키운 인물. 1931년 공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직접 비행사 자격을 취득해 거의 매일 비행했으며, 죄수들을 동원한 샤라슈카 설계국에서 폴리카르포프 I-5 전투기를 탄생시켰다.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 여덟 장군에게 사형을 구형한 특별재판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형을 주장했다. 그해 11월 라트비아 작전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간첩 혐의를 자백했고, 1938년 7월 콤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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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발미에라 사범학교에서 볼셰비키당 입당
1919–21제55소총사단 정치위원; 돈 지역 군사위원
1924–2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붉은 군대 참모부 조직 편성 근무
1926–31공군 부사령관; 1929년 카차 비행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1931–37붉은 군대 공군 사령관 겸 국방인민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 세계 최대 폭격기 전력 구축
적군 최고 사령부가 서로를 비방하던 시절, 쿠탸코프는 디벤코의 만취와 무능을 고발했다. 답장은 NKVD였다. 디벤코의 사무실에서, 디벤코의 도움으로 체포되었다.
사마라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7세부터 머슴살이로 일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차파예프 여단에 합류, 두 달 만에 정찰 소대장에서 연대장까지 올랐다. 차파예프 전사 후 25소총병사단을 이끌어 우랄 백코사크군을 격멸했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바스마치 토벌에서 적기훈장을 세 차례 수훈했다. 콤코르 계급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까지 올랐으나, 1937년 상관 디벤코와의 상호 비방전 끝에 디벤코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어 1938년 7월 28일 처형되었다. 사후 소설 『차파예프』에서 그의 이름은 '옐란'으로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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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하급 부사관으로 복무.
1917.5볼셰비키 입당. 제2차 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1918붉은 군대 입대, 차파예프 여단 합류. 73여단장으로 승진.
1919차파예프 전사 후 25소총병사단장 취임. 우랄 코사크군 격멸. 명예혁명무기 수훈.
1920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25사단 지휘. 두 번째 적기훈장.
1923–1924군사아카데미 졸업. 호레즘 집단군 사령관으로 바스마치 토벌. 세 번째 적기훈장.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가장 용맹한 적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북카프카스, 크림, 탐보프, 크론슈타트 등 모든 주요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적기훈장을 네 차례 수훈했다. 전후 군단·군관구 지휘관을 거쳐 1937년 키예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8년 1등군사령관 계급과 함께 국방제1부인민위원에 올랐다. 대숙청기에는 키예프군관구에서 자신도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으나, 같은 해 7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군사 파시스트 음모'를 자백했다. 1939년 2월 사형 판결을 받고 당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1940년 12월 고위지휘관 회의에서 파블로프는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인민의 적이 너무 많아서, 그 모두가 정말 적이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장군의 입에서 나온 보기 드문 직언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전차여단을 지휘하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고, 1937년부터 붉은군대 자동차장갑전차국장으로서 T-34 개발과 기갑 교리를 주도한 소련 기갑군의 설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로가 될 때까지 싸웠고, 붉은군대에 합류해 시베리아에서 바스마치 반란까지 진압했다. 1941년 6월 서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독일군 중앙집단군의 주공을 정면에서 맞았으나 전선은 참사로 무너졌다. 민스크 함락 후 체포되어 직무 태만으로 기소되었고, 전쟁 발발 정확히 한 달째 되던 날 총살되었다. 1957년 복권되었으며, 그가 설계를 주도한 T-34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차로 남았다.
『나는 군인들과 함께 왔고, 군인들과 함께 떠날 것이다』: 탈출용 비행기에 부상병과 군기를 싣고 자신은 포위된 채 남았다.
1차대전의 사관후보생에서 붉은 군대의 중장이 된 예프레모프는 내전 시기 장갑열차 부대를 이끌고 바쿠를 점령해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를 앞당겼다. 1941년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33군을 지휘해 나로-포민스크 돌파를 분쇄했고, 이어진 반격에서 나로-포민스크·보롭스크·베레야를 해방했다. 1942년 1월 주코프가 뱌지마로 무리한 진격을 명령하자 33군은 독일군 후방 깊숙이 포위되었고, 스탈린이 퇴각을 허락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예프레모프는 스타프카가 보낸 탈출용 비행기를 거부하고 부상병과 군기를 먼저 보낸 뒤, 1942년 4월 19일 포로를 피해 권총으로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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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7제국군 포병 사관후보생, 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1917–1920붉은 근위대 합류, 내전에서 중대·대대·연대·여단 지휘, 장갑열차로 바쿠 점령
1921–193333소총사단장, 군사고문으로 중국 파견,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소총군단장
1937–1940볼가·자바이칼·오룔·북캅카스·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1941.01–07보병총감 제1부감, 21군 사령관, 중부전선 사령관
1941.10–1942.0433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나로-포민스크 돌파 분쇄, 뱌지마 포위에서 전사
11월 17일, 공세 이틀 전, 볼스키는 직속 상관을 건너뛰어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우라누스 작전은 실패할 것이라고.
차르 군대 이등병으로 출발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한 볼스키는 1930년대 초 소련 최초의 기계화여단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4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공세 이틀 전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우라누스 작전의 실패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스탈린과의 통화 후 편지를 철회하고 공세에 참가해 포위망 최초 봉쇄 부대가 되었다. 이후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발트 해방과 동프로이센 작전을 지휘했으며, 결핵 악화로 전선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4년 1월 27일 봉쇄 완전 해제. 스탈린은 관례를 깨고 승전 축포 명령을 고보로프에게 맡겼다. 대조국전쟁에서 어떤 전선군 사령관도 받지 못한 유일한 특권이었다.
뱌트카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동원되어 제국군 포병 소위가 되었다. 내전에서 콜차크 백군에 복무하다 1919년 탈주, 블류헤르 51사단에 들어가 적군으로 전향했다. 대숙청 시기 백군 경력으로 의심받았으나 살아남았다. 독소전에서 5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를 맡아 주코프의 신임을 얻었고, 1942년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포위된 도시 방어를 체계화했다.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돌파하고 1944년 1월 완전 해방을 이뤘다. 전후 소련 방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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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7콘스탄틴 포병학교 졸업, 제국군 소위
1918–19콜차크 백군 8카마 사단 포대 장교, 중위 진급 후 탈주
1920–21블류헤르 51사단 포대장, 페레콥·카홉카 전투서 부상, 적기훈장
1933–38프룬제 사관학교·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원수 반', 포병 교관
1941.10–42.045군 사령관 — 모스크바 방어·반격
1942.04–45.05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이스크라 봉쇄 돌파, 완전 해방, 비보르크·발트 공세
예료멘코 원수는 이렇게 평했다: '자하로프는 머리는 나쁘지 않고 의지가 강하지만 끔찍한 무례자다.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사람에게 소리지르고 때로는 구타하기까지 한다.'
사라토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1세부터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1916년 징집되었다. 1917년 10월 병사들에게 연대장으로 선출된 후 적군에 합류, 동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아카데미를 마친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선군 부사령관으로 좌익 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고, 제2근위군을 이끌며 미우스 강 방어선 돌파와 세바스토폴 해방에 기여했다. 1944년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가했으나 공세 지연으로 신임을 잃고 제4근위군 사령관으로 강등되었다. 전후 남우랄·동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과 비스트렐 과정장을 지냈다. 날카로운 작전 감각과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1948년 9월 모스크바. 소련영웅 금성훈장을 단 크류코프 중장이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압수품에는 다이아몬드 208개, 레핀과 세로프의 그림 132점, 고급 승용차 3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3년 후 형량은 징역 25년.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소위까지 지낸 후 적군에 합류한 소련의 기병 지휘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2근위기병군단장으로 비스와-오데르 작전과 동포메라니아 작전을 이끌어 194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종전 후 유명 민요 가수 리디야 루슬라노바와 결혼했으나, 1948년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다.
절단 수술 후 라포포르트가 문병하자 보브시가 말했다. '지금 내 상태를 그때와 비교할 수 있겠나? 이제 나는 다리만 잃었을 뿐 사람으로 남았지만, 거기서 나는 사람이기를 그만뒀네.'
소련군 주임 내과의사(1941~1950)로서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군대 전역의 치료 체계를 조직하고 전시 내과학의 기초를 세웠다. 1948년 살해된 솔로몬 미호엘스의 사촌으로, 1953년 1월 '의사들 음모' 사건의 수괴로 타스 통신에 지목되어 체포·고문당했다. 스탈린 사후 석방되어 보트킨 병원에서 임상과 연구를 재개했으며, 말기 육종으로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병원에 머물며 죽을 때까지 일했다.
문서로 확인되는 소콜롭스키의 대표 행보는 1946~49년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로서 서베를린 봉쇄를 개시·지휘한 것이며, 스탈린은 이 조치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1897년 그로드노 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부설 학교와 네벨 사범학교를 마치고 1918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독소전쟁에서 서부방면군 참모장(1941~43)과 사령관(1943~44)을 지냈고, 오르샤·비텝스크 공세 실패로 1944년 4월 해임된 뒤 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으로 베를린 공세 준비에 참여했다. 1945년 5월 독일 무조건 항복 조인식의 소련 측 참여자였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 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서베를린 봉쇄를 지휘했다. 1952~60년 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제1차관을 지낸 뒤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방부 총감찰로 재직했고, 1962년 『군사전략』을 주편해 서방에 널리 알려졌다.
1941년 6월 23일 체포되어 9월 6일 석방되었다. 회고록에는 두 달간 "내 의사와 무관한 사정"으로 모든 일에서 배제되었다고 적었다.
러시아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열두 살에 모스크바 제철공이 되었고, 1917년 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를 조직해 서기가 되었다. 겨울전쟁에서 제7군을 지휘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고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참모총장이던 1941년 6월 23일 반소 군사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레포르토보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9월 6일 석방되었고 수사 파일은 1955년 폐기되었다. 볼호프 전선과 카렐리야 전선을 지휘하며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깼고, 1945년 제1극동전선을 이끌어 관동군을 격파했다. 1944년 원수에 올랐고 1968년 사망해 유골이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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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 조직, 서기 겸 적위대 참모장
1918–19218월부터 적군 복무, 카잔 전투에서 부상, 1921년 군사아카데미 졸업
1932–1937벨로루시·극동군관구 참모장, 1936~1937년 스페인 내전 군사고문(가명 페트로비치)
1939–19401939년 12월 9일부터 제7군 지휘, 만네르헤임 선 돌파로 소비에트연방영웅
1940–19411940년 8월부터 참모총장, 이듬해 1월 해임; 1941년 6월 체포·고문, 9월 석방
1942–1944볼호프·카렐리야 전선 사령관,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 돌파, 1944년 원수
스탈린-흐루쇼프 이행기 정보총국(GRU)을 지휘한 참모, 판문점 정전 전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1근위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샬린은 비정상적으로 일벌레였고, 정확하고 페달틱할 만큼 꼼꼼한 참모였다. 언제 사령부에 들여다봐도 그는 항상 책상 앞이었다.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도 위에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렌부르크 농민 출신으로 교원양성소를 나온 뒤 제정군 소위, 내전기 적군 중대·대대장을 거쳐 소련군 정보총국장까지 오른 상장. 1근위전차군 참모장으로 쿠르스크에서 베를린까지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종전 후 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51–1952년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복무했다. 1952–1956년과 1957–1958년 두 차례 GRU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소련 군사정보를 총괄했고, 1954년에는 주코프 원수가 서방과 접촉해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보고를 올려 군부 내 긴장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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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제정군 105보병예비연대, 빌나 군사학교 졸업 후 소위 임관, 17시베리아소총예비연대 중대장
1918–1921적군 자원입대, 공산당 입당, 내전 종군 — 오르스크 연대 중대·대대장, 여단장 대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크론시타트 진압 참가
1922–1931오르스크 현·튜멘 군관구 병무위원, '비스트렐' 과정 수료, 바시키르 자치공화국 영토관구 국장
1941년 12월, 바투틴이 작전과장 레드뇨프 대령의 즉결 처형을 명령했을 때 — 독일군이 사단 방어선을 뚫었는데 그가 잠들어 있었다는 이유로 — 쿠라소프는 바투틴의 머리 위로 모스크바에 직접 보고하여 총살 명령을 철회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적군의 해군 파견대 지휘관을 거쳐 대장까지 오른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제4충격군과 칼리닌·제1발트전선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스몰렌스크, 벨라루스, 발트 작전을 설계했고, 특히 토로페츠-홀름 공세에서 한 달도 안 되어 300㎞를 진격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에는 중부군집단 총사령관과 참모본부 군사과학 부문 부참모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작전술의 이론적 토대를 다듬었고, 두 차례에 걸쳐 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으로서 전후 세대의 고급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63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로 동독 주둔 국가인민군을 지도하며 냉전기 동맹 체제의 작전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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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러시아 제국군에 징집, 준위 학교 졸업 후 서부전선에서 소대장 복무
1918붉은 군대 입대, 발트함대 해군 파견대 지휘관으로 페트로그라드 방어전 참가
1921–1932군사교육기관 교관 복무,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벨라루스 군관구 참모
1936–1940참모본부 아카데미 수석 전술교관 → 작전국 부국장
1941–1942제4충격군 참모장 → 사령관, 토로페츠-홀름 공세 지휘
1943–1945칼리닌·제1발트전선군 참모장, 스몰렌스크·벨라루스·발트·동프로이센 작전 기획
1945년 4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과 나란히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코네프의 부대가 먼저 시내에 들어갔지만 제국의사당 게양의 영예는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그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5월 9일 프라하를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텝·제2·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며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비스와-오데르 작전, 베를린과 프라하 진격을 주도한 원수. 1944년 3월 붉은 군대 최초로 전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에 진입했고, 같은 해 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지상군 총사령관과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베리야 재판부를 이끌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지휘했고, 1957년 주코프 실각에 가담했다.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된 갈리츠키는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이 종결되어 석방되었다.
타간로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입대한 갈리츠키는 내전과 겨울전쟁을 거쳐 제11근위군 사령관으로 동프로이센 작전과 쾨니히스베르크 공략을 지휘했다.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되어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어 붉은군대에 복귀했다. 종전 직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전몰 장병을 기리는 소련 최초의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고, 1945년 4월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여러 군관구와 북부군집단을 지휘하고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2년 건강상 이유로 퇴역해 197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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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8제국군 하사관; 붉은군대 입대, 볼셰비키당 입당
1918–21내전: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중상, 철도방어 정치지도원
1922–37비스트렐 과정·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연대장·사단장, 하리코프군관구 참모장
1938–39NKVD 체포·수감, 자백 거부; 1939년 5월 복권·복직
1939–41제24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만네르헤임선 돌파, 서부특별군관구
1941–43제24소총사단·제67소총군단·제3충격군 지휘, 두 번 중상, 벨리키예루키·네벨
1943–45제11근위군 사령관 — 고로도크, 바그라티온,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필라우 함락; 소련영웅
1945–62특별·카르파티아·오데사·자캅카스군관구, 모스크바 방공권, 북부군집단 사령관; 1955년 대장 진급; 1962년 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