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기록보관소에서 레닌이 1918년 펜자에 보낸 '쿨라크 100명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하라'는 전문을 발견했을 때, 볼코고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내 마음속에서 무너진 마지막 성채였다."
소련군 심리전 총국장과 군사정치총본부 부본부장을 지낸 상장군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당 중앙위원회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연구하며 스탈린 평전 《승리와 비극》을 1978년부터 집필했다. 1983년 완성된 원고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아래 1989년 공개되어 소련 역사학에 충격을 주었다. 군사사연구소 소장으로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적 전기를 출간했고, 《지도자들》 3부작으로 러시아 연방 국가상을 사후 수상했다. 만년에는 옐친의 국방 고문과 국가두마 의원으로 공산당·KGB 문서의 대대적 비밀해제를 주도했으며, 평생의 볼셰비키 신앙을 '유토피아적 포로 상태'라고 술회하고 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그는 말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 — 군 정치기관 해체를 거부하며 사임을 택하면서.
소련군 정치기관에서 평생을 복무한 정치장교로,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어 군대 내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다. 초기에는 정치기관 쇄신을 추진했으나, 개혁이 반군 선전과 정치장교 제도 자체의 해체로 치닫자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임을 선택한 그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군 내 당 통제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마지막 총정치국장이었다.
12월 22일 아침, 그는 절친한 군의관에게 부탁해 멀쩡한 왼쪽 다리에 깁스를 감고 혁명 진압에서 빠지려 했다.
루마니아 공산군 포병장교 출신으로 1986년 국방차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22일 차우셰스쿠로부터 국방장관에 임명된 직후 군에 병영 복귀 명령을 내려 혁명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고, 12월 25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조직·집행했다. 혁명 후 국방장관과 국가경제장관을 지냈으나, 티미쇼아라 유혈 진압 책임으로 2008년 살인죄가 확정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충각 작전을 지시하며 주저하던 흑해함대 사령관에게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지낸 원자력잠수함 장교. 1962년 11월급 공격원잠 K-21 함장으로서 소련 원자력잠수함 최초의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를 성공시켜 북극 작전교범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후 델타급 전략원잠 사단장, 북방함대 사령관, 해군 총참모장을 거쳐 1985년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랐다. 재임 중 소련 해군은 전성기를 맞아 상시 200척 이상의 함정을 세계 해양에 배치했으며,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대한 충각 작전 '나발'을 승인하고 직접 책임을 졌다. 소련 해체 후 1992년 독립국가연합(CIS) 해군의 유일한 사령관을 지냈고, 퇴역 후 잠수함장 연합을 창설해 2014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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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북방함대 잠수함 부대 배치
1956–1959S-347 함장 (위스키급), 북대서양 30일 자율항해 성공
1959–1962K-21 함장 (11월급 공격원잠), 소련 최초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 수행 및 빙하작전교범 작성
1969–1972제19잠수함사단장 (델타급 전략원잠), 북방함대
1973–1974제3잠수함전단 사령관, 북방함대
1977–1981북방함대 사령관, 전략원잠의 남대서양·인도양 상시 배치 주관
1981–1985소련 해군 총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1983년 해군원수 진급
1985–1992소련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92년 2월–8월 독립국가연합(CIS) 해군 사령관
1975년 5월의 시점을 두고 사료가 갈린다. 한쪽은 5월 5일 수바나 푸마 앞에서 협력을 요구받은 때를, 다른 쪽은 5월 14일 헬리콥터로 롱티엥을 떠나며 포격이 시작된 때를 종결로 본다.
라오스 시엥쿠앙 주 농헷 출신 몽족 군인. 왕국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유일한 몽족이었다. 1960~70년대 롱티엥을 근거지로 중앙정보국이 훈련·지원한 비정규 ‘비밀군대’를 지휘하며 파테트라오와 베트남인민군에 맞섰다. 1975년 5월 공산 세력의 장악 속에 태국으로 빠져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몬태나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정착했고, 미국 몽족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1980~90년대 태국 내 난민 강제 송환 저지에 힘을 보탰다. 1981년 라오스 국가해방통일전선(네오홈) 창립에 참여했다. 2007년 미국에서 라오스 정부 전복 모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2009년 모든 연방 혐의가 취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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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1975라오스 왕국군 소장, 롱티엥 근거지의 중앙정보국 지원 ‘비밀군대’ 지휘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소말리아군을 격파한 지지가 전투를 지휘했다. 사료는 지지가 탈환 시점을 1978년 3월 4일과 3월 5일로 각각 기록한다.
아르날도 오초아 산체스(1930~1989)는 쿠바 혁명군(FAR)의 사단장이자 쿠바 공화국 영웅이었다. 카코쿰 출신으로 1958년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제2열에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싸웠고, 피그스만 침공을 막았으며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을 20여 년 지냈다. 1975년 루안다에서 FNLA에 맞섰고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 오가덴 전쟁을 지휘했다. 1984년 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89년 마약 밀매와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3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료는 둘째 이름을 토마스와 테오도미로로, 사망 당시 나이를 58~59세와 57세로 각각 기록한다.
1977년 2월 3일 그는 수도 밖에서 민병 부대에 깃발을 수여하고 있었고, 관측자들은 그 일이 목숨을 구했다고 보았다. 11월 11일 데르그 본부에서 체포돼 이튿날 총살형에 처해졌다.
에티오피아 군인으로 1974년 황제를 축출한 군사위원회 데르그의 창설 세대다. 제4사단 소령으로 데르그 부의장에 선출됐고 1975년 4월 이후 중령이 됐다. 1976년 에리트레아 전선에 보낼 수만 명의 농민 민병 모집을 맡았고 보수적·민족주의적·종교적 성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77년 2월 3일 총격에서 살아남아 제1부의장이 됐으나 같은 해 11월 12일 멩기스투의 명령으로 처형됐다.
1986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바레를 대신해 수개월간 사실상의 국가원수 역할을 맡았다.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출신 장성으로, 시아드 바레 정권의 핵심 인물이자 오가덴 전쟁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1970년부터 국방장관, 1971년부터 부통령을 맡았고, 평의회 해산 뒤 1976년 혁명사회당 창립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부서기장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당 장악을 상징했다. 1987년 쿠데타 이후 첫 총리가 되었으나, 이삭족 학살 지휘 책임으로 미국 법원에서 2100만 달러 배상 판결을 받았다.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
카레이라는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앙골라 독립 후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인민군(FAPLA)을 창설·지휘한, 네투 다음 가는 MPLA 군사 지도자였다. 1976년 10월 전원회의 뒤 그는 "MPLA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뿐"이라고 선언해 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채택을 증언했다. 1977년 니티스타 봉기 진압과 군사재판을 지휘했으나, 1979년 네투 사망 뒤 실각해 말년엔 조국의 '야만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40~50초짜리 작업을 위해 25~30킬로그램 납 갑옷을 입혔다. '우리가 석기시대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아직도 멈추지 못한다.
소련 민방위 장군이자 기술과학 박사. 체르노빌 원전 폭발 넉 달 뒤, 원격 로봇이 모두 고장 나자 정부위원회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구역의 수동 제염을 맡겼다. 그는 건물의 납 벽판을 뜯어내 급조한 방호복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3,828명이 40~90초씩 교대하며 3호기 지붕에서 200톤의 고방사능 파편을 손으로 퍼냈다. 작전 후 루이셴병으로 투병하며 두 권의 책을 썼고, 소련영웅 칭호에 추천되었으나 키예프 군관구 참모장과의 갈등 끝에 명단에서 빠졌다.
우주에서 첫 잠을 청하며 그는 교신했다. "팔과 다리만 잘 정리하면 우주 수면은 훌륭하다… 아기처럼 잤다."
소련의 우주비행사이자 군사우주 지휘관.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비행했으며, 17바퀴·25시간의 첫 장기 체류로 인간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5세의 최연소 궤도비행사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수동 조종과 영화 촬영을 수행했으며,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비행 후 스피랄 우주왕복선 계획의 조종사 훈련을 이끌었고,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부 우주수단총국(ГУКОС/УНКС)의 제1부국장으로서 군사우주체계 시험·개발을 총괄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1993~2000)을 지냈다.
“이것은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유혈 사태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1986년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구한 카자흐 당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련군 최고 직책인 총참모장까지 오른 직업군인.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카자흐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혈 사태 없이 사태를 해결했다.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군사개혁 초안을 두 차례 작성했으며, 복무 기간 단축·여단제 전환·방어적 군사 태세를 주장했으나 야조프 국방장관 및 이후 러시아 군 수뇌부와 충돌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4개월 뒤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소련군 마지막 총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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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소련군 징집, 투르키스탄 군관구 포병연대 복무
1967–1968주독 소련군 차량화소총대대장 — 프라하 인근 비행장 및 주요 거점 장악
1979–1981제28연합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1984–1987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 병력 투입 거부
1987–1988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 군사개혁 초안 작성, 야조프와 충돌 후 해임
「단 한 명의 시위자도 삽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소브차크 씨가 그루지야 파시스트들과 함께 지어낸 것입니다」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독립 요구 집회를 해산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려 21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로디오노프를 지목했으나, 명령 계통의 위쪽은 야조프 국방장관과 공화국 당 지도부로 이어져 있었고 그는 그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공개 책임을 진 인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제40군 사령관을 거쳐 1996년 러시아 국방장관에 임명됐으나 예산과 군 개혁 방향을 놓고 옐친 진영과 충돌해 10개월 만에 해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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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70오룔 기갑학교 졸업, 주독 소련군 복무, 말리놉스키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1970–1980제24 '철의' 차량화소총사단 연대장·부사단장·사단장 역임. 참모아카데미 우등 졸업
1980–1986제28군단장(체코슬로바키아), 제5군 사령관(극동),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
1986–1989모스크바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집회 해산 지휘
1989–1997참모아카데미 원장(1989~96). 러시아 국방장관(1996~97), 군 예산을 정부 개혁안에 종속시키길 거부해 해임
처형 직전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강인하게 살아라. 그리고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을 믿어라. 긍정적으로 살아라. 그리고 혁명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라."
소련 해군 3등 대위이자 정치장교(잠폴리트)로, 1975년 11월 대잠호위함 스토로제보이호에서 반란을 주도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부패와 정체를 비판하며 레닌주의 원칙으로의 복귀와 새로운 혁명을 촉구하는 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함선을 리가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게 했으나,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진압되었다. 반란은 실패했고 사블린은 반역죄로 총살형에 처해졌으나, 훗날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10월》에 영감을 준 이 사건은 체제 내부에서 제기된 가장 극적인 레닌주의적 저항 중 하나로 남았다.
1977년 5월 20~21일 MPLA 중앙위원회가 그와 니투 알베스를 분파주의 혐의로 제명했고, 5월 27일 쿠데타 미수가 뒤따랐다.
앙골라의 군인·정치가·반식민 사상가. 마르크스주의 계열이던 가족의 영향으로 의학 공부를 접고 MPLA에 들어가 루안다 지하위원회를 조직했고,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0년 1월 군사정보 임무로 포르투갈 식민군에 입대해 무기를 빼내다 체포됐다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뒤 석방됐다. 1974년 7월 룬도지 회의에서 최연소 중앙위원이 됐고, 1975년 3월 FAPLA 국가정치위원 겸 부참모장에 임명됐다. 1976년 제25차 소련공산당 대회에 니투 알베스와 함께 참석했고, 정통 공산주의 니티스타 지도부였다. 1977년 5월 제명 뒤 체포돼 처형됐다.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경보 사이렌이 울부짖었지만, 나는 '발사'라고 적힌 커다란 붉은 화면을 몇 초 동안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련 방공군 중령. 1983년 9월 26일 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에서 오코 위성이 미 본토에서 발사된 ICBM 5기를 탐지했다고 경보했으나, 1차 타격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고 지상레이더가 이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점을 근거로 오경보로 판단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시스템 오류로 처리하여 소련의 핵 보복 발사를 막았으며, 훗날 '세계를 구한 사람'으로 불렸다. 사건 후 불명예도 표창도 받지 못했고 1984년 조기 퇴역했으며, 2017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교외에서 은둔했다.
1986년 1월 13일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남예멘의 군인·정치가로 예멘사회당 정치국원과 국방장관을 지냈다.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했고 독립 뒤 군에서 성장했으며, 당 분열 뒤 압둘파타흐 이스마일을 지지하는 알투그마 계열에 섰다. 1986년 1월 13일 아덴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알리 나시르 무함마드의 경호원들이 반대파 정치국원들에게 발포했을 때 숨졌다. 그의 죽음은 뒤이은 내전의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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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대영국 식민 통치에 맞선 민족해방전선(NLF) 참여
1967 이후독립 뒤 남예멘 군에서 성장, 제22보병여단 지휘
1978예멘사회당 창당 당시 이미 당의 고위 인사
1979.08.11당내 분쟁 속에 내무장관직에서 해임
1980.10.16–1981.08.30내무장관 (사료에 따라 1980~1982년으로 기재되기도 함)
1981.08.30–1986.01.13국방장관, 1985년 2월 하이다르 알아타스 내각에서도 유임 (사료에 따라 1982년부터로 기재되기도 함)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나는 영원히 확신한다」 KAL 007 격추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입장.
우크라이나 광부의 아들로 자란 아나톨리 코르누코프는 1983년 9월 사할린 방공 지휘소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린 방공 장성이다. 상부가 책임을 거부하자 그는 오시포비치 소령에게 '목표 파괴'를 직접 지시했고, 죽을 때까지 이를 국제법과 소련법에 부합하는 정당한 명령이라 주장했다. 격추 사건으로 상도 벌도 받지 않았고 승진을 계속해 1998년 러시아 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어 공군과 방공군의 통합을 주도했다. 그 결정은 민간인 269명의 죽음과 맞물렸고, 그는 훗날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영원히 확신한다'고 말했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후 핵가방이 옐친에게 이양되던 날 샤포시니코프는 말했다: "핵버튼은 믿음직한 손에 있습니다."
소련 공군에서 30년 넘게 복무하며 전투기 조종사에서 공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직업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야조프에게 모스크바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제안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8월 26일 항공원수 계급을 받아 소련 역사상 마지막으로 '원수' 칭호가 붙은 군인 계급을 수여받은 인물이 되었다. 소련 해체 후 CIS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핵무기 통제권 이양을 감독했으며,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와 아에로플로트 사장을 거쳐 수호이에서 여생을 보냈다.
원자로 안에서 수톤의 흑연이 타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헬기로 불구덩이를 끄기로 했다.
모르드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오렌부르크 군사항공학교를 거친 정찰비행 장교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압과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아프가니스탄 상공 정찰에 모두 참전했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으로서 체르노빌 폭발 소식을 받고 즉시 현장으로 날아가, 10일간 헬기 조종사들을 이끌며 200m 상공에서 불타는 원자로에 4,925톤의 모래, 납, 붕소를 퍼부었다. 방사선에 노출된 몸으로도 퇴역하지 않고 1998년까지 복무한 뒤 통합 러시아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