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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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조직 인물 181명

베냐민 파블로비치 카잔스키

Василий Павлович Казанский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73–1922 ✕ 처형

기근 구호와 성물 수호 사이에서 교회를 이끈 수도대주교

“기근 구호를 위해 기부할 수 있지만, 성전의 성물은 건드리지 말라.”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대주교이자 페트로그라드 교구의 지도자로, 혁명 뒤 교회의 교육과 신자 공동체를 재건한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백색운동과 거리를 두면서도 국가가 교회의 자율성과 성물을 침해하는 데에는 맞섰다. 1922년 볼가 기근 때 성물이 아닌 교회 재산의 자발적 기부와 교회가 통제하는 구호를 제안했지만, 당국이 강제 몰수로 전환하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유죄 판결 뒤 처형되었고 1992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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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리가 신학교 성서학 교사
  • 1898–1899홀름 신학교 감독관
  • 1899–1902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감독관
  • 1902–1905사마라 신학교 학장
  • 1905–1910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학장
  • 1910–1917그도프 주교, 상트페테르부르크 교구 보좌
  • 1917–1922페트로그라드·그도프 수도대주교
  • 1922페트로그라드 재판 피고, 처형

옐레나 드미트리예브나 스타소바

Елена Дмитриевна Стасова

혁명 직후 당 서기국의 실무 관리자

마리야 에센이 지하 가명을 정할 때 말했다. "차라리 '정언명령'이라 부르고 싶지만 너무 기니까, 그냥 '압솔류트'로 하자." 스타소바는 그 이름대로 임무를 절대 실수하지 않는 당의 연락책이 되었다.

1898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함께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이스크라의 지하 연락책과 위조문서·무기 운반을 도맡아 '아브솔류트'(절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7년부터 중앙위 기술서기와 서기국 의장으로서 합법화된 당의 장부·연락·회의 실무를 체계화했고, 이후 코민테른 독일 담당과 MOPR 의장으로 국제 혁명가 구호 조직을 이끌었다. 초기 당 기구의 조직적 토대를 닦은 몇 안 되는 여성 중앙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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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8중앙위 기술서기, 합법화된 당 조직의 기록과 연락 실무
  • 1919중앙위 서기국 의장
  • 1921–26코민테른 독일 담당

세묜 이바노비치 발라쇼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Балашов

프룬제와 함께 첫 소비에트를 세운 이바노보 볼셰비키, 당명 '스트란니크'

1905년 5월, 발라쇼프는 자신의 아파트를 총파업 사령부로 삼아 72일간 7만 직조 노동자의 투쟁을 지휘했고, '콤파니야' 공장 노동자들은 그를 첫 소비에트 대표로 뽑았다.

농민 출신 직조공으로 1898년 RSDLP에 입당해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위원회의 핵심이 되었다. 1905년 프룬제, 아파나시예프와 함께 72일간의 총파업과 러시아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이끌었으며, 아파나시예프가 흑백파에게 살해된 뒤 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1908년 체포되어 9년간 시베리아에 유배됐다가 1917년 3월 귀환해 위원장직을 되찾고 체카에서 활동했다. 내전 후 여러 책임직을 거쳤으나, 누적된 박해와 투옥으로 쇠약해진 끝에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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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RSDLP 위원회에 입당
  • 1905프룬제·아파나시예프와 함께 총파업 지도, 첫 소비에트 대표 선출
  • 1905–1908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RSDLP 위원장, 브랸스크·모스크바에서 당 활동
  • 1908–1917체포 후 시베리아 유형
  • 1917–1918이바노보 볼셰비키 위원장·체카, 내전 전투 참전
  • 1919–1925하리코프·폴타바·모스크바에서 당 및 소비에트 직책

미하일 표도로비치 블라디미르스키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Владимирский

4반세기 동안 당의 회계를 감시한 구볼셰비키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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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 1917–191910월 봉기 모스크바당 5인 지도부 · 군사혁명위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 간부, 1919.3 중앙집행위원장 대행
  • 1922–1926우크라이나 부수상 · 국가계획위원장 · 당 중앙통제위원장 겸 노동자농민감찰 인민위원
  • 1926–1927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27–1951전연방공산당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24년간, 사망 시까지)
  • 1930–1934러시아 공화국 보건인민위원 (겸임)

알렉산드르 알렉세예비치 반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еевич Ванновский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인 1874–1967 ○ 자연사

혁명가에서 일본 문학·철학 연구자로 변모한 사상가

그는 셰익스피어를 거쳐 마르크스에서 그리스도에게로 갔다고 자신의 사상적 전환을 표현했다.

알렉산드르 반놉스키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초기 조직가이자 일본 문학과 철학을 연구한 문학연구자였다. 그는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을 대표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에 참가했고, 이후 불법 인쇄소와 군사기술 활동으로 혁명운동을 조직했다. 1912년 당을 떠난 뒤에는 혁명적 이상과 그 결과를 기독교 사상으로 성찰하며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과 일본 신화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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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모스크바 제국기술학교 학생, 혁명운동에 가담
  • 1898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 대표,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 대표
  • 1898–1900체포와 솔비체고츠크 유형
  • 1903–1905‘의지’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리빈스크와 야로슬라블의 불법 인쇄소 운영
  • 1905–1906키예프 공병 봉기와 모스크바 12월 봉기 참여, 모스크바 군사기술국 활동
  • 1910s–1960s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 강의, 일본 신화와 셰익스피어 연구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

Luis Emilio Recabarren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칠레 칠레 1876–1924 ✕ 자살

칠레 노동운동의 아버지이자 라틴아메리카 공산주의의 선구자

“독서는 노동계급 해방의 가장 훌륭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니 많이 읽기를 권한다.” — 레카바렌이 전국 노동자 모임에서 늘 되풀이한 말.

칠레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평생을 바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질산염 광산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1912년 타협적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칠레 사회주의노동자당(POS)을 창당했다. 수차례 투옥과 추방을 겪으면서도 노동자 신문을 창간·편집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계급의식을 고취했으며, 1922년 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켜 칠레 공산당으로 전환시켰다. 1924년 당내 노선 갈등과 건강 악화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닦은 조직·교육·언론의 토대는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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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칠레 민주당 입당
  • 1906토코피야 지역구 하원의원 당선 (의석 거부됨)
  • 1908–1909아르헨티나·유럽 망명
  • 1912사회주의노동자당(POS) 창당, 《엘 데스페르타르》 창간
  • 1918아르헨티나 공산당 창당 참여, 초대 전국지도부 위원
  • 1921안토파가스타 지역구 하원의원 당선
  • 1922POS를 공산당(PCCh)으로 전환, 코민테른 제4차 대회 참석
  • 1924산티아고에서 권총 자살

바실리 니콜라예비치 카유로프

Василий Николаевич Каюров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 조직자, 여성의 날 시위를 혁명으로 이끌다

2월 28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카유로프는 병사들 앞에서 "동지들이여, 한 지주를 다른 지주로 바꾸기 위해 사흘 동안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노동자의 피가 흘렀단 말인가?"라고 외쳤다.

1898년 입당한 금속노동자 출신 볼셰비키로,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에서 활동하며 1917년 2월 23일 여성 방직 노동자들의 국제 여성의 날 파업을 당 위원회의 신중론을 뒤집고 혁명적 총파업으로 전환시켰다. 2월 27일에는 무장분견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습격해 소총을 확보하고 감옥을 열어 수감된 혁명가들을 해방시켰으며 경찰서를 공격했다. 혁명 후 5군 정치부장을 거쳐 경제 행정에서 일했고, 1932년 아들과 함께 류틴의 강령을 받든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을 결성하여 스탈린에 공개적으로 맞섰다가 1936년 카자흐스탄 유형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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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5소르모보 12월 무장봉기 참가
  • 1912–17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 비밀 활동
  • 1917.022월 혁명 주도, 비보르크 구 소비에트 의장
  • 1917.07레닌을 자택에 은닉
  • 1918–20제5군 정치부장 (동부전선)
  • 1921–22시브레브콤 특별전권위원, 시비르 당 숙청위 의장
  • 1932'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체포, 3년 유형
  • 1935–36재체포, 카자흐스탄 3년 유형, 유형지에서 사망

그리고리 니키티치 바쿨렌추크

Григорий Никитич Вакуленчук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우크라이나 1877–1905 ✕ 봉기 중 사살

장교의 총탄에 쓰러져 포툠킨 반란을 촉발하고, 장례는 오데사 혁명 시위가 된 수병

「지체하는 것은 혁명을 실패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공동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

볼린 지방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898년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포툠킨함의 포병 부사관이 되었다. 1903년 RSDLP에 입당하고 세바스토폴 수병 중앙위원회(첸트랄카) 결성을 주도한 선동가로, 전함에 붉은 기를 숨겨 두고 함대 전체 봉기를 준비했다. 1905년 6월 27일 썩은 고기에 항의하는 수병들 앞에서 기량롭스키 부함장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고, 이틀 뒤 오데사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정치 시위로 전환되어 포툠킨함이 육상 포격으로 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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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흑해함대 징집
  • 1900기뢰·포술학교 졸업, 전함 포툠킨 포수 배치
  • 1903RSDLP 입당, 세바스토폴 수병 첸트랄카 결성 참여
  • 1905.06.27포툠킨 반란 중 기량롭스키 부함장에 치명상, 함상에서 사망

이반 플라토노비치 칼랴예프

Иван Платонович Каляев

폭탄을 든 혁명 시인, 마차 속 가족을 보고 폭탄을 거둔 '윤리적 테러리스트'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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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 1899학생 파업 주도로 예카테리노슬라프 유배
  • 1902베를린에서 혁명 문헌 운반 중 체포, 러시아로 송환되어 야로슬라블 유배
  • 1903제네바에서 SR 전투조직 가입 (아제프 휘하)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작전 감시팀 참여
  • 1905.2.4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세르게이 대공 폭탄 암살
  • 1905.4.5원로원 특별재판에서 전제정치 고발 연설, 사형 선고
  • 1905.5.23슐리셀부르크 요새 교수형 집행

게오르기 스테파노비치 흐루스탈료프-노사리

Георгий Степанович Носарь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77–1919 ✕ 처형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무소속 노동 변호사

흐루스탈료프는 당과 대중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빛났지만, 그 빛은 모두 반사된, 타인의 것이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 1905년 혁명의 중심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무소속이라는 점이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실질적 지도력은 트로츠키파르부스 같은 사민당 좌파가 장악했다. 1907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해 망명 생활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귀국했고, 1918년에는 고향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칭 '페레야슬라프 공화국'을 이끌다 이듬해 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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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11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 14일 만장일치 선출
  • 1905.11–1906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907시베리아 탈출, 런던 당대회 참석 후 망명
  • 1909–1914RSDLP 탈당, 파리에서 신디칼리즘·출판 활동
  • 1915–1917귀국 후 체포, 3년 카토르가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 1918–1919페레야슬라프 공화국 지도자, 반볼셰비키 활동

생디칼리슴에서 코민테른·제4인터내셔널까지: 혁명의 한 세기를 관통한 프랑스 국제주의자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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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 1940–1947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체류 — 1947년 프랑스 귀환
  • 1953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 출간 — 알베르 카뮈 서문
  • 1960알제리 전쟁 반대 '121인 선언' 서명

보그단 미르자자노비치 크누냔츠

Богдан Мирзаджанович Кнунянц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1 ○ 옥사

제2차 대회의 이스크라 다수파, 감옥에서 스러진 캅카스 볼셰비키 선구자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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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 1907–1910바쿠 지하 활동
  • 1910.09체포, 바일로프 감옥 수감

세묜 아로노비치 클리반스키

Семён Аронович Кливанский
사회운동·조직 유대인 노동자 총동맹(분트) 러시아 제국 → 소련 유대계 러시아인 1879 – 1944 이후 → 행적 미상

병사들 속에서 명령 제1호의 초안을 쓴 멘셰비키 분트 출신 지식인

1917년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그는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다.

1890년대 분트에 입당해 1905년 리가 총파업을 지휘하고 1907년 런던 당대회에 분트 대표로 참석한 유대계 사회민주주의자다. 1917년 망명에서 귀국해 멘셰비키 '방위주의자'로 활동했고,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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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분트(유대인 노동자 총동맹)에 가입
  • 1899분트 제3차 대회 대의원
  • 1905리가 총파업 지휘
  • 1907RSDRP 제5차 런던 대회 분트 대표
  • 1917.03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분과 회의에서 명령 제1호 핵심 조항 작성
  • 1917멘셰비키 '방위주의자' 신문 『덴』(День) 편집 참여
  • 1917.11제헌의회 의원 선출
  • 1918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
  • 1923OGPU 체포, 사건 종결 후 석방

아파나시 니콜라예비치 마튜셴코

Афанасий Николаевич Матюшенко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제정 러시아 신민). 사료에 따라 우크라이나인으로도 본다 1879–1907 ✕ 교수형

포툠킨 반란을 이끌고 1907년 세바스토폴에서 처형된 흑해함대 병참장

라코프스키는 1907년 회고록에서 1905년 콘스탄차에 정박한 포툠킨에 올랐을 때 마튜셴코가 자신을 맞이한 말을 전한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된 300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입니다.」 직접 인용이 아니라 라코프스키가 전한 회고다.

1879년 5월 2일 하르코프현 데르가치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1년 기근 뒤 학교를 그만두고 하르코프의 철도 급유공, 오데사 항만 노동자, 증기선 화부로 일했으며 로스토프나도누의 마르크스주의 학습회에 들어갔다. 1900년 11월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크론시타트 기뢰기관학교를 마치고 1902년 3월 건조 중이던 전함 포툠킨에 배속되었다. 1904년 11월 세바스토폴 라자레프 막사 봉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사면된 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도왔으나 당적은 갖지 않았다. 1905년 6월 14일(구력, 신력 6월 27일) 함상위원회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고, 망명 끝에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와 체포되어 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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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1징집, 흑해함대 복무
  • 1902.03전함 포툠킨 기뢰 병참장
  • 1905.06.14포툠킨 반란 주도, 함상위원회 의장 (구력 6월 14일 = 신력 6월 27일)
  • 1905.06–1907.06루마니아·스위스·미국·프랑스 망명
  • 1907.07러시아 귀국, 니콜라예프에서 체포, 세바스토폴 군사법정에서 사형 선고
  • 1907.10.20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 집행 (구력 10월 20일 = 신력 11월 2일)

지노비 야코블레비치 리트빈-세도이

Зиновий Яковлевич Литвин-Седой

프레냐 노동자 전투부대의 조직자

“우리는 투쟁을 끝낸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홀로다.”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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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혁명운동에 참가
  • 189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
  • 1905모스크바 프레냐 전투부대 지휘
  • 1906스베아보르그 수병 봉기에 참여
  • 1917–1918키예프 소비에트와 항공부대 당 조직에서 활동
  • 1919–1921군사교통 중앙관리국과 교통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1939모스크바 12월 봉기 기념 면방직 기술학교 교장
  • 1939–1947연금 생활

레옹 주오

Léon Jouhaux

31년간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한 생디칼리스트, 노벨 평화상 수상자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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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 1940–1945비시 정권의 CGT 해산 뒤 가택연금, 1943년 독일 이송·억류
  • 1947–1948공산당 주도 CGT와 재분열, 「노동자의 힘」(FO) 창립 의장
  • 1947–1954프랑스 경제이사회 의장, 1951년 노벨 평화상 수상
  • 1954.04파리에서 사망

어니스트 베빈

Ernest Bevin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영국 영국 1881–1951 ○ 자연사

노동조합에서 전후 외교로 나아간 현실주의자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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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브리스틀 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브리스틀 지부 서기
  • 1914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전국 조직가
  • 1922–1940운수·일반노동자노조 초대 전국서기장
  • 1940–1945전시 연립정부 노동·국민역무부 장관
  • 1945–1951애틀리 내각 외무장관
  • 1947조르주 비도와 유럽경제협력위원회 조직, 마셜 원조 대응 주도
  • 1949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에 기여

리디야 알렉산드로브나 포티예바

Лид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Фотиева

레닌의 개인비서, 마지막 정치투쟁의 전달자

1923년 3월 5일, 레닌은 포티예바에게 스탈린과의 관계 단절 편지를 받아쓰게 한 뒤 카메네프에게 '그루지야 문제에서 트로츠키 편에 섰다'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글랏세르는 트로츠키에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스탈린을 향한 폭탄을 준비 중입니다."

레닌의 개인비서(1918~1924)로, 1922년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를 구술받아 30년간 보관, 1956년 공개로 이끌었다. 1923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트로츠키와의 연락을 중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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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7모스크바 음악원과 베스투제프 여성고등과정 수학, 학생운동으로 페름 유형
  • 1904–1905제네바·파리 망명 중 RSDLP(b) 입당, 제1차 러시아 혁명 참가
  • 1917「프라우다」지에서 몰로토프의 보좌관,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 1918–1924V.I. 레닌 개인비서, 인민위원회의(Sovnarkom) 및 노동국방회의(STO) 서기 겸임
  • 1922–1923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 구술 필기, 그루지야 문제 자료 분석 및 레닌-트로츠키 연락 중개
  • 1918–1930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 서기 지속
  • 1938–1941중앙 V.I. 레닌 박물관 연구원
  • 1941–1945MOPR(국제혁명투사원조기구) 중앙위원회 근무
  • 1956–1975연방 등급 개인연금 수급자, 회고록 집필

아르샤코비치 카모

Симон Аршакович Тер-Петросян

볼셰비키의 전설적 무장약탈자, 광기를 연기해 사형을 네 번 피한 혁명가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티플리스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티플리스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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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03RSDLP 입당, 티플리스 위원회 청년조직 지도, 지하인쇄소 조직
  • 1903–05첫 체포 후 탈옥, 1905년 혁명 참가, 무기 밀반입
  • 1907티플리스 은행마차 습격 지휘 — 34만 루블 탈취, 레닌에게 전달
  • 1907–11베를린 체포, 3년간 광기 연기로 사형 면함,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 1912–17코조리 습격 실패 후 체포, 4건 사형선고 →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20년형
  • 1918–20캅카스·남러시아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 바쿠 봉기 준비
  • 1920–22참모아카데미 수학, 대외무역·그루지야 재무인민위원부 근무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얀손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Янсон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상한 소련 법무인민위원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열아홉 살 얀손은 아버지와 함께 겨울궁전 행진에 나섰다가 총격 속에서 아버지가 중상을 입는 장면을 목격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1905년 레벨(탈린)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후 미국 망명 시기 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을 조직했다. 1920년대 중앙통제위원회 간부로 당 숙청을 주도했으며, 1928년 톨마초프·야고다와 함께 기존 교도소 체계를 OGPU 강제수용소 모델로 전환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을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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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레벨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
  • 1907–1917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 서기 (미국)
  • 1921–1923금속노조 중앙위원회 서기
  • 1923–1927중앙통제위원회 서기
  •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28–1930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1–1934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
  • 1935–1937글라브세브모르푸티 부국장

알렉산드르 모이세예비치 샤피로

Александр Моисеевич Шапиро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82–1946 ○ 심장마비

암스테르담에서 IWA까지 국제 아니코생디칼리슴을 엮은 배후의 조직가

1921년 2월, 크로폿킨의 장례 행렬 뒤로 2만 명의 아나키스트가 모스크바 거리를 메웠다. 샤피로와 베르크만이 장례위원회를 조직했다. 소련에서 허용된 마지막 아나키스트 시위였다.

국제 아나코생디칼리즘의 핵심 연결자.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서기로서 대륙 간 네트워크를 조직했고, 혁명기 볼셰비키 정부에서 일하면서도 아나키스트 비판을 견지했다. 추방 후 베를린에서 IWA 창립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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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런던 유대인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 『아르베테르 프라인트』 그룹 회원, 주빌리 스트리트 클럽 주재
  • 1907암스테르담 국제아나키스트대회 대표; 국제사무국 서기 및 『Bulletin de l'Internationale Anarchiste』 편집
  • 1915『국제아나키스트 반전 선언』 서명; 크로폿킨의 연합국 지지와 결별
  • 1917–1920귀국 후 『골로스 트루다』 편집진; 유대인인민위원부 및 외무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크로폿킨 장례 조직; 『러시아 혁명과 공산당』 공동 집필; RILU 대회 중 정치범 석방 협상
  • 1922모스크바에서 체포, 국제적 항의로 석방된 후 소련에서 영구 추방
  • 1922–1932베를린에서 IWA 창립 주도, 사무국 서기; 『라보치 푸티』로 러시아 내 비밀 유통
  • 1932–1939바르셀로나에서 CNT-FAI 갈등 중재; 프랑스에서 『라 부아 뒤 트라바이』 편집; 1939년 뉴욕 이주
  • 1945–1946뉴욕에서 『뉴 트렌즈』 편집, 심장마비로 사망

실비아 팽크허스트

Sylvia Pankhurst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영국 영국 1882–1960 ○ 자연사

어머니의 WSPU를 떠나 이스트엔드 노동자 여성과 함께한 좌익 공산주의자

「볼셰비키는 공산주의를 저버리기 시작했다」 — 1922년 레닌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그녀는 이렇게 경고했다. 『워커스 드레드노트』를 당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CPGB에서 축출된 그녀는, 당 규율보다 자유로운 논쟁을 선택했다.

영국 참정권 운동가이자 좌익 공산주의자, 반식민 운동가. 어머니 에멀린의 WSPU와 결별하고 이스트엔드의 노동계급 여성 조직화에 헌신했으며, 레닌과 논쟁하며 평의회 공산주의로 전환한 뒤 생애 말년을 에티오피아의 반파시스트 독립 연대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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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맨체스터에서 에멀린·리처드 팽크허스트의 딸로 출생
  • 1903–1914WSPU 전임 활동가 — 로고·현수막 디자인, '블랙 프라이데이'(1910) 목격, 여성참정권 운동 전국 조직
  • 1914–1918이스트엔드참정권연맹(ELFS) 설립, 『우먼스 드레드노트』 창간 — 전쟁 반대·징병 거부, 임대료 파업·공동급식 조직
  • 1918–1920노동자사회주의연맹(WSF) 창설, 『워커스 드레드노트』 발행 —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참석, 레닌과 직접 논쟁
  • 1921–1924CPGB에서 축출,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발표 — 평의회 공산주의로 전환, 공산노동자당(CWP) 결성
  • 1935–1956『뉴 타임스 앤드 에티오피아 뉴스』 창간·편집 — 이탈리아 파시스트 침공 반대, 범아프리카·반식민지 여론 형성
  • 1956–1960에티오피아로 이주 —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고문, 최초의 교육병원 기금 모금, 『에티오피아: 문화사』 저술
  • 1960아디스아바바에서 78세로 사망 — 에티오피아 국장, 성 삼위일체 대성당 애국자 묘역 안장

소피야 시기즈문도브나 제르진스카야

Софья Сигизмундовна Дзержинская

독자적 혁명 경로를 걸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

1911년 6월 바르샤바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을 낳고, 생후 8개월 동안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04년 SDKPiL에 투신해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 혁명운동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반복된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에도 지하신문 발행과 크라쿠프 망명 조직을 계속했고, 1918년 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39~19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를 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점령 폴란드 대상 공산주의 방송 라디오 코시치우슈코를 지휘했으며, 3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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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SDKPiL 입당, 바르샤바에서 지하 혁명운동 시작
  • 1906–1911반복 체포·투옥; SDKPiL 제6차 대회 대표 (1908);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결혼 (1910);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 출산
  • 1912시베리아 유형 탈출; 크라쿠프에서 SDKPiL 해외분과 사무국 서기
  • 1918–1919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근무
  • 1922–1928로자 룩셈부르크 학교·서방 민족소수자 공산대학 교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폴란드국 선전선동부 책임비서
  • 1929–1937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겸 책임편집자
  • 1939–19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 담당
  • 1941–1946라디오 코시치우슈코 책임자; 1946년 은퇴; 회고록 『대투쟁의 시절』 출간 (1964)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책임서기에서 피고석으로 간 초기 볼셰비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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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재무인민위원
  • 1919–21책임서기, 정치국원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후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