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의 수도대주교이자 페트로그라드 교구의 지도자로, 혁명 뒤 교회의 교육과 신자 공동체를 재건한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백색운동과 거리를 두면서도 국가가 교회의 자율성과 성물을 침해하는 데에는 맞섰다. 1922년 볼가 기근 때 성물이 아닌 교회 재산의 자발적 기부와 교회가 통제하는 구호를 제안했지만, 당국이 강제 몰수로 전환하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유죄 판결 뒤 처형되었고 1992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마리야 에센이 지하 가명을 정할 때 말했다. "차라리 '정언명령'이라 부르고 싶지만 너무 기니까, 그냥 '압솔류트'로 하자." 스타소바는 그 이름대로 임무를 절대 실수하지 않는 당의 연락책이 되었다.
1898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함께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이스크라의 지하 연락책과 위조문서·무기 운반을 도맡아 '아브솔류트'(절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7년부터 중앙위 기술서기와 서기국 의장으로서 합법화된 당의 장부·연락·회의 실무를 체계화했고, 이후 코민테른 독일 담당과 MOPR 의장으로 국제 혁명가 구호 조직을 이끌었다. 초기 당 기구의 조직적 토대를 닦은 몇 안 되는 여성 중앙위원이었다.
1905년 5월, 발라쇼프는 자신의 아파트를 총파업 사령부로 삼아 72일간 7만 직조 노동자의 투쟁을 지휘했고, '콤파니야' 공장 노동자들은 그를 첫 소비에트 대표로 뽑았다.
농민 출신 직조공으로 1898년 RSDLP에 입당해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위원회의 핵심이 되었다. 1905년 프룬제, 아파나시예프와 함께 72일간의 총파업과 러시아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이끌었으며, 아파나시예프가 흑백파에게 살해된 뒤 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1908년 체포되어 9년간 시베리아에 유배됐다가 1917년 3월 귀환해 위원장직을 되찾고 체카에서 활동했다. 내전 후 여러 책임직을 거쳤으나, 누적된 박해와 투옥으로 쇠약해진 끝에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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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알렉산드르 반놉스키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초기 조직가이자 일본 문학과 철학을 연구한 문학연구자였다. 그는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을 대표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에 참가했고, 이후 불법 인쇄소와 군사기술 활동으로 혁명운동을 조직했다. 1912년 당을 떠난 뒤에는 혁명적 이상과 그 결과를 기독교 사상으로 성찰하며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과 일본 신화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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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모스크바 제국기술학교 학생, 혁명운동에 가담
1898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 대표,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 대표
1898–1900체포와 솔비체고츠크 유형
1903–1905‘의지’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리빈스크와 야로슬라블의 불법 인쇄소 운영
“독서는 노동계급 해방의 가장 훌륭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니 많이 읽기를 권한다.” — 레카바렌이 전국 노동자 모임에서 늘 되풀이한 말.
칠레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평생을 바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질산염 광산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1912년 타협적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칠레 사회주의노동자당(POS)을 창당했다. 수차례 투옥과 추방을 겪으면서도 노동자 신문을 창간·편집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계급의식을 고취했으며, 1922년 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켜 칠레 공산당으로 전환시켰다. 1924년 당내 노선 갈등과 건강 악화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닦은 조직·교육·언론의 토대는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초석이 되었다.
2월 28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카유로프는 병사들 앞에서 "동지들이여, 한 지주를 다른 지주로 바꾸기 위해 사흘 동안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노동자의 피가 흘렀단 말인가?"라고 외쳤다.
1898년 입당한 금속노동자 출신 볼셰비키로,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에서 활동하며 1917년 2월 23일 여성 방직 노동자들의 국제 여성의 날 파업을 당 위원회의 신중론을 뒤집고 혁명적 총파업으로 전환시켰다. 2월 27일에는 무장분견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습격해 소총을 확보하고 감옥을 열어 수감된 혁명가들을 해방시켰으며 경찰서를 공격했다. 혁명 후 5군 정치부장을 거쳐 경제 행정에서 일했고, 1932년 아들과 함께 류틴의 강령을 받든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을 결성하여 스탈린에 공개적으로 맞섰다가 1936년 카자흐스탄 유형지에서 죽었다.
「지체하는 것은 혁명을 실패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공동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
볼린 지방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898년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포툠킨함의 포병 부사관이 되었다. 1903년 RSDLP에 입당하고 세바스토폴 수병 중앙위원회(첸트랄카) 결성을 주도한 선동가로, 전함에 붉은 기를 숨겨 두고 함대 전체 봉기를 준비했다. 1905년 6월 27일 썩은 고기에 항의하는 수병들 앞에서 기량롭스키 부함장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고, 이틀 뒤 오데사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정치 시위로 전환되어 포툠킨함이 육상 포격으로 답하게 했다.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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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흐루스탈료프는 당과 대중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빛났지만, 그 빛은 모두 반사된, 타인의 것이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 1905년 혁명의 중심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무소속이라는 점이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실질적 지도력은 트로츠키와 파르부스 같은 사민당 좌파가 장악했다. 1907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해 망명 생활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귀국했고, 1918년에는 고향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칭 '페레야슬라프 공화국'을 이끌다 이듬해 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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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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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1917년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그는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다.
1890년대 분트에 입당해 1905년 리가 총파업을 지휘하고 1907년 런던 당대회에 분트 대표로 참석한 유대계 사회민주주의자다. 1917년 망명에서 귀국해 멘셰비키 '방위주의자'로 활동했고,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되었다.
라코프스키는 1907년 회고록에서 1905년 콘스탄차에 정박한 포툠킨에 올랐을 때 마튜셴코가 자신을 맞이한 말을 전한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된 300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입니다.」 직접 인용이 아니라 라코프스키가 전한 회고다.
1879년 5월 2일 하르코프현 데르가치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1년 기근 뒤 학교를 그만두고 하르코프의 철도 급유공, 오데사 항만 노동자, 증기선 화부로 일했으며 로스토프나도누의 마르크스주의 학습회에 들어갔다. 1900년 11월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크론시타트 기뢰기관학교를 마치고 1902년 3월 건조 중이던 전함 포툠킨에 배속되었다. 1904년 11월 세바스토폴 라자레프 막사 봉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사면된 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도왔으나 당적은 갖지 않았다. 1905년 6월 14일(구력, 신력 6월 27일) 함상위원회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고, 망명 끝에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와 체포되어 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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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1징집, 흑해함대 복무
1902.03전함 포툠킨 기뢰 병참장
1905.06.14포툠킨 반란 주도, 함상위원회 의장 (구력 6월 14일 = 신력 6월 27일)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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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티플리스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티플리스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열아홉 살 얀손은 아버지와 함께 겨울궁전 행진에 나섰다가 총격 속에서 아버지가 중상을 입는 장면을 목격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1905년 레벨(탈린)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후 미국 망명 시기 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을 조직했다. 1920년대 중앙통제위원회 간부로 당 숙청을 주도했으며, 1928년 톨마초프·야고다와 함께 기존 교도소 체계를 OGPU 강제수용소 모델로 전환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을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1911년 6월 바르샤바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을 낳고, 생후 8개월 동안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04년 SDKPiL에 투신해 로자 룩셈부르크 및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 혁명운동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반복된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에도 지하신문 발행과 크라쿠프 망명 조직을 계속했고, 1918년 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39~19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를 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점령 폴란드 대상 공산주의 방송 라디오 코시치우슈코를 지휘했으며, 3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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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SDKPiL 입당, 바르샤바에서 지하 혁명운동 시작
1906–1911반복 체포·투옥; SDKPiL 제6차 대회 대표 (1908);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결혼 (1910);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 출산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