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6월 6일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고백서를 쓰느니 차라리 사지를 찢기는 편을 택하겠다. 나 홀로 남는다 해도 쓰지 않을 것이다."
농장 그레체스키에 로티에서 태어나 17세에 농업학교로 떠났고, 1903년 포돌스크에서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한 뒤 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내전기에는 동부전선과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3년 46인 성명에 서명해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옹호 연설을 한 뒤 제명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1924년에는 레닌 묘역의 1번 초소를 창설했다. 1936년 4월 17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어 1937년 1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86년 4월 대법원이 판결을 취소하고 사후 복권했다.
「소소, 그들도 나처럼, 너처럼 늙은 볼셰비키야. 늙은 볼셰비키의 피를 흘리지 않을 거지!」 예누키제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재판에 세워 처형하려는 스탈린을 말렸다. 스탈린은 답했다. 「기억해, 아벨.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적이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바쿠 사회민주주의 조직과 코카서스 지하인쇄소 「니나」의 공동 창립자. 1918년부터 1935년까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와 소련 중앙집행위원회(TsIK) 서기로 17년간 소비에트 국가 최고 형식기관의 실무를 관장하며 연방 형성과 제도화를 뒷받침했다. 스탈린의 측근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대부였고, 개인으로서는 최초로 레닌 훈장(제3호)을 받았다. 1935년 「크렘린 사건」으로 제17차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중 처음으로 축출되었으며, 이는 대숙청의 중요한 전조가 되었다.
「나를 총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야 한다! 11군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나였다. 나는 내 민족을 배신했고, 스탈린과 베리야라는 이 변종들이 그루지야를 노예로 만들고 레닌의 당을 무릎 꿇리는 것을 도왔다」 — 1937년 NKVD 재판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캅카스 혁명운동과 내전에서 활동했다. 1922년 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스탈린의 '자치화' 계획에 반대하며 그루지야 공화국의 연방 내 주권을 주장했고, 이 갈등은 레닌이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를 비판하며 므디바니 측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출당·유배 후 복당했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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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캅카스에서 혁명활동
1918–1919제11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1920북페르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임무 수행
1921주터키 RSFSR 전권대표,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1922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연방 동의회 의장 — '그루지야 사건'에서 스탈린에 반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 치는 목동에서 시작해 스스로 공부한 이 올드 볼셰비키는, RSFSR 농업인민위원과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동시에 맡으며 집단화 직전까지 볼셰비키 농민정책의 얼굴이었다.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한 올드 볼셰비키로, 차르 치하에서 5년간 투옥과 유형을 겪었다. 1917년 보고로츠크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거쳐 내전기에는 식량인민위원부 차관으로 곡물 조달을 담당했고, 1923년부터 RSFSR 농업인민위원과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겸임하며 네프 시기 농업정책과 코민테른의 국제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1928년 중앙위 서기와 오르그뷰로 위원으로 승진해 당 지도부 핵심에 올랐으나, '스미르노프-에이스몬트-톨마초프' 반대파 그룹에 연루되어 1934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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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자, 육군대신 아라키는 이들을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높은 템포를 위해 서 있는 것이 낮은 템포를 위해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 1920년대 계획방법론 논쟁에서 유전론자들을 향한 스트루밀린의 일갈.
소련 계획경제의 지적 토대를 세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 세계 최초의 물질수지 체계를 개발하고, 노동생산성의 '스트루밀린 지수'를 정식화했으며, 초등 의무교육의 경제적 수익률을 최초로 계측했다. 1897년 혁명운동에 투신해 멘셰비키로 세 차례 체포·유배되었고, 1923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193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닌상·스탈린상 수상, 사회주의노동영웅(1967).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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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1917년 3월 16일, 미하일은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우리 위대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제헌의회가 정부 형태를 결정하여 나에게 그 권력을 부여할 때에만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아들로, 형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제위 계승 1순위에 있었으나, 평민과의 모르가나틱 결혼을 감행해 스스로 왕조의 변방으로 물러났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가 아들 대신 그에게 양위했을 때, 이튿날 그는 제헌의회가 국민 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때까지 제위 수락을 유보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사실상 끝났고, 그는 가치나로 물러나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살해되어 볼셰비키 손에 죽은 첫 로마노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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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04황태제(추정상속인), 국무회의 의원
1912나탈리야 브라소바와 모르가나틱 결혼, 모든 공직 해임과 국외 추방
1914–1916카프카스 원주민 기병사단('야생사단') 및 제2기병군단 지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1917.1–3기병 총감
1917.3.15–16니콜라이 2세의 양위로 미하일 2세로 선포됐으나 제헌의회까지 제위 수락 유보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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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주여, 군대를 구원하소서" — 1928년 4월 브뤼셀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남긴 마지막 말.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광산 기사로 출발했으나, 러일전쟁에 지원 입대하며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카우셴 전투의 기병 돌격을 이끌어 전쟁 최초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자 중 한 명이 되었고, 1917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0년 데니킨의 뒤를 이어 남러시아 백군 총사령관이 되어 '러시아군'으로 재편하고, 농민의 토지 점유를 인정하는 급진적 토지개혁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다. 적군에 패배한 뒤 14만 5천 명 이상을 크림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대규모 대피 작전을 조직했으며,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남았다.
1930년 4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은 니켈 주화를 제안한 브류하노프를 조롱하는 음란한 쪽지를 돌렸고, 메줄라우크는 매달린 인민위원의 그림을 덧붙였다. 둘 다 1938년 총살되었다.
1902년 입당한 볼셰비키. 심비르스크에서 측량 기술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와 카잔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혁명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차르 체제에서 수차례 체포·유형을 겪으며 우파에서 볼셰비키 위원회를 이끌고 우파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으며, 제7차(4월) 전러시아 회의 대의원이었다. 내전기에 대규모 곡물 징발을 조직하고 식량징발대와 징벌 원정대를 지휘했으며, 1926년 1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되었다. 1930년 10월 해임 뒤 밀려났고, 1938년 2월 3일 체포되어 9월 1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일부 참고문헌은 사망일을 1942년 6월 30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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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05학생운동으로 체포·제적, RSDLP 입당(1902), 카잔·볼로그다에서 지하 활동과 유형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 1928년 6월 15일, 재정 부인민위원 프룸킨이 정치국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이 한 문장이 우편향 탄압의 신호탄이 되었다.
1898년 분트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한 구파 혁명가로, 내전기 식량인민위원부에서 일하고 네프기에는 대외무역·재정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28년 6월, 곡물 조달을 위한 강제 조치가 한창이던 때 정치국에 보낸 편지에서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쓰며 스탈린의 농촌 정책이 노농동맹을 파탄내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 한 통의 편지로 당내 '우편향' 제1호 피의자가 되었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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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904–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1914–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1918–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저는 결백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1939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편지. 1956년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하다 1918년 9월 체카 군사부장, 이후 특별부장이 되어 북부 전선의 적색테러를 총괄했다. 아르한겔스크·볼로그다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고, 홀모고리 절멸수용소를 세웠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폐쇄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로 전환했다. 그의 아내 올가의 자매들은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와 결혼했고 아르투르 아르투조프의 어머니였다. 1921년 건강 악화로 체카를 떠난 뒤 경제·보건·스포르틴테른 등 변방 직책을 전전하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되지 못한 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트로츠키는 그를 두고 '정치가의 완전한 캐리커처였다. 오룔의 여자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는 매력적인 교사 — 그게 전부다'라고 평했다.
SR 창립자이자 우파 지도자로서,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SR 분파를 이끌었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과 예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내전기에는 통일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의 정점으로서,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11월 콜차크 쿠데타로 체포·추방되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망명 언론 활동을 했다. 그의 정치 궤적은 러시아 혁명기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장한 좌우 세력 사이에서 붕괴한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