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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블라디미르 필리포비치 트리부츠

Владимир Филиппович Трибуц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77 ○ 자연사

발트 함대의 최장기 전시 사령관, 탈린 탈출에서 쾨니히스베르크까지

1941년 8월 28일 밤, 탈린을 탈출한 발트 함대가 기뢰밭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트리부츠는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라 명했다. 그는 밤새 함교를 떠나지 않았다.

소련 해군에서 가장 오래 발트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1939–1947). 핀란드 겨울전쟁, 탈린 철수, 레닌그라드 포위전, 1944–45년 발트 공세까지 전쟁의 모든 단계에서 함대를 지휘한 유일한 함대 사령관이었다. 독소전 직전 전 함대에 전투태세를 발령해 기습 피해를 최소화했고,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는 함포와 해군 항공대로 육상 작전을 지원했다. 1941년 탈린 전환에서 지휘 과실로 상당한 손실을 냈다는 비판도 있지만, 1943년 제독으로 진급해 전후까지 함대를 이끌었다. 퇴역 후 200여 편의 해군사 저술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늘날 태평양 함대 구축함 '트리부츠 제독'에 그 이름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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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적위대·발트 해군 비행분견대 입대
  • 1918–1920볼가-카스피 소함대에서 남북전쟁 참전
  • 1926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 1926–1929전함 파리시스카야 콤무나 포탑장·당직장교
  • 1929–1932해군대학교 수학
  • 1932–1934전함 마라트 부함장
  • 1934–1937구축함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함장
  • 1937–1938발트 함대 전투훈련부장
  • 1938–1939발트 함대 참모장
  • 1939–1947발트 함대 사령관
  • 1943제독 진급 (5월 31일)
  • 1947–1948극동군 해군 담당 부사령관
  • 1949–1951해군 수로국장
  • 1952–1957보로실로프 고등군사대학 해군학부장
  • 1957–1961해군 감찰 제독
  • 1961–1977퇴역, VINITI 부문장, 200여 편 해군사 저술

이반 이바노비치 페듀닌스키

Иван Иванович Федюнин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77 ○ 자연사

할힌골 영웅에서 레닌그라드 봉쇄 해방군 사령관으로

주코프 회고: “스탈린이 나를 기계로 불러 레닌그라드 근처 군대를 지휘할 좋은 사령관을 물었을 때, 나는 서슴지 않고 페듀닌스키 장군의 이름을 댔다 …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군사 지도자이며, 뛰어난 조직가이고, 부대 지휘의 명수다.”

우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내전을 치렀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제24차량화연대를 지휘하며 일본군 후방을 돌파해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 공적으로 주코프의 눈에 띄었다. 1941년 레닌그라드 전선 부사령관으로서 도시 방어의 결정적 시기를 지휘했고, 이후 제2충격군 사령관으로 오라니옌바움 교두보에서 주공을 위장 전환하는 작전으로 1944년 레닌그라드 봉쇄를 돌파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에는 트란스코카서스 및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며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고 사망 시까지 소련 국방부 감찰고문단에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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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자원입대, 서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9제36소총사단 중대장, 중동철도 충돌 참전
  • 1939제24차량화연대장, 할힌골 전투 → 소련 영웅
  • 1941제15소총군단장; 레닌그라드 전선 부사령관 겸 제42군 사령관; 제54군 사령관
  • 1943–1944제2충격군 사령관, 오라니옌바움 교두보에서 레닌그라드 봉쇄 돌파
  • 1946–1951제7근위군 사령관
  • 1954–1957트란스코카서스 군관구 사령관
  • 1957–1965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1955년 대장 진급

니콜라이 데먀노비치 프수르체프

Николай Демьянович Псурцев

모스크바 전투 통신을 책임지고 27년간 소련 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체신장관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대일전 승리 명령에서 '프수르체프 휘하 통신부대'를 특별히 지목했다. 3년 뒤 스탈린이 그를 체신장관으로 직접 지명했다.

니콜라이 프수르체프는 1948년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소련 체신장관을 지내며 전화·전신·우편·방송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장관이다. 키예프의 러시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전신기사가 되었고, 내전기에는 제9군과 제12군의 통신을 책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서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체신장관 시절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간선과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망 '오르비타'를 건설하고 국제위성통신기구 '인테르스푸트니크' 창설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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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 군대 통신병, 제9군 및 제12군 통신국 위원
  • 1924고등군사통신학교 졸업, 시베리아 군관구 통신 부책임자
  • 1927–1930제10독립통신연대장 겸 정치위원
  • 1934군사전자공학아카데미 졸업, 적군 통신국 보좌역
  • 1936–1937국방인민위원부 통신소장
  • 1937–1939체신인민위원부 시외전화전신국장, 극동지방 전권대표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북서전선 통신부장
  • 1940–1941적군 통신국 부국장
  • 1941–1944서부방면 및 서부전선 통신부장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르제프)
  • 1944–1946적군 통신총국 제1부국장
  • 1945대일전: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국장
  • 1946–1948참모본부 통신부장
  • 1947–1948소련 체신장관 제1차관
  • 1948–1975소련 체신장관 (27년 최장수 재임)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75–1980연방급 개인연금 수급자

루이지 론고

Luigi Longo

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갈로', 코민포름의 자아비판을 겪고 톨리아티의 뒤를 이은 PCI 사무총장

1964년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PCI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론고는 '나는 두목이 아니라 서기다'라고 선언했다.

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리발디 여단을 지휘하며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전후 PCI 부서기로 톨리아티를 보좌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슈클라르스카 포렝바)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PCI 대표로 참석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격렬한 자아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PCI의 노선을 강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964년 톨리아티 사후 사무총장이 되어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노선과 모스크바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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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리보르노 대회에서 PCI 창당 참여
  • 1936–1939국제여단 총감독 (스페인 내전), 별명 '갈로'
  • 1943–1945가리발디 여단 총사령관, CVL 부사령관
  • 1945–1964PCI 부서기
  • 1947.09코민포름 창립 회의 PCI 대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 1964–1972PCI 사무총장
  • 1972–1980PCI 명예 의장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라브렌티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Лавренть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시베리아에 아카뎀고로도크를 세운 수학자이자 폭발물 응용의 개척자

대학생들 앞에서 푸앵카레가 항해 과목을 면제받은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도 몇 과목은 면제해줘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강의실 전체가 "공산당사!"를 외쳤다.

소련 수학자·유체역학자로서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원의 창립 의장을 지내며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했다. 준등각사상 이론과 유체역학에서 근본적 성과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발 물리학 연구로 성형작약탄 이론에 기여했으며 이후 통제폭파를 건설에 응용하는 분야를 개척했다. 1953~1955년 아르자마스-16 핵무기 연구소의 부과학책임자를 맡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소련 최초의 전자계산기 개발과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과학의 동진(東進)을 상징하는 인물로, 20개 연구소와 대학이 하나의 숲속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현실화한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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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수학연구소장
  •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50–1953정밀기계·계산기술연구소장
  • 1953–1955KB-11(아르자마스-16) 부과학책임자
  • 1957–1975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원 창립 의장
  • 1957–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9–1966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 교수

바실리 가브릴로비치 그라빈

Василий Гаврилович Грабин

소련 야포 설계의 거장, 속도설계 방식의 창시자

쿨리크 원수는 '네 포는 필요 없다'고 말했고, 그라빈은 '어째서입니까?'라고만 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비밀리에 ZiS-3를 양산했고, 1942년 2월 정식 채택될 때 이미 1천 문 이상이 전선에 있었다.

바실리 그라빈은 소련의 가장 중요한 포병 설계자로, 제2차 세계대전 최대 생산 화포인 ZiS-3 76.2mm 사단포(10만 3천 문 이상)를 비롯해 ZiS-2 57mm 대전차포, T-34의 주무장 F-34 전차포, BS-3 100mm 야포를 설계했다. 고리키 제92공장 수석설계자와 중앙포병설계국(TsAKB) 국장을 지내며 신형 화포 개발을 수년에서 수개월로 단축한 속도설계 방식을 확립했고, 인간공학이란 용어조차 없던 시절 포 설계에 생리학자를 참여시켰다. 설계와 생산기술을 통합한 그의 방식은 전시 화포의 컨베이어 조립과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전후 미사일 시대의 도래로 그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후기 설계 중 S-60 대공포만이 정식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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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크라스니 푸틸로베츠 공장 설계국 기술자
  • 1932GKB-38 제1부국장
  • 1933–1942고리키 제92공장 수석설계자 겸 포병설계국장
  • 1942–1946중앙포병설계국(TsAKB) 국장 겸 수석설계자
  • 1946–1957포병무장과학연구소(NII AV) 소장 겸 수석설계자
  • 1957–1959TsNII-58 소장 겸 수석설계자
  • 1960–1980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공과대학 교수

필리프 이바노비치 골리코프

Филипп Иванович Голи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정보를 쥐고도 침공을 놓친 GRU 수장, 다시 전선에서 원수로

1941년 3월 20일, 골리코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올봄 소련에 대한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소문과 문서들은 영국, 어쩌면 독일 정보기관까지 가담한 허위정보로 간주해야 한다." 94일 뒤 바르바로사가 시작되었다.

농민 출신 정치지도원으로 내전에 참전한 후 11년간 군 정치기관에서 복무하다 프룬제 사관학교를 마치고 지휘관으로 전환했다. 1940년 7월 GRU 정보총국장에 올랐으나, 1941년 봄 독일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영미의 도발적 허위정보'라고 보고해 바르바로사의 전략적 기습을 막지 못했다. 독소전에서 모스크바 반격의 10군과 브랸스크·보로네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두 차례 대공세로 적 25개 사단을 격멸했으나 그해 3월 하리코프 상실로 전선에서 물러났다. 전후 인사총국장을 거쳐 1958년 글라프PUR 총정치국장으로 흐루쇼프 시기 당의 군대 통제를 담당했고 1961년 소련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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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1적군 자원입대, '붉은 독수리' 연대에서 내전 참전, 정치지도원
  • 1921–31군 정치기관에서 선전·선동 부서장 역임, KUVNAS 졸업(1929)
  • 1931–3895연대장 → 61사단장 → 8기계화여단장 → 45기계화군단장
  • 1938–39벨로루시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빈니차 군집단·6군 사령관
  • 1939–406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과 겨울전쟁 참전
  • 1940–41부참모총장 겸 GRU 정보총국장 — 바르바로사 직전의 첩보 평가
  • 1941–42소련 군사사절단장(영·미) → 10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 →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1942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1근위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 1942–43재임명된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보로네시-카스토르나야, 하리코프 공세, 이후 해임
  • 1943–50국방인민위원부 인사총국장 · 송환 담당 전권위원(1944~)
  • 1950–56독립기계화군 사령관
  • 1956–58기갑군사아카데미 원장
  • 1958–62소련군·해군 총정치국장(글라프PUR), 1961년 소련원수 진급
  • 1962–80국방부 총감찰원, 1980년 7월 29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уй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82 ○ 자연사

「볼가 너머에 우리 땅은 없다」

1942년 9월 12일, 전임자가 도시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본 자리. "임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물음에 추이코프는 답했다. "맹세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죽거나, 지켜내겠습니다."

스탈린그라드 폐허의 제62군 사령관. 독일군과 수류탄 투척 거리에 지휘소를 두는 「포옹 전술」로 도시를 버텼고, 자신의 군대가 계획의 미끼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부대는 근위 제8군이 되어 베를린까지 걸어갔다. 유언대로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예프 언덕, 자기 병사들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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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9제62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 1943–45근위 제8군, 베를린까지
  • 1945.5.1베를린에서 독일군의 첫 항복 교섭을 접수
  • 1949–53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 1955/1960–64원수 승진, 지상군 총사령관

보리스 게오르기예비치 바자노프

Борис Георгиевич Бажанов

스탈린 비서실에서 유일하게 망명한 정치국 기록자

1923년 10월 2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트로츠키에게 자신의 후계자 역할을 제안했고, 트로츠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치국 서기 보리스 바자노프였다.

볼셰비키 당의 기술서기로,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스탈린의 개인 보좌관 겸 정치국 서기를 지내며 모든 정치국 회의의 기록을 담당했다. 레닌 사후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 정치국의 내부 작동 방식을 직접 목격했으며, 1928년 소련을 탈출한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출간해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구조와 권력 장악 과정을 서방에 최초로 폭로했다. 스탈린의 서기국에서 망명한 유일한 인물로, 그의 회고록은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내막을 전하는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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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2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화학 전공 (중퇴)
  • 1922중앙위 조직지도부 근무, 카가노비치 보좌
  • 1923중앙위원회 조직국 서기
  • 1923–1925스탈린 개인보좌관 · 정치국 서기 — 모든 정치국 회의 기록
  • 1926–1927『재정신문』 편집자, 재무인민위원부 및 체육최고위원회 근무
  • 19281월 1일 소련 탈출 — 이란 · 인도 경유 프랑스 망명
  • 1930–1980회고록 『스탈린의 전 비서의 회상』 출간 및 확대판 간행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

Karl Friedrich Otto Wolff

나치 SS의 고위 조정자이자 전쟁 말기의 협상 대표

1945년 3월 8일, 볼프는 스위스에서 앨런 덜레스와 북이탈리아 항복 조건을 논의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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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독일 제국군 제115 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서부전선 복무
  • 1931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SS 가입
  • 1935–1943SS 국가 지도자 개인참모장
  • 1943–1944이탈리아 최고 SS·경찰 지도자
  • 1944–1945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전권대장
  • 1945작전 선라이즈 독일 측 협상 대표, 북이탈리아 항복 관여
  • 1964–1969뮌헨 법원에서 유대인 30만 명 살해 방조죄로 15년형, 1969년 석방

우르호 케코넨

Urho Kekkonen
정부·행정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900–1986 ○ 자연사

중립 외교를 국가 전략으로 만든 장기 집권 대통령

1975년 헬싱키에서 35개국 정상과 대표를 맞이하며 분단된 유럽의 협상 무대를 열었다.

우르호 케코넨은 전후 핀란드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를 규정한 정치가로, 1956년부터 1981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소련과의 긴장을 관리하면서도 핀란드의 서방 경제·정치적 연결을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발전시켰다. 1972년 11월 디폴리 예비협의를 핀란드에 유치하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을 다듬은 일은 그 외교의 절정이었다. 그의 통치는 안정과 국제적 중개의 성과를 남겼지만, 대통령 권한과 동방관계에 의존한 정치가 민주적 경쟁을 좁혔다는 논쟁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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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2중앙탐정경찰청 법률가
  • 1936–1937법무부 장관
  • 1937–1939내무부 장관
  • 1950–1953핀란드 총리
  • 1954–1956핀란드 총리
  • 1956–1981핀란드 대통령
  • 1972–1975유럽안보협력회의 핀란드 개최와 중재

파벨 알렉세예비치 쿠로치킨

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Курочк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89 ○ 자연사

내전의 기병에서 아우슈비츠 해방군 사령관까지, 마지막 생존 전선 지휘관

1917년 7월 4일, 16세의 쿠로치킨은 크셰신스카야 궁전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레닌을 경비했고, 훗날 그 연설이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스몰렌스크주 고르네보 마을에서 태어나 13세부터 제과점 심부름꾼과 기관차 수리공장에서 일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무장대에서 볼셰비키 집회를 경비하다 10월에 적위대에 가담했다. 1918년 8월 적군에 입대해 기병 과정을 마치고 내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으며, 1921년에는 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1941년 7월 제20군 사령관으로 레펠 반격과 스몰렌크 포위전을 겪고 포위된 제16·제20군의 주력 돌파를 조직했으며, 이후 북서전선군 사령관으로 데먄스크 포위전을 지휘했다. 1944년부터 제60군을 이끌어 1945년 1월 27일 제322소총사단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진입했고, 1989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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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페트로그라드 적위대, 10월 혁명 참가
  • 1918–1921적군 기병 장교,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탐보프 봉기 진압 참전
  • 1932, 1940프룬제 군사아카데미·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39–1940제28소총군단장,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비보르크 차단 작전 수행
  • 1941–1942북서전선군 사령관, 토로페츠-홀름 작전·데먄스크 포위전 지휘
  • 1943–1944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부사령관,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기획
  • 1944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폴레스카야 공세 수행
  • 1944–1945제60군 사령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해방·프라하 진격
  • 1954–196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교수(1962)
  • 1968–1970바르샤바 조약군 최고사령부 동독 대표
  • 1970–1989소련 국방부 총감찰관단

일리야 그리고리예비치 스타리노프

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Стари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2000 ○ 자연사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 무선조종 지뢰와 철도 사보타주로 파르티잔전을 설계한 사보타주 기술자

1941년 11월 14일 새벽 3시 30분, 스타리노프는 보로네시에서 암호화된 무선 신호를 보냈다. 300km 떨어진 하리코프에서 독일군 사령부 건물이 R-10 지뢰와 함께 폭발해 게오르크 폰 브라운 장군이 매몰됐다.

일찍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을 거친 뒤 철도부대 공병장교로 복무하며 기폭 기술을 독학했고, 1930년대 초부터 우크라이나 군관구에서 파르티잔·사보타주 교관으로 활동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제14파르티잔군단의 사보타주 작전을 조직했고, 대조국전쟁 시기에는 무선조종 지뢰 R-10으로 하리코프 독일군 사령부를 원격 폭파했으며 중앙유격대본부의 사보타주 담당으로서 '레일 전쟁'과 '콘체르트' 작전의 기술적 토대를 설계했다. 전후에도 KGB 교육기관에서 1987년까지 사보타주 전술을 가르친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로, 그의 반열차 지뢰(PMS)와 훈련 체계는 베트남에서 라틴아메리카까지 20세기 비정규전의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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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27공병대대에서 복무
  • 1925–30키예프에서 폭파 전문가·사보타주 교관 양성
  • 1930–33우크라이나 군관구 제4부: 파르티잔 사보타주 계획 및 교관
  • 1936–37스페인 내전: 공화파 제14파르티잔군단 고문, 사보타주 작전 조직
  • 1941–42서부·남서전선 작전공병대장, 하리코프 R-10 무선지뢰 작전, 제5특수공병여단장
  • 1942–44중앙유격대본부 사보타주 보좌관, 우크라이나 유격대본부 사보타주 부본부장
  • 1944–45폴란드 유격대본부 부본부장, 유고슬라비아 소련 군사임무 참모장
  • 1956–87은퇴 후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선임연구원, KGB 장교과정에서 사보타주 전술 강의, 1984년 교수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 알릴루예바

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레닌 비서실에서 일하고 스탈린과 결혼한, 자신의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던 볼셰비키 여성

1932년 11월 8일 밤 보로실로프의 만찬에서, 스탈린이 그녀에게 오렌지 껍질을 던지며 '이봐!'라고 부르자 알릴루예바는 '나는 당신의 "이봐"가 아니에요!'라고 응수하고 자리를 떠났다.

올드 볼셰비키 가문의 막내딸로, 1917년 7월 봉기 당시 아버지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는 자택에 레닌을 은닉했고, 대부는 아벨 예누키제였다. 1918년 당 입당 후 레닌 비서실과 선동선전부에서 일했고, 1929년 산업아카데미에 입학해 합성섬유 공학을 공부하며 니키타 흐루쇼프의 당 셀 동료가 되었다. 스탈린과의 결혼은 그녀를 크렘린 중심에 두었으나, 독립적 정치 주체로 서려는 열망과 아내 역할 사이의 긴장 속에서 1932년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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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8–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비서
  • 1919–1921V.I. 레닌 비서실 근무 (리디야 포티예바 지휘 하)
  • 1921당 숙청으로 제명, 레닌의 개입으로 후보당원 복권 (1924년 정식 복권)
  • 1924–1929선동선전부 국제농업연구소 보좌관
  • 1929–1932모스크바 산업아카데미 섬유학부 학생 (합성섬유 전공), 니키타 흐루쇼프와 동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1–1938 ✕ 처형

28인의 볼셰비키를 키워낸 코민테른의 중국 전문가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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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내전 참전, 정치위원
  • 1925–1927중산대학 부총장
  • 1927–1929중국 노동자 공산대학 총장
  • 1928–1935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
  • 1930–1931코민테른 극동부 비서
  • 1935–1937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
  • 1937국제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 소장

드미트리 마트베예비치 드미트리예프

Дмитрий Матвеевич Дмитриев

'NKVD 내부 음모' 이야기를 처음 풀어놓은 스베르들롭스크 NKVD 국장

명령 제00447호가 스베르들롭스크주에 준 한도는 1범주 4천 명, 2범주 6천 명이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1일 자 그의 보고서는 작전 종료를 이렇게 명시했다. '반소비에트 분자에 대해 1만 5천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중 1번째 범주로 7500명...'

체카와 OGPU 중앙 기구에서 경력을 쌓고 1936년 여름 스베르들롭스크주 NKVD 국장이 된 체키스트로, 나우모프는 그를 류시코프, 레덴스와 함께 '북캅카스 출신자' 집단으로 분류한다. 쿨라크 작전에서 정치국의 서면 승인 없이 한도 증액을 관철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명령 제00447호가 준 한도 1만 명을 훌쩍 넘겨 1만 5천 명 유죄 판결로 작전 종료를 보고했다. 1938년 도로건설총국장으로 소환되었다가 6월 체포되었고, 10월 22일 'NKVD 내부의 공모'에 대한 상세한 진술로 공모 사건의 실을 처음 풀었으며 1939년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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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체카·OGPU 요원, 중앙 기구 근무
  • 1936–1938스베르들롭스크주 NKVD 국장
  • 1937한도 초과 집행, 1만 5천 명 유죄 판결 보고
  • 1938도로건설총국장으로 소환, 6월 체포
  • 193810월, 'NKVD 내부 공모' 진술
  • 1939총살

보리스 다비도비치 베르만

Борис Давыдович Берман

벨라루스 대숙청을 지휘한 정보장교 출신 내무인민위원

부하린 아파트 수색에 "검은 양복, 흰 셔츠, 고운 반지에 긴 새끼손톱" 차림으로 나타났다. 안나 라리나는 "마치 연회에 온 듯했다"고 남겼다.

1921년 체카에 입문해 경제·방첩 부서를 거쳐 이노(INO)로 옮겨 베를린과 로마에서 비밀 거점을 운영한 소련 정보장교였다. 1935년 이노 제1부책임자로 외국정보를 총괄했고, 1937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공화국 전역의 대숙청을 진두지휘해 8개월 만에 6만 명을 체포하고 쿠라파티 집단처형을 감독했다. 1938년 9월 NKVD 3국장으로 전보된 직후 베리야의 숙청에 휘말려 체포됐고, 1939년 2월 총살됐으며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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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3이르쿠츠크 구베르니야 체카 요원
  • 1923–1928OGPU 경제관리국 부서장
  • 1928–1931중앙아시아 OGPU 방첩·특별부서장
  • 1931–1933이노 OGPU 베를린·로마 거점장
  • 1935–1936GUGB NKVD 이노 제1부책임자
  • 1936–1937GUGB NKVD 비밀정치부 부책임자
  • 1937–1938벨라루스 SSR 내무인민위원
  • 1938NKVD 3국(수송·통신) 국장

콘스탄틴 드미트리예비치 팜필로프

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Памфил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1–194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행정가, 모스크바 대피 실패의 책임자

1942년 5월, 독일군이 소련 깊숙이 진격한 전시의 절정에서 팜필로프는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이 되었다. 1년도 채 안 되어 심부전으로 숨질 때까지, 그는 전선 너머의 민간 행정 전체를 홀로 떠맡았다.

회계사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당에 입당한 콘스탄틴 팜필로프는 남북전쟁과 크론시타트 진압을 거쳐 소비에트 행정가로 성장했다. 모스크바 주택 관리와 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을 거쳐, 독소전 발발 직후에는 소련 대피위원회 부의장으로서 민간인 소개를 지휘했으나 당·정부 간부 가족 우선 대피로 모스크바 대혼란(1941)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1942년 5월부터 이반 호흘로프의 후임으로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을 맡아 전시 행정을 총괄했으며, 재임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고, 모스크바 공공주택 아카데미는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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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볼로스트 혁명위원회 의장, 두홉시나 현 소비에트 집행위 서기, 볼로스트 당위 서기, 현 법원 서기
  •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지원자)
  • 1923스몰렌스크 노동자학교 졸업
  • 1924–192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비에트 법학부 야간과정 수학
  • 1927–1937모스크바 소비에트 근무, 모스크바 주택신탁 관리자
  • 1937–1938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부 주택총국장
  • 1938–1940러시아 공화국 공공주택 인민위원
  • 1940–1942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41.9–12소련 인민위원회의 대피위원회 부의장
  • 1942–1943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권한대행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바투틴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Ватут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1–1944 ✕ 전사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의 전략 설계자, 전선에서 쓰러진 육군대장

1942년 7월 보로네시가 위태롭던 작전회의에서 바투틴이 일어났다. "스탈린 동지! 저를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스탈린이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훗날 바투틴은 그 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그 행동은 아마도 주변에 더 적임자가 보이지 않을 때 즉시 중대 지휘를 맡겠다고 결심한 병장의 결정을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소련의 육군대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우라누스' 작전을 입안하고 쿠르스크 남측면 방어를 지휘했으며, 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해방했다. 1944년 2월 UPA 매복으로 중상, 4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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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26적군 입대, 마흐노·우크라이나군과 교전, 사병에서 중대장까지 진급
  • 1926–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참모아카데미 수료, 유명한 '원수반'에서 두각
  • 1938–41키예프 특별군관구 참모장 → 작전총국장 → 제1부참모총장
  • 1941–42북서전선군 참모장, 레닌그라드·모스크바 방어 및 반격 작전
  • 1942–43보로네시·남서전선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반격(우라누스·소토성) 주도
  • 1943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쿠르스크 남측면 방어와 벨고로드-하리코프 반격
  • 1943–44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키예프 해방·코르순 포위전·우안 우크라이나 해방

오자키 호즈미

尾崎秀実
보안·정보·치안 소속 미확정 일본 일본 1901–1944 ✕ 처형

고노에 총리의 브레인이자 모스크바를 구한 일본인 간첩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훌륭하게 죽고 싶다.

호즈미 오자키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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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7아사히 신문 기자
  • 1928–1932아사히 신문 상하이 특파원
  • 1930상하이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와 접촉
  • 1934–1941조르게 도쿄 첩보망의 핵심 정보원
  • 1937–1941쇼와연구회 연구원, 고노에 내각 자문
  • 1938–1941고노에 총리 '조찬회' 멤버
  • 1941.10조르게 사건으로 체포
  • 1944.11.7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셰르바코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Щербаков

스탈린의 전시 선전 책임자이자 모스크바 당 보스, 죽음은 「의사들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41년 10월 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20km 앞까지 진격해 시민들이 공황에 빠지자, 셰르바코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모스크바를 위해 끈질기게, 치열하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호소하며 도시의 질서를 되살렸다.

스탈린의 전시 최측근으로, 1938년부터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부터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으로서 대외선전과 국내 언론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을 겸해 군 정치교육과 사기 진작을 책임졌다.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을 당의 문학 정책 도구로 정비했다. 모스크바 당 책임자로서 전시 방공·피난·군수 생산을 조직했고, 1945년 승리 직후 43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탈린 말년 「의사들 음모」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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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 입대, 1918년 볼셰비키당 가입, 리빈스크에서 청년 조직 활동
  •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
  • 1930–1932적색교수양성소 역사-당 과정 수료, 이후 중앙위 조직지도부 및 문화선전부 근무
  • 1934–1936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 참여, 고리키 아래 조직서기로서 문학 행정 장악
  • 1936–1938레닌그라드 제2서기 → 동시베리아·이르쿠츠크 제1서기 → 스탈리노(도네츠크) 제1서기로 연쇄 이동
  • 1938–1945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 1942년 총정치국장 겸 국방부인민위원
  • 1941–1945정치국 후보위원(1941), 중앙위 서기(1941), 대장군 계급(1943), 전시 선전 및 군 정치사업 총괄
  • 19455월 10일 43세로 심장마비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Влас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1–1946 ✕ 처형

모스크바 방어전의 영웅에서 나치 협력자로 전향한 러시아 해방군 지도자

1942년 6월, 제2충격군이 포위되었을 때 사령부는 비행기로 탈출할 것을 제안했다. 블라소프는 거부하고 부하들과 함께 독일군 점령지에 숨었다가 열흘 뒤 농부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붉은 군대 중장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20군을 지휘해 '모스크바의 수호자'로 불렸으나, 1942년 류반 작전에서 포로가 된 후 나치 독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 해방군(ROA)과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KONR)의 지도자로서 반스탈린주의 민주 러시아를 표방했고, 1944년 프라하 선언을 통해 민족자결과 기본적 자유를 내건 강령을 발표했다. 나치는 그를 선전 도구로만 이용했으나, 전쟁 말기 ROA 제1사단은 프라하 봉기에 가담해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비밀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역사학과 기억 정치에서 첨예한 논쟁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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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백군·마흐노 세력과 교전
  • 1930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 1938–39중국 파견, 장제스 군사고문으로 복무
  • 1940–41제99소총사단장(최우수사단 선정), 이어 제4기계화군단장
  • 1941제37군 사령관(키예프), 제20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솔네치노고르스크 탈환
  • 1942제2충격군 사령관, 류반 작전 중 포위·포로, 나치에 협력 전향
  • 1944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KONR) 의장, 프라하 선언 발표
  • 1945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펙렌코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Фекл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1–1951 ○ 자연사

변동하는 전선에서 책임을 떠안은 기갑 지휘관

1939년 6월, 그는 모스크바에 전보를 보내 군단 지휘를 주코프에게 넘겼다고 알렸다.

니콜라이 펙렌코는 러시아 내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소련의 기갑 지휘관이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초기에 제57특별소총군단을 지휘했으나, 5월 전투의 실패 뒤 6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를 교체했다. 이후에도 기계화군단과 전차군단, 전차병과 기계화부대의 편성·훈련을 맡으며 전쟁 수행 체계의 한 축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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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군대 기병 부대 병사·소대 지휘관 보좌
  • 1922–1932정치지도원, 기병대대 지휘관 및 연대 학교장
  • 1932–1937제5기계화연대 지휘관, 기갑 과정 수료
  • 1937–1938몽골 주둔 제57특별소총군단 예하 기계화·전차여단 지휘관
  • 1938–1939제57특별소총군단 지휘관
  • 1939–1941제14중전차여단, 제15전차사단 지휘관
  • 1941–1943제19기계화군단·제38군 지휘관, 전차군단 지휘관
  • 1943–1950전차·기계화부대 편성·전투훈련 총국장 및 군관구 지휘관

루돌프 슬란스키

Rudolf Slánský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1948년 2월 쿠데타를 조직하고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실무 책임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회의에서 슬란스키는 모스크바의 권력 장악 지령을 받고 프라하로 돌아왔다. '국제 무대에서처럼 국내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했다' — 1948년 2월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1929년 KSČ 중앙위원·정치국원이 된 후 고트발트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을 이끌고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에 참가했다. 1945~1951년 서기장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해 1948년 2월 쿠데타의 실무를 지휘,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반국가 음모·트로츠키주의·티토주의·시오니즘 혐의로 사형당했으며, 이 재판은 동구권 숙청 중 가장 뚜렷한 반유대주의 성격을 띠었다. 1963년 사법 복권, 196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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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입당
  • 1924KSČ 기관지 《루데 프라보》 편집자
  • 1927–1928KSČ 오스트라바 지역당 서기
  • 1928–1929KSČ 클라드노 지역당 서기
  • 1929KSČ 중앙위원·정치국원 선출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원
  • 1939–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방송 주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45–1951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인민민병대 사령관 겸직, 2월 쿠데타 실무 지휘
  • 1951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