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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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906–1997 ○ 자연사

그리스 저항운동에 투입된 영국 공병 장교

1942년 11월 25일, 마이어스의 일행은 그리스 파르티잔 약 150명의 지원을 받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를 폭파했다.

에드먼드 마이어스는 영국 왕립공병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특수작전집행부의 그리스 군사사절단을 이끌었다. 그는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파괴 작전을 설계하고 지휘하며 ELAS와 EDES의 협력을 조정했다. 군사 목표를 수행한 그의 임무는 전후 그리스의 정치 질서와 영국의 개입 문제에 얽혔고, 그는 회고록에서 그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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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영국 왕립공병대 임관
  • 1942–1944점령 그리스 영국 군사사절단장, 특수작전집행부
  • 1942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파괴 작전 지휘
  • 1943아소포스 철교 파괴 작전 참여
  • 1944제1공수사단 왕립공병대 지휘관, 아른험 전투
  • 1955회고록 《Greek Entanglement》 출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푸자노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узан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6–1998 ○ 자연사

크림 이관을 반대했고 조용히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한 러시아 수상

김일성이 수상직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푸자노프는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김일성 본인도 수상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로 국가통제 기관에서 관료 경력을 쌓은 후 스탈린의 전후 세대교체 구상 속에서 1952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겸 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탈린 사후 간부회에서 배제되고 흐루쇼프의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이관에 반대해 1956년 강등된 후 외교관으로 전환, 조선·유고·불가리아·아프가니스탄 대사를 역임했다. 평양에서는 집단지도체제 권고를 밀어붙이지 않아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했고, 카불에서는 아민을 폭군으로 묘사한 보고로 소련의 군사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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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칸다우로보 촌소비에트 의장, 푸체시 군집행위 부의장
  • 1930플료스 농업전문학교 졸업, 세레다군 농경지과 농업기사
  • 1931–1933이바노보 주 교외농장 트러스트 부소장
  • 1934–1940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 소비에트통제위원회 근무
  • 1940–1943소련 국가통제 인민위원부 주임통제관
  • 1943–1944소련 국가통제 부인민위원
  • 1944–1946쿠이비셰프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46–1952쿠이비셰프 주당위·시당위 제1서기
  • 1952–1956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수상)
  • 1952–1953CPSU 중앙위 간부회(정치국) 후보위원
  • 1956–1957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7–1962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2–1967주유고슬라비아 소련 대사
  • 1967–1972주불가리아 소련 대사
  • 1972–1979주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
  • 1979–1980소련 외무부 중앙기구 근무
  • 1980연금 퇴직

드미트리 세르게예비치 리하초프

Дмитрий Сергеевич Лихачёв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906–1999 ○ 자연사

솔로프키를 살아남은 고대루스 문학의 세계적 권위자, 후기 소련의 도덕적 양심

1929년 가을 솔로프키. 체포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장작더미 속에 숨어 밤새 총성을 들었다. 날이 밝자 깨달았다. "내 대신 죽은 이를 위해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문헌학자·문화사가. 1928년 반혁명 활동으로 솔로프키 수용소에서 4년간 복역했다. 석방 후 푸시킨관에서 고대루스 문학을 연구했으며, 『이고리 원정기』 연구와 『고대루스 문학 기념물』 총서 편찬을 주도했다. 1970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6년 소비에트 문화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평생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사하로프 제명에 반대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인민대표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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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2반혁명 활동 혐의 체포, 솔로프키 수용소 및 벨발트라그 복역
  • 1938소련 과학아카데미 러시아문학연구소(푸시킨관) 연구원
  • 1947문헌학 박사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6–1993소비에트(러시아) 문화재단 이사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어니스트 그로스

Ernest A. Gross

유엔의 절차를 움직인 국제법률가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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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3미 국무부 법률고문
  • 1940–1943전시노동위원회 부법률고문
  • 1943–1945미 육군 민정국 경제과장
  • 1945–1949국무부 법률고문 및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보좌관
  • 1949국무부 의회관계 담당 차관보
  • 1949–1953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 차석대표, 1949–1950년 대표단장 직무대행
  • 1953–1999커티스·말레-프레보스트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59–1960티베트 망명정부 국제연합 로비스트·자문역
  • 1960년대국제사법재판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소송 제기

팜반동

Phạm Văn Đồng
정부·행정 베트남 국가기관 베트남 베트남 1906–2000 ○ 자연사

32년간 베트남을 이끈 호치민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최장수 총리

1970년대 말 팜반동은 한 방문객에게 말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1926년 광저우에서 호치민의 혁명 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 팜반동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평생을 보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말기 제네바 회담(1954) 북베트남 대표단장으로서 협정에 서명했고, 베트남 전쟁 기간 내내 북베트남의 대외적 얼굴로서 외교와 언론 대응을 주도했다. 1955년부터 1987년까지 32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전쟁 수행, 통일, 전후 사회주의 건설을 진두지휘했으나, 전시 동원형 경제 체제를 평화기에도 고수하여 경제난을 심화시켰다. 호치민이 '또 하나의 나'라고 부를 만큼 신임한 혁명가로, 보응우옌잡·레주언과 함께 베트남 현대사의 전 과정을 형성한 핵심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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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광저우에서 호치민 주관 혁명 훈련 수료,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 가입
  • 1929–1936프랑스 식민 당국에 체포되어 꼰다오 감옥에서 7년 복역
  • 1940보응우옌잡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인도차이나 공산당 입당
  • 1945–1946베트남 민주 공화국 초대 재무장관
  • 1949–1954부총리 겸 외무장관, 제네바 회담 북베트남 대표단장
  • 1955–1987북베트남 및 통일 베트남 총리 (32년)
  • 1986–1997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 고문

안드라니크 멜코노비치 페트로샨츠

Андраник Мелконович Петросьянц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906–2005 ○ 자연사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 24년간 원자력 국가위원회 이끈 창립 세대

1986년 체르노빌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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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우랄중공업기계(UZTM)에서 작업반장·기술부장·수석기사 대리 역임
  • 1939–1941중공업기계제조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1–1943전차공업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3–1945국방위원회(GKO) 전차산업 담당 부위원
  • 1947–1953소련 각료회의 제1총국 부국장 — 원자력 프로젝트
  • 1955–1962중형기계공업부 차관
  • 1962–1986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이반 이오시포비치 프로스쿠로프

Иван Иосифович Проскур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41 ✕ 처형

스탈린에게 독일 침공을 경고하고 총살당한 GRU 국장

1940년 4월 소련-핀란드 전쟁 참패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프로스쿠로프는 패배의 원인을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해석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폭격비행대를 지휘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폭격기 조종사 출신 군사정보 수장. 1939년 4월부터 1940년 7월까지 GRU(소련 군사정보국) 국장 겸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를 지냈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직후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련-핀란드 전쟁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0월 28일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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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3스탈린그라드 군사비행학교 졸업, 비행교관
  • 1936.9모스크바-하바롭스크 TB-3 기록 비행, 보로실로프로부터 금시계 수여
  • 1936–37스페인 내전 제1국제폭격비행대 지휘관, 46회 출격
  • 1937.6소련영웅 칭호 수여, 대위에서 소령으로 특진
  • 1938제2특수목적항공군 사령관, 극동 전선
  • 1939.4–1940.7GRU(제5국) 국장 겸 소련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
  • 1940.6항공 중장 진급,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에 관한 첫 경고 보고서 제출
  • 1941.6.19제7군 공군사령관 임명, 취임 전 독소전 발발

이반 다닐로비치 체르냐홉스키

Иван Данилович Чернях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45 ✕ 전사

37세에 전선을 지휘한 최연소 사령관, 승리 직전 동프로이센에서 전사하다

체르냐홉스키의 60군이 보조 공격축에서 독일 방어선을 무너뜨리자, 로코솝스키는 직접 그의 지휘소로 날아와 전선군 전체의 주공 방향을 이 구역으로 전환했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군 대장. 60군 사령관으로 쿠르스크·드네프르 돌파를 이끌었고, 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빌뉴스와 민스크를 해방했다. 1945년 2월 동프로이센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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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28오데사 보병학교 → 키예프 포병학교 졸업, VKP(b) 입당
  • 1928–3617군단 포병연대에서 소대장·포대장,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수석 졸업
  • 1938–41제9경전차연대장 → 제28전차사단장 (프리발트 특별군관구)
  • 1941–42북서전선군에서 28전차사단 지휘, 솔치·노브고로드 방어, 제18전차군단장
  • 1942–4460군 사령관 — 보로네시·쿠르스크·드네프르 도하·키예프 해방, 첫 영웅 칭호
  • 1944–45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빌뉴스·카우나스 해방, 두 번째 영웅 칭호

보구

博古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한족) 1907–1946 ✕ 추락사

코민테른 노선을 대표한 중공의 젊은 총서기이자 당 언론의 설계자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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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6상하이대학 수학, 5·30 운동 참여
  • 1926–1930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28인의 볼셰비키' 결성
  • 1931–1935중공 중앙 총서기 (중앙총책임자)
  • 1935.1쭌이 회의에서 실각, 정치국원 유임
  • 1937–1938중공 중앙 조직부장
  • 1941–1946『해방일보』 사장 겸 신화통신사 사장
  • 1946충칭 정치협상회의 중공 대표, 귀환 중 순직

아르소 라디보예프 요바노비치

Арсо Радивојев Јовановић

파르티잔 전쟁을 조직한 참모 장교

1948년 8월, 루마니아로 향하던 국경에서 그의 전쟁 경력은 망명 시도와 함께 끝났다.

아르소 요바노비치는 왕립 유고슬라비아군 출신의 교육받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의 참모총장을 맡아 작전 지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이 되었지만,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결별에서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치적 고립에 놓였다. 루마니아로 탈출하려다 국경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와 후대 증언이 엇갈려 죽음의 경위는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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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8베오그라드 왕립 군사학교 하급과정 생도
  • 1932–1934왕립 군사학교 고급과정 수학
  • 1939『보병대대 전술』 출간, 보병학교 교관·지휘관
  • 1941몬테네그로 봉기 임시 최고사령부 사령관
  • 1942–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참모총장
  • 1945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
  • 1946–1948모스크바 보로실로프 고등군사학교 유학
  • 1948인포르비로 결의 지지, 루마니아 탈출 시도 중 사망

미하일 이바노비치 로디오노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Родион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7–1950 ✕ 처형

전시 고리키를 무기고로 만든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49년 8월 13일, 로디오노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을 나서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다시 자유를 보는 일은 없었다.

고리키(現 니즈니노브고로드) 지역에서 교사와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당 기구에서 성장한 실무형 당료였다. 1940년 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가 되어 대조국전쟁 기간 주방위위원장과 국방위원회 전권위원으로서 이 지역의 군수 생산을 총괄했으며, 고리키를 소련의 주요 병기창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46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전후 재건을 이끌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표적이 되어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었고, 이듬해 '러시아 분리주의 음모'라는 조작된 혐의로 총살되었다.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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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9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6–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1–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41–1943고리키 시방위위원회 의장 · 국방위원회 전권위원 (군수 생산)
  • 1940–1946고리키 주당위 및 시당위 제1서기
  • 1939–1940고리키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39고리키 주당위 제3서기

레프 레오니도비치 (아로노비치) 시바르츠만

Лев Леонидович (Аронович) Шварцман

MGB 최악의 고문수사관, 블류헤르·바벨·메이예르홀트를 죽인 자

사형선고 후 유서에 "5발의 확산탄으로 쏴 달라. 보통 총알 한 발로는 죽지 않을 테니"라고 썼다. 고문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안겼던 자의 마지막 떨림이었다.

소련 MGB 대령, 국가보안 역사상 가장 잔혹한 수사관으로 악명 높다. 1937-38년 대숙청기 NKVD에 들어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고문 살해하고, 이삭 바벨과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를 심문했다. 전기 케이블로 그리고리 시테른의 눈을 적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1년 의사들 음모 연루로 체포, 1955년 총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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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콤소몰 가입, 키예프에서 신문 기자 활동
  • 1929모스크바로 전근, 《모스콥스키 콤소몰레츠》 근무
  • 1935NKVD 채용
  • 1938NKVD 수사관 — 블류헤르·코사레프 등 고문, 바벨·메이예르홀트 심문
  • 1941NKGB 수사부 부부장
  • 1951의사들 음모 연루로 체포
  • 1955사형판결 후 총살형

레프 일리치 루시노프

Лев Ильич Руси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07–1960 ○ 자연사

핵분열과 핵이성질체를 탐구한 실험물리학자

1935년 브로민의 방사능을 연구하던 그는 쿠르차토프 형제·미솝스키와 함께 원자핵 이성질체 현상을 발견했다.

레프 루시노프는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에서 핵물리학의 실험 기반을 넓힌 소련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1939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에서 한 번의 분열마다 둘 이상의 중성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해 연쇄반응 조건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인공 방사성 핵의 이성질체와 중성자·감마선의 상호작용을 연구했으며, 전후에는 연구용 원자로 건설과 핵물리학 연구 집단의 조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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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과대학 물리기계학부 학생
  • 1930–1944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쿠르차토프 연구실 연구자
  • 1939–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핵분열 중성자 실험 수행
  • 1944핵이성질체 연구로 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 1948실험물리학 교수
  • 1946–1960소련 원자 프로젝트 및 연구용 원자로 개발 참여
  • 1950s고중성자 특성 연구용 원자로 프로젝트 과학책임자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을 이끌어낸 중개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시티코프가 '일본 식민정치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보다도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45~50년 북조선 국가의 실질적 설계자'라고 평가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콤소몰에서 경력을 쌓고 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1938~1945)로 부상한 소련의 군사정치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고 1944년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45년 극동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북조선에 진입했다. 1945~1948년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김일성을 집권시키고 토지개혁을 설계했으며, 1948~1950년 초대 주조선 대사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 승인을 이끌어냈다. 전황 역전 후 정보 실패로 1950년 해임·강등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노브고로드·프리모리예 당서기와 주헝가리 대사를 지내고 196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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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8레닌그라드 콤소몰 → 비보르크 지구당 제1서기
  • 1938–1945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4상장 진급
  • 1945–1948북조선 소련군정 실질적 수장, 소련민정청 조직
  • 1948–1950초대 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련 대사
  • 1951–1954칼루가 주 집행위 부의장 (강등)
  • 1954–1959노브고로드 주당 → 프리모리예 변경당 제1서기
  • 1959–1960주헝가리 소련 대사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수호돌스키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Суходольский

툴라 방어전을 지휘하고 몰락한 NKVD 소장

1941년 가을, 서른넷의 수호돌스키는 자보론코프, 치무토프와 함께 툴라 시 방위위원회 3인에 올랐다. 전선의 붉은 군대가 철수한 텅 빈 도시에서, 그가 조직한 노동자 연대와 파르티잔 부대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45일간 막아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에서 복무한 장교로,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결정적 시기에 툴라 주 NKVD 국장을 맡았다. 툴라 시 방위위원회 위원으로서 노동자 대대와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하고 시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후방에서 압베어(Abwehr) 첩보망을 무력화했다. 전후 보로네시 주 MGB 국장과 불가리아 주재 소련 고문을 지냈다. 1950년 보로네시에서 발생한 청년 반스탈린 조직 'KPM' 사건을 처리한 책임으로 1957년 당에서 제명되고 소장 계급을 박탈당했으며, 사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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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1툴라 무기 공장 노동자, 라브파크 야간부 수료
  • 1931–1935모스크바 항공대학 입학 후 툴라 기계연구소 편입, 기계공학사
  • 1935–1938제173공장 기술자·선임 설계사
  • 1938–1939NKVD 중앙학교 졸업, GUGB 1국 8과 작전관
  • 1939–1940NKVD 경제총국(GEMU) 1과 부과장
  • 1940–1941에스토니아 SSR NKVD/NKGB 경제과 부과장
  • 1941.4–7툴라 주 NKGB 국장
  • 1941–1943툴라 주 NKVD 국장 겸 시 방위위원회 위원
  • 1943–1946툴라 주 NKGB/MGB 국장
  • 1946–1951보로네시 주 MGB 국장
  • 1951–1955불가리아 내무부 주재 MGB/MVD/KGB 수석 고문
  • 1956질병으로 예편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66 ○ 자연사

수용소에서 우주로. 이름조차 국가기밀이었던 설계자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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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제트추진연구그룹(GIRD) 출신으로 로켓연구소 창설 참여
  • 1938–40체포, 콜리마 금광
  • 1940–44옥중 설계국(샤라시카)에서 항공기 설계
  • 1946–57수석설계자: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7/1961스푸트니크, 보스토크(가가린) 발사
  • 1966수술 중 사망, 사후에야 실명 공개

아이작 도이처

Isaac Deutscher
학술·연구 폴란드 폴란드 1907–1967 ○ 자연사

트로츠키 3부작을 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비유대인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남기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 1965년 버클리 반전 티치인에서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냉전과 베트남전을 고발하며

폴란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하시드 경전의 신동이었다가 10대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1927년 폴란드 공산당 입당, '사회파시즘' 노선에 맞서 최초의 반스탈린 그룹을 조직해 1932년 제명되었다. 1939년 런던 망명 후 『스탈린: 정치적 전기』(1949)로 세계적 권위를 얻었고, 하버드대 트로츠키 아카이브로 3부작 『무장한 예언자』·『비무장한 예언자』·『추방된 예언자』를 완성해 정치 전기의 걸작을 남겼다. 1960년대 신좌파의 지적 스승이 되었고 1967년 로마에서 급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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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폴란드 공산당(KPP) 입당 — 지하출판 편집자
  • 1931소련 방문 — 모스크바대·민스크대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귀국
  • 1932KPP 내 최초 반스탈린 그룹 공동창설 — '사회파시즘' 노선 반대로 제명
  • 1939런던 망명 — 『이코노미스트』 소련·군사 담당 기자로 활동
  • 1946–1947저술 전념을 위해 언론계 은퇴
  • 1949『스탈린: 정치적 전기』 출간 — 세계적 소련 권위자로 부상
  • 1954–1963트로츠키 3부작 완성: 『무장한 예언자』(1954)·『비무장한 예언자』(1959)·『추방된 예언자』(1963)
  • 1965버클리 반전 티치인 연설 — 신좌파의 지적 스승으로 부상
  • 1966–1967케임브리지대 G. M. 트리벌리언 강연 — 『미완의 혁명』으로 사후 출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로보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робо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907–1967 ○ 자연사

고스플란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며 전후 복구와 코시긴 개혁 준비에 참여한 계획경제 관료

1944년 봄, 해방된 소련 영토의 공장·철도·주택을 목록화하고 복구 우선순위를 매기는 고스플란 특별부서가 신설되자, 코로보프가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소련 계획경제의 중추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경제관료로, 고스플란 내부에서 실무자에서 부의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방지역 경제복구를 담당하는 고스플란 부서를 이끌었고, 전후에는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으로서 흐루쇼프 시기 경제개혁 논의에 참여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소련 각료로 재임하며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 준비 작업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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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51고스플란에서 그룹장, 부서차장, 부서장, 국장 역임
  • 1951–1953고스플란 부의장, 소련 각료회의 의장 보좌관
  • 1953–1958소련 각료회의 사무국장
  • 1958–1960소련 재무부 차관
  • 1960–1963국가경제위원회 부의장, 고스플란 종합계획부장
  • 1963–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소련 각료

린뱌오

林彪
군사·지휘 중국 중국 1907–1971 ✕ 추락사

마오의 후계자였던 군사 천재, 중국 내전을 승리로 이끈 10대 원수

대중이 자신을 '마오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여긴다는 말에 린뱌오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아무 재능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마오 주석에게서 배운 것이다.'

린뱌오는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지휘관 중 한 명으로, 만주에서 랴오선·핑진 전역을 지휘해 국민당 주력을 섬멸하고 인민해방군을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1955년 10대 원수 중 3위로 서열되었으며,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주도하고 문화대혁명을 적극 추진했다. 1966년 당의 유일한 부주석으로 마오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되어 최고 권력에 근접했으나, 1970년대 초 마오와의 갈등 속에 실각했다. 1971년 9월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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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황푸군관학교 입학, 중국 공산당 입당
  • 1932홍군 제1군단장
  • 1937팔로군 115사단장 — 핑싱관 대첩 승리
  • 1948–1949동북야전군 사령관, 랴오선·핑진 전역 승리로 베이징 입성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제3위)
  • 1959국방부장 — 마오쩌둥 개인숭배와 인민해방군 정치화 주도
  • 1966–1971당 중앙위원회 유일 부주석,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

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

Павел Михайлович Фитин

예조프시나의 폐허에서 해외정보국을 재건하고 원자폭탄을 훔친 사내

«전쟁 전 몇 년 동안 해외에 약 40개의 거점을 꾸리고 200명 이상의 첩보원을 파견했으며, 다수의 직업 체키스트를 비합법 공작에 투입했다. 이는 즉각 성과로 나타났다.» — 파벨 피틴, 회고록에서, 예조프시나로 초토화된 해외정보국을 2년 만에 재건한 성과에 대해

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은 1939년 31세로 소련 해외정보국장에 임명된 역대 최연소 정보수장이다. 예조프시나로 붕괴된 해외 공작망을 2년 만에 40여 개 거점으로 재건했고, 1941년 영국 핵개발 보고서를 입수해 작전명 '에노르모즈'를 주도하여 소련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앞당겼다. 전쟁 중 독일 침공 경고 100여 건을 스탈린에게 올리고 쿠르스크 전투 계획을 입수했으며, 1946년 해임 후에는 카자흐 SSR 국가보안장관을 지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여파로 연금 없이 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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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8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후 국영출판사 셀호즈기즈 편집자·부편집장
  • 1938.8–11NKVD 특수목적학교 수료, 제5과 실습생 → 9분과장 → 부과장
  • 1939–1946소련 해외정보 총책임자: GUGB NKVD 제5과장 → NKGB·NKVD·MGB 제1총국장
  • 1946–1947독일 소련군정청 MGB 부전권대표
  • 1947–1951스베르들롭스크주 MGB 부국장 — 폐쇄 원자력도시 감독
  • 1951–1953카자흐 SSR 국가보안장관 —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 관할
  • 1953.3–7스베르들롭스크주 MVD 국장
  • 1954–1963국가통제부·각료회의 감사위원, 대외우호협회 사진공장장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코르투노프

Алексей Кириллович Кортунов

소련 통합가스공급체계를 건설한 영웅-장관

“우리는 우리 목숨은 걸 수 있어도 교두보와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걸 수 없었다.” — 비스와 강 도하 후, 1944년

소련 가스 산업의 실질적 창설자. 1957년부터 1973년 사망할 때까지 글라브가스를 이끌며 연중무휴 시공 기술과 1420mm 대구경 파이프라인으로 거의 10만 km에 달하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구축했다. 대조국전쟁에서는 629소총연대를 지휘해 비스와 강 도하 작전을 성공시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5년 샤임-튜멘 송유관으로 서시베리아 원유의 경제성을 입증하며 튜멘 유전 개발의 돌파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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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8아조프스탈 제철소 · 중앙공기유체역학연구소(TsAGI) 건설 기술자
  • 1943–1945제629소총연대장 · 소비에트연방영웅 (1945)
  • 1948–1953투이마지 건설국장 → 석유공업부 건설담당 차관
  • 1955–1957소련 석유공업기업건설장관
  • 1957–1965글라브가스(가스공업총국) 국장 · 통합가스공급체계 설계
  • 1965–1972소련 가스공업장관
  • 1972–1973소련 석유·가스공업기업건설장관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랴비코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Рябиков

레닌 훈장 9회: 전시 무기생산에서 스푸트니크까지, 소련 군산복합체를 35년간 떠받친 조직자

R-7 발사가 성공하자 누군가 연회를 넌지시 꺼냈다. 랴비코프는 국가 예산이 아닌 각출로 자리를 마련하게 한 뒤, 손풍금을 집어 들고 러시아 왈츠와 「카튜샤」를 신나게 연주했다. 코롤료프가 코냑을 따르며 건배를 청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노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바노보 직물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행정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공장 동부 이전과 무기 증산을 지휘했고, 1945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을 이끌었고, 1957년 R-7 미사일 및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승인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련 우주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후 13년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 군수-민수 자원 배분을 조율하며 브레즈네프기 계획경제의 핵심 축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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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이바노보주 직물공장 노동자, 이후 콤소몰·당 지역 간부
  • 1929–1937레닌그라드 기술원·군사기계연구소·해군사관학교에서 공학 수학
  • 1937–1939볼셰비크 공장 설계기사, 당위원회 서기,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조직자
  • 1939–1950무장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이후 제1부위원 — 전시 공장 이전·무기 증산 지휘
  • 1950–1953소련 각료회의 제3총국장 — 모스크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 주도
  • 1955–1957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의장 — R-7 및 스푸트니크 1호 국가위원회 주재
  • 1961–1962, 1965–1974고스플란 제1부의장 — 군수-민수 자원 배분과 경제 계획 조율

보리스 예프스타피예비치 부토마

Борис Евстафьевич Бутома

19년간 소련 조선을 지휘한 핵잠수함 함대의 설계자

1959년 7월 23일, '특수장비 제작에 관한 정부 과업 수행'이라는 비밀 포고령으로 부토마는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 '특수장비'란 K-3 '레닌스키 콤소몰' —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당·국가 지도자로, 195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년간 소련 조선산업을 총괄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를 관통하며 국내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프로젝트 627, K-3 '레닌스키 콤소몰'),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잠수함(프로젝트 V611), 그리고 전략미사일 잠수함 667B형의 건조를 진두지휘하여 소련 해군을 대양함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지휘 아래 220여 개 조선·선박기계 공장이 신설·재건되었고, 민간 부문에서도 원자력 쇄빙선과 초대형 유조선 건조가 본격화되었다. 스탈린상(1949), 사회주의노동영웅(1959), 레닌상(1974)을 수상했으며, 1966년부터 사망 시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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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레닌그라드 조선연구소 졸업
  • 1936–1944블라디보스토크 달자보트 조선소에서 정비공·진수기사·수석기사 역임
  • 1944–1948젤레노돌스크 제340조선소 수석기사, 이후 소장
  • 1948–1952소련 조선공업부 본부장
  • 1952–1953, 1954–1957소련 조선공업부 차관
  • 1957–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조선위원회 의장
  • 1965–1976소련 조선공업부 장관

세르게이 마트베예비치 시테멘코

Сергей Матвеевич Штем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7–1976 ○ 자연사

스탈린의 작전지도를 설계하고 두 번 몰락한 참모장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 시테멘코는 스탈린을 수행해 매일 아침 전황을 브리핑했다. 스탈린이 연합국 수뇌들 앞에 펼쳐 보인 작전지도는 시테멘코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르게이 시테멘코는 스탈린 시기 소련군 작전기획의 핵심이자 최연소 참모총장을 지낸 군사 엘리트였다. 돈 카자크 출신으로 1926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포병·기갑 장교를 거쳐 참모로 성장했다. 독소전쟁 중 작전총국장으로서 스탈린그라드·캅카스·벨라루스·만주 작전의 구체적 기획을 주도했고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을 수행했다. 1948년 41세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1952년 경질되고 베리야 연루로 강등되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 연합군 참모장으로 복귀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고, 회고록 『전쟁 시기 참모본부』는 소련 군사사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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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붉은 군대 자원입대
  • 1937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졸업, 전차대대장
  • 1943–1946작전총국장 — 스탈린그라드·캅카스·벨라루스·만주 작전 기획
  • 1948–1952참모총장 겸 국방차관, 육군대장
  • 1952–1953소련군 독일주둔군 집단 참모장
  • 1956–1957참모본부 정보총국(GRU) 국장
  • 1968–1976바르샤바 조약 연합군 참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