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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쿠르콧킨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уркотк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7–1990 ○ 자연사

소련군 후방을 16년간 지휘한 마지막 원수들 중 하나

1944년, 14근위전차여단장이 전사하자 부하였던 쿠르콧킨이 지휘를 인수했다. 군단장 폴루보야로프는 이렇게 적었다: "쿠르콧킨이 여단을 맡아 복잡한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자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잃지 않았다."

농민 출신으로 정치장교에서 출발해 독소전에서 전차여단장으로 두각을 나타낸 탱크 지휘관이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간 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Тыл) 책임자로 재임하며, 1970년대 말 후방 구조를 기동성 있고 효율적인 현대 물류체계로 전환하는 대대적 개혁을 주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 파견군의 모든 물자 보급을 직접 지휘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스피타크 지진 등 재난 대응에서도 후방 조직을 총괄했다. 1983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 1981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브레즈네프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당 중앙위원으로 군 물류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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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오룔 전차학교 졸업, 정치장교로 복무
  • 1941–1945독소전 참전: 정치지도원에서 전차대대장, 14·13근위전차여단장으로 승진, 프라하까지 진격
  • 1951–1958기갑·기계화군사아카데미와 참모아카데미 졸업, 전차사단장
  • 1959–1968군단장, 근위전차군·야전군 사령관, 주독소련군 제1부사령관
  • 1968–1971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71–1972주독소련군 총사령관
  • 1972–1988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 책임자: 후방 개혁, 아프간·체르노빌·스피타크 대응
  • 1988–1990국방부 총감찰단에서 복무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오가르코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Огар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7–1994 ○ 자연사

군사혁명을 예견한 참모총장, 아프간 파병에 맞서다

참모총장 오가르코프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논의에서 우스티노프 국방장관과 정면으로 맞섰다. "폭탄과 포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질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정치적 방법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1977~84년 소련군 참모총장을 지낸 원수. 농민 출신으로 독소전에 공병장교로 참전했고, SALT 협상에서 군사전문가로 활약했다. 정밀유도무기·자동화지휘체계를 중심으로 '군사문제의 혁명' 이론을 정립해 소련 군사교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현실주의적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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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군입대, 군사공학아카데미 졸업 후 요새화 공사에 배치
  • 1941–1945독소전 참전: 카렐리야·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공병장교로 복무, 부다페스트 공세에서 부상
  • 1947–1968극동·벨로루시 군관구 참모, 사단장, 군관구 사령관으로 승진
  • 1968–1974참모총장 제1차장,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에 군사전문가로 참여
  • 1974–1977국방차관 겸 국가기술위원회 의장, 군사기술 현대화 추진
  • 1977–1984참모총장·국방제1차관, '군사혁명' 이론 정립, 대규모 작전훈련 '서방-81' 주관
  • 1984–1992서방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좌천된 뒤 국방부 총감찰단에서 복무
  • 1992–1994러시아 국방부 및 CIS 합동군 참모총장 고문

바딤 알렉산드로비치 마트로소프

Вадим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тросов

17년간 KGB 국경군을 지휘한 군사적 축

소련 국경군 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오른 수장이었던 마트로소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직접 국경 부대를 방문해 작전을 조율했다. 훗날 국경군 원로들은 그를 '국경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으로 꼽았다.

스몰렌스크 지방 시골 교사 가정 출신으로, 1938년 NKVD 국경군에 입대해 이란 접경에서 복무하다 독소전쟁 발발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핀란드군 후방으로 10차례의 장거리 정찰을 감행했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KGB 국경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국경수비대 역사상 최장기 지휘관으로 군 복무했고, 국경군 수장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올랐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 3대 KGB 의장 아래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 작전을 직접 지휘했으며, 소련 전 국경의 군사화를 총괄한 국가보안 기관의 핵심 군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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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NKVD 국경군 입대, 아제르바이잔 렌코란 분견대에서 이란 국경 경비
  • 1941–1944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정찰 장교로 10차례 핀란드군 후방 정찰
  • 1948–1963국경군 본부에서 참모 경력, 북부·자캅카스 국경관구 근무
  • 1967–1972국경군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2–1989KGB 국경군 총사령관 (1984년부터 KGB 부의장 겸직), 아프가니스탄 국경 작전 지휘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9–1992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퇴역까지 근무

토니 클리프

Tony Cliff
학술·연구 영국 폴란드 1917–2000 ○ 자연사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세운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1950년, 한 줌의 지지자와 함께 《소셜리스트 리뷰》를 내면서 클리프 그룹이 내건 구호: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를.」 냉전의 두 진영을 모두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자, 이후 반세기 동안 이 조류를 규정한 문장이었다.

본명 이가엘 글룩슈타인. 팔레스타인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십대에 시온주의 좌파를 떠나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반전 활동으로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1년간 수감된 뒤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에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며 제4인터내셔널의 정통과 갈라섰고, 이 분석 위에 서방과 소련의 군비 지출이 전후 호황을 떠받쳤다는 「상시 군비경제」론과, 부르주아지도 노동계급도 아닌 지식인·군부가 혁명을 대행한다는 「빗나간 연속혁명」론을 얹었다. 1950년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에서 출발한 그의 조직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을 거쳐 1977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네 권짜리 『레닌』, 네 권짜리 『트로츠키』를 남겼고, 영국 시민권을 끝내 얻지 못해 평생 무국적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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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오스만령 팔레스타인 지크론야코브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의 이가엘 글룩슈타인으로 출생
  • 1931–1933마파이 청년조직을 거쳐 포알레 시온으로, 시온주의 좌파 안에서 정치를 시작
  • 1930년대 후반트로츠키주의·반시온주의로 전향, 팔레스타인의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그룹에서 활동
  • 1939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체포되어 아크레 감옥에서 12개월 복역
  • 1945남아프리카 출신 사회주의자 하니 로젠버그와 결혼
  • 1947영국으로 이주했으나 체류 허가를 얻지 못해 아일랜드로 밀려나 더블린에서 활동
  • 1948「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 발표,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
  • 1950《소셜리스트 리뷰》 그룹 창립: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 1952영국 재입국 허가를 받아 런던에 정착
  • 1959『로자 룩셈부르크』 출간, 토니 클리프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 1962–1963그룹을 국제사회주의자들(IS)로 개편, 「빗나간 연속혁명」론 정식화
  • 1977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창당
  • 1975–1993네 권짜리 『레닌』과 네 권짜리 『트로츠키』 집필
  • 2000.04.09런던에서 심장 수술 뒤 사망, 무국적자로 생을 마침

드미트리 스테파노비치 폴랸스키

Дмитрий Степанович Полянский
농업·토지정책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7–2001 ↓ 전보 1976

농업과 정부 부문을 오간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73년 2월, 브레즈네프는 상임간부회에서 폴랸스키의 농업장관 전보를 통보했다. 몸을 떨며 일어선 폴랸스키가 "아무도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자, 브레즈네프는 "자, 지금 상의하고 있잖나"라고 응수했다.

정치국원·제1부수상을 지내며 1964년 흐루쇼프 축출을 위한 '폴랸스키 보고서'를 작성한 소련 고위 관료. 이후 농업장관을 거쳐 일본·노르웨이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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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6농업장관

바실리 파블로비치 미신

Василий Павлович Миш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러시아 러시아 1917–2001 ○ 자연사

코롤료프를 이어 소유즈·살류트·N-1을 책임진 실천적 우주설계자

1966년 1월 14일, 코롤료프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 크렘린은 미신에게 전화를 걸었고, 해질녘에는 그가 소련 우주계획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이탄촌에서 태어나 ЦАГИ 견습공으로 출발했다. 1945년 독일에서 V-2를 조사하며 코롤료프를 만난 후 오랜 제1부수석설계자로 일했고, 1966년 코롤료프 사후 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소유즈 우주선, 살류트 우주정거장, 달로켓 N-1이 개발되었다. N-1은 네 차례 발사 모두 실패했고, 1974년 동료들의 서한으로 해임되면서 소련 달탐사 계획도 함께 종결되었다. 이후 모스크바항공대학에서 30년간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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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35ЦАГИ 공장 견습공, 야간반 거쳐 МАИ 입학
  • 1941–45볼호비티노프 항공설계국: 첫 로켓전투기 БИ-1 무장 설계
  • 1945–46독일 파견, V-2 조사단에서 코롤료프와 평생의 동료가 됨
  • 1946–66OKB-1 제1부수석설계자: Р-1부터 Р-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까지
  • 1956Р-5 개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 1966–74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 소유즈, 살류트, N-1 달로켓
  • 1974N-1 실패와 내부 서한으로 해임, 달탐사 계획 폐기
  • 1974–2001МАИ 교수·학과장, 교과서 《장거리유도탄탄도학》 등 저술

크리스토퍼 몬터규 우드하우스

Christopher Montague Woodhouse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917–2001 ○ 자연사

저항과 제국의 경계에 선 그리스 전문가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작전 뒤 그는 철수하지 않고 그리스에 남아 저항세력과 카이로를 잇는 사절단을 세웠다.

크리스토퍼 몬터규 우드하우스는 영국 육군 장교이자 SOE·MI6 요원, 그리스 정치사 연구자였다. 그는 점령기 그리스에서 ELAS와 EDES를 잇는 영국 군사사절단을 조직하고 지휘하며 저항운동과 전후 국가질서 사이의 접점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활동은 군사 협력이 영국의 왕정 복귀와 영향권 정책으로 기울 수 있었던 긴장을 보여준다. 훗날 의원과 저술가로서 그리스 현대사를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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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영국 왕립포병대에 입대
  • 1941크레타 저항조직 지원을 위한 SOE 임무 수행
  • 1942고르고포타모스 작전의 하를링 부대 부지휘관
  • 1942–1943영국 군사사절단에서 ELAS·EDES와 연락
  • 1943–1945그리스 주재 연합군 군사사절단 지휘
  • 1945–1946아테네 영국대사관 2등서기관
  • 1959–1974옥스퍼드 하원의원, 보수당 정부 각료직 수행
  • 1976『그리스를 위한 투쟁』 출간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톨스티코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Толстиков

해빙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당 지도자이자 주중 대사

1970년, 아무런 외교 경력도 없던 레닌그라드 당 수장이 갑자기 주중 대사로 발령받았다. 브레즈네프는 그의 독립적 성향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후 레닌그라드 복구사업에 투신했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되어 1965년 경제개혁의 도시 적용을 주도하고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70년 느닷없이 주중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자적 권위를 견제하려는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외교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베이징에서 중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적 대화 통로를 유지했으며, 이후 주네덜란드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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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0건설 기술직 후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 졸업, 군 건설현장 주임기사
  • 1941–1946붉은군대 복무, 카렐리야 전선 참전, 주독 점령군 수송부서장
  • 1948–1960레닌그라드에서 건설·소비에트·당 직책 역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까지 승진
  • 1962–1970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CPSU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1962–1966)
  • 1962–1971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 1970–1978주중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9–1982주네덜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케림 알리예비치 케리모프

Керим Алиевич Керим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7–2003 ○ 자연사

오랫동안 이름이 숨겨진 유인우주비행 관리자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앞두고 편안히 잠들었다. 침대 센서로 이를 확인하던 케리모프는, 로켓에 오를 남자보다 더 긴장된 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추샤 로켓을 검수하고 독일에서 V-2 로켓 정보를 수집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국가위원회 위원을 거쳐, 1966년부터 1991년까지 25년간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의 모든 유인우주선 발사를 승인했다. 살류트, 소유스-아폴로, 미르까지 소련 유인우주비행 전성기의 관문을 지킨 행정가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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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91국가위원회 의장 · 유인우주비행

장춘차오

张春桥
이념·선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17–2005 ○ 사형 선고 후 감형, 1998년 석방

문화대혁명 '사인방'의 이론가,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부르주아지 전면독재를 주창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춘차오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수년 후 가족 면회가 허용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이론가이자 '사인방' 구성원.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상하이에서 《해방일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부르주아 법권 사상을 타파하자」를 발표해 마오쩌둥의 주목을 받았고, 문화대혁명기 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으로 1967년 상하이 인민공사를 조직해 기존 시 정부를 전복시켰다. 1975년 부총리로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전면독재를 실시하자」를 집필해 사회주의 이행기 계급투쟁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마오 사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98년 석방될 때까지 마오주의 신념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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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중국 공산당 입당
  • 1949–1966《해방일보》 편집장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성원
  • 1967–1976상하이 혁명위원회 주임 (시장)
  • 1969–1973정치국 위원 → 1973–1976: 정치국 상무위원
  • 1975–1976부총리 겸 총정치부 주임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4–1998사형 선고 → 무기징역 → 18년형 → 의료 석방

니콜라이 프로코피예비치 페도렌코

Николай Прокофьевич Федоренко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7–2006 ○ 자연사

수학으로 계획경제를 재설계한 CEMI의 창립자이자 SOFE의 설계자

1960년대 말, CEMI는 소련 경제의 성장 둔화를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스플란 의장은 폴리트뷰로 송부를 거부했고, '이데올로기적 이단' 혐의를 피하기 위해 연구소는 네스쿠치니 정원에서 보고서를 모닥불에 태웠다.

소련 계획경제에 수학적 최적화 방법론을 제도화한 경제학자. 1963년 넴치노프의 추천으로 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22년간 이끌며,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을 전국 계획 체계로 확장한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SOFE)'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1971–1986)로서 수리경제학을 소련 경제과학의 공식 의제로 격상시켰고, 고스플란의 자동화된 계획계산체계(ASPR)의 과학적 지도를 맡아 프로그램-목표·부문별·지역 계획을 통합하는 방법론을 추진했다. 2차대전에 화학부대 장교로 참전해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았고, 1970년 화학공업 경제학 연구로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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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6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화학공업 경제학 강사·부교수·교수·학과장
  • 1953–1958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부총장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63–1985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 창립·초대 소장
  • 196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믹)
  • 1965–1988학술지 《경제학과 수리방법》 초대 편집장
  • 1967–1983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197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
  • 1987–2006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고문

아서 M. 슐레진저

Arthur M. Schlesinger Jr.
학술·연구 미국 미국계 1917–2007

자유주의를 변호한 역사가이자 권력의 내부 기록자

피그만 침공 뒤 그는 결정적 회의에서 더 크게 경고하지 못한 자신을 두고 "나는 몹시 자책했다"고 회고했다.

아서 M. 슐레진저 주니어는 미국 자유주의와 대통령 권력의 역사를 탐구한 역사가이자 공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특별보좌관으로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연설문을 다루며 피그만 침공에 반대했지만, 결정적 회의에서 침묵한 책임도 훗날 인정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이 아니었으나 유엔 주재 대사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위기 발표 작성을 도왔다. 1965년의 『A Thousand Days』는 케네디의 위기 관리를 정교한 지도력의 서사로 각인시켰고, 이후 연구자들은 그 영웅적 기억이 배제한 쿠바와 소련의 행위, 비밀 합의, 구조적 위험을 다시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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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하버드대학교 학사, 최우등 졸업
  • 1939–1942하버드대학교 펠로
  • 1943–1945전략정보국 분석관
  • 1946–1962하버드대학교 역사학 교수
  • 1961–1964케네디 대통령 특별보좌관
  • 1966–1994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인문학 교수
  • 1965『A Thousand Days』 출간, 1966년 퓰리처상 수상
사회운동·조직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련 우즈베키스탄 1917–2008 ↓ 중앙직 사임 1961

중앙아시아 출신 첫 프레지디움 위원, 민족 정책 실무자

1956년 10월 타슈켄트 제1차 우즈베크 지식인대회에서 소련 최초로 스탈린 시기 대량 탄압의 실상과 피해자 이름을 공개석상에서 밝혔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우즈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통신으로 협동조합대학을 졸업하고 붉은군대에서 정치·무선정찰 장교로 복무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전후 우즈베키스탄 당에서 급속히 승진해 1955년 우즈베크 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57년 중앙아시아 출신 최초로 CPSU 프레지디움 정위원 겸 중앙위 서기에 올랐다. 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우즈베크 내 대규모 정치 재활, 강제이주 민족 귀환, 타슈켄트 핵물리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민족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했다. 1961년 흐루쇼프와의 정책적 이견으로 중앙직을 떠난 뒤 시리아 대사 등을 지내고 9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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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붉은군대 복무, 정치·무선정찰 업무
  • 1948–1950나망간 주당위 제1서기
  • 1951–1953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5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의장 (복직)
  • 1955–1957우즈베키스탄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1CPSU 중앙위 서기 겸 프레지디움 위원
  • 1968–1977주시리아 소련 대사
  • 1986–2008우즈베키스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의장

표트르 닐로비치 데미체프

Пётр Нилович Демичев

문화정책을 관리한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61년 10월, 모스크바 시당 국 회의에서 데미체프는 단호히 말했다. '스탈린의 시신을 마우솔레움에 두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며칠 뒤 10월 31일 밤, 시신은 비밀리에 옮겨져 크렘린 벽 아래 묻혔다.

흐루쇼프의 보좌관에서 출발해 24년간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낸 핵심 이념 관료였다. 1961년 스탈린 시신의 마우솔레움 철거를 직접 발의한 탈스탈린화의 주역이었으나, 브레즈네프기 문화장관으로서는 보수적 통제를 행사했다. 셸레핀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글라주노프·솔로우힌 같은 향토주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복합적 면모를 지녔으며, 소련 말기까지 문화·이념 영역의 핵심 관리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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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모스크바 당 조직과 중앙위 선전 라인에서 성장
  • 1961–1974중앙위 서기, 이념·문화 담당으로 해빙 이후 문화통제 관리
  • 1974–1986문화장관, 정체기 공식 예술·공연·출판 행정 총괄
  • 1986 이후고르바초프기 문화정책 변화 속에서 중앙 무대에서 물러남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학술·연구 영국 유대계 영국인(폴란드계 유대인 부친·오스트리아계 유대인 모친) 1917–2012

혁명의 사회적 기반과 후대 기억을 연구한 역사가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빈과 베를린에서 자랐다. 『혁명의 시대』 등 ‘긴 19세기’ 3부작으로 산업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형성을 서술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버크벡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다. 『혁명의 시대』에서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을 함께 다루었고, 『마르세유의 메아리』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후대 정치와 역사 서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살폈다. 이 강좌에서는 계급과 사회구조, 혁명의 계승과 변형을 읽는 해석 기준으로 참고한다. 그의 분석은 당대 사료 자체와 구별해야 하며 혁명사 해석의 유일한 정답을 뜻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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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버크벡 칼리지 역사학 강사
  • 1952학술지 『과거와 현재』 창간에 참여
  • 1970–1982버크벡 역사학 교수
  • 1982버크벡 명예교수로 퇴임
  • 1984–1997뉴스쿨 사회연구소 방문교수
  • 2002버크벡 총장에 선임

바실리 빌랴크

Vasiľ Biľak

자기 나라에 소련 탱크를 불러들인 초대장에 서명한 당 이념 비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빌랴크는 "나는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초청장은 개인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항변이었다.

루신족 출신의 재단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네오스탈린주의자.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건전한 세력'의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하는 초청장에 서명한 5인 중 한 명이었다. 침공 후 후사크 체제의 이념 책임자로서 '정상화'의 교리적 기초가 된 「위기 발전의 교훈」(1970)을 기초하고 반체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당내 최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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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루신족 가정 출생, 재단사 수업
  • 1936–45공산계 노조 가입, 재단사 노동,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54–62당 고등정치학교 졸업, 프레쇼프 지역당 서기, 교육·문화 담당
  • 1962–68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이념 담당 서기
  • 1968.1–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4월 KSČ 정치국원, 바르샤바조약군 초청 서한 서명
  • 1968–88KSČ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 대외정책·이념 총괄
  • 1970「위기 발전의 교훈」 기초, 정상화의 교리적 헌장
  • 1988.12정치국·서기직 해임, 1989년 당에서 제명

바실리 이바노비치 페트로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7–2014 ○ 자연사

오가덴 전쟁을 지휘한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마지막 전시 세대 원수

1978년 3월, 지지가 탈환 작전: 페트로프는 정면 공격으로 속이고 주력은 헬기강습으로 북쪽에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3월 4일 지지가가 해방되었고, 2주 안에 소말리아군은 에티오피아 영토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2차대전을 최전선에서 싸운 소련 원수.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에서 시작해 우크라이나 해방, 루마니아·헝가리 전역까지 종군했으며 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전후 프룬제 아카데미를 거쳐 극동에서 참모·지휘관으로 성장, 1972년 극동군관구 사령관에 올랐다. 1977–78년 오가덴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주재 소련 작전그룹을 지휘하며 지지가 탈환 작전을 입안해 전황을 결정지었다. 1980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85년 국방제1차관을 지냈으며 1983년 소련원수로 진급했다. 브레즈네프 후기 소련 지상군의 중추를 이끈 전략가로, 냉전 말기 지상전력 현대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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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붉은 군대 입대
  • 1941–1945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 및 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 전역 참전
  • 1945–194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속성과정 및 본과정 졸업
  • 1953–1955제50소총연대장
  • 1955–1957제39소총사단 참모장
  • 1957–1961제129차량화소총사단장
  • 1964–1966제5군 사령관
  • 1966–1972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2–1976극동군관구 사령관
  • 1976–1978소련 지상군 제1부총사령관
  • 1977–1978에티오피아 주재 소련 국방부 작전그룹장 (오가덴 전쟁)
  • 1978–1980극동군 총사령관
  • 1980–1985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83소비에트 연방 원수 진급
  • 1985–1986소련 국방제1차관
  • 1986–1992소련 국방부 총감찰관
  • 1992–2014러시아 연방 국방부 고문

로버트 콘퀘스트

George Robert Acworth Conquest
학술·연구 영국인 영국계 1917–2015 ○ 자연사

스탈린 시대를 해부한 냉전기 역사가

『The Great Terror』 개정판은 기록관 공개 뒤에도 그의 핵심 문제 제기가 남았음을 보여 주었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소련의 정치적 폭력과 농업 집산화를 연구한 영국계 역사가이자 시인이었다. 1968년 『The Great Terror』는 공개된 문서와 망명자 증언을 엮어 대숙청을 모스크바 재판만이 아닌 국가적 테러 체계로 서술했고, 영어권에서 그 시대를 부르는 이름을 널리 정착시켰다. 그의 희생자 추계와 전체주의 해석은 이후 기록관 공개와 연구 성과로 일부 뒷받침되었지만, 규모와 인과관계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는 반공 정보 활동과 문학 활동에도 관여해, 학술 연구와 냉전 정치의 경계가 얽힌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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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옥스퍼드대학교에서 철학·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영국 공산당에 가입
  • 1940–1946영국 육군 장교로 복무
  • 1944–1948불가리아 주재 영국 공관 및 연합군 통제위원회 연락장교
  • 1948–1956영국 외무부 정보연구부에서 대소련 정보·선전 업무
  • 1962–1963『스펙테이터』 문학 편집자
  • 1968『The Great Terror: Stalin's Purge of the Thirties』 출간
  • 1986『The Harvest of Sorrow』 출간
  • 1981–2015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나코 스피루

Nako Spiru
경제·재정·계획 알바니아 국가기관 알바니아 알바니아 1918–1947 사망 경위 미확정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경제기획자, 유고슬라비아 경제통제의 비판자

1947년 11월 18~19일 정치국 회의에서 쇼체가 그를 '반당적 민족주의 활동'으로 고발했고, 이튿날 그는 국가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총상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에서 자살로 공식 설명이 바뀌었고 살해 주장도 있어 경위는 확정되지 않았다.

본명 아타나스 스피루. 두러스의 부유한 정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코르푸와 토리노에서 수학했고, 1941년 신생 알바니아 공산당에 입당해 청년부를 이끌었다. 1944년 정치국원, 1946년 3월 22일 경제장관, 1947년 산업장관 겸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당 지도부에서 유일한 경제학 전공자였다. 1946년 7월 유고슬라비아와의 경제협정에 마지못해 서명했으나 이후 관세동맹과 통화통합을 포함한 경제통합 계획에 반대했고, 1947년 베오그라드 교섭과 모스크바 방문으로 유고슬라비아 의존에서 벗어날 근거를 마련해 '유고슬라비아 로비'의 코치 쇼체와 충돌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공산주의 범죄연구소는 그를 당·민족해방군의 탄압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인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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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9두러스 소년 초등학교
  • 1929–1937코르푸의 이탈리아계 학교 수학
  • 1937토리노에서 경제학 전공 시작
  • 1941알바니아 공산당 입당, 청년부 책임자
  • 1944정치국원, 페르메트 회의 대표
  • 1946인민의회 의원 겸 간부회 서기, 3월 22일 경제장관
  • 1947산업장관 겸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 베오그라드 경제교섭 대표

강건

강건

소련군 출신으로 남침 작전계획을 완성한 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유성철 작전국장의 증언: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뢰였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만주 항일유격대와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측근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1950년 5월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남침을 위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을 지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8일, 금강 인근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탄 지프가 폭발해 즉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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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0만주 항일유격대 및 동북항일연군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대위 계급
  • 1946연변에서 활동 후 귀국,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 지휘
  • 1948–1950조선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 1950.05바실리예프 중장과 남침 작전계획 완성
  • 1950.06–09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전선 지휘

표도르 다비도비치 쿨라코프

Фёдор Давыдович Кулаков

브레즈네프의 후계 후보였으나 급서로 고르바초프의 자리를 열어준 농업 담당 서기

1978년 4월 농업 전원회의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농업 담당 정치국원 겸 서기인 쿨라코프를 위원회에조차 넣지 않았다. 석 달 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농민 출신으로 농업 전문가 경로를 밟아 올라온 당 간부로, 1965년부터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를 맡으며 브레즈네프·수슬로프·키릴렌코와 함께 서기국과 정치국을 겸한 4인 중 하나였다. 스타브로폴 제1서기 시절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후원했으며, 1971년 정치국 위원에 오른 후 서방 분석가들은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꼽았다. 그러나 1978년 농업 정책을 둘러싼 당내 비판 속에 급서하면서 그의 서기국 자리는 고르바초프에게 넘어갔고, 이는 소련 지도부 세대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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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탐보프 주 사탕무 국영농장 조수, 펜자 주 사탕공장 농업기사
  • 1941–1944펜자 주 지구 콤소몰 제1서기, 지구 집행위원회 의장, 현급 당위 제1서기
  • 1950–1955펜자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55–1959RSFSR 농업 차관
  • 1959–1960RSFSR 곡물생산물 장관
  • 1960–1964스타브로폴 변경당위 제1서기 — 고르바초프를 발탁·후원
  • 1964–1976중앙위 농업부장
  • 1965–1978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71–1978정치국 위원 (후보위원 건너뜀)

표트르 미로노비치 마셰로프

Пётр Миронович Маше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8–1980 ✕ 교통사고

벨라루스 파르티잔 영웅에서 산업화를 이끈 15년의 지도자

스스로 알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도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수학·물리 교사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여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65년부터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로 15년간 재임하며 민스크 메트로, 대규모 화학공장, 브레스트 요새·하틴 기념관을 추진하여 전후 농업 공화국을 소련의 첨단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치국 후보위원(1966–1980)이자 코시긴 개혁을 지지한 실용적 개혁파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코시긴의 후임 각료회의 의장으로 유력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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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로소니 중학교 수학·물리 교사
  • 1941–1942로소니 지하 콤소몰 조직 책임자
  • 1942–1943파르티잔 분견대 '쇼르스' 지휘관 (호출부호 '두브냐크')
  • 1943–1944로코솝스키 파르티잔 여단 정치위원, 빌레이카 지하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7–1954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55–1959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9–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65–1980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0CPSU 정치국 후보위원

이고리 데먀노비치 스타첸코

Игорь Демьянович Стац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8–1987 ○ 사망

쿠바에 R-12 미사일을 배치한 51 로켓사단장

헬기에서 쿠바 중서부를 내려다본 스타첸코 소장은 깨달았다: 이 정도 야자수로는 90마일 북쪽 초강대국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소련 전략로켓군 소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제51로켓사단을 지휘, 36기 R-12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고 10월 20일 전투 태세를 완료했다. 사후 보고서에서 정찰 부족과 현지 조건 무시 같은 참모본부의 '아나디리' 계획 결함을 솔직히 기술했다. 이후 페름 고등군사공병학교장과 우주추적센터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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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치칼로프 대공포학교 사관생도
  • 1942–1945서부·북부전선 대공포대대장
  • 1957–1961제61대공사단장 → 참모본부 아카데미
  • 1961–1962제43로켓사단장 (롬니)
  • 1962제51로켓사단장, 아나디리 작전 (쿠바)
  • 1963–1967제5독립로켓군단 부사령관 (키로프)
  • 1967–1971페름 고등군사공병학교장
  • 1971–1976제153우주추적센터장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Nicolae Ceaușescu

독자 외교와 개인숭배를 결합한 루마니아 지도자

1968년 침공 비판은 동유럽 사회주의권 내부의 균열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 지도자가 되어 국가주의적 독자 노선과 강한 개인숭배 체제를 구축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판했으나, 1989년 혁명 속에서 정권과 함께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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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89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국가 지도자
  • 1968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비판
  • 1989루마니아 혁명으로 실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