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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스튜어트 슈람

Stuart R. Schram
학술·연구 미국 미국 1924–2012 ○ 자연사

마오쩌둥의 정치사상』과 10권짜리 『마오의 혁명 노정』을 편찬한 마오 연구의 개척자

마오의 공과를 저울질한 연구자. 토지개혁과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를 반혁명 진압의 처형, 대약진 후의 기아, 문화대혁명의 참상과 견주며 "나는 마오 개인을 천국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보다 그의 사상의 장래 영향에 더 관심이 있다"고 했다.

미네소타 출신의 물리학도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뒤 정치학으로 옮겨 파리에서 가르쳤고, 런던 SOAS 현대중국연구소를 이끌었다. 1963년 『마오쩌둥의 정치사상』으로 마오의 사상을 원문에 근거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첫 서구 연구자였으며, 마오 사상이 소련 마르크스주의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중국의 조건에 맞춘 독자적 변형이라고 주장했다. 만년에는 하버드 페어뱅크센터에서 1912~1949년 마오의 저작을 원문 그대로 모은 『마오의 혁명 노정』을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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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89SOAS 현대중국연구소 소장 · 정치학 교수

아고스티뉴 안드레 멘드스 드 카르발류

Agostinho André Mendes de Carvalho
문학·예술 독립 활동 앙골라 앙골라 1924–2014

간호 보조원 출신 앙골라 민족주의자, 작가 '우안넹가 시투'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은 1974년 『마스터 타모다』로, 거만하고 식민지적으로 물든 말쟁이 '타모다 선생'은 앙골라 문학에서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민중의 사회적 처지"라고 말했다.

필명 우안넹가 시투로 알려진 앙골라의 간호 보조원·민족주의자·작가. 1924년 8월 29일 이콜루 이 벵구 주 카롬보로카에서 태어났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하고 의료 보조원 자격을 취득했으며, 1957년부터 루안다 외곽에서 독립을 위한 비밀 활동을 벌이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70년 가석방으로 MPLA에 복귀해 루안다 시 조직부를 이끌었고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2014년 2월 13일 루안다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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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701942년부터 카테테-루안다에서 위생 요원으로 일했고, 1947년 간호 보조원 자격을 취득한 뒤 딩게·쿠이투·칼룸부·문구·카비리·봉 제주스 두 콴자와 벵겔라·루반구 병원의 보건소에서 근무했다. 1947년 딩게에서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조직했고, 1959년 PIDE에 체포되어 재판과 유죄 판결 후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보베르데 타라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 1957–1958루안다 외곽에서 당시 태동하던 MPLA와 '에스팔랴 브라자스' 그룹과 연결된 전단 위원회를 통해 앙골라 독립을 위한 비밀 정치 활동을 벌였고, 1958년 앙골라 해방군(ELA)에 들어갔다.
  • 1970–19881970년 가석방 후 MPLA에 복귀해 같은 해 루안다 시 조직부(DOM)를 이끌었고, 1974년 중앙위원이 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으며 한때 당 지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독립 후 혁명평의회에 임명되었다.
  • 1979–1983루안다 주 위원 1979–1980년, 보건부 장관 1980–1983년.
  • 1983–2000s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 주재 앙골라 인민공화국 대사(동독에서는 정치학도 공부)를 역임했고, MPLA 소속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나이를 이유로 물러났다. 2009년에는 MPLA 소속 최고령 의원으로 보도되었다.

카렌 네르세소비치 브루텐츠

Карен Нерсесович Брутенц

브레즈네프 시대 제3세계 정책을 설계한 국제부 이론가

브루텐츠와 국제부 전문가들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견을 전달할 부서장 포노마료프는 중대한 12월 회의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국제부 이론가로, 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시기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으로서 '민족민주주의' 개념의 정립을 주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을 내부에서 반대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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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바쿠 정신병원 의사
  • 1950–1954바쿠 시당 위원회 강사
  • 1954–1958사회과학아카데미 대학원생, 1958년 학위 취득
  • 1961–1969『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민족해방운동부장
  • 1961–1976중앙위 국제부 책임직, 제3세계 정책 기획
  • 1976–1986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1986–1990중앙위 후보위원
  • 1997–2017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4–2018 ○ 자연사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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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매사추세츠주 밀턴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출생
  • 1942–1945해군 뇌격기 조종사로 58회 출격, 지치지마에서 격추되어 잠수함에 구조
  • 1953–1966자파타 오프쇼어 석유회사 창업, 텍사스의 백만장자
  • 1967–1971텍사스주 하원의원, 두 차례 상원 선거 낙선
  • 1971–1977유엔 대사, 공화당 전국위 의장, 중국 주재 대표, CIA 국장
  • 1981–1989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부통령
  • 1989–1993제41대 대통령: 몰타 회담으로 냉전 종식, 독일 통일 지지, 걸프전
  • 2018휴스턴에서 94세로 사망

드미트리 티모페예비치 야조프

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Яз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출생지와 소련·러시아 국가 맥락 기준, 민족적 자기규정은 사료에 명시되지 않음) 1924–2020 ○ 사망 (모스크바)

마지막 소비에트 연방원수, 8월 쿠데타의 국방장관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 "아니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1941년 열일곱에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우고 두 차례 부상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에 비밀 배치된 연대를 지휘했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뒤 국방장관에 기용되었으나 핵 군축의 속도와 범위를 두고 고르바초프와 갈등했고, 1990년 4월 소련 최후의 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일방 감군 50만을 집행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해 모스크바에 전차를 투입했다. 옐친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군을 철수시켰으며, 체포되어 498일간 수감된 뒤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풀려났다. 2019년 리투아니아 법원이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중 10년형을 선고했고, 2020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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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어린 장교로 독소전에 참전
  • 1960s–1970s극동·중앙아시아 등 군관구 지휘를 거쳐 승진
  • 1987–1991국방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군의 불만을 대표
  • 1991.8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참여하나 군을 결정적으로 움직이지 못함
  • 1991–1994체포·수감 뒤 사면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돌기흐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Долгих

브레즈네프 시대 16년간 중공업·에너지를 총괄한 당 서기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국가 광물매장량 심의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탈나흐 광구 우안에 산업 건설을 강행했다. '노릴스크는 그 규모에 충격적이었습니다: 탄광, 지하 갱도, 거대한 노천광 두 개, 세 개의 공장 — 니켈, 코발트, 구리, 그리고 거대한 도시.' 광구 '마야크'는 1965년 첫 광석을 냈다.

야금기술자 출신으로 노릴스크 콤비나트 사장 시절 탈나흐 광상을 과감히 개발해 소련 니켈·백금 생산을 비약시켰고, 36세에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1972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된 뒤 16년간 중공업·에너지 부문을 총괄하며 서시베리아 유전 개발과 소련 연료-에너지 복합체의 골격을 설계했다. 정치국 후보위원(1982–1988)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 후기 경제정책의 실무를 관장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개시 3년 뒤인 1988년 전원 퇴진 속에 은퇴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모스크바 시의원·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95세까지 공적 생애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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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붉은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브랸스크 전선에서 중상 후 제대
  • 1949–1958크라스노야르스크 정련공장 기술자·주임기사, 귀금속 제련 특허 다수
  • 1962–1969노릴스크 광산·야금 콤비나트 사장, 탈나흐 광상 개발로 생산 10배 증대
  • 1969–1972크라스노야르스크 변경주 당 제1서기, 지역 종합개발 계획 수립
  • 1972–1988중앙위 서기, 중공업·에너지 담당 — 서시베리아 유전·연료복합체 총괄
  • 1976–1984중공업·에너지부장 겸임
  • 1982–1988정치국 후보위원
  • 2011–2018국가두마 의원 → 연방평의회 의원

유리 표도로비치 오를로프

Юрий Фёдорович Орлов
이념·선전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련 러시아 1924–2020 → 국적 박탈 · 강제 추방 1986

소련이 서명한 헬싱키 인권 약속을 내부에서 감시한 물리학자

1978년 5월 폐쇄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그는 말했다: "이런 재판으로는 헬싱키 그룹의 문서가 증언하는 사회의 병폐와 결함을 없앨 수 없습니다."

입자가속기 물리학자에서 소련 최초의 인권감시 조직을 세운 반체제 운동가로 선 인물. 1956년 당 회의에서 스탈린과 베리야를 '권력을 쥔 살인자'라 칭해 제명·해고당했고,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6년 5월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 이행을 감시하는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을 창립했다. 이는 소련 스스로 서명한 제3바스켓의 약속을 내부에서 뒤집어 맞대결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2월 체포되어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을 선고받고, 1986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미국으로 추방되어 코넬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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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56보안 원자력 연구소(훗날 이테프) 물리학자
  • 1956스탈린·베리야를 격렬히 비판, 당 제명과 해고
  • 1956–72예레반 물리연구소, 1963년 이학박사
  • 1968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3소련 최초 국제앰네스티 그룹 창립 참여
  • 1976.5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창립, 초대 의장
  • 1977–86체포, 7년 수용소와 5년 유형 선고
  • 1986국적 박탈·미국 추방, 코넬대 교수

루보미르 슈트로우갈

Lubomír Štrougal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끈 후사크의 오른팔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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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베셀리나트루주니치 출생, 부친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공산주의자
  • 1945~48KSČ 입당, 카렐대학교 법학 졸업
  • 1959~61농업·임업·수자원 장관
  • 1961~65내무장관, 국가보안(StB) 관할
  • 1968체르니크 내각 부총리 겸 경제위원회 의장
  • 1968.11~70.1KSČ 중앙위 서기·상임위원, 후사크의 '정상화' 노선 합류
  • 1970.1~88.10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총리, 18년 재임
  • 1988~90야케시와 충돌 후 사임, 벨벳 혁명 후 KSČ 제명

지미 카터

Jimmy Carter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4–2024 ○ 자연사

데탕트의 정점과 종말을 모두 품은 미국의 39대 대통령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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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1967그루지야주 상원의원
  • 1971–1975제76대 그루지야 주지사
  • 1977–1981제39대 미국 대통령
  • 1982카터 센터 설립
  • 2002노벨 평화상 수상

파트리스 루뭄바

Patrice Lumumba

취임 연설 하나로 제국의 표적이 된 콩고의 초대 총리

“역사는 언젠가 말할 것이다… 아프리카는 자신의 역사를 쓸 것이다.” — 옥중에서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1960)

콩고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초대 총리. 1960년 독립 기념식에서 보두앵 국왕 앞에서 식민 폭력을 고발한 연설로 세계적 상징이 되었고, 석 달 만에 쿠데타로 축출되어 이듬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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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콩고민족운동(MNC) 창립
  • 1960.5총선 승리 — 초대 총리
  • 1960.6독립기념식에서 식민 폭력을 고발하는 즉흥 연설
  • 1960.9모부투 쿠데타로 축출·연금
  • 1961.1카탕가로 이송되어 살해 — CIA·벨기에 공모

프란츠 파농

Frantz Fanon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프랑스 마르티니크 1925–1961 ○ 병사

식민주의 자체를 병으로 진단한 정신과 의사

“유럽을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인류를 위해, 동지들이여, 우리는 새로운 인간을 세워야 한다.” —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1961)

마르티니크 출신 정신과 의사이자 반식민 혁명가. 식민주의의 심리적 폭력을 분석한 『검은 피부, 하얀 가면』과 탈식민 투쟁을 이론화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저술했다. 알제리 FLN에 합류, 36세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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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5자유프랑스군 참전
  • 1952『검은 피부, 하얀 가면』 출간
  • 1953–1956블리다 정신병원장 — 고문 피해자와 고문자를 함께 진료
  • 1956–1961FLN 합류 — 기관지 편집, 순회 대사
  • 1961『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출간, 백혈병으로 사망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5–1968 ✕ 암살

형 대통령의 최측근 법무장관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타결의 실무자가 된 정치인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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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존 F. 케네디 상원 선거 캠프 매니저
  • 1953–1955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매카시 위원회) 법률고문
  • 1957–1959상원 노동부패조사위원회(매클렐런 위원회) 수석법률고문
  • 1961–1964제64대 미국 법무장관
  • 1965–1968뉴욕주 상원의원

파벨 이바노비치 벨랴예프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Беля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5–1970 ○ 복막염

최초의 우주유영을 지휘한 전투조종사

자동유도장치가 죽었다. 벨랴예프는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보조르 항법기를 들여다보며 캡슐의 자세를 손으로 바로잡았다. 레오노프가 그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완전 수동 재진입이었다.

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출신으로, 1960년 최초의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었을 때 서른넷의 최고령이자 최고 계급(소령)으로 단장이 되었다.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 2호의 선장으로서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인류 최초 우주유영을 지휘했고, 귀환 시 자동유도장치가 고장나자 누운 자세로 수동 재진입을 수행해 사상 처음으로 우주선을 사람 손으로 착륙시켰다. 2,000km나 빗나간 착륙 지점은 페름 밀림이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이틀을 영하의 숲속 캡슐에서 버텼다.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이후 소유스 계획 훈련을 지휘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 복막염으로 1970년 마흔넷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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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소일전 참전
  • 1959공군사관학교 졸업, 흑해함대 비행대대장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초대 단장
  • 1965.3.18–19보스호트 2호 선장: 인류 첫 우주유영, 수동 재진입
  • 1966–67소유스·알마즈 계획 훈련 지휘
  • 1969우주비행사훈련센터 제1국장

루스 퍼스트

Ruth First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1925–1982 ✕ 암살

아파르트헤이트를 고발한 탐사 저널리스트이자 117일 독방을 견딘 공산주의 혁명가

「감옥에서는 적의 움직임만 보인다. 감옥은 싸움을 하기에 가장 어려운 곳이다.」 — 《117일》(1965)

남아공 공산당과 ANC에서 활동한 백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언론인. 진보 매체 《가디언》 편집장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고발했고, 자유헌장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역죄 재판 피고를 거쳐 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가 되었고, 독방 체험을 《117일》로 남겼다. 망명 후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연구했으며, 모잠비크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경찰의 소포 폭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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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위트워터스랜드 대학 사회과학 학사, 진보학생연맹 창립 참여
  • 1946–1950s《가디언》 편집장 — 신문 금지 후 《클라리온》《뉴 에이지》 등으로 재창간
  • 1949조 슬로보와 결혼
  • 1953민주주의자회의(COD) 창립 지원 — 의회동맹 백인 조직
  • 1955자유헌장 기초위원 — 집회 금지로 클립타운 대회 불참
  • 1955급진 정치 저널 《파이팅 토크》 편집장
  • 1956–1961반역죄 재판 피고 — 156명과 함께 기소, 전원 무죄
  • 196390일 구금법 첫 백인 여성 수감자 — 117일 독방, 《117일》 집필
  • 1964런던 망명 — 영국 반아파르트헤이트운동 활동
  • 1964–1970s만델라·음베키·오딩가 평전 편집, 아프리카 해방운동 연구
  • 1970『총의 포신: 아프리카의 정치권력과 쿠데타』 출간
  • 1972–1978맨체스터·더럼 대학 연구원 겸 강사
  • 1978–1982에두아르두 몬들라네 대학 아프리카연구센터 연구국장 — 마푸투
  • 1982.08.17남아공 경찰 소포 폭탄으로 암살 — 34개국 정상·대사 장례 참석

안드레이 도나토비치 시냡스키

Андрей Донатович Синявский
문학·예술 소비에트 러시아 1925–1997 ○ 자연사

『노비 미르』의 비평가에서 반체제 운동의 상징이 된 아브람 테르츠

1966년 2월 재판에서 시냡스키는 무죄를 주장했다 — 소비에트 정치 재판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역사가 프레드 콜먼은 이 재판을 "현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탄생"이라 불렀다.

소비에트 문학학자, 비평가, 작가. 필로로기야 학위 후보(1952년)로,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모스크바 국립대·예술극장 학교 강사였다.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노비 미르』에서 주요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당시 가장 자유주의적인 소비에트 합법 출판물이었다. 아브람 테르츠 필명으로 서방에 풍자 소설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1959)를 발표했다. 1966년 율리 다니엘과 함께 순수 창작물로만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소비에트 작가가 되었고, 이 재판은 근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6년간 수용소 복역 후 1973년 프랑스로 망명, 소르본에서 러시아 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신탁시스』를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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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모스크바 국립대 문헌학부 졸업
  • 1952필로로기야 학위 후보 취득; IMLI 연구원
  • 1955–1965아브람 테르츠 필명으로 서방에 소설·에세이 발표
  • 1950년대 말–1965『노비 미르』 주요 문학비평가
  • 1960소비에트 작가동맹 가입
  • 1966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7년형 선고; 두브라블라크 수감
  • 1971조기 석방
  • 1973–1997소르본 대학 러시아 문학 교수; 『신탁시스』 공동 창간

블라들렌 미하일로비치 미하일로프

Владлен Михайлович Михай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5–2004 ○ 자연사

소련 말기 GRU를 이끈 마지막 군사첩보 수장

1990년 가을, 동유럽 주둔 정보망이 하나둘 접히던 때 한 장교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미하일로프가 답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전쟁 말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교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프룬제 사관학교와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거쳐 사단장·군단 참모장·참모총장 보좌관을 두루 역임한 정통 군인이다. 1979년부터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총참모부 주작전총국장으로서 소련군의 작전기획을 총괄했다. 1987년 7월 GRU 국장에 임명되어 아프가니스탄 철군,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소련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 군사첩보를 지휘했으며, 199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GRU의 마지막 정규 국장으로서 1991년 10월까지 재임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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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49입대 →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 소대장 → 중대장
  • 1951–54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 발트 군관구 소총대대장
  • 1958–66연대 참모장 → 차량화소총연대장, 발트 군관구
  • 1966–68총참모부 사관학교 졸업
  • 1969–79제21차량화소총사단장(GSVG) → 제15군 참모장 → 투르키스탄 군관구 참모장
  • 1979–80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
  • 1980–83총참모부 제7국장 → 주작전총국장
  • 1983–87극동군 총사령부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87.2–7GRU 제1부국장
  • 1987.7–1991.10GRU 국장 겸 총참모부 차장
  • 1992건강상 이유로 퇴역

게오르기 마르코비치 코르니옌코

Георгий Маркович Корниенко

그로미코의 대미정책 실무 책임자, 아프간 침공과 거짓말에 맞섰던 외교관

1979년 가을, 코르니옌코는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의견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로미코는 서명을 거부하고 중앙위원회에 올리지 않았다.

게오르기 코르니옌코는 40년 넘게 소련의 대미 외교를 실무에서 이끈 외교관으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아래에서 제1차관(1977–1986)을 지내며 1970~80년대 미소 군축 협상의 핵심 의제를 설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으로 냉전의 최전선에 섰으며, 이후 소련 외무부 미국국장으로서 닉슨·카터·레이건 행정부와의 모든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내부 반대했고,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 때는 진실 공개가 국제적 고립보다 낫다고 주장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냉전 후에는 회고록 『냉전: 한 참여자의 증언』을 남겨 소련 외교정책 결정 과정의 내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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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소련 외무부 산하 정보위원회에서 외교 경력 시작
  • 1960–1964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이후 공사참사관
  • 1965–1975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75–1977소련 외무차관
  • 1977–1986소련 외무제1차관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6–1988CPSU 중앙위 국제부 제1부장

프라무디아 아난타 투르

Pramoedya Ananta Toer
문학·예술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1925–2006 ○ 자연사

부루 섬에서 입으로만 지은 사부작, 노벨문학상 8회 후보

"모든 부정의는 싸워야 한다, 비록 자기 마음속에서뿐일지라도 — 그리고 나는 싸웠다." — 『망명』, 안드레 블첵·로시 인디라와의 대화

식민지 감옥에서 첫 소설을 쓰고, 독립 후에는 레끄라(Lekra)에서 문화운동을 이끈 인도네시아 최대의 작가. 1965년 쿠데타 뒤 수하르토에 의해 부루 섬에 14년간 수용되었고, 연필조차 금지된 수용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구술해 「인간의 대지」로 시작되는 부루 사부작을 완성했다. 평생 금서 작가로 살았으나, 그의 작품은 40개 언어로 번역되며 반식민·반권위주의 문학의 기념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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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7독립전쟁에 참전, 자카르타 주둔 — 반식민 선전 활동
  • 1947–1949네덜란드군에 체포, 부킷두리 감옥에서 첫 소설 『도망자』 집필
  • 1950–1964레끄라에서 활동, 『타락』 등 집필 — 소련·중국 문화교류 참여, 고리키·톨스토이 번역
  • 1960중국계 차별을 비판한 『화교』로 수카르노 정권하 9개월 구금
  • 1965–1979수하르토 쿠데타로 체포 — 부루 섬에서 정치범으로 14년 구금, 구술로 부루 사부작 완성
  • 1979–1992석방 후 자카르타 가택연금 — 『해안의 소녀』, 『벙어리의 독백』 출간
  • 1995–2006막사이사이상·후쿠오카 문화상 수상, 노벨문학상 8회 후보

라미즈 알리아

Ramiz Alia

호자 이후의 알바니아

호자가 의사에게 알리아를 소개하며 말했다. "이 친구 같은 젊은 동지가 이어받을 겁니다."

1985년 호자 사후 알바니아 노동당의 지도자가 됐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 하면서 제한적 대외 개방을 추진했으나 경제위기와 대중 시위 속에서 다당제 전환을 수용했다. 1991년 대통령이 되었고 1992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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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알바니아 공산당 입당
  • 1948중앙위원회 위원
  • 1956정치국 후보위원
  • 1961정치국 정식 위원
  • 1982인민의회 상임위원회(국가원수) 의장
  • 1985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
  • 1991알바니아 공화국 대통령
  • 1992대통령직 사임

유리 필리포비치 솔로비요프

Юрий Филиппович Соловьёв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리가초프 측근

1989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솔로비요프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했다고 보고하며,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기술 관료로 성장한 후 당 기구로 옮겨갔다. 198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소련 제2도시를 책임졌다. 1989년 3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유권자 60%가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으며,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한 이 사건은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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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73렌메트로스트로이 근무, 수석기술자 거쳐 국장
  • 1973–1974레닌그라드 시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4–197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75–1978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78–1984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84–1985소련 산업건설부 장관
  • 1985–1989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1986년부터 정치국 후보위원 겸임)

구리 이바노비치 마르추크

Гурий Иванович Марчу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25–2013 ○ 자연사

소련 과학아카데미 마지막 총재이자 시베리아 계산수학의 개척자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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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피직스에너지연구소 수학부장 (오브닌스크)
  • 1964–1980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계산센터 소장
  • 1975–1980시베리아 지부 의장 ·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0–1986GKNT 의장 ·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91–2013RAS 상임간부회 명예위원 · 계산수학연구소 소장/명예소장

블라디슬라프 그리고리예비치 콜레스니코프

Владислав Григорьевич Колесников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페레스트로이카 말기까지 이끈 마지막 전자공업 장관

그의 지휘 아래 보로네시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가 탄생했고, 로켓·우주·전략핵전력 통제체계에 들어갈 전자장비들이 잇따라 개발되었다.

소련 전자공업의 핵심 인물로, 1960년대 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를 개발·양산했으며,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제1차관으로서 군수·우주·전략핵무기 체계에 필요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반을 확충했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장관으로 승진하여 몰락 직전까지 소련의 컴퓨터·반도체 산업을 총괄했으나, 서방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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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툴라 무기공장 · 카스토르나야 기관차 차량기지 정비공
  • 1948–1952보로네시 무선부품공장 기술자 → 연구소장 → 부수석설계자
  • 1952–1954주동독 소련 통상대표부 근무
  • 1958–1969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 수석기술자 → 공장장
  • 1969–1971보로네시 '엘렉트로니카' 생산조합 총책임자
  • 1971–1985소련 전자공업부 제1차관
  • 1985–1991소련 전자공업부 장관

체스와프 얀 키슈차크

Czesław Jan Kiszczak

계엄령 실행자에서 원탁회의 공동의장이 된 폴란드 내무장관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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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9군사정보부장 (총참모부 제2국)
  • 1979–1981내부군사부장 (WSW)
  • 1981–1990내무장관
  • 1981–1983구국군사평의회 위원
  • 1982–1990폴란드 통일노동당 정치국 위원
  • 1989원탁회의 정부 측 공동의장
  • 1989.8총리 지명 (내각 구성 실패)
  • 1989–1990부총리 겸 내무장관

유리 이바노비치 드로즈도프

Юрий Иванович Дроздов

KGB 불법정보국을 12년간 지휘한 소련의 전설적 첩보장교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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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붉은 군대 복무, 제1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 입성
  • 1945–1952주독 소련군 및 발트 군관구 포병장교
  • 1952–1956군사외국어대학 졸업, 독일어·영어 전공
  • 1956–1957KGB 전입, 불법정보요원 훈련
  • 1957–1963동베를린 KGB 연락장교, 슈타지와 협력하며 불법요원으로 활동
  • 1964–1968KGB 베이징 주재원 (문화대혁명 시기)
  • 1968–1975PGU 중앙기구 근무, S국 부국장
  • 1975–1979KGB 뉴욕 주재원, 유엔 소련 부대표로 위장
  • 1979–1991PGU 부국장 겸 S국장 (불법정보 총괄), 빔펠 창설